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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동아일보 대해부 1권 -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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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3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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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철옹성 같은 경계망리에 각처에서 조선 00 만세 고창(高唱)」이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제목 안의 ‘00’은 ‘독립’일 텐데 총독부 검열에서 삭제된 것 같다.

  작일 오전 8시부터 돈화문을 떠나기 시작한 인산(因山)행렬이 황금정거리에까지 뻗치고 대여(大輿)가 막 관수교를 지나갑시며 그 뒤에 이왕(李王) 전하, 이강 공 전하가 타신 마차가 지나는 오전 8시 40분경에 그 행렬 동편에 도열하고 섰던 00000(000)에 있는 00전문학교 학생 수십 인이 활판으로 인쇄한 격문 수만 매를 뿌리며 조선00만세를 불러서 크게 소동 중 현장은 바람에 날리는 격문은 이왕 전하 마차 부근에서 날리었으며 경계하고 있던 경관과 기마경관대는 학생들과 충돌되는 한편으로 그 부근에 도열하고 있던 시외 00전문학교 학생이 이에 응하여 엄숙하던 행렬이 크게 혼잡을 이루게 됨에 따라 대여 뒤에 따르던 기병 의장대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돌아서 닫는 바람에 군중이 이리저리 몰리다가 중경상을 당한 사람이 매우 많으며 현장에서 학생 30여 명이 체포되었고 9시경 인산행렬이 거의 다 지나갈 때에 종로 3정목 동양루 앞에 도열하고 섰던 시내 계동에 있는 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 생도가 입으로는 역시 조선00만세를 부르며 손으로는 활판으로 인쇄한 격문을 뿌리었는데 현장에서 50여 명 학생이 검거되었으며 9시 20분경에는 황금정 도립 사범학교 앞에서 역시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린 학생이 있어서 크게 소동을 하였는데 청년 수삼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인산행렬이 오후 1시경 동대문을 나서려 할 때에 양복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동대문부인병원 입구에 나타나서 호각을 불며 만세를 3창함에 군중이 이에 응하여 처참한 광경이 연출되었는데 청년은 경관에게 체포되었다. 시내 장사동 247번지 부근에서도 시내 남대문통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이 격문을 뿌리다가 현장에서 네 사람이 체포되었다더라.

동아일보는 6월 12일자 1면에 올린 사설(「대곡[大哭] 후의 조선민족」)에서 6·10 만세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민족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자는 아리송한 논조를 펼쳤다.

  개인으로의 조선인과 민족으로의 조선인에 대하여 세인은 여러 가지로 구별과 장단(長短)을 말한다. 어찌 외인에게서만 이러한 말을 들으랴. 조선인 우리 스스로의 언단(言端)에서도 흔히 듣는 말이니 우리는 항상 실제 사실에 관하여 이 말과 조선민족의 정체를 대조하고 우리가 기거하는 입각지요 토대인 조선민족의 장단을 운위할 것이라고 믿는다. 조선인을 개인으로 보면 상당하지만 민족으로 보면 너무나 분열과 사투(私鬪)가 다대하니 이것은 민족으로서 조선인은 타인에게 열(劣)한 불치의 고질인 것과 같이 말한다. 그리하여 심한 자에 이르면 이것은 조선인의 성격상 결함이라고까지 말을 하나니 그 의견에 의하면 조선인은 민족적으로 일치하여 어느 대이상에 진(進)할 소질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오인은 항상 이러한 의견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조선민족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실은 결코 조선인 간에 많이 있다는 분열과 사투도 그것이 우리 조선민족의 성격상 결함이 아니라 환경의 작위와 구사가 많이 그 원인이 되는 것을 믿는다.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히려 기약이 없이 견고하며 강렬하게 일치한 의식의 발로를 목도할 수가 있으니 더욱 우리의 견해는 신념을 더하게 된다. 물론 우리민족의 성격에 남다른 결함이나 불치의 고질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순종효 황제 최후의 길이 우리민족의 머리에 나타나던 때에 우리가 울고 우리가 슬퍼한 실경(實景)은 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행동을 여실히 정체 그대로 발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인은 단언한다. 결코 조선인이 민족으로도 일반적으로 보아서 남에게 특히 열악한 성격의 소재를 발견할 수 없으니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자신에 대하여 우리가 견고확실한 신념을 파지(把持)하며 현실을 통찰하여 이후의 작정이 더욱 웅대하여야 할 것을 믿는다. 비록 우리가 현대문명을 충분히 소화하고 임의로 활용하리만큼 모든 정도가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 일약(一躍)하여 선진 제족(諸族)과 단시일에 병진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울지라도 전도에 대하여 일정한 방책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요 이 방책을 실현함에 전 민족의 일치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은 더 다시 노노(呶呶)할 필요가 없다.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는 전제시대의 조선인이었으니 정치제도상의 모든 힘은 모든 방면에 작용하여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의 발전을 저해한 바가 많아 혹심하지만 금후 우리가 이에서 그대로 시종(始終)하지 아니할 것은 세계의 대세가 이것을 암시할 뿐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접촉되는 모든 사물은 그 멸륜(滅倫)을 표명하는 터이니 전제의 과거와 현재를 우리의 힘으로 전환하여 우리가 열망하고 동경하는 바에 맹진하는 용기와 의협과 분투가 가일층 강렬하여야 할 것이다. 융희 황제가 영원히 가시던 길에 엎드려 대곡하던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운명을 가져오기 위하여 오족의 새로운 기백과 책동이 발발하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

이 사설에는 같은 신문 바로 전 날짜에 실린 6·10 만세 사건의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조선왕조 최후의 임금인 순종(대한제국 제2대 황제)의 장례식 날에 터진 독립만세 소리는 1919년 3월 1일부터 방방곡곡에 맹렬한 기세로 퍼져 나간 항일독립투쟁 이후 7년 만에 일어난 최대의 독립투쟁이었다. 그런데 그 중대한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의 사설은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를 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6·10 만세를 거론하고 있는 대목은 이렇다. “순종효 황제의 최후의 길이 우리민족의 머리에 나타난 때에 우리가 울고 우리가 슬퍼한 실경은 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행동을 여실히 정체 그대로 발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인은 단언한다. 결코 조선인이 민족으로도 일반적으로 보아서 남에게 특히 열악한 성격의 소재를 발견할 수 없으니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으로서의 조선인 자신에 대하여 우리가 견고확실한 신념을 파지하며 현실을 통찰하여 이후의 작정이 더욱 웅대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인의 성격’에 대한 신뢰만으로 독립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위 사설의 필자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설은 총독부의 검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6·10 만세운동을 에둘러 간 전형적인 글이다. 그런 논조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민족지’를 자처한 언론이 당시 동아일보였다.


느닷없는 사설 ‘우월감의 죄악’

6·10 만세 사건으로 많은 학생과 청년, 그리고 일반인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난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동아일보 6월 13일자 1면 머리에 「우월감의 죄악」이라는 사설이 올랐다.

  속담에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어느 사람을 물론하고 각자가 자기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변호하는 동시에 자기의 생활이 그 현실보다는 더욱 발전될 것을 믿으며 또는 그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므로 항상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계획을 신용하게 되는 것이니 자기가 남보다 못지않은 인간이라는 신념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네에 상당한 자신이 있고 그 자신력으로 말미암아 자살을 아니 하고 다대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청년이나 장년기에 있어서 대개 이러한 심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잘난 생각쯤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더욱이 지각이 덜 난 어리석은 자일수록 자기의 처신을 자기의 자격에 상부(相副)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왕왕 자기의 자격은 잊어버리고 당치도 아니 한 외람한 생각을 내어서 망동을 하는 자가 있다. 어리석은 자에게만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인물도 이러는 때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인간의 과실로 말하면 어느 사람을 특히 지적하여 논란하는 것보다도 모든 사람이 서로 조심하고 근신할 바이지만 현대와 같이 계급이 현격하고 정복관계가 악랄한 때에는 더욱 그러한 부주의 혹은 우매한 언행이 개인으로나 또는 민족적으로 인간적 원만한 교섭을 저해하며 심하면 무용(無用)한 싸움을 일으키며 빙탄(氷炭)의 관계를 짓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 고로 계급 간의 우월감이라는 것도 그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많지만 민족 간의 우월감은 더욱이 그 결과가 가경(可驚)할 바에 미치는 것이다.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태도로 말하면 항상 지배자의 지위에 있는 관계상 우월감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 피치 못할 일일는지도 알 수 없으나 어느 때나 오만한 태도로 대하면 아무리 피정복자라고는 할지라도 그중에는 인격상으로도 그러한 꼴을 차마 보지 못할 자도 있을 것이요 사리상으로도 그러한 언행에 긍종(肯從)할 수 없는 때가 있을 터이니 그와 같은 무용한 행위로 상대자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것은 정복자의 이익을 위하여서도 결코 취할 바가 아닌 줄 믿는다.
  자못 정복자요 지배자라는 권력적 지위만 과신하고 오직 천시와 모욕으로만 대한다면 그 결과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반항을 도발시키고 격분과 항거를 돕는 것이다. 피지배자요 피정복자인 약자들의 안신지책(安身之策)은 오직 인욕(忍辱)에 있을 터이니 유유(唯唯)순종이 가장 요령 있는 처신술이 되겠지만 이것이 과하고 심할 시에는 차라리 이러한 더러운 생명의 구득(拘得)에 여유가 없는 생활보다도 그 악착하고 자심한 비인간성의 횡포에 반항하여 장쾌한 전사를 결심하고 분연히 궐기하는 일도 있기 쉬운 것이다. 감정이 한 번 이와 같이 격동하게 되면 그 결과가 결코 정복자를 위하여서도 이롭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인도와 평화를 위하여는 큰 죄를 끼치는 바이니 외람한 우월감의 발사는 실로 죄가 작지 아니한 줄 믿는다.

1926년 6월 당시의 조선에서 정복자이자 지배계급은 일제와 일본인들이었고 피정복자이자 피지배계급은 조선의 민중이었다. 그런데 위의 사설은 6·10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시점에 느닷없이 정복자와 피정복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에 대한 ‘고담준론’을 펼치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6·10 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민중을 향한 조롱처럼 읽히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더욱이 지각이 덜 난 어리석은 자일수록 자기의 처신을 자기의 자격에 상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왕왕 자기의 자격은 잊어버리고 당치도 않은 외람한 생각을 내어서 망동을 하는 자가 있다.” “현대와 같이 계급이 현격하고 정복관계가 악랄한 때에는 더욱 그러한 부주의 혹은 우매한 언행이 개인으로나 또는 민족적으로 인간적 원만한 교섭을 저해하며 심하면 무용한 싸움을 일으키며 빙탄의 관계를 짓는 일이 허다하다.”
동아일보의 이 사설은 정복자를 향해서도 짐짓 ‘충고’를 하고 있다. “정복자가 피정복자에 대하는 태도로 말하면 항상 지배자의 지위에 있는 관계상 우월감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 피치 못할 일일는지도 알 수 없으나 어느 때나 오만한 태도로 대하면 아무리 피정복자라고는 할지라도 그중에는 인격상으로도 그러한 꼴을 차마 보지 못할 자도 있을 것”이니 “무용한 행위로 상대자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것은 정복자의 이익을 위하여서도 결코 취할 바가 아닌 줄 믿는다.”

위의 사설은 결론 부분에서 “정복자요 지배자라는 권력적 지위만 과신하고 오직 천시와 모욕으로만 대한다면 그 결과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반항을 도발시키고 격동과 항거를 돕는 것”이라고 일제에 ‘조언’하고 있다. 조선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일제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이 민중을 천시하거나 모욕하지만 않았다면 6·10 만세운동 같은 반항이나 격동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잃어버린 나라와 주권을 되찾으려고 필사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6·10 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는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운동은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진다.


광주학생운동과 동아일보의 미온적 해결책

1929년 11월 4일자 동아일보 5면에는 2단 짜리 기사가 짤막하게 실렸다. 제목은 「고, 중 양교생 수백 명 충돌 / 기차통학생의 사소한 감정 / 양교 직원과 경찰이 진무(鎭撫)」이다.

  [광주] 지난 1일 오후 4시경에 광주역전 광장에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2백여 명과 광주중학교(일본 학생들이 다니던 5년제 학교-인용자) 학생 3백여 명이 각각 남북으로 결진(結陣)하여 일대 육박전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 두 학교의 직원들과 광주경찰서 정사복 순사 수십 명이 진무에 진력하였으므로 동 6시경에 무사히 해산되었었는데 이제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듣건대 나주에서 통학하는 두 학교 학생들 사이에 그날 아침 학교로 오는 차 중에서 사소한 일로 약간 말다툼이 있었던 바 기차시간이 되어서 통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중학교 학생 50여 명이 각각 무기를 준비하여 가지고 좇아와서 폭행을 가하려 하므로 쌍방이 서로 응원대를 불러 모은 것이 그와 같이 되었으므로 경찰은 통학생 내왕에 대하여 더욱 경계하는 중이라더라.

이렇게 간단히 보도된 이 사건이 나중에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동아일보는 11월 6일자 1면 머리에 실은 사설(「광주의 학생 충돌사건」)에서 일본 경찰의 ‘자제’와 학교 당국자 간의 ‘해결’을 촉구했다.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고보생 박 모대 광주중학생 다나카 모 외 2인의 개인적 소충돌은 마침내 1천여 명 양교 학생의 대립적 혈전에까지 이르러 경찰 외 소방조의 출동으로 겨우 그 진압을 보고 그 후도 불안한 분위기에 싸였다는 바 실로 학계 미증유의 불상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양교 당사자는 학교의 3일 간 휴학을 명하고 각각 학부형회까지 열어 그 대책을 강구한다 하니 어쨌든 그 해결을 볼 터이라 하겠지만 일이 1, 2인의 개인적 충돌이 아닌 만치 문제가 매우 중대하다 하겠다.
  최초 그 발단 동기를 듣는다 하면 전기(前記) 박 모의 사매(舍妹) 박 모란 광주여고보생이 통학하는 기차에서 나오려 할 때 전기 일본인 학생들이 수 차 담롱적(談弄的) 언동을 가하므로 전기 박 모는 그 부당을 힐책했던 바 도리어 다나카 모 등은 적반하장 격으로 박 모에게 도전하였으므로 소충돌이 기(起)하려 하였으나 근방 일본인 순사에게 제지되고 박 모는 뺨을 한 개 맞았으며 그 익일(翌日) 기차 중에서 다시 언쟁이 있었다가 차장에게 제지되어 대문제를 야기치 않았었다.
  그러나 그 익일 양교 학생들이 하학 후 귀가하느라고 각기 광주역에 나아갈 새 돌연 광주중학 유도교사 이다 모란 일본인이 학생을 충동하는 불근신한 말이 있어 양자 간에 대충돌이 일어날 뻔하였으나 학교로부터 달려온 양교 당국자 및 경관에게 진압되어 미연에 방지되고 그 익일은 중학생 측의 단도 든 일단이 고보생을 습격함에 의하여 고보생도 이에 대항한 결과 양교로부터는 이것을 응원코자 1천여 명의 학생이 군집하여 난입 충돌하였으므로 유혈의 참극을 보게 되었다 한다. 이에 이르러 경관과 소방조가 출동하여 이의 진압에 노력하여 더 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위에 술(述)한 바와 같이 시위적 행렬까지 있어 기세가 용이히 진정할 것 같지 않으니 중대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기왕에 일어난 일은 여하히도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 금번 사건에 대하여 경찰에서라도 무리한 검속과 형을 가하여 도리어 반감을 살 우려가 있어서는 불가하다. 학생은 심혈에 끌리기 쉬운 것이요 시비를 판(辦)할 연세에 있지 않으니 되도록은 이것을 학교당국자 간에 해결하도록 하며 상서롭지 못한 경찰의 문제까지 일어나지 않도록 함이 가하다 한다, 이것 당국에 일언하는 바다.

광주학생운동은 동아일보의 사설이 주장하듯이, 경찰이 무리한 검속과 형을 가하여 조선인 학생들의 반감을 사지 않는다거나 학교당국자들이 경찰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가라앉을 성격의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당초 지역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학생운동이 삽시간에 전국적인 일대 민족해방운동으로 파급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배경에서였을까?
  그 배경으로는 우선 1920년대에 들어서 해가 갈수록 격화되어온 전국 각지의 항일학생 맹휴투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지역적·산발적으로 전개된 맹휴투쟁을 통해 고양된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광주학생운동을 도화선으로 하여 쉽사리 전국적 규모의 일대 학생운동을 촉발시키게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신간회를 비롯한 조선청년총동맹, 노동총동맹 등의 전국적인 규모의 사회단체가 서울과 지방의 학생층 및 학생들의 비밀결사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파급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장하기 시작, 1930년을 전후하여 질과 양의 면에 있어서 큰 발전을 이룩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일제하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일제에 착취당하는 한국 노동자와 농민의 해방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대로 민족해방운동이었으며 이것은 한국민족의 일반적인 항일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지대한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계속된 원산 총파업이 바로 뒤이어 일어난 광주학생운동과 그 전국적인 파급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던 목포, 부산, 원산, 함흥 등지에서의 학생투쟁이 역시 가장 격렬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한정일, <일제하 광주학생민족운동사>, 전예원, 1981,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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