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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한 논조’로 급변한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1권 -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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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1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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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0월 초 김성수가 사장 겸 전무로 취임한 직후부터 동아일보 지면에는 진보적 성향이 강한 과격한 논설과 기사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의 대표적 자본가이자 보수적 인물로 꼽히던 그가 발행인으로 복귀한 신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박춘금 협박 사건’으로 한바탕 시련을 겪은 뒤 기자들의 거센 개혁운동에 밀려 곤경에 빠졌던 그가 ‘진보적 논조’를 위기 탈출의 돌파구로 삼으려 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선뜻 수긍하기는 어렵다.


동아일보 ‘좌경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사장 김성수’ 명의로 동아일보 1924년 10월 23일자 1면 머리에 실린 「취임에 제(際)하여」라는 글의 끝부분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 본보는 창간 이래로 지금까지에 사상과 주장을 여러분과 같이하였으며 근심과 고로(苦勞)를 여러분과 같이 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근심이 있으면 본보가 이것을 먼저 슬퍼하였으며 여러분에게 기쁨이 있으면 본보가 이것을 앞서서 즐거워하였으며 여러분에게 결점이 있으면 본보가 이것을 도맡아 고치고자 애를 쓴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전에도 다소간 본보에 중역의 책임을 가지고 있던 관계로 상세히 그 내용과 심사(心思)를 아는 바이올시다. 이러한 관계와 이러한 태도야 어찌 작금의 다름이 있으며 전후가 바뀜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본보의 주장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입니다. 오직 저는 배구(倍舊)의 노력을 다하고 믿는 데까지의 정성을 더하여 한 가지로는 본보의 귀중한 명예를 욕되게 하지 아니하며 다른 한 가지로는 본보를 낳으시고 본보를 기르시고 키우시는 형제자매의 중망(重望)을 저버리지 않기를 힘쓰고자 할 뿐이올시다.

여기서 김성수가 “본보의 주장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뜻은 ‘민족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이라는 동아일보의 3대 주지를 지켜나가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3대 주지는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존중한다는 의미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하겠다는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성수가 사장으로 취임한 10월 21일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10일자부터 동아일보에는 진보적이거나 좌경적인 논조를 띤 사설이 며칠이 멀다 하고 실리기 시작했다. 먼저 제목부터 보기로 하겠다.

· 「합병 후의 조선/ 소득이 무엇인가」(11월 10일자)
· 「일본의 신군국주의」(11월 13일자)
·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상]」(11월 23일자)
·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하]」(11월 24일자)
· 「군사교육과 반대운동」(1925년 1월 27일자)
· 「일본 정치가의 고루(固陋)를 소[笑]함」(1월 31일자)
· 「무산자(無産者)의 조국 문제」(2월 3일자)
· 「치안유지법과 조선과의 관계」(2월 10일자)
· 「중국 5·4운동」(3월 2일자)
· 「일본의 무산정당 [상]」 3월 6일자)
· 「일본의 무산정당 [중]」(3월 7일자)
· 「일본의 무산정당 [하]」(3월 8일자)
· 「다시 사회운동자에게 / 전선 통일이 급무」(3월 20일자)
· 「‘아! 손문 선생이여」(3월 14일자)
· 「강제참배 문제 / 역리(逆理)에 철저한 교육당국자 [상]」(3월 18일자)
· 「강제참배 문제 /역리에 철저한 교육당국자 [하]」(3월 19일자)
· 「민중운동자대회에 대하여 [1]」(3월 20일자)
· 「민중운동자대회에 대하여 [2]」(3월 21일자)
· 「민중운동자대회에 대하여 [3]」(3월 22일자)
· 「민중운동자대회에 대하여 [4]」(3월 23일자)
· 「계급적 자각을 촉(促)함」(3월 25일자)
· 「쟁투와 사회적 기치」(4월 9일자)
· 「전조선기자대회」(4월 15일자)
· 「일본 자본과 조선 노동」(4월 16일자)
· 「신문기자의 입각지(立脚地)」(4월 17일자)
· 「간도의 조선청년총동맹」(4월 18일자)
· 「민중운동자대회 금지에 대하여」(4월 21일자)
· 「현하(現下)의 운동과 인격」(4월 22일자)
· 「관권의 횡포 / 철저히 규탄하라」(4월 23일자)
· 「관권 횡포의 오산 / 개혁의 원리를 들어서」(4월 24일자)
· 「전조선형평대회에 대하여」(4월 26일자)
· 「4 사상단체의 합동 / 획시기적 진보」(4월 29일자)
· 「메이데이 운동의 발전성」(5월 1일자)

위의 사설들 가운데 두 편을 들어 동아일보의 논조를 짚어보겠다. 먼저 1924년 1월 30일자 사설(「일본의 신군국주의」)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신군국주의가 어떠한 것인가 (···) 그 특징을 국내에서 발견하여 볼 것 같으면 국민적, 재정적, 과학적이 될 것이니 1)국민적으로 말하면 다른 국가를 배척 또는 침략하려는 견지에서 국민을 총동원하는 국민개병주의 즉 의무병역제도와 여(如)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이요 2)재정적으로 말하면 군사비의 재원을 국가재정에서 지출하되 그 지출액이 평시에도 국가재정지출 예산의 가장 중대 부분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며 3)과학적으로 말하면 군사상의 기계, 기구 기타 사용품이 양으로도 수일(遂日) 증대하여 가지만 이 위에 과학적 기술을 응용하여 신연구, 신발명의 결과 그 질로서의 정교를 극치(極致)하려는 말하자면 저 독와사(毒瓦斯-독가스)와 여한 살인제를 발견하여 이것을 군사상에 실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군국주의의 근본적 특색은 정치적 권력이 군벌 또는 관료에게 있지 아니하고 온전히 자본벌(資本閥)의 장중에 있음이니 이것은 외면으로 보면 일종 기괴한 현상인 것 같이 사량(思量)할 수 있지만 이 신군국주의의 발생한 원인과 그의 실연(實演)되는 이유로 볼 것 같으면 조금도 괴이한 것이 없는 사실이다.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이 신군국주의는 자본벌이 그의 존속과 번영을 위하여 창조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자본벌은 이것으로써 자가(自家)의 유일한 무기요 생명의 양식을 삼고 그의 재포(財褒)를 경도(傾倒)하여 적극적 대대적으로 이것을 지지, 확장함에서 실연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후진국가인 일본은 시조(時潮)의 관계로 후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선진국과 병구(並驅)치 아니치 못할 외적 형세에 강제되어 제반 문화가 성장, 발달한 고로 만개조숙(晩開早熟)하는 과실에 기형물이 많은 것과 같이 일본 문화에 기형적인 발달이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인 바 그 가운데 더욱이 이 신군국주의의 기형적 발달도 다른 국가사회에 있어서는 그 예가 희소할 줄로 안다. (···) 연래로 군사비가 지출예산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은 물론이요 과학의 군사상 이용에 열중하는 최근 현상은 실로 언어도단일 뿐 아니라 이 위에 금번 내각에 이르러서는 국민개병주의를 철저할 목적에서 의무연한의 단축을 구실로 하여 군대교육을 중학생에게 또는 청소년에게까지 시행하려는 것은 결국 신군국주의의 본색을 여지없이 폭로한 것이다. (·····)
  저와 같이 노골적으로 나아가는 일본의 신군국주의의 연극할 무대는 그 어디인가. 물론 그 국내에 있어서는 신흥계급의 두상(頭上)에서 행하는 동시에 밖으로 국제무대에 출정할 터인 바 미주, 호주, 인도 등 고유(膏油)한 지역은 모두 심구(深溝) 고루(高壘)임에 불가범(不可犯)으로 단념할 것이요 따라 그 총세력은 조선을 기점 삼아 극동으로 집중하여 만주와 중국 본방에서나 시베리아에서 실연할 것이니 금후 이 연극의 참절비절(慘絶悲絶) 한 실제 사정은 실로 상상으로만은 형용치 못할 것이다. (···) 지금 조선에서는 처처마다 기근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현상은 결코 금일에만 있고 또는 금일에만 그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랴. 누구는 말하되 금년에 일어난 수재, 한재, 화재 등 그 원인의 전부라 하지만 이보다 재앙이 더 많은 일본에 있어서는 기근이라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조선 기근의 원인이라는 말은 절대로 신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밖에 다른 중대한 원인이 잠복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사설은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견지에서 신군국주의의 본질을 소개하면서 일본의 신군국주의가 1930년대 초부터 나갈 길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실린 동아일보를 압수했는데, 심한 경우에는 정간 처분까지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설에 대한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사장 김성수가 이런 글을 내보내도록 허용한 동기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25년 3월 25일자 사설(「계급적 자각을 촉함」)은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선동하는 듯한 논조를 펼치고 있다.

  명명(明明)히 조선인으로서 명명히 비조선인의 태도와 행동을 가지는 자가 없지 않으며 명명히 무산자로서 명명히 비무산자의 태도와 행동을 가지는 자가 없지 않다. 그가 어찌 그 자신이 조선인임을 모르며 조선인 된 비애를 느끼지 아니하랴. 또 그가 어찌 그 자신이 무산자임을 모르며 무산자 된 고통을 느끼지 아니하랴. 조선인으로서 금일의 경우에 있어서 고통을 느끼지 아니한다면 무산자로서 현대의 조직에 있어서 고통을 느끼지 아니한다면 그는 반드시 의지를 상실하고 의식(衣食)을 불수(不需)하는 조모(朝暮)에 장사(將死)할 중태의 병인일지라. 더불어 말할 수 없거니와 번연히 그들은 잘 느끼면서 다시 일보를 나아가 이 비애를 철거하려고 하는 생의 욕구를 충분히 소유한 그 무리 속에서 이 같은 비신분의 태도와 행동을 보게 됨은 또한 하고(何故)인가.
  조선인의 행복은 오직 조선인 스스로가 제래(齊來)할지며 무산자의 행복은 오직 무산자 스스로가 제래할지니 (···) 조선인으로서 행복을 구하려는 자는 반드시 조선인 노릇을 잘하여야 할지니라. (·····)
  (···) 조선인으로서 조선인 노릇을 아니하면 그는 곧 비조선인으로 조선인과 조선운동에 대한 반역이요 무산자로서 무산자 노릇을 아니하면 그는 곧 비무산자로 무산자와 무산운동에 대한 반역이다. 어찌 장차 영구(永久)의 멸망에 지(至)할 뿐이리오. 또한 이미 막대(莫大)의 죄과에 함(陷)하였나니 어찌 또한 가외(可畏)치 아니하랴.
  조선인아 무산자야 네 노릇을 잘하여라. 곧 너의 신분이 어느 처지에 어느 계급에 속한 것을 명심(明審)하여 그 처지 그 계급에 상당한 태도와 행동을 취하여라. 이것이 이른바 계급적 자각이다. 각자의 각오가 발견되는 날에는 대중의 단결이 성립되고 대중의 단결이 성립되는 날에는 그 이후의 일체는 모두 다 인(刃)을 영(迎)하여 해결될지니 자각의 긴요함이 또한 중차대하지 아니한가. (···) 또 무슨 여가에 후면을 돌아보며 사어(私語)를 감히 하랴. 오직 우리는 각자 각오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며 마지못하는 일면에 호상 면려(勉勵)함이 또한 도이(徒爾)가 아님으로 생각함이라. 조선인아 자각하라. 계급적으로 자각하라. 무산자야 자각하라. 계급적으로 자각하라.

  동아일보는 위의 사설을 통해 “무산계급이여 자각하고 단결하라”고 촉구함으로써 일제가 가장 적대시하는 봉기 또는 혁명을 선동한 셈이 되었다. 1920년 4월 창간 이래 가장 강경한 논조를 펼친 것이었다. 그 배경과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주이자 발행인인 김성수가 그런 사설이 나가게 하는 데 앞장섰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일보의 논설반이나 편집국에서 일하던 ‘사회주의운동’ 그룹 또는 창당을 준비하던 공산당의 ‘세포들’이 위의 사설 집필을 주도하고 지면에 반영하도록 작용했을까?

1928년 11월 10일에 작성된 박헌영의 자필 영문 이력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924년 4월 이래 나는 조선인들에 의해 발행되던 일간신문 동아일보에 취직해 있었는데, 나는 1925년 6월에 일어난 파업의 조직자란 혐의로 해고되었다.”(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87쪽).

<동아일보사사 권 1> 423쪽에는 박헌영의 동아일보사 재임 기간은 1924년 4월에서 1925년 5월까지로 되어 있다. 재임 중 그의 직책은 판매부 서기와 지방부 기자였다.

박헌영은 1924년 4월 21~23일에 열린 조선청년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3일째인 4월 23일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된 바 있었다. 동아일보사에서 발급한 경력증명서에 따르면 박헌영의 입사일은 1924년 4월 15일이다. 그렇다면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계열에 속했던 그는 동아일보사에 들어간 지 6일만에 조선청년동맹에 참가한 셈이다.

“동아일보사에서 발급한 경력증명서에 따르면, 박헌영은 1924년 12월 12일자로 지방부 기자로 발령받았다. 이를 통해 박헌영은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은 채 각 지방을 돌아다닐 수 있는 합법적 신분을 획득했다. 이 직책은 그의 비밀활동에 큰 편의를 주었을 것이다.”(<이정 박헌영 일대기>, 90쪽).
그러나 「계급적 각성」이라는 사설이 나가던 1925년 3월 25일 현재 지방부의 평기자에 불과하던 그가 논설을 작성해서 지면에 반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헌영이 동아일보사 논설반이나 편집국에서 비밀조직에 속해 있던 ‘공산주의 계열’ 사람들을 통해 그런 작업을 한 것일까?

  1925년 4월 17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19명의 당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경향 각지의 비밀 야체이카(세포) 대표자들이었다. 서울에 소재하는 6개 합법 사회단체 내부의 비밀 야체이카 대표가 8명이었고, 각 지역 야체이카 대표자가 11명이었다. 신뢰할 만한 최신 연구성과에 따르면 참석자 면면은 다음과 같다. 김재봉, 김찬, 김약수, 주종건, 윤덕병, 진병기, 조동호, 조봉암, 송봉우, 김상주, 유진희, 독고전, 정운해, 최원택, 이봉수, 김기수, 신동호, 박헌영, 홍덕유 등 19명이 그들이다. 박헌영은 사상단체 화요회 내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같은 책, 95쪽).

이 기록에 따르면 박헌영은 「계급적 각성을 촉함」을 비롯한 일련의 ‘좌경적 사설들’이 동아일보에 잇달아 나가던 1925년 4월 17일 동아일보사 지방부 기자로서 조선공산당 창당에 주역으로 참여한 것이 된다. 그가 그 회사에서 해임된 날짜는 1925년 5월 24일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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