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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협박 사건’과 동아 기자들의 개혁운동동아일보 대해부 1권 -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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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03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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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앞장서서 1923년 가을에 만든 연정회에 대해 최민지는 <동아일보사사 권1>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했다.

  (···) “지금 정세 하에서는 직접적인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도의 국민회의 같은 합법적 정치단체 구성에 나서 그 명칭을 연정회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간디가 주도한 국민회의가 비타협 불복종 운동체였음에 반하여 연정회는 타협적 복종적인 민족운동 곧 자치운동을 지향했고 그 선전지로서의 자세를 드러내 보인 것이 바로 문제의 사설 「민족적 경륜」이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일단 연정회 조직과 자치화 추진은 브레이크가 걸렸으나 이 일이 있은 직후 4월에 일어난 박춘금 등 친일파 단체인 각파유지연맹의 김성수, 송진우 등에 대한 권총 협박 사건과 서약서 사건으로 언론계는 동아 기자들의 개혁운동과 언론 압박, 탄핵운동으로 번지는 한편 자치운동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계속 추진되기에 이른다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132~133쪽).


‘박춘금 협박 사건’의 경위

동아일보가 연속사설「민족적 경륜」 때문에 호된 시련을 겪고 있던 1924년 4월 초, 그 신문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사건이 터졌다. 친일단체인 ‘각파유지연맹’ 간부인 박춘금이 동아일보사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리집 ‘식도원’으로 유인해서 권총으로 협박하며 3천 원이라는 거액을 요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먼저 이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1924년으로 접어들며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비롯하여 각종 청년단체들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본보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이를 소상히 보도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보도가 총독부 당국으로는 실로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사실 보도를 일일이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연쇄반응을 일으켜 민족운동은 더욱 왕성해 가기 때문이었다. 이 골칫거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마루야마(丸山) 경무국장은 부지런히 친일단체를 육성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
  마루야마 경무국장은 골치덩이 “동아일보를 타도하기 위해 동경경시총감으로부터 무술에 능하고 황민사상이 투철하다는 노동상애회 부회장 박춘금을 소개받고 1924년 1월 하순 그를 내한케” 했던 것인데, 그는 “매일 경무국장 차를 타고 육혈포(六穴砲)를 지니고 다니며” 동아일보를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어둔 밤의 홍두깨 격으로 동아일보가 자기네 단체(노동상애회)를 무시한다느니, 자기의 대우를 소홀히 한다느니 하며 경우에도 닿지 않는 언사를 늘어놓으며 본사와 본사 간부들에게 대하여 모욕적인 행동으로 나오더니, 드디어 그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본사가 재외동포 위문을 위하여 모금한 3만여 원을 자기네 사업비로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본사에서는 “5전 10전씩 국민총의로 모은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으며, 재일동포위문금(동경 대진재 때)도 우리의 연락기관을 통해 전달할 방침”이라고 이를 거절했던 것이다. (·····)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사육해 오던 친일단체들을 규합, 소위 ‘각파유지연맹’이라는 친일폭력단체를 결성한 것이 1924년 3월 25일이었다. 남산 소재 경성호텔에서 송병준 계의 소작인상조회를 비롯하여 민원식의 잔당인 국민협회 등 11단체 34 유지가 총독부의 비호 하에 연맹을 이루었던 것이다. (·····)
  각파유지연맹이 결성되자 본보는 3월 30일자 사설 「소위 각파유지연맹에 대하여」와 4월 2일자 사설 「관민 야합의 어리(漁利)운동」을 실어 저간의 성립과정을 밝히고, ‘총독정치의 선전기관’ ‘이이정리(以利征利)의 야합’ 등의 표현으로 이를 통렬히 비난하고, 민중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더욱 경각심을 높여 줄 것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 사설이 나가자 격분한 유지연맹원들은 본사 송진우 사장과 취체역 김성수에 보복하기 위하여 간계를 꾸며 식도원으로 유인, 권총으로 협박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동아일보사사 권1>, 221~224쪽).

최민지는 <동아일보사사 권1>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박춘금 협박 사건’을 기록했다.

  (···) 이 사건은 (···)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의 간부인 박춘금이 동아일보의 4월 2일자 사설 「관민 야합의 어리운동」에 반발하여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리집 식도원으로 유인, 권총으로 협박하며 돈 3천원과 협조를 요구한 불상사로서, 송진우는 ‘사담(私談)’이라고 하여 “주의 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치 못한 글로 인(認)함”이라는 쪽지를 건네고 풀려 나오고, 김성수는 그들의 요구대로 돈 3천원을 그 이튿날 마루야마 경무국장에게 가지고 가 전하도록 하였으나 박춘금이 “그 돈은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 해서 일단락된 언론계의 테러 사건으로서 식도원 사건으로도 불린다.
  물론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친일단체의 언론테러 행위이며, 이 사건을 일으킨 박춘금은 동경에서 한인노동자들을 모아 노동상애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후에는 대의사(代議士) 노릇을 하면서 대의당을 조직한 1급 부일 민족반역자였으나 동아일보는 이상하게도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4월 11일자에 「민중의 반역자에게」 제하의 사설로써 사건 전말을 보도하였을 뿐 ‘서약서’든 ‘사담’이든 여기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었고, 박춘금에 대한 고발이나 고소도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한 타 신문사의 보도를 보면 ‘동아’ 중역진의 불투명한 태도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문제의 폭행 사건 / 이제야 검사 활동 개시 / 사건 발생된 지 5일이 된 오늘에 착수」 제하에 4월 8일자 조선일보는 크게 취급했으며 거기에 나타난 양 당사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박춘금 담: 동아일보 사장으로 말하면 단순한 이것뿐이 아니라 재외동포 위로금 사건과 및 노농국에서 나온 돈을 공연한 곳에 허비한 사건으로 미리부터 미워하던 판인데 금번에 불러다가 말하던 중에 내가 좀 때려준 것이며 더구나 사실이 없다고 하면 신문사의 사장으로서 서약서는 무슨 이유로 만들어 놓았겠소.
  송진우 담: 서약은 낭설 / 죽었을지언정 그럴 리가 있소.
  (···) 만약 언론계를 미워하거든 직접 취소를 시켜도 될 일인데 무슨 이유로 간접의 정책을 쓰고 있느냐 하였으며 또 고소 않느냐고 하기에 고소는 아니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 언론계에 대하여 이러한 폭행을 하여 위협을 함은 참으로 적지 않은 문제외다. (···) 서약서는 절대로 없습니다. 내가 죽기는 할지언정 서약서를 할 리야 있겠습니까.

  여기서 박춘금이 말하는 재외동포 위로금 사건은 관동 대지진(1922년) 및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대기근을 당한 재외동포를 구제하기 위해 동아일보가 재외동포 위문회란 대간판을 걸고 모금한 3만여 원의 의연금으로서, 3년이 지날 때까지 재외동포에게 보냈다는 보고나 어찌 되었다는 기사 한줄 없이 행방이 묘연해서 독자들의 의혹이 있었던 것이며 노농국 자금 유용 건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이면서 고려공산당의 당수인 이동휘가 소련공산당 제1서기 레닌으로부터 받은 60만 루블의 원조자금 중에서 국내에 들어온 8만 루블이 이봉수를 통해 동아일보의 주간인 장덕수에게 전달된 바 있는데, 이 돈의 행방을 둘러싸고 조선청년연합회가 분열됐으며 서울청년회의 공격으로 장덕수는 타의에 의해 1923년에 미국으로 가게 된 사건을 말함이다. (·····)
  어쨌든 박춘금 사건은 동아일보 단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언론계 전체와 사회 일반에게도 크게 분격을 일으킨 대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송진우나 김성수는 거론 자체를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133~135쪽).

박춘금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성가(聲價)는 크게 떨어지고, 사내에서도 젊은 기자들이 테러 사건에 대해 고소를 하지 않은 사주와 사장을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기자들은 편집국장 이상협을 통해 경영진에게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기자들의 동아일보 개혁운동

동아일보 기자들은 1924년 4월 24일 모임을 갖고 사장 송진우와 간부 5명, 그리고 논설반 기자 1명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동아일보의 체면을 손상한 적이 많은 송진우를 사직시키고, 새 간부진을 구성할 때 사원들의 의견을 들을 것, 사내의 중요 사건들에 사원들과 협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기자들은 그 3개 요구사항을 중역회의에 보내면서 24 시간 안에 회답하라고 통보했다.

  「민족적 경륜」과 ‘박춘금 협박 사건’으로 인해 이와 같이 사내외의 불신에 봉착하여 만신창이가 된 ‘동아’ 경영진은 우선 재경(在京) 주주총회를 열고 사장 송진우의 사표는 물론 김성수 등 취체역 여러 사람의 사표도 수리했다. “(···) 하여간 우리 사에는 대단히 잘 되는 일인 줄로 압니다. 이번 사장의 사면도 동아일보 그것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사원들이 사장에게 무슨 결의서를 제출하였다는 것도 역시 동아일보사라는 그것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우리 신문을 신성하고 아름답게 하여 나아가자는 것이므로 우리 사에는 잘된 일인 줄로 알며 뒷수습도 그다지 곤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임시사장 직무대행이 된 허헌 감사역의 기대대로 명실공히 사랑받는 동아일보를 위한 개혁운동으로 그 실을 거둘 듯이 보였다. 그러나 5월 14일에 열린 임시주주총회에서 동아일보의 대주주 김성수는 기자단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함은 물론이요, 소주주들의 의견도 무시한 채, 그의 절대의사에 따라 간부진을 조직하였다. 이에 분개한 각 부 부장과 공장장 등 9명과 기자 대부분이 사표를 제출하고 신문사에 안 나오는 등 기자들의 요구도 강경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쇄직공 및 영업국 광고부장과 직원 7명도 이에 동정휴업을 일으켜 ‘동아’의 개혁운동은 연정회 모임 등 자치운동으로 회사 측과 밀착한 정치부장 최원순, 경제부장 한기악 등 몇몇 기자를 제외하고는 전 사원의 결속리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동아’ 사주 김성수는 기자들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 기미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이승훈을 사장으로, 청년들과 민족, 사회 양 진영에 인망이 있었던 홍명희를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앉혀 이들의 명망으로 여론을 자기 편으로 이끌어 들이고 대외적으로 땅에 떨어진 ‘동아’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시도했다. 대내적으로는 ‘동아’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다수 기자들의 사표 제출에 맞서 평양, 대구, 부산, 광주, 인천, 전주 등의 각 지국장을 불러 올려 임시 편집국원을 구성하고 인쇄직공들을 무마하여 기자 참여 없는 변칙적인 신문 발행을 강행하여 기자들의 편집권, 사내 민주화 요구는 완전히 묵살하였던 것이다. 이때 사표를 제출한 기자들은 논설부장 김양수, 정치부장 민태원, 사회부장 유광렬, 지방부장 김형원, 조사부장 김동성, 정리부장 최영목, 기자 서승효를 비롯하여 공장장 최익진, 영업국장 홍증식 등이었는데 이들은 동아일보를 떠나고 말았다.
  9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기자들의 대량 이직으로 사태가 가라앉자, 경영주 김성수는 10월에 잠시 사회비난에 대한 방탄용으로 그 자신이 추대했던 사장 이승훈을 고문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직접 사장으로 앉아, 경영과 편집 전권을 장악한 다음, 송진우를 고문에 앉혔다가 1925년 4월에 주필이었던 홍명희가 시대일보 주필로 옮기는 것을 계기로 다시 송진우를 주필로 임명함으로써 기자들의 개혁운동은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같은 책, 137~139쪽).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개혁운동은 사주 김성수의 술수 때문에 좌절로 끝나고 말았지만, 언론계에서는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탄압하는 일제에 맞서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활발한 운동이 일어났다.

<동아일보사사 권1>은 기자들의 개혁운동이 전개된 과정과 김성수의 기만적 책동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은 사실들만 기록했다.

  1924년 3월, 최남선이 3·1 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 <동명>이란 잡지를 발행하다가 잡지를 일간으로 바꾸는 허가를 얻어 3월 31일 시대일보를 창간, 사장 겸 주간에 최남선, 발행인 겸 편집국장에 본보 창간동인의 한 사람인 진학문, 그리고 역시 본보 창간 당시의 기자였던 염상섭 등을 스탭으로 갖췄던 것이다. 또한 시대일보는 처음부터 민족지의 성격을 뚜렷이 하고 발행되었었다.
  신문은 발행되었으나 이 신문을 돕기로 했던 유지들의 출자가 부진하여 곧 경영난에 빠지게 된 것은 불운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보천교가 얼마간의 출자를 빙자, 경영에까지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분규가 일어, 그해 7월에는 보천교 측에서 분규 수습을 이유로 자진휴간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보천교가 시대일보 운영권을 장악한 데 대한 일반의 여론이 일어 7월 15일 조선교육회관에서 서정희를 의장으로 한 시대일보 사건 토론회가 열리는 등 반대운동이 격화하게 되었다. 그 결과, 9월 1일부터 최남선 등에 의하여 속간을 보게 되고, 그 익년(翌年)인 1925년 4월에는 민간유지들이 시대일보를 위한 재단을 만들고 사장에는 본보의 주필이었던 홍명희를, 편집국장에는 역시 본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던 한 기악 등으로 새 진영을 갖춰 재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업(同業) 조선일보는 이 무렵에 본사를 그만둔 사원이 대거 입사하게 되어 인적인 충실을 기하게 되었고, 1924년 9월 신석우가 그 판권을 넘겨받게 되면서 조선일보의 면목이 일신하게 되었다.
  사장에는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아오던 이상재를 추대하고, 부사장에 신석우, 이사진에 안재홍, 조설현, 백관수, 이상협, 최익선, 김동성, 신구범 등을 선임, 그 기치도 ‘조선민중의 신문’이라 내세워 민족지로 그 면모를 갖췄던 것이다.
  여기 이사진에 본보 출신으로 이상협, 신구범, 김동성 등의 면면이 끼어 있고, 또 편집국장에도 본사 사회부장이었던 민태원이 취임하게 되었다 (238~239쪽).

이 글은 3대 민간지의 하나로 창간된 시대일보, 그리고 동아일보의 경쟁지였던 조선일보의 인적 구성과 변동을 중심으로 그 시기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춘금 협박 사건’이 불씨가 되어 동아일보사에서 일어난 기자들의 개혁운동이 그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은 깡그리 묵살한 것이다.

게다가 <동아일보사사 권1>은 기자들의 개혁운동을 좌절시킨 김성수를 이렇게 미화했다.

  김성수는 어떤 일에든 옆에서 일개의 조력자로 있기를 즐겨했고, 직접으로 그 국(局)에 당하는 일을 즐겨하지 않는 성품의 사람이었지만, 무슨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는 그 수습과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일면도 있었던 것이다. 제2대 사장에 취임했을 때도 주식회사 설립이라는 어려운 일을 성취시키어 본사의 기초를 튼튼히 구축하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제5대 사장에 취임하여서도 (···) 사옥 신축이란 힘겨운 사업을 완성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각설하고, 김성수가 사장에 재취임하여 1924년 10월 23일자 사설 「취임에 제하여」에서 본보가 “외국의 유수한 신문지에 비하여 내용과 설비가 아직도 불충분한 것이 많다 할지라도 현재 조선 사계(斯界)에 있어서 권위와 신용을 가진 것은 세인이 공인”하는 바임을 되새기며, 이것이 모두 사원 일동의 불휴불면(不休不眠)의 고심분투한 결과임은 물론이지만, 이에 앞서 그것은 국민적인 성원에 크게 힘입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실상은 이것이 기 천만의 피와 눈물의 결정이며 수심과 한탄의 소산인 것”이라고 하고, 그러므로 “본보의 정신은 항상 일관하고 본보의 주장은 영구히 불변할 것”을 다시 약속하였다(244~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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