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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지진’ 보도동아일보 대해부 1권 -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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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1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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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정오 가까운 무렵 일본 간토(關東)지방의 가나가와현 사가미만을 진앙지로 대규모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것을 ‘관동 대지진’이라고 불렀다. 5분 간격으로 세 차례나 터진 지진으로 10만~14만 명이 사망하고 3만7천여 명이 실종되었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다시피 하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조선인 대학살을 부른 일본 경찰과 언론의 유언비어

일본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이런 내용이 적힌 공문을 보냈다.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그것은 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들의 ‘폭동’ 쪽으로 돌리려는 계책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거기에 발 맞추어 일본의 다수 언론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와 약탈과 강간, 살인을 저지르거나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경찰과 언론의 ‘선전’을 곧이듣고 공포와 흥분에 사로잡힌 많은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서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죽창과 낫, 일본도 등으로 가차없이 학살했다. 관동 대지진 직후 그렇게 살해당한 조선인은 4천~6천명으로 추산되었다.

동아일보는 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뒤인 9월 3일자 1면 머리에 「일본의 재난 / 일대 참극」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올렸다.

  일본 동해도 각지에 대지진이 폭발하여 혹은 가옥을 파괴하며 혹은 생명을 상실하며 혹은 교통이 두절하여 상해(桑海)의 변을 성(成)하게 된 것은 기보(旣報)와 여(如)하거니와 취중(就中) 동경지방은 전시(全市)를 거(擧)하여 화염의 오유(烏有)에 귀(歸)하였도다.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인은 이에 대하여 무량한 감개가 불무(不無)하도다. 첫째, 인도적 관점으로 보아서 적어도 3백만 인구를 포용한 동경시가가 돌연히 초토회신(焦土灰燼)으로 화작(化作)하는 동시에 무수한 생령이 참사중상을 당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령 도명구생(圖命求生)하여 근근히 위난을 면하였다 할지라도 노약남녀가 읍기호갈(泣飢呼渴)하여 서설도로(棲屑徒路)의 참경에 재(在)할 것은 불견가상(不見可想)하는 바라. (···) 더욱이 재류동포의 안위가 여하한가 오인의 원려불이(遠慮不已)하는 바며 둘째는 문화상으로 보아서 동경시로 말하면 현대문화에 대한 위치가 자못 일본에 한하여 중추적 발원지가 될 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로 말하면 동양 전국(全局)에 대한 중심점이며 발원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노라. 적어도 명치 대정 연대의 5,60년 간 일본민족의 한혈(汗血)의 결정과 심력의 경주가 이에 응취(凝聚)하였으며 또한 이에 집중하였도다. (···) 일본민족의 비통한 심사에 대하여 깊이 동정을 기(寄)하는 바이며 또한 국제정국의 풍운이 축일격심(逐日激甚)한 금일에 재하여 아무리 불가항력의 천재라 하여도 심각한 타격을 수(受)하게 된 것은 절(窃)히 일본 국운의 소장(消長)에 대하여 관계가 불무할 것이라 하노라. (···) 인류 세계에 강한 자가 과연 그 누구이며 지(智)한 자가 과연 그 누구인가. 대자연의 앞에는 억조창생이 모두 평등인 것을 통절히 감할 뿐이로다. 그러면 인류로서의 오인은 홍범(弘汎)한 애(愛)를 수련하여 상부상조의 대의로 운명의 노(路)에 취할 것 아닌가. 금회 동경지방의 재난은 실로 공전의 참극이라 요히 인류로서의 동정을 기코자 하여 일언을 기하노라.

이 사설은 ‘인도적 관점’에서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 참사에 대해 동정을 보내고 있다. 아무리 조선을 강제로 병탄한 일본이라 하더라도 그 나라 국민들이 당한 천재지변에 인간적 아픔을 표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의 천재를 빌미로 조선의 ‘인재’를 탓한 사설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극진한 동정의 뜻을 전한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9월 5일자 사설(「오호 인재 / 조선인아 거듭 나자」)에서는 엉뚱하게도 조선민족이 최근에 겪은 ‘인재(人災)’를 통탄하고 있다.

  이번 일본의 천재는 실로 사후(史後) 미증유의 참상이다. 타 지방은 말고 동경, 요코하마 양대 도시만 보더라도 거의 4백만의 생령이 방금 화염 속에 오뇌하고 아직 확보(確報)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참사한 자만도 동경에만 15만이라 한다. 게다가 이 15만 중에는 일본의 정수라 할 만한 유위한 인물들이 많이 섞여 있을 것인즉 40억, 50억이라는 경제적 손실은 혹 회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인재(人材)의 손실은 영구히 회복할 수 없는 쓰린 창이(瘡痍)라 할 것이다. (·····)
  그러나 불행한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할 때에도 자기의 신세를 반성하는 생각이 앞선다.
  ‘남은 불가항(不可抗)의 천재를 당하여 민족적 대손실을 당하였건만 우리는 그러한 천재도 지변도 없이 왜 이 참경을 당하였는고?’
  먼 과거의 일은 고사하고 금년 1년 지나간 8개월 간 우리가 당한 참상만을 보자. 작동(昨冬)에 발아하여 신년 벽두부터 전 반도가 총동원된 관(觀)이 있던 자작자급운동은 이금(而今)에 안재(安在)런고? 170일의 이 목적으로 된 단체와 수만의 운동자들은 무슨 재변(再變)으로 전멸을 당하였는고? 종로에 번득거리던 수목(水木)모자와 여학생들의 수목치마는 어느 화재에 스러졌는고?
  이어서 일어난 민립대학운동은 이금에 안재런고. 팔로에서 모였던 4백여의 발기인과 각 군 각 면에까지 설립되었던 지부와 그 일의 책임을 맡은 수천 명의 임원은 다 무슨 재변에 영체(零替)를 당하였는고?
  근 70의 개조파와 창조파의 제 단체는 2년을 이어 알력과 당쟁을 일삼다가 무슨 천재에 다 전멸을 당했는고?
  대관절 오족(吾族)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모든 생활이 무슨 천재로 이토록 참혹한 전멸을 당했는고? 아니 그 참혹함이 어찌 동경의 전멸, 요코하마의 전멸에 비하랴. 진실로 전 조선이 전멸이다!
  오호 인재다! 사람이 없는 재(災)며 옳지 못한 사람이 있는 재다. 자작운동을 할 만한 사람은 없고 무너뜨릴 사람은 있는 재다. 민립대학운동, 자유운동을 할 만한 사람은 없고 무너뜨릴 사람은 있는 재다!
  그 사람은 일이(一二)의 영웅호걸을 가리킴이 아니요 전 조선 민중을 가리킴이다. 적더라도 전 민중의 중축이 될 만한 다만 1만 명이라도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천재는 인심에 회개의 기회를 준다. ‘아아 벌이다’ 하는 것은 천재를 당할 때에 저나 남이나 같이 받는 충격이다. 이제 우리 조선민족은 이번에 일본이 당한 몇 백십 배 이상의 대재앙의 유허(遺墟)에 섰다. 만일 적이 심안(心眼)이 열린 자일진대 전 조선에 인육이 타고 썩는 내를 맡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아, 인재의 참담한 유허다.
  일본의 천재가 비록 사후 미증유라 하나 일본민족에게 생명력이 있는 이상 조만간 회복될 날이 있을 것이다. 혹은 천재 이전의 일본 이상의 일본을 건설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썩어버리는 인재야 무엇으로 회복하랴.
  “거듭 나라!” 하고 예수는 멸망에 들어가는 동족을 향하여 외쳤다.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줄 아느냐. 지옥에 빠지리라” 하고 울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은 이 외침을 듣지 않고 지옥에 빠졌다. 이제 당시 유대족 이상의 대천재의 유허에 선 우리 조선족에게도 외칠 말이 하나요 오직 하나이니 곧 “조선족아, 거듭 나라!” 함이다. 허위와 나타(懶惰)와 궤휼(詭譎)과 시기와 겁나(怯懦)와 모든 추한 털을 벗어버리고 진실과 근면과 성실과 상애(相愛)와 용기의 흰옷 속에 거듭 나 참담한 재변의 유허에 신생명을 건설하자!

이 사설은 조선의 민족과 민중이 ‘인재’ 때문에 참담한 재난의 폐허 위에 서 있다고 단정한다. 동아일보가 인재 때문에 빚어진 참사의 대표적 보기로 들고 있는 것은 자작자급운동과 민립대학운동이 유명무실해졌고 개조파와  창조파 같은 단체들이 알력과 당쟁을 일삼다가 전멸했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설이 거론하는 자작자급운동은 1922년부터 조선에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번지기 시작하자 민족진영이 자급자족적 물산장려운동과 더불어 소비 절약, 금주·단연 운동을 펼친 것을 가리킨다.

민립대학운동은 1920년 6월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1백여 명이 우리나라에 대학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열고 민립대학 설립을 결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결성했고, 1923년 3월 29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기인 462명이 참가한 가운데 총회가 열렸다.

개조파와 창조파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안에서 독립운동의 방식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의 쌍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23년 1월 상해, 북경, 만주 등지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개개조해야 한다는 쪽은 개조파,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하는 쪽은 창조파로 불리게 되었다. 양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논리를 앞세워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사설은 자작자급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부진에 빠진 사실은 외면하고 조선에 ‘쓸 만한 인물들’이 없기 때문에 자멸했다고 탄식한다. 그렇다면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한 동아일보사 사주 김성수와 사장을 지낸 송진우조차 무능한 인물이라는 뜻인가?

하물며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는 운동가들이 사상과 이념 또는 지원세력의 차이 때문에 벌인 논쟁과 대립을 조롱하고 멸시할 정도로 동아일보는 일제의 압제와 탄압을 물리치기 위해 몸을 던져 싸운 적이 있었던가?

위의 사설은 일본이 천재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유로서 그 나라에는 쓸 만한 인물들이 많다는 듯이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민족에 대해서는 ‘허위와 나타와 궤휼과 시기와 겁나와 모든 추한 털’을 벗어버리라고 ‘훈계’한다. 민족의 지상과제인 독립과 해방에는 관심이 없고 개량주의적 운동에만 몰두하는 일부 지식인과 일제에 빌붙은 친일파 말고 조선의 민중이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그래서 위의 사설은 민족성을 비하하고 자조(自嘲)하는 파괴적인 글이 되고 말았다.


재일동포의 재난을 걱정한 사설

동아일보는 9월 6일자 사설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있는 동포들이 대지진으로 어떤 피해와 고통을 겪었는지에 관한 우려를 밝혔다.

동경, 요코하마, 하치오지 등지에 재류하는 우리 동포는 이번 대재변에 어찌 되었는가. 재변이 시(始)한지 이미 5, 6일이 지나되 우리 가련한 동포에 관한 일자의 음신(音信)도 들을 수 없다. 뉘 있어 이 혼란 중에 그네의 생사 안부를 주의하리오. 우리는 일각이라도 속히 조난동포의 안부를 알아 그네의 슬퍼하는 부로(父老)와 일반 동포에게 전할 양으로 2일 밤에 특파원을 파견하였으니 그는 수화(水火)를 무릅쓰고 동포의 안부를 수탐(搜探)할 것인즉 일내(日內)에 자세한 보도가 올 것으로 믿는다.
  동경에 재류하는 남녀 학생 2천여 인 중에 하기휴가로 귀국하였다가 다행히 아직 본국에 있는 이도 있으나 그것은 9월 10일 이후에 개학하는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들뿐이요 그밖에는 9월 1일 이전에 이미 동경에 돌아갈 것인즉 이번 재변을 동경에서 당한 우리 유학생만 하여도 1천6백 이상은 될 것이다. 그중에는 중등 정도 이하의 소년들도 있고 보호할 자 없는 여학생도 있을 것인즉 그들이 어떻게나 이 혼란 중에 지내나 원컨대 한 사람도 사상(死傷)이 없을지어다. 오는 조선의 주인이 될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가 건전하게 이번 재난을 면하여지이다. 우리는 본국에서 울고 있는 그네의 부모와 함께 울고 함께 축도할 뿐이다.
  유학생 외에도 재난 각지에 산재한 노동하는 동포의 수가 수천에 달하는 형편이다. 그네는 대개는 시외에 거주하는 모양이니 시내에 있는 유학생들 보다 피난하기가 비교적 용이한 처지에 있다 하려니와 천행으로 비록 사상을 면하였다 하더라도 그날 벌어 그날 먹던 신세로 의지와 직업을 잃어버리고 백미 1승(升)에 4원이라는 난리 중에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여 가는가. 화염과 폭풍우 속에서 기한(飢寒)에 우짖는 수천 동포의 정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여 흉억(胸臆)이 막히고 이 글을 쓰는 붓이 떨린다.
  작석(昨夕)에 경성에 있는 일본유학생들이 조난동포 구제문제를 위하여 대회를 개(開)한다 하니 그 회의 결과가 성공이기를 바라거니와 이것은 결코 일본유학생만의 일이 아니요 조선인 전체의 일인즉 가장 인구가 많은 경성부민(府民)을 머리로 하여 일대 구제운동을 속히 개시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설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바로 이튿날인 9월 2일 현지에 특파원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9월 11일자 신문이 나오기까지 9일 동안 동아일보 지면에는 일본 경찰과 언론이 퍼뜨린 유언비어에 따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거나 그들의 인권을 유린한 데 관한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9월 12일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사설로 추정됨)가 완전히 삭제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인들에 대한 살상과 테러에 관한 글을 총독부가 통째로 지워버린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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