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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의 지면동아일보 대해부 1권 -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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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0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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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호인 1920년 4월 1일자 신문은 3월 31일 저녁에 발간되었다.


일제의 조선 병탄과 식민 지배를 에둘러 간 ‘창간사’

1면 머리에는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창천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 산정수류(山靜水流)하며 초목 창무(昌茂)하며 백화 난발하여 연비어약(鳶飛魚躍)하니 만물 사이에 생명과 광영이 충만하도다.
  동방아세아 무궁화 동산 속에 2천만 민중은 일대 광명을 견(見)하도다. 공기를 호흡하도다. 아, 실로 살았도다. 부활하도다. 장차 혼신용력을 분발하여 멀고 큰 도정(道程)을 건행(健行)코자 하니 그 이름이 무엇이뇨. 자유의 발달이로다.
  세계 인류의 운명의 대륜(大輪)은 한 번 회전하도다. ‘쯔아(러시아의 황제-인용자)’는 가고 ‘카이사’는 쫓기는도다. 자본주의의 탐람(貪婪)은 노동주의의 도전을 받고 강력(强力)에 기본한 침략주의와 제국주의는 권리를 옹호하는 평화주의와 정의를 근본한 인도주의로 전환코자 하는도다.
  그런즉 인민으로 말미암은 자유정치와 노동으로 말미암은 문화 창조와 정의 인도에 입각한 민족연맹의 신세계가 전개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오인(吾人)은 몽상가가 아니라 또한 현실에 즉한 자로다. 어찌 이상과 하늘만 보고 사실과 땅을 망각하리요. 세계의 대세를 여실히 논할진대 일편에 신세력이 있는 동시에 우(又) 일편에 차(此)와 대립하여 세력이 있어 서로 쟁투하는도다. 환언하면 정치로나 경제로나 사회로나 문화로나 각 방면에 해방과 개조의 운동이 있는 동시에 굳이 모든 것을 억압하려 하는 일대 운동이 존재하도다. 이는 사실이라 뉘 감히 부인할 바리요. 오호라, 신구 충돌과 진보 보수의 다툼이 어찌 이 시대에만 특유한 바리요. 온 역사를 통하여 상존하는 것이로다.
  그러하나 일양내복(一陽來復)에 적설견빙(積雪堅氷)이 융해하고 백화만물이 각서기생(各叙其生)함은 그때가 옴이라. 누가 능히 팽연(彭然)한 춘(春)의 힘을 억거(抑拒)하리요. 이와 같이 신구의 충돌은 이미 신(新)의 올 때 됨을 표시함이요 구(舊)의 갈 때 됨을 명고(鳴鼓)함이라. 필연의 세는 인력으로 좌우치 못할 바라. 신이 기필코 성공하고 구가 반드시 퇴거하리니 오인은 신시대가 이미 왔다 아니 하노라. 신세계가 벌써 전개되었다 아니 하노라. 오직 암흑 중으로서 쟁투로써 해산(解産)의 고(苦)를 가지고 웅웅(雄雄)한 신문명의 婆(파)와 명명(明明)한 신시대의 서광이 멀리 수평선상에 보이도다 하노라.
  보이도다. 보라. 기천만의 남녀 민중이 그를 향하여 노력하는 것을.
  이러한 때에 동아일보는 생(生)하도다. 희(噫)라. 그 생이 어찌 우연하리요.
  회고컨대 일한 합병 우자(于玆) 십년 그 사이에 조선 민중은 일대 악몽의 습(襲)한 바 되었었도다. 그가 또한 사람이라 어찌 사상과 희망이 없었으리요. 그러나 능히 서(敍)치 못하며 그가 또한 사회라 어찌 집합적 의사와 활력의 충동이 없었으리요. 그러나 능히 달(達)치 못하며 그가 또한 민족이라 어찌 고유한 문명의 특장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었으리요. 그러나 감히 발(發)치 못하였으니 실로 개인이 간혹 경험하는 바 부르짖고자 하되 개구(開口)치 못하며 달음질하고자 하되 용신(用身)치 못하는 그 악몽에 조선 2천만 민중은 빠졌었도다.
  이는 곧 사지(死地)라 함정이라 자유와 발달을 기(期)치 못할 곳이였었도다. 조선 민중은 실로 고통을 감(感)하도다. 혹은 울고 혹은 노하였도다. 어찌 현대 민중뿐이라 하리요. 4천년 역사적 생명이 분개하도다. 그는 조선 인민이 홀로 그 생을 달치 못하며 그곳을 득(得)치 못함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나 때가 한 번 변하여 언론자유가 다소 용인된다 하매 조선 민중은 그의 의사를 표현하며 그의 전도(前途)를 인도하는 친구가 될 자를 열망으로 기대하였도다.
  이에 동아일보가 생하였으니 그가 어찌 우연하다 하리요. 실로 민중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생하다 하노라.
  주지를 좌에 선명하여서 창간사에 대(代)코자 하노라.

  1)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自任)하노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적 전체로 본 2천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한즉 그의 의사와 이상과 기도(企圖)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기를 기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이는 국체니 정체(政體)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라 곧 인류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척하고 인격에 고유한 권리 의무를 주장함이라. 그 용(用)이 국내정치에 처하여는 자유주의요 국제정치에 처하여는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처하여는 평등주의요 경제조직에 처하여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에 재(在)하여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이상의 친목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국(全局)에 재하여는 정의 인도를 승인한 이상의 평화 연결(聯結)을 의미함이라.
  경언(更言)하건대 그 체(體)는 폭력 강행을 불가라 하고 양심의 권위와 권리의 주장으로써 인생 각반(各般)의 관계를 규율코자 함이니 고자(古者)의 소위 왕도의 정신이 곧이라. 오인은 천하 인민의 경복(慶福)과 광영을 위하여 이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오묘라. 환언하면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문명에 공헌케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고창(高唱)하노니 이는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요 생존의 가치라 사유한 연고라.
  요컨대 동아일보는 태양의 무궁한 광명과 우주의 무한한 생명을 천리강산 천만민중 가운데 실현하며 창달케 하여서 자유 발달의 국(局)을 믿고자 하노니 (1)조선 민중이 각정(各正) 생명하여 보합대화(保合大和)하는 일대 문화의 수립을 기하며 (2)천하 민중이 각득기소(各得其所)하여 상하 여천지(與天地)로 동류(同流)하는 일대 낙원을 건설함에 동력공조(同力共助)하기를 원함은 본 일보의 주지로다.
  그러나 본사의 전도가 심히 험하도다. 그의 운명을 누가 가히 예측하리요. 오인은 오직 민중의 친구로서 생사진퇴를 그로 더불어 한 가지 하기를 원하며 기하노라.

<동아일보사사 권 1>은 이 ‘창간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창간사가 전편(全篇)을 통하여 강렬하게 풍기는 기조는 민족지임을 자부하고 있는 점이다. 민족지로서의 본보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을 예견하면서 “본사의 전도가 심히 험하도다. 그의 운명을 누가 가히 예측하리요. 오인은 오직 민중의 친구로서 생사진퇴를 그로 더불어 한가지 하기를 원하며 바라노라”고 창간사를 맺고 있지만, 이것은 동아일보 50유여 년의 험난한 길을 벌써 내다보았을 뿐만 아니라, 험난한 길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민족과 더불어 이것을 극복해 나갈 것을 다짐했고, 또 그것을 염원 호소하고 있다(101쪽).

<동아일보사사>의 이런 주장은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왜냐하면 동아일보는 ‘민족지’를 자임하고 출발했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반민족지’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일제에 아부하거나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창간사’는 서두부터 과장된 문장들을 나열하면서 마치 ‘신천지’가 펼쳐지는 듯이 흥분하고 있다. ‘동방아세아 무궁화동산’에서 2천만 조선 민중이 ‘일대 광명’을 보면서 부활했다는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1919년의 3·1 독립투쟁이 좌절로 끝난 뒤 일제의 억압 아래서 계속 비참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현실에 절망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일제는 다시는 3·1 운동 같은 위협적 움직임이 벌어지지 않도록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언론자유 비슷한 것을 주면서 ‘민간지’ 발행을 허가했다. 동아일보가 진정한 민족지가 되려면 조선 민중의 암담한 현실과 미래를 냉정하게 인정하면서 독립과 해방에 이바지하는 신문이 되겠다고 약속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창간사’는 “침략주의와 제국주의는 권리를 옹호하는 평화주의와 정의를 근본한 인도주의로 전환코자 한다”는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다. 제 나라 땅에서는 민족이 10년 동안 일제의 탄압과 수탈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데 침략주의와 제국주의가 평화주의와 인도주의로 전환하고 있다니!

‘창간사’는 일제의 조선 병탄과 압제에 희생당하는 조선 민중의 현실을 ‘일대 악몽의 습한 바’ ‘사지(死地)’ ‘함정’ 같은 말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가 생하였으니 (···) 실로 민중의 열망과 시대의 동력으로 생하다”라고 허황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동아일보가 ‘창간사’를 통해 내세운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은 21세기 오늘날까지 ‘사시(社是)’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동아일보가 창간 이래 90여 년 동안 일관성 있게 그 사시에 걸맞는 신문을 제작해 왔는지 여부는 이 총서를 모두 읽고 난 분들이 종합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믿는다.


‘과격함’을 보인 초창기 논설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자부터 7일자까지를 ‘창간 특집’으로 꾸몄다. 4월 1일자에는 ‘주지를 선명하노라’ 밑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유근), 「지(知)아 부(否)아[아는가 모르는가-인용자]」’(양기탁)라는 논설이 실렸다.
창간 특집에서 「주지를 선명하노라」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4월 2일자부터 7일자까지 3회에 걸쳐 1면 머리에 연재된 「세계 개조의 벽두를 당하여 조선의 민족운동을 논하노라」라는 무기명 논설이다. 아주 긴 논설에서 핵심적 부분 몇 군데를 옮겨보겠다.

  (···) 대관(大觀)하건대 자연계에 봄이 회래(回來)함과 같이 인간세상에 또한 춘광(春光)이 내조(來照)하였으니 그는 무엇인고. 곧 우내(宇內)에 창일(漲溢)한 개혁의 기운이며 개조의 노력이로다. (·····)
  (···) 여(余-나)는 단언하노니 자유는 실로 인간발달의 일대 요소라 하노라.
  입헌정치의 일대 특색은 3방면으로 분할함이니 1은 입법이요 2는 행정이요 3은 사법이라.
  대개 이 3권은 1 기관에 위임 운용하면 그 권력이 태강(太强)하며 감독이 불명하여 전제의 각반 폐해가 생하므로 유(由)함이니 인민의 자유를 승인함은 입헌정치의 본질이요 3권 분립은 본질 발휘의 수단방법이라 할지라. (·····)
  약자와 강자를 균등 처지에서 자유로 경쟁케 함은 일견 공평한 것 같으나 그러나 실은 불연(不然)하여 약자를 보호하고 그 권리를 신장케 함이 당연하니 이 사회주의의 발생한 소이라. 그는 철저한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니 곧 절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여서 사회 감독과 지배 하에서 각인에게 자유를 향락케 함이요 심지어 노동자로서의 국가 경영과 산업 관리를 주장함에까지 지(至)하였으니 이 천하에 대(大) 문제 노동자의 발흥이라. 이미 노독(露獨) 양국에 실현하고 장차 천하를 석권하려는 것이로다. (·····)
  국권 민유(民有)의 대원칙은 국가 경영을 민의에 의하여 행한다 함이니 각 민족은 스스로 그 운명을 개척하여 경영하며 결정할 권(權)이 유(有)한지라 이 곧 자결이니 민족주의의 본질이며 자유주의의 정신이거늘 19세기 사(史)는 과연 무엇을 증명하는고? (·····)
  문화는 반드시 정치적 정의를 의미하거니와 정치적 독립은 반드시 문화를 의미함이 아니라. 그러면 어찌 총명한 우리 조선 민중이 정치적 의미로서만 저와 같은 일대 운동을 야기하였으리요. 오직 이민족의 통치 하에서는 원만한 문화의 수립을 기(期)치 못하리라 확신함(그 시비곡직은 별개 문제)으로 원대한 이상의 실현을 위하려 그 제1보를 답출(踏出)함이니 이 곧 자비승고(自卑昇高)의 이(理)를 종(從)함이라. 2천만 조선 민중 가운데 일대 문화를 수립함이 어찌 그 궁극적 목적이 아니리요. (·····)
  희(噫)라. 천지에 봄비 소리 없이 내리는도다. 대지상에 생명을 최촉(催促)함이니 만물이 유형(流形)하리로다. 아, 조선 민중아, 봄이 오도다. 천지의 무한한 생명을 받아 2천만 민중의 일대 문화를 수립할진저.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4월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1919년 10월 혁명이 로마노프 왕조를 몰아내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세계적으로 제국주의와 전제정권의 지배를 받던 민중과 약소민족들은 10월 혁명을 역사 발전의 본보기로 삼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위의 논설은 그런 흐름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는 한편 서구적 입헌정치의 본질을 소개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까지 원용한다.

이런 논설이 동아일보 창간 이틀 만에 지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정치’와 ‘언론자유’를 강조하던 총독부가 당장 법적 제재를 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창간 특집을 내보낸 뒤 4월 11일자부터 4월 29일자까지 일제를 자극하는 논설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 「조선총독부 예산을 논함」(8~10일자)
·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을 폐(廢)하라」(11~13일자)
· 「재계의 공황과 구제책」(14~15일자)
· 「홍삼 매하(賣下)에 대하여」(16일자)
· 「조선노동공제회에 대하여」(17일자)
· ‘통치권의 근본의(根本義)는 하재(何在)뇨?」(18일자)
· 「원고 검열을 폐지하라 / 언론자유의 一端(일단)을 논함」(25~26일자)
· 「경무국장의 지시사항을 독(讀)함」(25~26일자)
· 「전쟁의 종식은 하시(何時)에 재(在)하뇨?」27~28일자)
· 「과학의 조선 / 이학(理學) 발달의 필요를 논함」(29일자)


잇단 발매금지와 제1차 정간

동아일보는 창간된 지 보름만인 1920년 4월 15일자 신문의 한 기사 때문에 처음으로 ‘발매반포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 기사의 제목은 「평양에서 만세 소요」’이다. 그날부터 9월 5일자까지 발매반포정지와 삭제 처분을 받은 기사와 논설은 모두 24건이었다. 총독부가 그런 처분의 근거로 삼은 것은 대한제국 시기에 공포된 ‘신문지법(속칭 광무신문지법)’이었다.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다. 9월 24~25일자 1면 머리에 올린 사설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가 정간의 주된 사유였다. 문제가 된 대목은 아래와 같다.

  우상 숭배의 제일 현저한 자는 목조이소(木彫泥塑)하고 분면전신(粉面全身)하여 신이 자(玆)에 재(在)하며 혹 영(靈)이 자에 재하다 하여 이를 숭배할 뿐 아니라, 유시호(有時乎) 이에 대하며 강상(降祥) 강복(降福)을 기도함이니, 이는 확실히 우상숭배라 할 것이요, 설혹 인신을 모작(模作)한 우상이 무(無)할지라도 혹은 경(鏡)으로, 혹은 주옥으로, 혹은 검으로, 그 타(他) 하등 모양으로든지 물형(物形)을 작(作)하여 혹처(或處)에 봉치(奉置)하고 신이 자에 재하며 혹 영이 재하다 하여 이에 대하여 숭배하며 혹 기도함은 일체 우상숭배라 할 것이니 대개 차리(此理)는 지자(知者)를 대하여 비로소 알 바 아니라 현자를 물론하고 인(人)의 지각을 구비한 자는 반드시 곽연(廓然)할지니 인수(人手)로 조작한 바 공(工)과 소장(塑匠)의 창시(彰施)한 바 색(色)이 어찌 신을 접할 수 있으며 신이 또한 어찌 이에 접하리오.

이 글은 일본이 ‘삼종신기(三種神器)’라고 떠받드는 검(劍-칼), 경(鏡-거울), 새(璽-옥새)를 우상숭배의 표본이라고 지적했다. 총독부가 9월 25일 발표한 「무기정간 이유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본일 발행의 동아일보는 발매반포를 금지당하고, 이어 무기발행 정지의 명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창립 당시 박영효 후작 스스로 이를 통괄하고 온건한 주의주장 하에 진실로 일선(日鮮) 민족의 복리를 증진하고 문화의 발전에 공헌할 것이 기대되었으나,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격(矯激)의 언설을 게(揭)하여 빈번히 발매금지처분을 받은 바 있었다. 편집의 국(局)에 당한 자와 의합(議合)하지 않아 박 후작은 사장의 직위를 사퇴하였었다.  (···) 본일의 신문에서 우상예배를 논하여 일부러 아(我) 제국 신민(臣民)의 신념의 중추인 검·경·새에 대하여 무이해한 망설(妄說)을 들고, 다시 20세기 인도를 인용하여 영국의 폭정을 논하여 은근히 이를 조선과 직접 대조시킴에 자(資)하고자 하는 듯하고, 그 내용 또한 과장 허위의 점도 불소하여 제국의 신문지로서 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할 우려도 없지 아니하다. 편집의 국에 당하는 자는 혹은 운위할지도 모른다. 동지의 언설은 결코 그런 우의(偶意)를 가지지 아니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비(都鄙) 독자의 실제에 있어 이를 보면 동지의 반영이 현저한 바가 있어 건전한 일반사상을 혹란(惑亂)함이 현저한 바 있다. 이상 누술(縷述)함과 여(如)히 동아지의 언론은 도저히 통치의 근본방침과 상용되기 어려워 자(玆)에 발행정지가 부득이함에 이르렀다(같은 책, 151~152쪽).

  총독부의 무기정간 처분에 대해 <동아일보사사 권1>은 다음과 같이 해석 했다.

  이 이유서에 나타난 그들의 서술에는 동아일보의 이제까지의 발자취를 대변해 주는듯한 대목으로 꽉 차 있다. 사실 그들로는 감내하기에 역겨웠을 정도로 항일적이었고, 민족광복을 위해 줄기차게 싸워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정간은 단지 사설에 나타난 언구(言句)가 그들의 구실로 되기는 하였으나, 그것보다도 이제까지 누적되어 온 총독부의 동아일보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었으리라. 이유서에도 잠깐 언급되어 있지만, 발행인 이상협을 소환하여 앞으로 다시 발매금지처분을 당할 경우 ‘단호한 처분’을 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었으나, 본보의 사명을 저버리고 발행에만 급급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본보의 실정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이유서에 나타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신문을 발행할 아무 의의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같은 책, 152쪽).

동아일보사의 이런 주장과는 전혀 달리 최민지는 “동아일보 스스로 무기정간을 불러일으켰다”는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가 창간한 조선일보가 민간지로서는 처음으로 무기정간을 당하자 동아일보가 대응책으로 일제를 자극하는 논설을 실었다는 것이다.

  (···) 조선일보는 민간지 최초로 1920년 8월 27일 당시 극동을 시찰 중이던 미의원단의 내한을 맞아 이를 환영하면서, 이 환영을 탄압하는 경찰당국을 비난한 사설 「자연의 화(化)」로 1주일 간의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였고, 해정(解停)된 3일째인 9월 5일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를 정간시켰나뇨」라는 사설에서 “(···) 오인도 과연 당국자가 비방함과 같이 무문곡필(舞文曲筆)을 할 수도 있다. (···) 오인은 불행히도 당국자가 비방함과 같이 무문곡필의 기능에 부족하여, 조선일보라는 간판 아래 민족적 양심이 민멸(泯滅)하지 않는 한에서는 이를 참고 부릴 수가 없으며 철두철미 배일신문이라는 소질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는 바라”면서 철두철미 배일신문을 공언하는 논필을 폈다가 무기정간을 받음으로써 민족언론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는 배일신문을 공언하면서도 비록 일제의 강요라 할지라도 최국현, 방한민 등 3명의 배일기자 를 해고함으로써 신문 발행을 총독부 당국과 타협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마치 천마분공(天馬奔空)의 세로 시골구석까지 아니 가는 곳이 없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확고한 지반을 가졌으므로 조일동화주의를 표방하는 실업주의로서는 이에 대항하여 경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고심참담한 결과 불온기사를 게재하여 민중들에게는 민족지임을 자임하는 동아일보보다 선명한 민족지로 보이며 총독부 당국에는 또 배일기자를 해임함으로써 타협하는 양면작전을 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에게는 실로 신문판매 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된 형국이었다. 압수, 삭제가 민중들에게는 애국운동으로 보이던 식민지 하에서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에 앞서 무기정간을 당하게 된 것은 동아일보로서는 크게 당황할 중대하고도 위협적인 사태였다. 이러한 때 주요 역할을 담당한 것이 주필 장덕수였다. 그는 곧 9월 24, 25일에 걸쳐 「제사 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연속 논설을 써서 무기정간을 당하였는데 이 논설이 무기정간을 유발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64~65쪽).


일제에 투항한 비굴한 ‘속간사’

1920년 9월 25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은 동아일보는 3개월 반이 지난 1921년 1월 10일 정간 해제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속간호는 2월 21일자로 내게 되었다. 1면에 실린 「속간사」는 민족지를 자처하던 동아일보가 일제에 무릎을 꿇는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다.

  아! 이제 다시 붓 들어 독자 제군을 대하매 오인의 감개는 과연 무량하도다.
  오인의 운명을 그 무엇으로써 비하며 오인의 행로를 그 무엇으로써 가히 표할꼬. 광풍에 몰려가는 운무 같다 할까. 노도에 흘러가는 부평(浮萍) 같다 할까. (·····)
  봄이 왔도다. 엄동설한의 바람은 모두 가고 이에 다시 봄이 왔나니 일화 풍순(日和風順)에 잠자던 모든 나무는 다시 움을 내며 감취었던 모든 새는 다시 노래하기를 시작하는도다. 우리 동아일보 이에 다시 살았으니  아! 회고하면 객년 9월에 발행정지의 액을 당하여 제군과 작별한지 어언간 반개 년에 오인은 다시 새해를 맞았도다. (·····)
  희(噫)라. 동아일보는 일찍이 그 길이 험할 줄을 스스로 깨달았으며 그 걸음이 위(危)한 줄을 또한 기(期)하였도다. (·····)
  그러나 마침내 불행히도 객년 9월 25일에 당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명을 받았으니 아! 비록 위험을 각오하며 곤란을 자기(自期)하였을지나 그 어찌 또한 참연(慘然)하지 아니한가.
  오인은 과연 통곡함을 마지못하였노라. 독자에 대한 미안과 사회에 대한 공황(恐惶)의 염(念)을 이에 어찌 필지(筆紙)로써 다 기(記)하리오. 오직 방타(滂沱)히 흐르는 열루(熱淚)를 스스로 금치 못하였노라. 그러나 오인이 감히 누구를 원(怨)하며 또 우(尤)하리오. 오직 스스로의 식견이 불밀(不密)함을 책(責)하노라.
  대개 본보 발행정지에 두어 가지 이유를 두었으니 (1)은 은어(隱語)와 반어(反語)로써 음연(陰然)히 조선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2)는 총독정치에 대하여 이해 없는 악평을 가하였다 함이라. 이 어찌 오인의 본의리오. 오인은 일찍 논평에 공정을 실(失)할까 저어하였으며 보도에 과장이 유(有)할까 스스로 조심하였노라. 그러나 총독부 당국이 어찌 오인을 박해하는 자며 궤변을 농하는 자리오. 주관과 객관이 반드시 합치하지 못하며 오인이 이상을 추구함에 태급(太急)하여 혹 필단(筆端)이 격하여 입론장진(立論張陣)에 과불급의 폐가 무(無)하였다 필기(必期)키 난(難)하니 오인은 원래 식비문과(飾非文過)코자 하는 자 아니라 다만 본보 사명의 중차대함을 사(思)하여 차(且) 차(此) 이후로 일층 자성에 자성을 가하고자 하노라.
  실패는 성공의 모(母)요 자성은 연달(練達)의 초(初)라 그러나 본보의 주지(主旨)에 어찌 일점의 변경이 유하리오. (···) 근본방침에 재(在)하여는 추호도 동요함이 무하고 더욱 정력을 가하여 사회교육과 산업개발에 노력하며 보도의 확실과 비평의 공정을 기하노니 행(幸)히 독자 제군은 양(諒)하여 ‘조선인 생활 향상운동’에 의연히 본보가 제군의 동반자 됨을 허하라. 객년 9월에 본보가 발행정지의 명령을 받은 이래 3개월여를 경(經)하여 거일 10일에 다시 발행정지 해제의 영(令)에 접하였도다.

이 속간사는 ‘고상한 필치’로 씌어졌지만 마치 죽을 죄를 지은 ‘식민지 백성’이 조선총독부를 향해 석고대죄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일본의 ‘삼종신기’를 우상숭배로 표현한 논설의 한 대목이 무기정간의 주된 이유라면,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냐면서 무기정간 처분을 내린 총독부에 맞서야 ‘민족지’다운 자세였으리라. 그러나 동아일보의 속간사는 오히려 “총독부 당국이 어찌 오인을 박해하는 자며 궤변을 농하는 자”이겠는가 하면서 앞으로 ‘자성에 자성’을 거듭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렇게 비굴한 자세로 총독부의 무기정간 해제 조치를 받은 동아일보사는 목숨을 이어가게 된 데 감지덕지 하면서 “본보의 주지에는 일점의 변경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총독부에 투항한 신문이 어떻게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구실을 제대로 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문화주의를 제창’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속간사는 후안무치하게도 동아일보사가 주관하는 ‘조선인 생활 향상운동’을 함께하자고 ‘독자 제군’에게 부탁하고 있다.

<동아일보사사 권1>에 실린 속간사의 내용은 단 몇 줄에 불과하다.

  속간사에서 “독자에 대한 미안과 사회에 대한 공황의 염을 이에 어찌 필설로 다 기하리오. 오직 방타히 흐르는 열루를 스스로 금치 못하였노라”고 지나간 쓰라림을 되새기고, “행히 독자 제군은 양하여 ‘조선인 생활 향상운동’에 의연히 본보가 동반자 됨을 허하라”고 독자에게 호소하면서 재기하였던 것이다(160쪽).

동아일보는 「제사 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1940년 8월 강제폐간을 당하기까지 사설 때문에 정간당한 일은 없었다. 조선일보가 일제강점기에 사설이 문제 되어 4번이나 정간 처분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첨이 극에 이른 사설 ‘일본 친구여’

동아일보는 속간호를 낸 지 11일밖에 안 된 1921년 3월 4일자부터 이틀에 걸쳐 「일본 친구여」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이 글은 동아일보가 ‘민족지’라는 이름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바치는 최대의 찬사와 아첨으로 가득 차 있다.

첫 날치는 「조선 사람의 고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 일본 친구여, 우리로 하여금 속에 서리고 서린 설화(說話)와 가슴에 아프고 쓰린 심정을 충분히 토로케 하라.
  그대가 우리의 적이뇨 아니라. 그대가 흉악한 사람이뇨 아니라. 우리는 그대의 가슴에도 따뜻한 정의 불이 붙고 그대의 눈에도 아름다운 눈물이 있는 줄을 확실히 믿노라. (···) 아! 우리는 석동환(石童丸)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울고 어린 정행(正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또한 울고 탄복하노라. 그대의 가슴에 어찌 정의 불과 그대의 눈에 어찌 아름다운 눈물이 없으랴. 우리는 본래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로라. 이 온 세상 사람의 비록 그 말은 다르며 그 빛은 다르며 그 옷과 밥은 다르나 그 속 본심은 다 한 가지라고 누가 자기의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 하며 누가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지 아니 하며 누가 슬픔에 울고 기쁨에 반가워하지 아니 하랴. 각 사람 마음속에 뛰는 하늘의 ‘생명’은 다 한 가지라 하노라. 만일 우리가 그대의 마음 가운데에 이와 같은 아름다운 정과 의로운 생각이 없다 할진대 무슨 중언부언의 토정(吐情)이 있으리오만은 그대가 더욱 정에 예민하고 의에 굳센 줄 아노라. 명치유신사를 장식하던 오쿠보(大久保利通)는 누구며 명치헌정사를 빛내던 우가키(板垣退助)는 누구뇨. 우리는 실로 우리 가슴 가운데 뛰노는 생명의 줄이 또한 그대 가운데 뛰노는 줄을 아노라. 아! 일본 친구여. 우리로 하여금 기탄없이 말하게 하라. 일한합병 후 과거 10년간에 그대는 총독부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는 보기 좋은 푸른 산이요 둘은 훌륭한 도로와 셋은 훌륭한 재판소요 넷은 훌륭한 행정관이요 다섯은 훌륭한 산업개발이요 여섯은 훌륭한 교육진흥이뇨. 그러면 조선 사람은 만족하고 행복으로 태평가를 불렀는가. 재래의 한국 정부가 부패하고 대신이 암약(暗弱)하고 법률이 문란하고 재정이 곤핍하여 관직을 매매하고 인민을 취리(取利)의 재료로 생각하므로 생명 재산의 안전이 없으며 교육발달과 산업진흥은 기념(企念)도 없으며 더욱이 자유가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하였다. 연즉(然則) 재래의 한국 정부는 암흑정치요 총독부 정치는 문화정치 아닌가. 유곡(幽谷)을 출(出)하여 교목(喬木)에 천(遷)함은 사리에 당연한 바라. 조선인은 차(此)를 가(歌)하며 차를 송(頌)하여 태평가를 불렀으리라. 그대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가. 그대의 관찰이 무리가 아닌 줄로 생각하노라. 그러면 조선 전도(全道)에 그물 늘어놓듯 하였던 저 유명한 헌병제도는 무엇을 의미하며 조선 전체에 재갈을 물려 일언반구의 심사를 토치 못하게 하였던 저 유명한 ‘언론압박’은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우리는 솔직하게 말하노라. 이 모든 것은 조선인이 당시 총독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포(抱)한 까닭이며 불평의 폭발을 막고자 한 까닭이라 하노라. (·····)
  (···) 조선 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여 그 선한 줄을 알았으나 이상의 빛에 비추어 불만과 불평을 품었도다. 일본 친구여, 과거에 비교하여 당시 총독정치를 자랑하지 말지어다.

이 사설의 제목에 나오는 ‘일본 친구’는 특정의 일본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병탄하고 식민지로 만든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동아일보가 진정한 ‘민족지’라면 조선 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일제를 ‘적’이 아니고 ‘흉악한 사람’도 아니라고 단정하는 말을 차마 사설에 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회사의 이름을 걸고 내보낸 이 사설은 일제 침략자들을 ‘아름다운 정과 의로운 생각’을 가진 인간집단이라고 찬양한다. 그리고 식민지배의 원흉인 조선총독부가 병탄 후 10년 동안 농민의 토지를 약탈하고 조선반도의 자원을 앗아가고 3·1 운동 시기에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총독부가 ‘베푼’ ‘훌륭한 업적들’을 칭송한다. ‘보기 좋은 푸른 산’ ‘훌륭한 도로’ ‘훌륭한 재판소’ ‘훌륭한 행정관’ ‘훌륭한 산업개발’ ‘훌륭한 교육진흥’·····.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영원히 미개국가로 남았으리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 사설은 일제에게 패망한 대한제국 정부는 부패하고, 고위관리들은 허약하고, 법률이 문란해서 관직을 매매하고, 인민을 착취해서 이익을 취하는 최악의 집단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래서 “재래의 한국 정부는 암흑정치요 총독부 정치는 문화정치”라는 것이다.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당위론’이다.

이튿날 동아일보에 실린 사설 「일본 친구여」의 속편(부제는 「친하고자 하되 불능」)은 전날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한다.

  사이토(齊藤) 총독은 온후란 사람이요 미즈노(水野) 총감은 정직한 사람이요 이하 간부 각각은 모두 일류 신진이라. 아! 일본 친구여. 그대는 이를 자랑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그 자랑이 무리가 아닌 줄 알며 중앙정부가 여사한 인물을 파견한 것은 정치적인 허다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인물 택용(擇用)에 과연 그 의(宜)를 득(得)한 것으로 아노라. 중앙정부가 재래의 무단정치가 실로 실패에 귀(歸)함을 자각하고 이를 개혁하여 조선 인민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고자 하는 성의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겠노라. 비록 재래에는 중앙정부가 따라 그대들 일반 국민이 조선정치를 1 무인과 1 행정관에게 위임하여 불고(不顧)하는 냉담이 있었으나 독립운동이 발발한 후 과연 그 잘못을 깨닫고 내두(來頭)의 혁신을 자기(自期)한 것을 우리는 아노라. (·····)
  아! 일본 친구여. 사이토 총독 이하 신 총독부 간부 일동의 당시 포부는 실로 굉장한 줄로 우리는 생각하노라. (1)은 오인의 성심으로써 임하면 하사(何事)의 불성(不成)이 있으리오. 일선(日鮮)의 융화는 가히 기할 바요. (2)는 성심이 발하여 실제 민생에게 유익이 될 문화정치를 보시하면 조선 사람도 사람이라 어찌 감응할 바 없으리오. (3)은 일선의 융화는 동양평화의 핵심 문제이라 일본을 위하여 조선을 위하여 동양평화 연(延)하여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용왕매진하리라 함이로다. 우리는 그 의기의 장함을 충심으로 찬양하노라. 이와 같은 일본 국민의 성의가 있고 신 당국자의 포부가 있으므로 각양 선명(宣明)이 유(有)하였으며 누차 유고(諭告)의 발표가 유하였도다.
  혹자의 해석하는 바와 같이 이 모든 것이 조선인을 기만코자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고 우리는 믿지 아니 하노라. 아니라, 믿고자 하지 아니 하노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생명은 실로 참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오직 기뻐하고자 하노라.
  재래 무단정치가 추상 같았으면 금차의 문화정치는 춘풍 같다 할 것이다. 확실히 복장이 변한 것 같이 민중에 대한 관료의 태도도 변하였도다. 오만은 공순(恭順)으로 불손은 겸양으로 독단은 계중(稽衆)으로 변하였도다. (·····)
  (···) 그대는 실제 정치에 대하여 여하히 관찰하는고. 덕정(德政)이라 하며 문화정치라 하며 이에 일점 광명을 발견하는가. 오인은 그대의 관찰이 부정당하다고 하지 아니 하노라. (·····)
  총독부 당국자의 성심은 성심이며 그 성심을 의지하여 개혁을 각 방면으로 기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가 철저하지 못하고 부득이의 모순과 사실상 당착(撞着)이 생하는도다. (·····)
  우리는 진실로 그대가 정치의 의(義)를 행하여 양민(良民)과 안민(安民)을 도(圖)하되 그 결과를 참말 ‘시일(時日)’의 자연적 해결에 구하기를 바라노라.

이 사설은 아예 처음부터 신임 총독 사이토와 정무총감 미즈노에게 노골적인 아첨을 떨고 있다. 그리고 조선 민중의 3·1 독립투쟁에 겁을 먹은 일제가 어쩔 수 없이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꾼 것을 “조선 인민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고자 하는 성의”에서 나온 조치라고 미화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조선인을 기만코자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는 것을 우리(동아일보)는 믿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무기명으로 된 이 사설을 누가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주인 김성수의 동의 없이 그런 글이 나갔을 리는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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