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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 동기와 과정동아일보 대해부 1권 -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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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2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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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가 펴낸 공식 기록집인 <동아일보사사(東亞日報社史) 권1>(1975)에는 동아일보 창간 전후의 사정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3·1운동과 지하신문의 폭발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자 곧 훈화를 통하여 한인계 민간지의 발행을 용인할 의사를 발표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일제가 한인을 위하여 베푼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깊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3·1운동 하에 꾸준히 전개된 지하신문들의 활동이 그들의 두통거리가 되었던 데 그 원인의 일단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국문판 일간지로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 밖에 3·1 운동 직후, 만주 봉천에서 선우일 등이 몇 달 동안 발행한 국문지 만주일보가 당시 서울에서도 판매되기는 하였지만 격발(激發)한 민중의 심정은 이것으로 충족될 수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날부터 국내에서는 비합법적으로 지하의 비밀신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초각(初刻)을 다투어 변동하는 사태를 알고자 하는 민중의 갈증이 있고, 이것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이상에는, 이 신문 공백시대에는 그럴 밖에 달리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 수는 막대한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는 실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29 종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 격문, 전단 등까지 계산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한편 국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주에서는 이미 한미보(주간), 태평양시사(주간), 국민보(주간), 신한민보(주간) 등이 발행되고 있었고, 3·1 운동 이후에는 간도, 노령(露領), 중국 등지에서 발행된 신문이 20여 종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국내의 지하신문들이 호소력 있게 움직이고, 국외의 한인계 신문들이 국제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등 신문들이 활발히 움직이자 일본은 이에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언론 가운데서도 조선에 ‘어느 정도’의 언론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게 되었다. 동경조일(東京朝日)은 “소란의 유력한 원인은 아(我) 총독정치의 결함에 있다”고 반성하면서, 조선에 있어서의 언론 억압은 세계에 비류(比類)가 없어 어용신문 이외에는 발간을 불허하고 있는 실정을 폭로하였고, 중앙공론 6월호에 게재된 요시노(吉野作造)의 ‘조선에 있어서의 언론자유’라는 글에서, 그는 “선인(鮮人)의 언론의 자유를 일본과 같은 정도로 허한다는 것은 일선(日鮮) 양민(兩民)의 평등을 허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
  이런 일본의 여론도 작용하면서 일본의 대한정책이 조금씩 바뀌어 사이토가 부임 제1성으로 “언론·집회·출판에 대하여는 상당히 고려를 가하여···”로 구체화하였던 것이다(65~67쪽).


일제 ‘문화정치’의 산물 동아일보

사이토(해군대장)는 3·1운동의 열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1919년 8월 1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육군대장)의 후임으로 조선총독이 되었다.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꿈으로써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를 누그러뜨리기로 작정한 일제가 강성 이미지를 가진 육군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해군인 사이토에게 식민지 통치의 책임을 맡긴 것이었다.

그러나 사이토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가 열차 편으로 남대문역(지금 서울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서는 순간 강우규가 일행에게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사이토는 무사했지만 그를 마중 나갔던 일본인 기자 여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사이토는 9월 10일 「유고문(諭告文)」을 통해, 종래의 헌병경찰제를 폐지한 뒤 보통경찰제로 전환하고 관리와 교원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는 제도를 없애며, 행정을 쇄신하고 국민생활을 안정시키는 한편 문화를 증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민족해방운동전선을 약화시키고 민족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구상된 ‘문화정치’의 또 하나의 책략은 3·1 운동으로 높아진 민족해방운동의 열기를 문화운동 쪽으로 유도하여 절대독립론·독립전쟁론적 분위기를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3·1 운동 후의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는 절대독립론·독립전쟁론이 지속된 것과 함께 독립준비론·실력양성론과 외교독립론도 나타났다. 처음에 일본은 이 모두를 용납하지 않았으나 점차 온건론인 독립준비론·실력양성론을 이용하려 했고, 그것을 문화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다.
  3·1 운동이 적어도 국내에서는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한 반면, 사회주의운동이 대두하자 국내 민족주의자의 일부는 한때 운동 방향을 잃게 되었다. ‘문화정치’를 표방한 일본은 이를 틈타 민족운동의 방향을 문화운동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종교운동·수양운동·사교운동·생활개선운동·농촌계몽운동 등을 적극 장려하는 한편, 그 운동의 주동자를 포섭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강만길, <고쳐 쓴 한국 현대사>, 창비, 2010, 37~38쪽).

「유고문」을 발표하기 한 주 전인 9월 3일 사이토는 ‘훈시’를 통해 “언론·출판·집회 등에 대하여는 질서와 공안유지에 무방한 한 상당히 고려를 가하여 민의 창달을 허하여야 한다”면서 민간지 발행을 허가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일제 ‘문화정치’의 핵심에 조선 언론의 ‘민간화’가 들어 있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사이토가 ‘민간지 발행 허가’ 방침을 발표하자 장도빈의 서울일보를 비롯해서 수십 건의 발행허가 신청서가 총독부에 제출되었다.

  총독부는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하던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이하 대정친목회-인용자)의 예종석에게 조선일보를 허가하고(1920년 3월 5일), 총독부 어용지 매일신보의 편집국장으로 있다가 전해 5월에 퇴사한 친일파 언론인 이상협에게 동아일보를 허가하였으며(4월 1일),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던 친일 반민족단체인 ‘국민협회’의 두목 민원식에게 시사신문을 허가했다(4월 1일). (박지동, <한국언론실증사 1>, 아침, 183쪽)

<동아일보사사 권1>에는 일제가 동아일보를 허용한 ‘숨은 의도’에 관한 증언이 실려 있다.

  그 당시 고등경찰과장 시라이(白上佐吉)는 동아일보의 발행허가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후일에 술회하고 있다.
  조선의 청년층이 모여서 조선에서 신문을 발행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 청년층이란 것이 독립만세의 중심인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런 선동적인 인물들에게 신문을 내주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해서 총독부 국장급 인물들은 이 청년들의 신문발행에는 절대로 반대하였지요. 그러나 나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내지연장(內地延長)’이니 하는 표어는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 신문을 허용한다는 것은 큰 문제이기는 하지만, 큰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간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 총독각하를 찾아가서 이렇게 설명하였지요.
  “동아일보를 한다는 청년들이 장래 조선의 치안을 소란케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중심인물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럴수록 이런 인물들을 항상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인물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즉 적을 알아야 이 쪽의 방비책도 쓸 수 있을 줄 압니다.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아 놓아야만 일조유사시(一朝有事時)에 일망타진하는 경찰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 신문을 허용하는 것은 백 가지 이득이 있을지언정 한 가지 해도 없을 줄 압니다. 각하, 두려워하실 것 없이 제 책임 하에 신문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이 술회를 보더라도 동아일보의 허가는 매우 위험시되어, 그 허가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허가에는 고등경찰의 고등정책이 개재되어 민족진영의 급진세력을 수시로 감시한다는 한 방편으로 허가해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 이 점에 대하여 경기도 제3부장 지바(千葉了)도 “(···) 언문신문의 간행은 하나는 조선민족의 불평을 완화할 안전판이며, 다른 하나는 민심의 동향을 알아낼 수 있는 바로미터이다”라고 하여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다(74~75쪽).

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요시찰 인물’들을 동아일보라는 그물 속에 가두어 놓고 동태를 파악하는 한편 유사시에 ‘일망타진’하기 위해 발행허가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사의 역사를 기록한 공식 간행물이 왜 이런 사실을 공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결코 ‘민족지’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는 데 유리한 자료가 될 리 없음은 분명하다. 어쨌든 동아일보는 1920창간 이래 1940년 폐간 때까지 극히 짧은 시기를 빼고는 일제의 ‘어항’ 안에서 놀던 붕어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친일파 ‘거두’ 박영효를 초대 사장으로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발행허가를 받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맨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편집장이던 이상협이었다. 그는 총독부의 영문판 기관지 <서울 프레스> 주간인 일본인한테서 총독부가 조선어신문 발행허가 방침을 정했다는 정보를 듣고 1919년 6월 매일신보를 사직한 뒤 7월부터 신문 창간 운동에 들어갔다.

  (···) 이와 때를 같이하여 평양일일신문의 조선문 주간이던 장덕준, 대판조일신문의 기자인 진학문 등도 민간지 발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 여러 갈래의 신문발행 계획이 김성수의 자금과 결합하여 1919년 10월에 동아일보를 제호로, 이상협을 발행인으로 하는 신문발행 허가원을 총독부 경무국에 제출하는 한편 서울 화동 138번지에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창립사무 소’의 간판을 걸고 전국적으로 주식 모집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1920년 1월 4일, 경기도 제3부로부터 허가증을 교부받아 발행허가를 얻었는데, 이때 사장엔 김성수, 편집인엔 장덕수, 발행인엔 이상협으로 되어 있었다. 1920년 1월 14일에는 전국적으로 주식을 인수한 각도 유지들을 망라, 총 78명의 발기인 총회를 열고 사장에 ‘합병’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된 박영효를, 편집감독엔 전 황성신문 사장 유근과 대한매일신보 총무 겸 편집차장이었던 양기탁의 두 원로를, 주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 영업국장에 이운 등의 진용을 짜는 한편, 2월 1일엔 김성수를 발기인 총대(總代)로 하는 총 자본금 1백만 원의 주식회사 동아일보 설립 허가신청을 내었고, 우리신문, 민족신문을 만든다면서 우리회사, 한국 사람의 회사를 만든다고 민족감정에 호소하면서 전 조선 13도를 편력하여 주식 모집에 나섰던 경성방직회사 창립 당시의 경험을 살려 동아일보 주식 모집에도 같은 방법을 썼다(최민지,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일월서각, 1978, 44~45쪽).

민간지 발행 허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였는데, 동아일보만은 처음부터 ‘민족지’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에는 왜 친일파의 ‘거두’로 널리 알려진 박영효가 ‘추대’되었을까?  <동아일보사사 권1>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갈래의 신문 발행 계획들이 김성수를 중심으로 뭉치어 민족대변지 발행에 뜻을 모았다. 그러나 신문 발행의 허가가 용이하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박영효를 사장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설립할 때, 그 설립 인가가 꽤 까다로워 역시 박영효를 사장으로 하여 겨우 설립인가를 얻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
  그는 개화파의 기수로 이 나라의 근대화 개혁에 선구자였다. 그러나 한일 합병 이후 일본으로부터 후작을 받았고, 조선귀족회장이 되면서 세간에 그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의 그 후의 행적에는 때로 젊은 날을 연상케 하는 일면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였다. (···) 3·1 운동 후 노령(露嶺)의 ‘국민의회’, ‘임시정부’의 조직이 되었을 때, 그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의 중망(衆望)은 아직 두터운 바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김성수는 박영효에 대한 어떤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71~72쪽).

김성수는 호남에서 손꼽히는 대지주로서 일제강점기 초반에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농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이전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김성수의 경력과 친일 행적은 나중에 기술함). 대자본가로서 민족의 독립이나 해방을 위한 운동에 가담할 수 없었던 그가 동아일보 설립을 주도하면서 친일파 ‘거두’인 박영효를 사장으로 옹립한 것이 그의 두터운 ‘중망’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로서 일제가 조선인에게 주던 최고의 작위인 후작을 받고 조선귀족회장 자리에까지 오른 박영효를 사장으로 내세워 총독부를 안심시키면서 동아일보 발행허가를 얻어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2012)에 기록되어 있는 박영효의 친일행적(1907~1920)을 요약해 보겠다.

  1907년 조선과 일본 양국인의 친목을 도모하여 조선을 부식(扶植)할 목적으로 한일동지회(일명 한일친목회)를 조직해 회장에 선출되었다. (···) 1909년 6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설립과 함께 총재에 선임되었다. 신궁봉경회는 단군과 조선의 태조 및 일본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낸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합병 후,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28만원을 받았고, (···) 9월에는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해 1918년 5월까지 재임했다. 조선귀족회는 1911년 4월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이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
  (···) 1912년 2월 권업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9월 도쿄에서 열린 천황 메이지의 장례식에 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 1915년 11월에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8년 10월 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되면서 이사에 임명되어 1930년 10월까지 역임했다. (···) 1919년 5월 경성방직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서 설립과 함께 사장에 취임했으며, (···) 같은 해 12월 조선경제회 회장에,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사장에 임명되어 6월까지 2개월 간 역임했고, 5월에는 노동대회 총재를 맡는 한편, 조선산업은행 발기인으로서 창립위원장을 맡았다(인명편 2권, 60~61쪽).


‘설립자 김성수’의 동아일보 사유화

1920년 4월 창간 이래 오늘날까지 동아일보는 ‘민족지’라고 주장해 왔다. 주식회사 설립 당시에는 ‘민족신문’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동아일보는 완전히 김성수 일가의 ‘족벌회사’로 바뀌어버렸다. 동아일보사는 그 과정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한 적이 없다. 이 문제의 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동아일보사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핵심적 요소이다.

먼저 동아일보사가 기록한 설립 당시 상황을 보기로 하자.

(···) 설립자 김성수는 자기의 모든 사업을 혼자의 실력으로 하여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경성직뉴를 비롯하 여 경성방직이 그랬듯이 동아일보도 주식회사의 형태로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
  신문허가를 신청한 1919년 10월 초에는 이미 주식 모집에 착수,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직접 13도를 두루 순방하면서 동아일보의 창간 취지를 설명함과 아울러 주식 인수를 호소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금을 마련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문이라는 언론사업의 본질을 감안하여 개인 우위 또는 족벌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적어도 동지적 규합, 가능하면 전 민족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민족지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
  (···) 뜨거운 민중의 성원은 주식 모집에 있어서도 그 특색을 보이었다. 동아일보 창간 취지에 공명한 사람들은 주식 인수와 더불어 다시 유지들에게 그 취지를 전하여 주식 모집에 나서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식을 인수한 사람은 각도 유지를 망라 78명에 달하여, 1920년 1월 14일에는 발기인 총회를 가졌는데, 신문 발행허가가 있은 지 8일만의 일이었다. 3월 1일 총독부에 제출한 회사설립 허가신청서에 서명한 (···) 발기인 총대표는 김성수로 되어 있다(<동아일보사사 권1>, 87~89쪽).

그런데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45쪽에 인용되어 있는 <동아일보사사 권1>의 내용은 위의 글보다 훨씬 상세하고 내용도 상당히 다르다. 위의 글이 실린 <동아일보사사 권1>보다 앞서 나온 같은 제목의 책이 있었기 때문일까?

  (···) 뒤에 주식회사가 완료되었을 때의 발기인이 된 55명을 보면 경기 13명, 전남 9명, 전북 15명, 황해 4명, 평남 3명, 그리고 충남, 경북 출신 발기인이 1명으로 되어 있어 전국을 망라한 듯이 보이지만 일반 공모주 모집은 여의치 않아 뒤에 자본금을 70만원으로 줄였음에도 제1회 불입금의 징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사사(社史)>의 기록을 계속 인용해 보면 “일반 공모주는 그만두고라도 발기인 인수주마저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제1회 불입금 25만원의 절반인 십수만 원이 겨우 징수되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그 대부분이 김성수계의 출자에 지나지 않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왕 시작한 신문의 발행을 더 지연시킬 수도 없어서 김성수 보증으로 차입금을 얻어 4월 1일 창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주식 불입을 끝냄으로써 주식회사가 성립된 것은 1921년 9월 14일이었다. 이때 주주는 4백여 명, 발기인 55명으로 동아일보 설립취지서의 발기인 중 계속 남아 있는 사람은 33명에 불과하였다.

언론학자 박지동은 동아일보사가 김성수 일가의 사유물이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아일보는 (···) 당시 조선반도에서는 최대의 지주였던 김성수가 사실상의 경영주가 되어 자본금 1백만 원의 주식회사(1920. 9)로 출발한다.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는 총자본금 70만 원을 1주당 50 원짜리 주식 1,400주로 출발했으며 창업 당시의 주주 수는 412명이었으나 그 후 차츰 줄어들어 해방 시기를 거치면서 주권 실효자를 여러 차례 공고하는 형식으로 주식을 가로채거나 증대시켜 나중에는 아예 김성수 일가의 독점회사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를테면 1962년 당시의 경우 총 주식 수 1만4천여 주 가운데 김성수의 큰아들 김상만이 3천 주, 그의 처 1천 주, 손자 김병관이 2천 주, 작은 손자 김병건 1천5백 주, 김상만의 두 딸들 각각 1천 주씩,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이 4천 주를 소유하였다. 1973년에는 총자본금 21억1천5백만 원에 주식 수는 4백22만 주가 되었고 1990년대에 이르면 윤전시설 장치 한 가지만도 새로 도입된 일본제가 5백억 원이 넘을 정도이니 자산의 총 규모나 발행 부수 150만 부가 벌어들이는 광고수입(한창 때는 광고수입이 하루에 10억 원이 넘는다)과 지대는 가히 천문학적 수자로서 시대와 국가와 정권이 바뀌어도 끄떡없이 승승장구하여 온 반민중 언론사의 전형을 ‘동아’ ‘조선’ 두 신문은 똑똑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언론실증사 1>, 184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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