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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촛불혁명-2020년 21대 총선[기고]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ㆍ경향신문 부국장ㆍ재단 기획편집위원장
  • 관리자
  • 승인 2020.05.1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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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 60주년을 맞는 오늘, 2020년 21대 총선 결과를 반추해 본다. 우리가 지금 60년 전을 반추하는 것은 ‘역사는 현재다’라던 유명 서양 역사학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작업은 얼마 전 돌아가신 이이화 선생의 ‘역사는 미래다’라는 주창이 더 절실해 보인다.

일반론적으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 즉 반민주적 작태에 항의한 학생혁명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1960년 4월 19일 서울대 문리대생의 4·19 제1 선언문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는 첫 구절에 함축돼 있다. 이것이 그해 11월 1일 서울대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을 시작으로 민주운동에 통일운동이 가세한다. 그것이 1961년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으로 확대되고, 1월 15일 민자통의 통일선언서는 4월혁명 ‘진화’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8·15해방의 감격과 환희는 일장의 춘몽인 양 유래 15년 동안 우리는 억압과 빈궁 속에서 허덕였고, 겸하여 민족상잔의 일대 참극까지 겪어 온 것이다. 이는 실정의 누적과 민족자주역량의 결여 등에 기인된 바 크다 할 것이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은 국토가 양단되고 민족이 분열돼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4월혁명의 3대 정신인 민주, 자주, 통일이 완성됐다. 이는 독재로부터 민주, 외세로부터 자주, 분단으로부터 통일이다. 이 4월혁명 정신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그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4월혁명은 여전히 ‘미완의 혁명’일지 모른다.

이 4월혁명 정신을 가장 치열하게 주창한 언론이 <민족일보>이며, 이를 통해 발행인 조용수는 5·16쿠테타 세력에 ‘법살’됐다. 이것이 한국언론사의 가장 큰 필화사건인 민족일보 사건이다. 이는 2002년 진실화해위를 통해, 그리고 2008년 재심을 통해 재규명됐고, 복권됐다.

60년 전 4월혁명 이후 우리는 반동과 후퇴를 반복했지만 쉼 없이 역사의 ‘진전’을 이뤄냈다고 믿는다. 4월혁명은 5·16군사 쿠데타와, 군부 장기 집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독재자의 암살이라는 1979년 10·26을 거치고 다시 서울의 봄을 맞았다. 1980년 12·12 신군부의 반란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지만, 87년 6월항쟁을 거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고, 4월혁명 정신의 부활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권에서 시작된 ‘역사의 역진’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국가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이라는 반민주 행위로 재연되기 시작했다. 정통성 없는 박근혜 정권은 교학사 교과서, 국정교과서 도입이라는 ‘친일 미화, 민주화 혐훼’ 역사 왜곡에 나섰다. 극도의 종북몰이가 시작됐고 급기야 나치 이론을 동원해 정당 해산이라는 반민주적 만행을 저질렀다. 재벌이 그토록 원하던 쉬운 해고와 노동조합 탄압이 노골화됐고, 무엇보다 4월혁명 이념이자 헌법 정신인 평화통일을 훼손하는 작태까지 나왔다.

광주항쟁을 북한 인민군 소행이라는 주장이 서슴없이 방송에 나오자 항의하는 시민이 “두려움은 내가 가지고 가겠다, 일어나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서울역 고가도로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이렇게 권력에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람도 여럿이다. 유신의 설계사 김기춘이 만든 종북, 혐오, 공포사회에 우리는 모두 ‘나는 아니다’라고 벽을 쌓았다. 독일의 목사이자 시인 마르틴 니묄러의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회자됐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도, 사민주의자도, 노동조합원도, 유태인도, 결국 나도 부정하게 됐다. 한 시인은 이 사회를 ‘연대는 증발했고 공포는 전염됐다’고 규정했다.

이런 가운데 소위 식자층, 혹은 지도층은 뭘 했는가. 대학은 돈과 권력을 쫓아 부정입학과 부정학점을 남발했고, 유명 역사학자는 국정교과서를 만들며 역사 왜곡에 앞장섰다.
기성언론은 전쟁 공포조성에 앞장서고 종북몰이에 편승하고, 권력과 자본에 눈치를 봤다. 결국 ‘기레기’ 소리를 들었다.
서울대학병원 의사는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사람을 병사라 우겼다. 정의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는 권력과 재판을 흥정했고, 종교인마저 부당한 공권력을 피해온 신자를 내쫓았다.

4월혁명의 산실이던 대학은 오히려 부패하고, 학생은 세상에 무관심했다. <민족일보>같은 신문은 없었고 대신, 조그만 대안 언론이 ‘쫄지마’를 외쳤다. 야당(민주당)은 독재 권력과 영수회담을 제안하는 등 눈치를 봤다.

이것을 극복한 것이 바로 촛불혁명이다.
그 주역은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교사, 재야 역사학자와 극도의 민주주의 퇴행에 항의한 민주화운동 원로와 평화통일 세력,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에 시달리던 노동자, 신자유주의 농정에 항의하는 농민과 도시 철거민 등이었다. 여기에 세월호 참사에 항의하는 시민이 가세해 이뤄낸 것이 촛불혁명이다.
그래서 4월혁명이 학생혁명이고, 1987년 6월혁명이 정치 엘리트와 넥타이 부대인 화이트칼라의 시민혁명이었다면 촛불혁명은 민중혁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혁명의 주도세력은 달라졌지만 4월혁명정신인 민주·자주·통일의 3대 원칙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그렇게 만든 것이 촛불 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의 요구를 수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촛불의 요구는 노동개악, 성과 퇴출제 폐기, 최저임금 1만원 실현, 위험의 외주화 중단, 쌀 수입중단 대북 쌀 지원, 농산물값 보장, 노점 단속, 강제 퇴거 중단, 장애 등급제 의무부양제 폐지, 청년에 좋은 일자리 제공, 노동법 교육 의무화, 성차별 성폭력으로 안전사회 건설 공안탄압 중지, 국가보안법과 테러방지법 폐지, 역사왜곡 중단, 언론 공정성 실현, 인권차별법 제정,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중단, 세월호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노후 핵발전소 폐기, 재벌책임 강화 등등이다.

그러나 이런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그 분명한 이유는 4월혁명이 그랬듯이 촛불혁명 이후 혁명의 주역인 민중세력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왜일까. 이들에게 민중세력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선거 전문가이며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던 조기숙은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은 2012년처럼 통합진보당 세력과 결별한 것’이라는 주장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도 여전히 촛불혁명의 불을 당긴 ‘민중세력’이 부담스런 존재다. ‘표의 확장성’ 운운하지만 소위 개혁 진보세력 내에도 여전히 편견과 혐오, 심지어 종북몰이가 엄존하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거론하지만 이는 선거법 협상과 총선 연정논의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촛불혁명 주역을 배제한 자리에 ‘먹물’을 잔뜩 먹은 시민운동 세력(쁘띠부르조아)이 국정운영 전면에 나섰다. 잠깐의 소득주도성장이 시행되는가 싶더니 곧 친재벌로 돌아섰다. 이들은 개혁에 대한 면밀한 계획도 없었지만, 의지도 빈약했다. 정책을 실행하는 공무원을 장악할 방법도, 또 용기도 없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안이 전교조 합법화와 인혁당 사건 피해자의 배상금 반환 문제였다. 이는 노동부장관과 국정원장의 조직장악 능력은 물론, 의지를 시험하는 잣대라 생각한다. 결국 이들의 도덕적 폐해가 노정 되면서, 가치의 배분에서 소외되면서 그나마 가세한 시민세력도 서로 이반하고 양분됐다. 이른바 ‘조국사태’가 그것이고, 진중권의 ‘이반’이 그것이다.

202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촛불혁명의 주도세력은 촛불 정부·여당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선거 결과는 유권자인 국민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4월혁명 정신을 가장 잘 계승했다고 자부하던 민중세력이 왜 이런 ‘참담한’ 결과를 접해야 하나. 이것을 규명하는 것이 ‘4월혁명 60주년과 오늘’이라는 주제에 걸맞지 않을까.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위해 개선해야 한다. 이것은 4월혁명의 정신을 완수하기 위한 길이다.

따라서 이 글의 본론은 지금부터다. 하지만 이는 이런 문제의식에 바탕을 둔 치열한 토론의 ‘실마리 글’이 됐으면 한다.

먼저 우리 스스로 촛불혁명의 의미를 축소하고 민중이 주역임을 자부하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한다. 민중세력은 수줍어서인지. 언론 플레이가 서툴러서인지 자신이 한 행위를 당당하게 밝히지 못했다. 김중배 선생도 ‘민교협 세미나에서조차 촛불혁명을 항쟁으로 표현하길래 혁명으로 정정해 줬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일부 인사들의 ‘헌법개정이나, 변혁세력의 교체가 없어 혁명이라 할 수 없다’ 운운은 ‘현학적 먹물들’의 논문 소주제 거리에 불과하다. 촛불혁명 공식백서인 <촛불의 기록> 조차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숨지는 장면이 없을 정도다. 남의 공을 가로채 자신의 공인 양 떠벌리는 세상에 민중세력은 너무 순진했다.

순진했기 때문인지 전략적이지도 못했다.
촛불정부가 ‘알아서 잘 해줄 것’으로 믿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먹물들은 100석이 넘은 ‘폐족세력’이 잔존하고, 여전히 견고한 재벌과 냉전 및 사대주의 세력, 그리고 사학과 연계한 교회의 극렬한 저항을 간과했다. 특히 보수언론은 물론, 생존에 목을 맨 진보언론의 현실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몰랐다기보다 애당초 이를 극복할 의지도 없었다.

여기서 경제민주화나 차별금지법, 자주통일의 문제 등 재벌과 교회, 언론, 미국이라는 거대한 상대가 있는 쟁점은 여기서 논외로 치자. 이는 각론으로 다뤄도 한참을 따져야 할 사안이다. 여기서는 지극히 국내 문제이자, 눈에 보이고 현실적인 정치개혁 문제만 놓고 보자. 헌법개정 작업부터 문제였다. 촛불 주도세력 일부가 헌법개정에 협조했지만 예고된 실패였다. 개헌특위는 허송세월만 했고, 그나마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 권력구조는 4년 중임 미국식 대통령제였다. 기본권 확대조항도 의미 있지만 국민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미국도 문제가 많아 바꾸고 싶어 하는 4년 중임 대통령제를 도입하자는 것은 논리의 빈곤이었다.

사실 우리의 권력구조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닌, ‘제왕적 국회제’다. 입법부가 우리처럼 막강한 헌법적 권한을 가진 나라가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란 공부하지 않은 어설픈 정치학자와 편하게 국회의원들의 말을 옮기는데 열중한 언론 탓이다. 오죽 했으면 노무현 대통령은 ‘연정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박근혜 정권도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못해 시행령 개정으로 정치를 했겠는가. 게다가 우리는 국회선진화법까지 있다.

제도보다 더 큰 문제는 촛불혁명 세력이 헌법개정안을 마련하는 절차는 지극히 형식적이었고, 국민의 중지를 모으는 것이 너무 부실했다. 폐족정당이 엄존해 국회발의조차 못하는 정치 현실을 무시하고 그냥 내던진 격이다. 정치를 시민 운동하듯 착각한 사람들이 면밀한 전략도 없었고, 심하게 표현하면 ‘마지못해 한 쇼’였다.

선거법 개정 과정은 더더욱 문제였다. 촛불혁명의 주역들은 ‘정치개혁 공동행동’으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역시 개헌(내각제)이 전제되지 않고, 우리 정당, 선거제도와 문화에서 역부족이라는 지적을 외면했다. 51대 49가 대결하는 대통령중심에서 대선은 양당제로, 총선은 다당제로 하자는 주장은 현실을 무시한 시민운동적 발상이다.

민주당 본심은 2018년 지방선거 기초의원 선거구획정 개악에서 이미 드러났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인 기초의원 선거구 조정은 특히 3~4인 대선거구를 양당이 나눠 먹는 2인 중선거구로 개악했다. 그러면서 비례 민주주의 운운은 허구였고, 무엇보다 정치개혁공동행동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대로 재연됐고, 촛불세력은 순진(무지)하게 이를 간파하지 못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반대하던 민주당은 공수처법안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일부 수용했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곧 위성 정당을 만들었다. 이는 미래통합당이 먼저여서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앞서 조기숙에서 보듯이 민주당과 촛불 주도 민중세력은 애당초 ‘표’를 계산하는 관점이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정치는 정치 엘리트 충원 및 교체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고 확인하는 선거도 있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정부 여당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책을 통해 실질적 결과물을 국민에게 제시하는 정부 운영이다. 비례 민주주의를 주창한 시민세력이 주장한 것이 정치의 투입, 즉 인푸트라면 정부 여당은 운영과 결과 즉 아웃푸트를 중요하게 여긴다. 시민세력은 안정적 원내 과반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이제 4월혁명의 어제, 오늘을 거쳐 미래를 간략히 언급하자. 이번 21대 총선 과정에서 ‘원조’ 촛불혁명과 사실상 ‘결별’한 것은 앞으로 평가받아야 할 대목이다. 이 선택이 향후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촛불혁명 세력은 순진했고 집권여당은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총선을 앞두고 개혁 진보세력, 나아가 민중세력의 연대와 통합에 힘을 쏟아야 할 원로와 민중진영이 엉뚱한 곳에 정력을 소비했다는 아쉬움이다.

총선 결과 집권 민주당은 180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떤 법안, 정책도 할 수 있다. 더 이상 발목 잡는 야당 탓도 할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하나. 어설프게 도입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폐기하는 것이 옮지만, 다양한 소수의견을 원내에 반영하자는 그 정신은 옳다. 이번 총선에서 국회의석 60%를 싹쓸이한 민주당 득표율은 49.9%에 불과하다. 보수(극우,폐족) 정당도 41.5% 득표를 올렸다.

필자는 남은 10% 정도를 원내에 수렴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기술적 제안을 한다. 현재 47개로 늘어난 비례대표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군소정당에 안배하는 3%의 봉쇄조항을 기술적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정당과 선거는 지방선거-국회의원선거-대통령선거가 연계돼 있고, 풀뿌리부터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지방선거부터 성과를 내는 정당에 국회의원 비례의석 배정에 가점을 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의원 1명을 배출하면 1점, 도의원은 1.5점, 기초단체장 2점, 광역단체장은 3점을 주는 방식이다. 이 점수를 모아 점수화하고, 여기에 국회의원 정당득표율을 더해 군소정당에 비례의석을 배분하면 지방선거가 활성화되고, 총선 때만 정당이 급조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비례민주주의 원칙을 살리고, 4월혁명의 민주정신을 보완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4월혁명의 종국적 이념은 자주와 통일이다.
솔직히 이번 총선은 북한 이슈가 별로 없었다. 코로나19가 선거 이슈 모두를 집어삼킨 탓이다. 일부 개성공단에서 마스크를 생산하자는 주장이 참신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차제에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민주당 지도부는 서둘러 입을 막았다.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자주 통일을 주창하는 민중세력이 불편한 민주당 입장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최소한 7조 고무찬양죄를 폐지하는 것은 박근혜 당도 동의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상 최대 필리버스터를 시행하며 입법을 저지했던 테러방지법 폐지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100억 달러를 주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대선용이지만, 이는 트럼프가 연임되는 한 계속 제기될 사안이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폭발력을 가진 문제로 문재인 정부 최대 시험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문재인 정부는 어떠한 선택을 할까. 적당히 봉합하고 넘어갈 것인가, 단호한 결정을 할 것인가. 이런 가운데 남북관계와 한반도평화경제는 어찌할 것인가.

이런 흐름에서 촛불혁명 세력은 4월혁명의 민주·자주·통일 정신을 어찌 지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개혁·진보세력의 입장과 선택은 어찌해야 하나. 갈라지고 이반된 지금 감정을 다시 고쳐 잡을 수 있을까. 이는 곧 정권 재창출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의 ‘소결론’이고 문제 제기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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