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13일 오후 2시29분 서울동부지방법원 204호 법정 앞에서 그가 내게 말했다. “아이고, 또 오셨어요.” 말 높이가 낮아 ‘또 왔느냐’고 타박하거나 물었다기보다 수인사에 가까웠다. 올해 1월29일 오전 10시3분 같은 법원 304호 법정 앞에서 이미 한 차례 마주쳤던 터라 ‘안녕’보다 ‘또 왔느냐’고 묻는 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긴 했다.

그는 방송통신위원회 박 아무개 국장. 2016년 10월부터 2019년 1월까지 2년4개월 동안 여섯 차례 이어진 뉴스타파의 ‘100억 원대 통신기업 과징금 봐주기 의혹’ 관련 보도와 취재 때문에 기자는 그와 꾸준히 마주쳤다. 박근혜 정부 방통위에서 시작한 만남이 2020년 4월까지 4년째 이어졌고, 재판마저 길어질 낌새여서 좀 더 마주칠 것으로 짚힌다. 하여 기자는 ‘예, 또 왔네요’ 대신 “고생 많습니다”라고 응답해 줬다.

박 국장은 2015년 3월 150억 원(검찰 추산)으로 짐작된 4대 통신기업의 방송통신상품 묶음판매 경품 위법행위 관련 과징금 처분을 가로막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를 샀다. 그와 공동 정범으로 같은 혐의를 산 방통위 김 아무개 과장도 재판에 넘겨졌다.

▲ 2020년 1월29일 오전 10시10분 방송통신위원회 박 아무개 국장과 김 아무개 과장의 직권남용 사건 첫 공판이 열린 서울동부지방법원 304호 법정. 4월13일 오후 2시30분 두 번째 공판은 204호 법정에서 열렸다.

검찰은 1월29일 첫 공판에서 “(박 국장이) LG유플러스 등 사업자에 대한 제재를 무마하기로 마음먹고 2015년 4월 중순 무거운 제재가 예상되는 경품 부분 사실조사가 제재로 나아가지 말게 지시하는 등 관련 사건이 종결되지 않도록 해 (방통위) 소속 공무원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며 “직권남용”이라고 짚었다. 검찰은 김 과장도 “(박 국장과) 공모해, 직권남용해 소속 공무원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며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의 공소 까닭을 들은 서울동부지법 형사2단독 이형주 부장판사가 말했다. “흔한 사건은 아니네요.” 중앙행정기관 고위 공무원이 얽힌 100억 원대 직권남용 혐의였기 때문으로 들렸다. 범죄 여부를 밝혀 달라고 수사를 요청한 기관이 방통위라는 점도 이 판사에게 이채로웠을 것으로 보였다.

박 국장 쪽 변호인은 “(2015년 3월과 4월 중순) 당시에는 (25만 원어치를 넘는 경품 관련) 위법성 기준이 없어 제재할 수 없었고 2015년 8월에야 제재할 수 있었다”며 “이 포인트만 보더라도 무죄”라고 주장했다. 변호인이 사건 흐름과 25만 원어치를 넘는 경품도 처벌한 당시 위법성 기준 실태를 살펴본 뒤 펼친 “무죄” 주장일 텐데, 방통위 자체 감사와 검찰 수사에 따른 직권남용 혐의와는 크게 달랐다. 특히 방통위는, 박 국장과 김 과장이 조사 대상 사업자의 전기통신사업법상 금지 행위를 확인하고도 “시정조치나 과징금 부과 등을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냈다. 2018년 3월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까닭이었다.

김 과장 쪽 변호인은 법정에서 결이 조금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박◯◯ 국장이 (경품 사실조사와 제재 등을) 중단하라는 이야기를 했고, (김 과장은) 그 지시를 따랐을 뿐”이며 “공모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2015년 4월에 박◯◯으로부터 (나온 지시가) 경품 조사 결과를 제재하지 말라는 취지가 아니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조사한 자료 분석 작업을 계속”했으며 “2015년 6월에 제재를 위한 여러 가지 조사를 계속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박 국장의 “중단” 지시가 있었음에도 조사 자료 분석을 이어 나가며 제재할 생각이었다는 뜻. 그의 주장이 진실에 더 가깝다면 주범과 종범으로 갈려 형량이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읽혔다. 한 법조인은 그러나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더라도 공범”이라고 짚었다.

▲ 2020년 4월13일 오후 서울동부지방법원 법정동 앞에서 변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박 아무개 방통위 국장(오른쪽).

박 국장과 김 과장은 직무유기 혐의에선 놓여났다. 검찰이 ‘증거불충분’이라며 ‘혐의 없음’ 처분을 한 것. 박 국장은 강요미수 혐의도 벗었다. 그가 2015년 말부터 2016년 초까지 SK텔레콤·KT·LG유플러스·네이버·다음카카오·SK커뮤니케이션즈에게 가칭 ‘인터넷문화재단’ 출연금을 요구했다는 의혹을 샀는데 ‘증거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처분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이 의혹에 이기주 전 방통위원이 얽혔는지를 밝히려고 2019년 1월16일 이 전 위원의 서울시 내자동 정통행정사사무소를 압수수색했지만 따로 기소하지 않았다.

방통위는 검찰에 ‘수사 요청’만 했기 때문에 박 국장과 김 과장의 ‘직무유기 혐의 없음’ 처분을 두고 항고할 수 없었다. 자체 감사 결과와 동떨어진 검찰 처분서를 손에 쥔 채 항고조차 못하게 되자 방통위 안에서 “애초 중징계한 뒤 고발하지 않은 탓”이라는 지적이 일었다. 이런 흐름에 기대어 자신감을 얻었을까. 법정에 선 두 피고인의 변호인은 “무죄”요, “공모한 사실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위 혐의를 산 채 반성하지 않는 공무원은 기자에게 큰 짐이다.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지켜봐야 하기 때문. 시민에게도 마찬가지다. 박 국장과 김 과장에게 죄가 있고 없음을 가리느라 방통위 간부직 두 자리가 2018년 3월부터 2020년 4월까지 2년 2개월째 흔들렸다. 마지막 판결까지 시간이 더 걸릴 텐데 공무원 사회를 떠받치는 시민 혈세가 그만큼 줄어들 수 있을까. 그럴 리 없겠기에 기자는 꾸준히 짐 질 용의가 있다.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 이글은 2020년 05월 06일(수) 미디어오늘에 게재된 글입니다. 기사원문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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