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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된 지방선거조선일보 대해부 4권 - 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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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4.2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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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7일 4대 지방선거(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 광역 및 기초의회의원 선거)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실시됐다. 광역 및 기초단체장 직선은 1961년에 중단된 이래 34년만의 일로서 지방자치 시대의 본격 부활이었다.

집권 초기 반짝 인기를 누렸던 김영삼 정권은 잇단 실정으로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데다, 그 해 3월 30일 김종필이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련을 만들어 뛰쳐나간 최악의 상황에서 전국 규모의 선거를 맞았다. 그래서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이 컸을 것이다.. 민자당의 선거 전략은 선심성 지역공약 남발, 김대중 때리기에 집중됐다. 막판에는 북한 쌀 보내기가 가세했다.

‘지역주의’에 관해서는 김대중이 선제공격을 가했다. 아태재단 이사장의 신분으로 민주당 전국 유세에 지원에 나선 그는 선거일을 정확히 한 달 앞둔 5월 27일 전남 여수 유세에서 “이번에는 반드시 좋은 정당, 좋은 인물을 내 고장에서 뽑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면서 “지방자치를 앞두고 호남 충청 대구 등이 스스로 뭉치는 것이 패권주의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도 이젠 우리 권리를 찾겠다는 등권주의, 대등한 권리를 갖고 협력하는 지방화시대로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역패권주의’에 맞선 이른바 ‘지역등권주의’였다.


선거 때면 나오는 지역주의와 김대중 비판

조선일보는 애초에는 김대중의 발언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다루다가 여야 간 치열한 논쟁이 붙기 시작하자 5월 31일자 사설(「지역등권론」)을 통해 통해 “지도자들이 되도록 지역주의를 개탄하고 만류해야 함에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들고 나온다는 것은 비록 정직한 리얼리즘일 수는 있어도 가치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라며 “지역등권론이든 지역 할거주의든 또는 지역감정이나 지역 패권주의는 특정지역 내지는 지역연합의 배타적 응집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득세를 도모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다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등권론은 한마디로 여권의 비민주계까지를 염두에 둔 반YS 대연합 전선론의 제창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각제 개헌에 대한 선호를 암시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면서, 정계 은퇴 중인 김대중이 정치의 큰 판을 새로 짜보겠다는 명백한 정치적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공개리에 제창한 것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자민련 총재 김종필은 “지역 특성과 토양에 따라 지역 주민의 자유의지로 정치적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을 지역할거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국민의 자유 선택에 대한 도전이자 부정”이라며 지역등권주의를 옹호했다.


야당 정치인의 정치자금 수수 혐의

김영삼 5월 30일 지방선거 실시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통해 공정한 선거 관리와 엄격한 법 집행 의지를 거듭 천명하고, 선거 분위기를 틈탄 각종 불법 집단행동에도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6월 지방선거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의 참된 일꾼을 뽑는 것이 중요하며, 지방선거가 중앙정치의 축소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번에 반드시 공명선거를 실천하여 선거혁명이 이뤄지도록 하겠다” “선거를 몇 번 다시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불법·타락 선거는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법을 위반한 사람은 다시는 공직선거에 나서지 못할 뿐 아니라 법에 정해진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6월 11일자 1면 머리에 「「6·27 선거운동 돌입 / 내일까지 등록 거리연설 등 16일간 / 2만여 명 출마 최대 6 대 1」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선거 비리 관련 3백16명이 내사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 바로 뒤에는 민주당 의원 김인곤이 지방선거 공천과 관련해 4억 원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는 기사가 따라 붙었다. 그는 “내가 왜 구속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선거를 앞둔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총재 이기택은 그 사건에 대해 “지자제 선거 등록 시작을 앞두고 검찰권을 행사, 정치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야비한 행위”라고 주장했고, 지방을 순방 중이던 아태재단 이사장 김대중도 논평을 통해 “내가 호남에 들어가는 날을 택해 김 의원을 구속한 데 대해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동교동계 일부 의원들은 이번 사건이 호남에서 일어난 점 등을 중시하며 “김 이사장의 최근 행보들에 찬물을 끼얹고 결국 김 이사장의 향후 운신을 막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자민련도 “선거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려는 의도”라고 비난했고 김종필 은 “불법 행위를 지켜보다가 후보 등록 후에 손대는 것을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6월 11일자에 「정치인과 검은 돈」이라는 사설을 싣고 야당의 반발을 비판했다.

한 야당 의원이 공천 장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혐의가 공판을 거쳐 입증될 경우 그것은 우리 정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척결하는 데 하나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 이번에도 구속된 의원은 야당 탄압이라 소리쳤다는 이야기이고, 야당 대변인은 수사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 정계는 문제를 그런 식으로만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행은 정당 보스들과 중간 보스들의 정계 독과점 체제가 만들어낸 것이며, 역으로 그러한 돈의 흐름이 그 같은 독과점 체제를 지속시켜준 측면도 크다. 그러기에 정계는 정치와 관련된 검은 돈의 흐름이 거론되기만 하면 엇비슷이 이야기를 하는 척하다가 어물어물 뚜껑을 닫곤 했다. 피차 찔리는 데가 있기 때문에 서로 봐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사직당국 역시 수사를 하면서도 위의 눈치를 살피거나 적당한 선에서 멈춘다는 의혹을 받곤 했다.
이 점에서 이번 사건은 선거 국면에서의 검은 돈관계의 오랜 관행에 대한 무한 척결의 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강조돼야 할 것은 이러한 사정이 행여 정치적이란 오해를 살 여지를 극소화해야 하겠다는 점이다. (…) 정부는 정치인에 대한 비리 척결에 엄정한 보편성과 객관성의 기준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보편성과 객관성의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는 사족을 붙였지만 그건 그야말로 구색 맞추기처럼 보인다. 사설 자체가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 돈거래가 횡행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왜 하필 선거를 목전에 둔 때, 야당 정치인만 구속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정치활동 못 한다?

김대중은 정치권에서 은퇴한 상황이었지만 지방선거 초반 국면부터 민주당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조선일보 6월 13일자 1면 배꼽에는 「김대중 씨 연설 정치 쟁점화 / 여야, 선거법 위반 공방/ 선관위 유권해석 의뢰: 민자 / 당원자격 문제 안 된다: 민주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자 김대중은 14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지원을 위한 유세에 참여하겠다고 공식으로 발표했다. 그는 “선거 유세는 정계 은퇴 당시 밝혔던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당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는 범위 내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서, “요즘 논의되고 있는 정계 복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민자당은 “지자제선거를 정계 복귀를 위한 발판으로 악용하려는 김 이사장의 기도는 한국의 정치 발전을 후퇴시키는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규정했다. 중앙선관위는 김대중의 호남지역 연쇄 순회 강연이 사실상 선거운동 목적이었다고 해석하고 자제와 공명선거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그에게 보냈다.

조선일보는 6월 16일자 사설(「은퇴와 복귀 사이」)을 통해 “그의 처신에서 우리는 한 나라의 대통령에 도전했던 원로 정치인으로서의 행적을 읽을 수가 없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사람들은 김 이사장 측의 말게임을 관전하는데 싫증이 나고 있”으니 “복귀를 하겠으면 복귀를 선언하든지, 은퇴를 하겠으면 뒤에 물러서 있든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진로를 알아듣게 설명하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6월 17일자 4면 기사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타날 ‘DJ 변수’를 따지면서 “‘김대중 변수’가 호남, 영남, 충청권의 지역정서를 굳히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거의 없다. 민자·민주·자민련의 후보와 무소속 후보까지 영향권 안에 빨려들어 갈 전망이다”라면서 김대중 변수의 작용 여하에 따라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물론 지방선거 후의 정국 전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지금까지는 TV를 비롯한 미디어 유세를 중심으로 후보 3인 간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져 왔었다. 그러나 양김 대결 구도로 바뀌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정책·인물을 위주로 한 대결의 성격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대신 정당·양김·계파·지역성 등의 요소가 추가될 가능성이 크다.
선거전문가들은 그 같은 요소들로 양김구 도가 1백% 짜이면 현행 대통령 중심제 유지와 세대 교체를 실현하려는 집권세력과,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내각제 개헌 등 정계 개편을 시도하려는 김대중 씨 측의 대결이 시선을 모을 것으로 전망한다. 자연 무소속의 박찬종 후보는 관심권에서 멀어지고 정원식·조순 대결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설명도 곁들인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런 식의 논쟁과 대립에 유권자 특히, 20~30대가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면 양김 대결 구도가 1백% 짜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무소속의 박 후보가 오히려 반사적 이득을 보는 양상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어느 쪽의 구도가 형성될 지는 김대중 씨의 서울시장 선거 구상, 이에 대한 민자당의 대응, 그리고 유권자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

대통령 김영삼은 6월 26일자 〈타임〉지 인터뷰에서 ‘세대교체론’을 꺼내 김대중 공격에 가담했다. 조선일보는 27일자 사설(「김 대통령의 세대교체론」)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세대교체론은 정치적으로 계산된 그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 면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살 것으로 본다”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단연코 새 세대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임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고 한 김 대통령의 타임지 회견은 그 구체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에 신선한 바람과 분위기를 몰고 올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그것은 김 대통령의 처음 발언은 아니며 전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얘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번의 언급은 그 의지의 강도에 있어, 그것의 시기적 적절성에 있어 신선감과 함께 진전된 느낌을 주고 있다.
(…)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제 김 대통령을 비롯한 원로 세대들이 차세대의 등장을 방해 내지 방관하지 말고 오히려 북돋아 주고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성의 원로들이 권위주의적으로 군림하는 한, 우리의 차세대는 결코 그 벽을 뚫거나 넘을 수 없었던 것이 우리 정치의 고질적 환경이었다는 것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의 정치판에는 (…) 40여년을 풍미했던 이름들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40여년을 보아왔던 그 얼굴들이 또 다시 우리의 시선을 강압적으로 덮고 있다. 자못 우리는 과거로의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들도 그런 현상에 무감각 무기력해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차세대는 클 수가 없다. 게다가 바로 원로들이 또 다시 권력을 잡겠다고 자신들을 앞세운다면 차세대의 등장은 요원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런 뜻에서 김 대통령의 이번 타임지 회견 내용을 의미 있게 주시하며 앞으로 차세대의 진출을 돕고 키워주는 정치적 여건 조성에 따른 결단과 지도가 있을 것으로 기대해 마지않는다.

‘세대교체론’은 선거를 이틀 앞둔 6월 25일자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이 3김 3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류근일은 ‘국민의 죄’까지 운운하며 3김을 싸잡아 비판했다. 류근일은 1987년에도 그랬고 1992년에도 그랬고 도대체 국민이 무슨 죄가 있다고 똑같은 공연을 몇 십년씩이나 계속해서 봐야 하냐면서 유권자들은 “3김 세력 중에서 하나를 고를 것인가, 아니면 3김이냐 비3김이냐의 선택을 할 것인가부터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김 중 김영삼은 이미 대통령에 올랐기 때문에 이 칼럼은 결과적으로 나머지 두 김을 불공평하게 공격한 셈이었다.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과 조선일보의 혼란

6월 들어 선거에 의외의 변수가 생겼다. 정부가 6월 6일 한국통신 노조 간부들이 농성 중이던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 종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애초 조선일보는 6월 3일자 사설(「농성과 종교와 공권력」)에서 종교 관계자들이 노조 피신자들의 불법 혐의를 일방적으로 보호해 주는 것보다는, 순법의 길을 걷도록 권유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라고 촉구하면서 “종교단체 마당에서 농성만 했다 하면 구속영장 하나 제대로 집행하기가 쉽지 않은 국가 공권력이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법이라면 아예 없는 편이 나으며, 그 대신 어느 집단이든 힘과 밀어붙이기와 버티기, 고함, 주장, 몸싸움, 세싸움으로 판가름 내는 세상이 차라리 정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끝내는 종교기관으로 피신하면 되는 것인가”고 개탄한 바 있다.

경찰은 조선일보의 주문대로 6일 오전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해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연행한 데 이어 7일 밤에는 시위 도중 피신한 대학생을 붙잡기 위해 또 다시 명동성당 입구 주차장의 성모마리아상 앞까지 진입해 신부 및 신도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최고기구인 사제평의회가 9일 정부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데 이어 추기경 김수환이 11일 미사강론을 통해 정부를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 1백77개 성당은 그날 정오미사에서 일제히 명동성당에 대한 공권력 투입 경위를 알리면서 천주교의 입장을 신자들에게 설명했다.

정부와 여당은 큰 고민에 빠졌다.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였다. 6월 14일자 사설(「유감과 불가피성」)은 “경찰이 종교단체의 의사를 어기고 성소에 들어가 강제로 사람을 끌어내는 사태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로 시작되었다. 며칠 전 “종교단체 마당에서 농성만 했다 하면 구속영장 하나 제대로 집행하기가 쉽지 않은 국가 공권력이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고 질타하던 논조와 180도 달라진 것이었다.

그 사설은 “국민 각자가 종교적 열정에 못지않게 냉철한 이성으로 이 사태를 판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면서 “경찰의 투입은 원론적으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구체적 현실적으로는 국법의 집행을 위해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설은 “당국은 종교인들의 자존심과 분노 허탈감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종교인들 역시 공권력을 집행해야 하는 정부의 고충을 이해해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많은 국민의 솔직한 바람일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쌀 ‘깜짝쇼’와 공약 남발

김영삼 정권은 선거 막판에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어떤 선거에서도 ‘북풍’이 불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에는 살벌한 북풍이 아니라 부드러운 북풍, 즉 북한에 쌀 보내기 깜짝쇼였다. 사실 정권이 처음부터 거센 북풍을 기획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 〈워싱턴 타임스〉 1995년 5월 29일자는 “한국의 여당인 민자당이 정치적 곤경에 처하자 최근 발생한 북한군의 휴전선 침입을 두고 지나치게 휴전선 일대에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며 “게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은 한국군 지도자들에게 북한군의 침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도록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쌀 지원은 미국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민들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다만 국내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또는 김영삼의 통치기법이 늘 그러했듯 깜짝쇼 형식으로 비밀리에 추진된 것이 문제였다. 조선일보 6월 20일자 ‘기자수첩’(「쌀 깜짝쇼 유감」)은 북한이 남북한 당국 간 회담을 수용하기로 했다는 외신이 전해지면서 재경원에서 벌어진 일대 소동을 소개한 뒤 재경원과 청와대, 통일원의 비밀을 지키려는 입막음, 거짓말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기자수첩’은 “쌀 지원 문제가 합의된 것으로 전해진 지금, 과연 쌀문제를 이처럼 깜짝쇼 하듯 비밀외교로 처리했어야만 했는지 의구심이 든다”면서 “쌀문제는 이미 지난 5월 26일 나웅배 부총리가 공식적으로 지원의사를 밝혔던 사안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수용 의사가 있을 경우 이를 대내외에 알리고 공개 협의를 갖는 것이 합리적인 수순이다”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6월 22일자 1면 기사(「쌀 15만t 무상 지원: 1차분 / 남북 북경합의문 서명 정부 발표 / 추가지원 회담 7월 개최 / 금명 통일장관회의 종합 대책 / 당국, 합의문 전문 오늘 공개 검토」)로 남북이 쌀 지원에 합의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합의된 15만t 중 2천t이 어젯밤 동해항으로 철야 수송됐으며 오늘부터 선적해 24일 출항하기로 했다는 별도 소식을 전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쌀 나눠먹기」)에서 북한의 태도와 협상 과정에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그것은 일단 북한 동포의 먹고사는 문제, 즉 동포의 생존의 문제로 보고 그 큰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이번 쌀 제공과 관련해서 어떤 즉각적인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 것이 쌀 지원의 효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라고 대승적 입장을 보였다. “북한이 기피하는 것이 급속한 전면 개방이라면 당분간은 북의 경제적 상황 변화에만 남북 대화의 초점을 맞추는 방법도 바람직할 것이다. 북한도 이제는 표면상의 정치논리를 그대로 견지한다 해도 이면으로는 탈정치적인 경제논리로 임하는 자세로 나왔으면 한다. 한마디로 주체와 혁명의 논리에서 밥의 논리로 서서히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김영삼은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동포애 차원에서 북한에 지원할 돈이 있다”면서 “외국 쌀을 사서라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6월 23일자 조선일보 1면에는 이 소식 외에도 「북송 쌀값 1천억 외상 / 정부, 5만t 내달까지 인도」「북에 30만~50만t 유상 지원: 일 정부, 공식 결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날 발표된 조선일보·한국갤럽조사 여론조사 결과는 “쌀 협상 너무 서둘렀다” 50%, “무상 지원 결정 잘한 일” 59.2%, “원산지 표시 반영 실패 잘못” 58%, “추가지원 북 태도 변화 따라” 74%로 나왔다.

김영삼 정권이 워낙 드세게 치고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민주당이 “쌀을 수입해서 제공하겠다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일 지경이었다. 조선일보 6월 25일자 사설(「쌀과 정상회담(?)」)조차 김영삼 정권이 쌀 지원을 통해 너무 여러 가지를 원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염려를 할 지경이었다.

(…) 우성호도 돌아오고, 남북 정상회담도 성사되면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호의에 대해 북이 어떤 상응 조치를 보여줄지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한 발 앞서 국민의 기대를 부풀려 놓았다가 충족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 잘못하면 인도적으로 쌀을 주겠다고 해놓고 정상회담 흥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되면 결코 좋은 모양도 아니다.
또 쌀 실은 배가 동해항을 떠날 때는 국무총리가 현지에 가서 환송하는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너무 지나친 감상이며 오버액션이다. 이러한 일들이 어찌 조용히 쌀을 받으려는 북한의 요망과, 쌀로써 남북 화해의 길을 터보려는 우리의 희망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정부가 불필요하게 북한의 신경을 자극하거나, 행여라도 국민의 오해를 살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기 바란다. 대북 쌀 제공을 비밀협상으로 합의하고, 조용히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 정부의 홍보가 일의 진행에 앞서 가면 불신을 받기 쉽다는 점을 유의했으면 한다.

1995년 6·27 지방선거는 ‘금권’이 비교적 잠잠했던 대신 대통령과 집권당의 지역 공약이 난무했다. 그 해의 각종 시설공사 중 70%를 상반기에 발주하기로 했고, ‘백제권 종합개발계획’이 갑자기 살아났으며, 영동국제공항과 동서고속전철 건설 계획, 고속철도 대전 구간 지하화, 서해안 고속도로 당진~홍성 간 조기 착공 등이 제시됐다.

조선일보는 선거 하루 전인 6월 26일자 사설(「선거와 경제」)을 통해 그런 ‘선심성 정책’을 준엄하게 나무랐다. 이번 선거에서도 “경제의 기본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후보자는 물론 “정부가 앞장서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선심성 정책을 마구 발표하는 구태를 되풀이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같이 정책의 일관성을 무너뜨려 정부의 신뢰성에 금이 가게 하고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 선거 때가 되면 정치권의 요구가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경제부처가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 정치권의 압력이나 요구로 선심성 정책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취한 일련의 선심성 조치들은 대개 정치권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인 것이다. 정치권은 당초부터 경제의 건전한 발전보다는 표를 염두에 둔 정치적 이해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지방선거에서조차 정치권의 압력에 이렇게 쉽게 굴복한다면 앞으로 연이어 치러질 총선과 대통령선거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선거의 중요성이 크면 클수록 정치권의 자제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경제관료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각오와 소신이 한층 필요한 시점이다. 선거로 경제가 흐트러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대단히 훌륭한 내용이기는 한데 왜 선거 하루 전에야 이런 사설이 나왔을까? 3월 혹은 4월쯤에 그런 사설을 써 놓고 지속적으로 선심성 공약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언론의 역할 아닌가.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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