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92년부터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송과 팀스피릿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단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북한은 공개적으로 핵 문제 전제조건 철회와 이인모 송환이 선행돼야만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1992년 7월 10일자 사설(「고향 방문은 볼모일 수 없다」)을 통해 북한의 요구는 “저들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라기보다 고향 방문 사업을 깨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고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인모 노인의 송환에 관해서도 (…) 북측은 그것을 대남 교란 전략의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다”면서 “남북 간의 인도적인 사업을 상호주의에서 추진하지 않고, 이인모 노인만을 송환 했을 때, 과연 그것이 이 사업을 확대 발전시키고 나아가 남북 간의 전반적인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 말이다”라고 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남북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 가운데는 이인모 노인에 못지않게 애절하고, 더 억울한 사정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많”고 “남북관계에서도 기다릴 필요가 있을 때는 기다려보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총리 회담)에서도 이인모 송환문제가 주요 의제였다. 북측은 회담이 진행되면서 면회소 설치를 먼저 논의한 다음 이인모 송환을 협의하고 그 다음에 노부모 방문단 문제를 협의하자는 융통성 있는 제안을 해왔고 남측은 동진호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훈령 조작 사건’이 일어나 회의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조선일보는 9월 26일자 사설(「대북정책 헷갈린다」)에서 예의 상호주의를 다시 주장했다. “우리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보이고 있는 신축성은 (…) 그저 북측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무엇인가 한 건 하려니까 양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만 준다”는 것이었다. 그 사설은 고향 방문 사업이 북측의 약속 파기로 무산되었지만,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규명에는 별 관심 없이 북측이 요구하는 이인모 노인 송환문제에 검토를 시사하면서 역시 북측이 갈망하는 경제 교류 문제에서 북측의 주장에 따라 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남북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신축성, 양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상호적이어야 한다. 우리만 인심 좋게 하다가는 남북문제의 본질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인모 송환문제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급속히 추진되었다. 무엇보다 신임 통일부총리가 한완상이 그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정부는 1993년 3월 11일 “새 정부 출범에 따른 민족화합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우리가 주도한다는 통치권자의 결단에서 이인모 씨의 방북을 허용한다”며 “이인모 씨의 건강과 희망을 고려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조건 없이 방북을 허용하되 방북 통로는 판문점을 활용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3월 12일자 사설(「이인모 씨 송환과 남북관계」)설에서 이인모 송환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것대로 평가받을 소지도 있고, 북한 측이 그를 대남 선전에 이용해 보았자 그것으로 지금 북한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경제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받아들인다면서도 “다만 정부가 그를 돌려보냈을 때 야기될 수 있는 앞뒤의 사정을 얼마나 깊이 검토했는지를 밝히지 않는 것이 극히 유감”이라고 밝혔다.

(…) 남북 간에는 이인모 씨보다도 더 딱한 사정에 놓여 있는 이산가족들도 많다.(…) 왜 저들은 우리의 이산가족을 외면하는데 우리만 그래야 하느냐는 문제도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 북한의 문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측이 유연한 자세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사정도 있었으나, 우리의 대북정책이 정립되지 못하여 의견 분열을 보인 것이 북한 측에 의해 이용당한 경우도 없지 않다.
(…) 비록 우리 측이 이번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다 해도 이에 대해 상응 조처가 무엇인지는 북한 측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를 얻고도 내놓는 것 없이 또 다음 것만 얻으려 한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새 정부가 전진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해도 북한 측이 이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계속 얼어붙을 것이다

그런데 ‘이인모 북송 결정’ 발표가 나오자마자 3월 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나왔다. 조선일보는 14일자에 실은 「예사로운 때가 아니다」라는 통단사설을 통해 “이인모 노인을 송환시켜주면 북도 태도를 바꿀 것으로 낙관했다면 정부의 그런 단세포적 감상주의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뒤통수를 얻어맞고서야 깨달았을 것이다”라고 뒤늦게 비분강개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인모 북송과 북한의 NPT 탈퇴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도 그랬다.

(…) 북한이 핵확산 금지조약을 탈퇴하고 IAEA의 핵 사찰을 전면 거부한 것은 한국 내에서 상반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한편에서는 북의 조치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취해진 방어적인 성격으로 북한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북의 막다른 행동이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쪽으로 발전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 북한의 행동은 계산된 각오를 거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제는 저들의 계산 방식이 우리 또는 서방사회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 북한 역시 다른 세계관, 가치관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때로 편리하게 외면해왔다. 그들의 체제는 곧 삶의 유일한 방식이며 그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다는 유사종교적 신념에 살고 있는 것이다. (…) 북한은 북한 식의 합리주의와 이성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 미국은 북한과의 게임에서 진퇴양난일 경우 다른 나라의 반란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등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북이 이미 각오한대로 우선 외교적, 경제적 압력이며 궁극적으로 군사적 제재일 것이다. (…)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보다 약소국의 핵반란을 저지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고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미국의 이른바 세계전략적 발상의 대두도 강력히 경계한다. 우리는 동시에 궁극적인 수단으로 한국에 대한 군사적 보복, 또는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북한의 군사 강경노선의 압도에 전율한다. 미국과 북한의 두 강경노선이 충돌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지혜와 노력과 안목이 김영삼 정부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국민대로 이런 상황까지를 예견하면서 슬기롭고 신중하게 정부를 유도하는 성숙함을 보일 때가 왔다. (…) 많은 국민들, 또 일부 낙관적인 정부인사, 지식인들은 아무런 근거 없이 북한이 이제 군사적으로 우리의 적수가 아니며 북한도 곧 경제의 중요성에 눈을 돌리게 되면 군사력에의 의존을 버리게 될 것으로 막연히 믿어왔다.
예를 들어 바로 그런 막연한 인식 반 기대 반의 심경이 오늘날 북한으로 하여금 핵 사찰에 대한 우리 쪽의 심각성을 잘못 읽게 해 결국 조약의 탈퇴라는 강경수를 두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인모 노인을 송환시켜주면 북도 태도를 바꿀 것으로 낙관했다면 정부의 그런 단세포적 감상주의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뒤통수를 얻어맞고서야 깨달았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탓한 국민들의 ‘낭만주의적 대북관’에 대한 짜증은 이인모가 3월 19일 북송된 뒤 20일자에 실린 「이인모 현상 유감」이라는 사설에 유감없이 나타났다.

이인모 노인이 북으로 갔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할 말은 많았지만 언급을 유보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공연히 그러다가 우리가 혹시 한 고령 노환자의 북송에 너무 인색하게 굴지 않나 하는 오해를 사기 싫어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인모 노인의 북송 자체에 대해서는 보내도 별 문제 아닌 것으로 치부해 왔다. 그리고 정부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남북 대화의 한 쟁점을 해소하려 애쓴 점도 가급적 이해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 이 노인이 가고난 이 시점에서는 우리도 하고 싶던 말을 해야겠다. 한마디로 우스꽝스럽고 메스꺼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이 노인을 둘러싼 그의 주변 분위기가 무슨 쟁취라도 한 듯이 나오는 게 눈에 거슬렸다. 이 노인이 남에 있게 된 발단은 어디까지나 그가 남침 대열에 끼여 있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납치를 해 왔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는 북의 전쟁 도발에 대해 책임의 일단을 느껴야 마땅한데 한사코 그러지를 않았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남쪽의 일부 그룹은 그런 그를 무슨 희생자인 양, 그리고 그의 남침 행위를 처벌한 우리 측의 국가 형벌권을 마치 무슨 양심수 억류인 양 왜곡해서 분위기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 노인의 북송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죄는 컸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국가의 큰 은전을 베풀어 주라” 는 식이 돼야 옳은 것인데, 일부의 공기는 마치 “분단의 희생자요 통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니까 당연히 보내라”는 식으로 풍겼다.
이 노인을 환송한 사람들 역시 만세를 부르고 한반도기인지 뭣인지를 흔들며, 전쟁 범죄자 아닌 통일 전사의 개선이라도 기리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참으로 경우를 뒤집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개혁인사 몰아내기-통일부총리 한완상의 경우

김영삼 정부에서 첫 통일부총리를 맡은 한완상에 대해 조선일보는 1993년 2월 27일자 4면에 「유신 시절 반독재 투쟁 앞장」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간단한 프로필을 실었다.

유신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현실 참여 교수. 75년 시국선언문 낭독으로 해직된 이후 10·26 다음해인 80년 복직됐다가 재차 해직당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차례 연행·감금의 시련을 겪었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관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이래 김영삼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지난 13·14대 대선 과정에서 핵심 자문 역할을 수행.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현재 교수들이 주축이 된 현대교회(서울 압구정동)를 이끌고 있으며 김 대통령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대표기도를 할 정도.

3월 6일 단행된 대사면 조치로 감옥 문을 나선 목사 문익환은 “한완상 박사가 통일원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한완상은 3월 8일 주한 미대사 대리 레이먼드 버거트의 예방을 받고 북한에 대한 핵 사찰 문제 등 한반도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북한이 IAEA 사찰을 합리적으로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국·미국·일본이 공동 노력을 벌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대대변인 최병보가 밝혔다. 한편 최병보는 그날 일부 언론의 ‘이인모  송환 검토 보도’와 관련된 논평을 발표하면서 “이는 사실이 아니며 정부 내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3월 11일자 사설(「핵과 우방의 의혹」)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새 정부의 대북한 핵정책이 감상주의에서 비롯됐다가 다시 기조를 잡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느낌이다.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앞으로 다른 기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이를 주도할 것이라고 다짐한 한완상 신임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은 대북한 핵정책에 관해 유연한 발언을 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한 공조체제를 유지해온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의혹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노명 남북 핵통제 공동위원회 남측 위원장이 새 정부의 대북 핵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미·일을 방문 중에 있고, 레이먼드 버거트 주한 미대리대사가 한완상 부총리를 방문하여 새삼 핵 사찰 문제를 논의 하는 일련의 움직임에서 우리 역시 새 정부의 대북 핵정책에 대해 궁금증과 함께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일이 통일정책 분야의 최고 책임자가 상황을 미처 종합적으로 파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기주의로 소견을 피력함으로써 빚어진 것이라면, 새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적지 않게 손상시키는 것이다. (···) 새 정부의 통일정책 최고책임자는 우리의 대북 핵정책에 대한 우방의 의혹을 해소하는 데 노력하기 바란다. 그것이 북한 핵 위협을 제거하는 전제이다.

하지만 정부는 3월 11일 한완상 주재로 통일장관 전략회의를 열고 이인모 를 무조건 빠른 시일 내에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다음날인 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던 것이. 정국은 북한 핵문제로 소란해졌다.

한완상은 “북한이 NPT에 복귀하고, IAEA의 특별사찰을 수락하며 남북 상호 사찰을 받아들여 핵 투명성을 보장해야 남북 관계의 획기적 발전이 있을 것” “북한이 6월 12일까지 NPT에 복귀하면 남북 경협에서 대북 유화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업인 방북 등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의 정책기조는 핵 우선이 아니라 민족 우선이었다.

5월에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한 특사 교환을 다시 주장했다. 권위 있는 특사들에 의해 최고위급의 중대한 뜻이 전달될 수 있으므로 비핵화에 관한 실천적 방도를 토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면서 양측 대표는 부총리급으로 하자고 했다. 한완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6월 1일자 사설(「왜 특정 특사를 고집하나」)에서 강한 의구심을 보였다.

(…) 남북 고위급회담의 대표는 쌍방의 총리이다. 어떻게 총리보다도 북한이 제의하는 부총리급의 특사가 최고위급의 중대한 뜻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이 한정한 특사의 범위는 우리 측에서는 한 사람밖에 없다. 북한은 우리 측의 특사를 지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측의 한완상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을 염두에 두고 특사 교환을 주장하는 것은 남북문제에 남다른 시각을 가진 한 부총리가 문민정부에서 새로운 대화 방식을 추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점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한 부총리가 특사를 맡는다고 상정해보자. 그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을 것을 우려, 남북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펴는 데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전반적인 남북관계를 관장할 그가 심리적으로라도 어떤 제약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설사 그가 원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보낼 수가 없는 입장이 되고 만다. 그가 어떤 성과를 가져온다 해도 그의 신뢰도에는 많은 흠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사 교환을 고집하는 것은 우리 측의 다양한 통일 논의나 남북정책을 교란시키려는 술책이 작용한 소치가 아닌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부터 한완상에 대한 조선일보의 의혹과 문제 제기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7월 11일자 ‘김대중 칼럼’(「조령조개 / 한 부총리의 통일론」)은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6일 평통자문회의 6기 출범식에서 감상적 통일론이나 통일지상주의, 무조건적인 조기통일 주장에 분명한 쐐기를 박았다. 그는 ‘내실 없는 통일을 감상적으로 바라서는 안 된다’며 자유 없는 통일, 번영 없는 통일, 민족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지 못하는 통일의 문제성을 지적했다”로 서두를 열었다.

(…) 이것을 지켜보면서 궁금한 것은 한완상 통일원장관의 입장이었다. 김 대통령의 통일론은 대통령 자신의 뜻인가, 아니면 누구의 발상인가? 거기에는 한 부총리의 주장이 반영된 것인가, 아니면 한 부총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각이 투영된 것인가?
한 부총리는 “민족은 특정체제나 사상보다 오래 가게 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수 천년 동안의 동질성이 강조된다”면서 분단은 민족을 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가 갈라놓은 것이며 이제 탈냉전의 시대에서 남북한은 체제의 아집에서 벗어나 서로 끌어안아야 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의 논리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같이 살아야한다”는 것으로 단순화돼 있다.
김 대통령이 말한 감상적 통일론이 누구를,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아마도 한 부총리의 주장이 바로 나이브한 감상적 통일론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남북 분단은 애당초부터 세계 차원의 사상과 체제의 문제였지 국내적 차원의 민족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그것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김 대통령과 한 부총리의 통일관이나 남북문제에 관한 철학이 같은 선상의 것이냐, 아니면 서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냐는 점이다. 만일 한 부총리가 김 대통령의 뜻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좋다. 그 경우도 명백한 공개적 언급은 있어야 옳다. 만일 김 대통령의 통일관이 자신의 것과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본인이 생각한다면 한 부총리는 스스로 그의 거취를 분명히 해야 한다. 대통령과 통일관이 다른 통일원장관은 이미 임명권자로부터 불신임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국면 전환이나 분위기 쇄신은 우선 사람을 바꾸고 정치의 메뉴 를 바꾸는 일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로 끝을 맺으면서 취임 5개월 만에  통일부총리 한완상의 거취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한완상은 “통일·안보 문제가 잘 돼가고 있는데도 한국의 언론들이 재야·학자 출신인 자신을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또는 환상주의자로 보고 있다”고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재야 진보적 인사나 보수인사들을 두루 만나 범국민적 통일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도 언론은 재야인사들과 만난 사실만 보도해 왔고, 보수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뉴스가 안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대중 칼럼’이 대통령과 자신의 통일관이 다르니 물러나라고 요구한 것을 거론하면서 “통일정책은 대통령이 확정해 준 것인데 (김 주필이)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다시 조선일보의 ‘한완상 때리기’가 시작됐다. 7월 21일자 사설( 「북의 핵 이용과 시간 벌기」)은 “미국·북한 간의 제2단계 고위급회담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방미 중인 한완상 통일원장관은 ‘군사제재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의 협상 위치를 도와주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전략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앞질러 한계를 설정하는 우를 한국의 통일원장관이 범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공격했다.

조선일보는 이튿날인 22일자 사설(「한 부총리의 우파론」)에서도 한완상이 미국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으며 ‘김대중 칼럼’을 떠받쳤다.

한 부총리는 학문을 깊이 한 인사로서 결코 아무 것도 모르는 환상주의자는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그런 평을 들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이인모 노인 북송 결정과, 북한 핵문제 발생 직전의 그의 일련의 통일 관련 발언들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노인의 북송은 그를 위한 개인적 차원에서의 인도주의 실천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북이란 집단이 그런 인도주의에 감동이라도 하는 사람들인가. 감동은커녕 그들은 그것을 우리 측의 굴복이었다는 식으로 선전해대며 체제 공고화에 실컷 우려먹었다. 납북인사들의 생사 확인조차 해주지 않고 이산가족의 편지 왕래조차 외면하는 북이기에, 한 부총리가 그런 북을 상대로 갑자기 “북은 약자의 처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포용력 있게 대해야 한다”는 식으로 낙관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게 아닌데” 하며 의아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부총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남쪽의 냉전적 논자들을 경계하고 북의 인권문제 거론은 안 된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통일문제를 다분히 민족 내부 문제로서 보고싶어하는 정서(물론 국제적 성격을 전적으로 무시한 바는 아니겠지만)를 간간이 드러냈다. 그러나 특히 요즘에 와서 진짜 냉전론자는 누구인가. 바로 입만 열었다 하면 남조선 도당 운운 하며 해묵은 대남 비방을 일삼는 북이야말로 구태의연한 냉전론자들인데, 한 부총리는 어째서 그런 북을 경계하자는 이 쪽의 경각심과 반론만을 자꾸 냉전적이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김일성의 노선이 변하지 않는 한 이 쪽의 대북 불신은 없어질 수 없고, 그것을 냉전적이라 한다면 달게 감수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북의 인권문제는 한 부총리의 생각과는 달리 당연히 세계적인 쟁점이 돼야 한다. 그리고 통일문제는 갈수록 국제적인 연관체계의 틀 안에서 조명돼야 하지 민족 내부 문제로 보다가는 큰 오판의 소지가 있다. 이래서 한 부총리의 견해에 의아심을 표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며 그런 이견을 “우파라서 그렇다”고 딱 잘라 가른다면 그러면 한 부총리는 무슨 파인가. 우파론은 한 부총리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래도 잘한 말 같지가 않다.

‘대북 유화파’ 한완상에 대한 조선일보의 공격은 집요했다. 10월 19일자 사설(「스스로를 묶는 발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완상 부총리는 18일 민족통일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 “대북정책이 북한의 고립을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다. 북한이 헤어날 수 없는 궁지에 처할 경우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염려하고 있는 우리는 한 부총리의 견해를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의 선택(option) 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한 부총리가 이 시기에 세미나에 나가 그러한 견해를 피력할 필요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진다. 지금은 핵문제를 둘러싸고 북한이 국제적으로 매우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다. 마음먹은 견해나 정책을 성급하게 밝히는 것은 곧 이쪽의 선택 범위를 제약하는 결과를 빚는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채찍과 당근이 함께 구사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내외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정부 당국자가 당근만을 들고 나온다면 운신의 폭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민족의 사활이 걸려 있는 안보문제에서 앞질러 스스로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새 정부에서는 안보 4인방이 모두 학자 출신이다. 각자 일가견을 갖고 있겠지만 재직 중에는 말을 아꼈으면 한다. 세미나에 나가 주제 발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꼭 할 말이 있으면 신중한 검토를 거친 후에 시기와 장소를 골라 함으로써 오히려 정책 구사의 폭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조선일보의 집요한 공세에도 한완상은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지켜 나갔다. 10월 26일 관훈클럽 토론에서도 그는 “정부는 채찍과 당근의 정책을 다 쓰고 있다. 통일원은 그 성격상 남북관계 개선에 치중할 수밖에 없어 유화적인 입장이며 안보를 다루는 안기부 같은 곳은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유화책이라도 강경책보다는 바람직할 수 있는 것이다. 나중에 강경책을 쓸 명분을 위해서도 그렇다면서 “재야 때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정책은 현재적 상황에서 가장 유효한 것을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28일 국회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도 “정부는 북한 핵에 대해 강온 양면정책을 동시에 쓰고 있으며 유화와 강경정책이 동일한 효과를 낸다고 판단될 때는 유화책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12월 개각설이 흘러나오자 조선일보는 한완상이 포함된 외교안보팀에 아주 박한 평가를 내렸다. 국방장관을 뺀 외교·안보 분야의 요직 전체가 학자 출신으로 구성됐으며 그들은 학문적 성장배경에 따라 강·온으로 나뉘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해왔고 10개월여의 시험기간이 끝난 지금,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한 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특히 “북한 핵문제는 이들 외교·안보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안이었다. 3월 이후 현 외교·안보팀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총력을 다해왔지만, 아직도 해결의 전망을 찾기 힘든 상태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한때 유임설이 나돌던 한완상이 결국 개각 명단에 포함되지 못하고 이영덕이 새 통일부총리로 임명되었다. 조선일보는 큰 시름을 덜은 듯 「대북정책 팀웍 효과 겨냥 / 강·온 갈등 씻고 다양한 접근 가능성」이라는 해설기사를 내보냈다.

(…) 이영덕(67) 명지대 총장의 통일부총리 기용은 외교 안보 진영에 대한 상징적·정치적 효과를 노린 부분수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총리의 기용은 현 외교 안보팀에 대한 외부의 색깔 시비라는 부담을 씻어내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우리 대북정책의 한 정서적 기반이 실향의식라고 볼 때, 평남 강서 출신에 이산가족이기도 한 신임 이 부총리의 등장은 그것만으로도 불필요한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안보정책의 수립과 추진 과정에서 어쩌면 불가피하기까지 한 강·온 논쟁이 그간 우리 사회에서는 자주 이념 대립으로 번지곤 했다. 특히 한 부총리가 통일정책의 책임을 맡게 되면서, 정부는 과감한 대북 접근을 기획하거나 아니면 원칙 있는 강경을 고집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또 학자 출신들의 실무 경험 부족에 따른 기성 관료 조직과의 마찰을 감안할 때, 이 부총리의 기용에는 교총 회장과 공직자윤리위 위원장 등 다양한 행정 경험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총리의 기용은 더이상 통일·대북정책을 소모적 논쟁에 휘말리도록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대북정책의 보수 회귀로 단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인 것 같다. 오히려 외교·안보 정책의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본격적이고 다양한 대북정책 추진을 앞둔 사전 포석이라는 적극적 해석도 있다.

누가 강·온 논쟁을 이념 대립으로 번지게 하고 통일·대북정책을 소모적 논쟁에 휘말리도록 했는지에 대해 조선일보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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