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총선은 부정선거 백화점이었다. 그 해 말 실시될 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고 정부와 여당은 온갖 선심공약을 남발했고, 할 수 있는 모든 부정선거 수법을 동원했다.

한맥회 사건

조선일보 3월 20일자 31면(사회면)에는 「검찰, 민자 한맥회 조사 / 보고서 진위 여부 확인 나서」라는 기사가 5단으로 실렸다. 서울지검 공안1부가 민자당 외곽 청년조직인 한맥청년회 파문과 관련해 그 단체의 운영 실태에 대한 내사를 벌이는 한편, 유세장에 대학생들을 동원하고 일당을 주었다는 상황보고서의 진위 여부 등에 대한 사실 확인 조사에 나섰다는 것이다. 한맥청년회가 민자당의 정상적인 공개 청년조직인지 아니면 정당과 관련 없는 용역조직인지 등을 가리기 위해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라는 것도 붙였다.

그런데 같은 날짜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은 「유세장 ‘바람잡이’ 비난 여론 일당 대학생 줄었다 / 역효과 우려해 자진 해산/ 부녀회원·가족으로 충당 / 대학가 “양심 팔지 말자” 자제 촉구 줄이어」였다. 아르바이트 대학생 동원 파문이 확대되면서 출마자들이 일당을 주던 대학생 조직을 해체하거나 동원을 억제했고, 각 정당 행사장과 유세장에서 대학생들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수사를 하든 말든, 이미 여당이 일당을 주고 대학생들을 동원해 왔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날짜 조선일보의 사회면은 중요도로 볼 때 머리기사와 5단 기사가 자리를 바꾸어야 마땅했다. “검찰이 보고서 진위 여부 확인에 나섰다”는 기사 내용도 사안의 엄중함에 비춰 너무 약하 표현이었다.

조선일보의 같은 날짜 1면 머리기사는「‘탈·불법’ 수집 총력: 상호 감시 강화 / 여야, 흑색선전 공세 폭로전 / 물증 확보 막판 무더기 고발 계획」이었다. 그 나름으로  여야 간 균형을 맞추려는 기사로 보이지만 이미 탈·불법이나 흑색선전을 주도하는 것이 여당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 상황에서 오히려 여당에 유리한 ‘물타기 보도’로 보인다.

더구나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학생들까지 오염시키나」)과 ‘기자수첩’(「한맥회 수사」)을 통해 돈을 주고 대학생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하는 불법 행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사설은 “종반 선거전에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민자당의 외곽 학생단체인 한맥회 문제가 (…) 새삼 우리의 관심대상이 되는 것은 민자당의 외곽지원 단체의 차원을 넘어 선거 현장에 직접 동원되기 때문이다. (…) 학생들이 동원될 때마다 전해지는 대로 2, 3만원의 일당을 받았다면 이는 선거운동은 등록된 선거운동원만이 할 수 있도록 한 국회의원 선거법에 저촉된다. (…) 그런데 검찰이 국민당의 두잇이벤트 때는 큰 대어라도 낚은 듯이 떠들어 댔다가 이번 민자당의 한맥회 사건에는 쉬쉬하듯 우물거리고 있음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자수첩’도 “돈 주고 대학생을 산 것은 국민당뿐 만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두잇이벤트 소속 대학생들이 민자당 외곽 조직인 한맥청년회에도 간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불똥은 여당으로 옮겨 붙었다. 아직 불법성 여부는 단정할 수 없지만 민자당 후보의 유세장이나 정당 연설회에 한맥회 학생들이 대거 동원됐다는 사실은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검찰의 수사 여부를 사회면 한 귀퉁이에 몰아넣을 것이 아니라 1면 머리에 세워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어야 한다. 조선일보는 의견 표시는 제대로 하는 듯 하면서 전체적인 편집에서 한맥회 사건에 쉬쉬하듯 우물거린 것이다.

안기부원 흑색선전-92년판 ‘댓글사건’

3월 21일 0시 30분쯤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 그 지역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 홍사덕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유인물을 뿌리던 수상한 인물 4명이 그의 선거운동원들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현장에서 안기부 직원들임이 밝혀졌으나 조선일보는 국가 정보기관이 개입한 중대한 범죄에 관한 기사를 「안기부원이 흑색선전물 / 비방·선심 등 막판 혼탁 극심」이라는 모호한 제목을 붙여 사회면 구석에 5단으로 쳐박았다.

이튿날 안기부원들은 구속되었다. 조선일보는 22일자 사설(「안기부원들의 흑색 개입」)을 통해 “안전기획부 직원의 흑색 유인물 배포 사건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수 십년 후퇴시키고 있다. (…) 특이한 위치에 있는 안기부의 직원이 선거운동에서도 가장 비열하고 저급 행위인 흑색 유인물 배포에 관여했다”고 개탄했다. 그럼에도 안기부원 구속 기사는 여전히 사회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파장이 커져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온 선거에 영향을 미칠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투표 하루 전인 23일자에도「검찰, 안기부 직원 흑색선전물 조사 진전 없어」라는 기사는 사회면 구석에 5단으로 밀려난 반면, 선거운동 분위기를 전하는 「연극·노래·사인회: 휴일 유세장 법석 / 유권자는 시들 행락객 급증 유원지 길목 관심 끌기 안간힘」이라는 기사가 머리에 큼지막하게 올랐다. 울산 민주당원이 자기 쪽 후보를 비방하는 데 항의하는 상대 운동원을 차로 치어 중상을 입혔다는 기사는 같은 5단이지만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제목을 뽑아 훨씬 눈에 잘 띄었다.

군 부재자 부정투표 사건

3월 22일자 조선일보 지면에서 특기할 만한 편집은 현역 육군 중위가 기자회견을 열어 “군대 내 부재자투표에서 공개투표를 강요했다”고 폭로한 기사(「“공개투표 강요”: 육군중위 기자회견」)를  제2사회면에 2단으로 내보낸 것이다.

육군 모 부대 소속 이지문(24) 중위가 22일 오후 9시 30분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부 군 부재자 투표과정에서 공개투표를 통해 여당을 지지하도록 강요하는 등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중위는 “지난 18일부터 3일간 실시된 모 부대 부재자 투표에서 5·7·8 중대 중대장이 기표소에서 사병들에게 직접 1번을 찍도록 요구했으며, 본부 중대의 경우 중대 인사계가 보는 앞에서 공개투표를 실시했다”고 말했다.
이 중위는 또 부재자투표에 앞서 연대장과 대대장이 간부 및 사병들에게 여당을 지지하도록 교육, 탈법·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투표 당일인 3월 24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은「막판 혼탁 ‘절정’: 투표 하루 전 / “돈 뿌린다” 고발 사태 / 운동원끼리 곳곳 난투극 / 비방 난무 돌연 반상회도」를 머리기사로 세우고, 「군 부재자투표 파문 확산 / 국방부 “대부분 허위”-공선협 대책위 구성」, 「상부 지시 여부 수사: 안기부원 사건 / 검찰 독자행동 설득력 부족 인쇄업자 추궁」을 각각 5단으로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또 전날 제2사회면 2단에 불과했던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에 대해 「군 부재자투표 부정의 공방」이라는 사설을 실었는데, 역시 진실 여부의 ‘공방’에 초점을 맞추면서 실제 부정이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었다.

그 사설은 이 중위의 폭로 내용을 군 당국이 전면 부인하고 있으므로 “이 시점에서 이 중위의 폭로 내용의 진실 여부에 어떤 결론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투표일을 하루 앞둔 중요한 시점에 또다시 양심선언과 허위 조작이 교차하는 선거 풍토가 우리의 민주주의 역량을 약화시키고 있음을 개탄해마지 않는다”고 했다. 사설은 “왜 선거 때만 되면 군의 부재자투표와 관련된 고발과 폭로들이 등장하는가”라고 물으면서 “그것은 군이 아직도 국민의 철저한 신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인 동시에 “만일에 이번의 경우가 사실을 조작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황을 상당히 왜곡한 것이라면, 이제 이런 폭로는 선거 전략의 일환이며 이런 풍토는 마땅히 개선돼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지문의 폭로가 (야당) 선거 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가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 방준식이 「기관 한몫주의」라는 제목으로 같은 날짜 지면에 올린 ‘기자수첩’이 훨씬 더 사건의 본질에 가깝다. ‘기자수첩’은 “아직은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알 길은 없다. (…) 자신의 장래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으면서도 양심선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군 부정선거 사례를 구체적으로 밝힌 이 중위. 치욕스럽다면서 이 중위의 주장을 전면 부인한 10여명의 젊은 장교들. 국민들의 마음은 그래서 더욱 착잡하다. 왜 이런 논란이 이는가”라고 묻고 있다. ‘기자수첩’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군은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 (…) 이 중위의 양심선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공명을 다짐한 군의 지휘부가 개입됐을 리 없고 군 자신이 우려했던 과잉 충성의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만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사태는 결코 간단치 않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군 조직상의 문제가 더욱 부각돼 버리고 마는 자가당착에 부딪치는 것이다. (…) 선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기관 한몫주의의 부작용을 목격하고 있다. 선거 때인데 우리도, 우리 회사도, 우리 기관도 한몫 거들어야할 텐데 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부담감에서 출발한 충성심들이 거듭 악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이번 사태가 군까지 기관 한몫주의의 대열에 가담한 증거가 아니기를 기대하고, 믿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갖기 위한 전제는 무엇보다 중립적 단체에 의해 이 중위의 양심선언이 어떤 압력도 없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강조해둔다.

군 부정선거 여부에 대해 여전히 불필요하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사설보  다는 훨씬 더 진상에 가까운 논평이다.

선거가 끝나자 부정선거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가 돌변했다. 철저히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3월 25일자 사설(「재선거를 하는 한이 있어도」)이 대표적 보기이다.

(…) 선거사범들이 어느 것이나 용납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중에도 금품 살포나 선거폭력, 흑색선전 같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나 시민의식을 얕잡아본 추악한 부정, 탈법 양상은 국민 일반의 공분을 촉발하고 있는 만큼 철저히 다스려야겠다.
(…)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이미 2명의 후보가 구속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과연 지금 적발된 1백27명의 후보들에게 법의 형평 적용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들의 범법 사실이 과연 선거 후 엄정하게 집행될 수 있을 것인가가 역시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악성의 범법 행위를 해도 일단 선거에서 이기고 나서 처벌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저간의 인식이다.
특히 지난번 여당이 관련된 한맥회 사건이라든가, 안기부 직원들의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의 수사 과정이 지지부진인 것은 선거에 끼칠 영향을 감안한 수사당국의 노골적인 직무유기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이들 사건이 선거 후에까지도 적당히 세월만 끌다가 유야무야로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과연 있는가.
우리는 이들 사건이 국민이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엄정하고 공평하게 또 신속히 처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선거법에는 벌금 1백만 원 이상의 유죄가 확정될 경우 후보자는 피선거권이 박탈된다고 한다. 선거사범으로 적발된 1백여명 의 후보가 모두 피선거권이 박탈되어 선거를 다시 치르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생기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선거사범의 처리는 확실하고 철저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의 불법, 탈법선거 양상을 이번 기회에 뿌리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전의 미온적인 보도 태도에 비추어 보면, 선거가 끝난 지 단 하루 만에 부정 사례에 대한 엄격한 수사를 촉구하며 “법의 형평 적용이 의심스럽다”는 조선일보의 느닷없는 호통이 우습기까지 하다. 조선일보는 그 후에도 3월 28일자 사설(「안기부·한맥회 유야무야 안 돼」)과 29일자 사설(「이 중위 면담 왜 꺼리나」), 그리고 4월 2일자 사설(「부재자 시비 철저히 가려야」)을 통해, 선거 기간에 터져나왔던 각종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엄정 수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실제 그 사건들에 대한 수사 진행 속보는 사회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일보의 요란한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였다.

4월 15일자 ‘기자수첩’에 김종래가 올린 글(「더기 발표」)이 저간의 사정을 비교적 잘 알려준다.

한기용 씨 등 안기부 직원 4명 기소, 통신사령부 예하 부대의 일부 대리투표 사실 확인, 이지문 중위 기소유예 처분, 현대상선의 송윤재·박세용 두 전 사장 구속. 14대 총선을 치르면서 또는 치른 후 돌출한 이른바 3대 의혹 사건. 검찰과 국방부는 어제(14일) 하루 동안 그 사건들에 대한 수사 결과와 결정을 이처럼 한 바구니 쏟아부었다.
언론은 언론이고, 독자 쪽의 느낌은 어땠을까. 신문을 펼쳐드는 순간 그동안의 갈증과 허기가 냉수 마신 가슴처럼 씻어지고 채워졌을까.
이 땅에 권위주의의 서슬이 시퍼렇던 3·4·5공 시절. 그때도 중차대한 현안만 나타났다 하면 마른 하늘에서 천둥치듯 북의 동향에서부터 영세민 생계대책 등 각종 대책, 해묵은 수사 결과 발표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던 국민들도 나중에는 척하면 삼척인 줄 알 만한 홍보전문가가 돼버렸다. (…) 없었던 일로 넘기자니 너무 불거진 문제들이고, 그렇다고 따가운 시선을 혼자서만 받는 것은 절대 피하고 싶고 .
당국자의 이런 답답한 속마음들이 무더기 발표 소동을 낳았겠거니. 이게 역대 정권에 의해 홍보전문가로 양성돼 버린 국민들의 짐작일 것이다. 그동안 숨 죽여 지켜봤던 국민이 건진 거라곤 발표에 앞서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덧붙인 검찰의 한마디 정도일까.
선거에서 표시된 국민의 심판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집권세력. 그 집권세력 안에서 지겹도록 대권 잔치의 비린 냄새를 풍기고 있는 정치권과, 공권력의 ‘공’자가 벗겨져 나간 공권력. 따로 도는 맷돌의 틈바구니에서, 갈증과 허기 속에서 정부의 발표 총공세를 지켜보며 국민들은 뭘 생각하고 있을까. 물으나 마나다.
그들은 말보다 몇 배 무서운 표로 심판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맥회 사건은 4월 8일 회장 등 2명 구속되고, 군 부재자 투표 사건은 중위 이지문이 5월 2일 이등병으로 불명예에 강제 전역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안기부 직원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은 연루자 4명이 구속된 지 두 달 만인 5월 22일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남으로써 흐지부지 끝났다. 그 과정에서 조선일보 등 언론은 군 발표와 검찰 수사, 재판 결과를 축소 보도하며 방관자로서 간혹 ‘지당한’ 논평만 남발했을 뿐 진지하게 심층 취재에 나서거나 기획기사로 진상을 적극 파헤치거나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언론 본연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검찰과 법원을 꾸짖는 손가락은 먼저 제 자신을 향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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