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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숨은 주역들〈안형준 방송기자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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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1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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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라디오) 뉴스 시간이지만, 본사 사정으로 뉴스를 보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오늘 오전 9시 자유언론실천백서를 발표하고,
해임된 동료 20여 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신문, 방송 뉴스와 잡지의 제작을 거부했습니다.
우리들은 외부세력의 압력으로 자유언론이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고 단정하고, 제작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한현수 아나운서는 뉴스 대신 제작 거부를 결의한 기자들이 작성한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한 시간 뒤인 12시, 사측은 라디오 뉴스를 서울 구로구 오류동 송신소로 옮겨 변칙 진행했습니다. 이는 당시 방송관련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뉴스가 진행됐어야 할 본사 스튜디오에는 최남경 아나운서가 마이크 앞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 사이에 방송하는 콜사인을 언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최 아나운서는 준비된 콜사인 대신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방금 보내드린 정오뉴스는 기자들의 뜻과는 다른, 일부 간부 사원들에 의해 제작됐음을 알려드립니다.”

1975년 3월 12일 동아일보사 4층 동아방송(DBS)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동아방송은 당시 수도권 청취율 1위를 달리던 라디오 방송입니다. 송신소에서 진행된 해적방송과 고준환 프로듀서의 해임에 항의하며, 프로듀서와 아나운서, 엔지니어 50명이 제작 거부에 돌입했습니다. 제작 거부는 농성과 함께 진행됐습니다. 송신팀과 녹음팀, 보수팀으로 구성된 엔지니어 십여 명도 조를 나눠 방송 장비를 지키는 불침번을 서며 동참했습니다. 해적방송이 진행되는 오류동 송신소 항의 방문은 엔지니어들이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모두 ‘동아방송 자유언론실천총회’ 지도부에 일괄 사표를 제출한 상태였습니다.

방송국 총인원 70명 중 단 한 명만 제작에 참여했고, 50명이 거부, 19명은 ‘미상’이었다고 당시를 정리한 ‘동아투위 실록, 자유언론 40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자들 중심인 편집국의 제작 거부 인원이 43명, 뉴스부 24명, 출판국 20명이었습니다. 방송국 직원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고, 참가 비율에서도 출판국(77%)에 이어 71%로 두 번째로 높습니다.

방송국의 파업 참가율이 높았던 것은 누적된 방송 탄압 때문으로 보입니다.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동아일보사 바로 뒤 광화문 우체국에 분소를 차리고, 통제의 강도를 높여 왔습니다. “인기 프로그램인 ‘정계야화’의 재방송을 중지시키고, 코미디나 드라마의 박수 소리마저 문제를 삼았다”고 해직 프로듀서인 윤활식 전 동아투위 위원장은 밝혔습니다.​

시사평론 프로그램인 ‘앵무새’ 사건은 동아방송 직원들의 인내심을 소진하게 했습니다. ‘앵무새’는 언론자유가 짓밟힌 당시 상황에 대한 자조적 의미도 담겨 있는데요. 당시 대통령의 일제 강점기 창씨명을 방송에 사용하고, 한일협정 반대 데모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웠습니다. 담당 프로듀서 김영효 씨 등 동아방송 관계자 5명, 동아일보 편집국 2명이 내란 선동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몇 년이 지나 무죄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동료들의 억울한 구속에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로 일하던 방송작가와 성우들도 동아투위의 제작 거부에 뜻을 같이했습니다. 인기 프로 ‘정계야화’의 김기팔 씨 등 4명의 작가와 이완호, 김종성 씨 등 성우 27명도 생계보다 자유언론을 선택했습니다. 김기팔 작가는 몇 년 뒤 윤활식 프로듀서를 찾아와 ‘다시 작품을 써야 할 것 같아 승낙을 받으러 왔다’며 양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제작 거부로 미운털이 박힌 성우들은 빈대떡 장사, 복덕방 거간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가야 했습니다.​

신문과 방송이 모두 제작 거부에 들어간 둘째 날인 13일부터는 23명의 기자가 단식에 합류했습니다. 물과 소금으로 버티면서 자유언론에 대한 의지를 다져갔지만, 상황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모든 전화선이 다 끊겼어요!
2백여 명의 괴한들이 건물 통로를 모두 차단했어요!”

유선전화가 유일한 통신 수단이던 1975년 3월 16일, 라디오 스튜디오. 날씨 뉴스를 확인하기 위해 관상대(기상청)로 연결된 유선전화만 남은 상황에서, 황윤미 아나운서가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관상대 담당자에게 평소처럼 전화를 건 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전화선이 끊기고 외부와 통제된 상황을 전달한 것입니다. 관상대 담당자는 기독교 방송(CBS)에 전화를 걸어 송화구와 수화기를 엇갈리게 맞대는 방법으로 황 아나운서가 CBS 측에 단식 농성이 진행 중인 동아방송에 곧 물리력이 투입될 상황임을 알렸습니다. 잠시 후, 농성장 소식은 CBS 전파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뉴스를 접한 재야인사와 정치인, 그리고 양심적 시민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인 3월 17일 새벽 3시 15분, 강력한 서치라이트 불빛 속에 각목과 해머, 산소용접기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공무국 벽을 부수고 침입했습니다. 휘두른 각목에 프로듀서가 쓰러지고, 아나운서는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갔습니다. 정체불명의 구사대에 의해 쫓겨난 동아투위 농성 이야기입니다. 다음날, 외신은 ‘동아일보 농성사원 축출’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해직된 113명 중 34명이 방송국 소속이었습니다. 피디가 23명, 아나운서가 11명입니다. 마치 MBC의 2012년 파업 뒤 변칙적으로 운영된 유배교육, 속칭 ‘신천교육대’의 구성을 떠올리게하는 대목입니다.

여섯 달 동안 복직 투쟁을 하던 해직자들은 파탄 난 가정경제를 살리기 위해 각자도생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해직자 중 상당수는 독재정권의 방해로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없었고, 일부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영화 ‘1987’에서 박종철 열사의 물고문 치사 사건을 밝혀낸 것도 동아투위 이부영(김의성 역) 대변인이었습니다. ​

70대가 막내 역할을 해야 하는 동아투위가 최근 충무로의 뉴스타파 건물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분들은 70년대의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기를 원하십니다. 또 현재 독재정권 하에서 탄압받는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언론인들을 격려하고 돕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지난해 발간된 ‘분투하는 아시아의 자유언론, 우리는 말하고 싶다’라는 현장르포도 이 계획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재정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남은 시간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동아투위는 일터에서 쫓겨난 3월 17일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매달 17일에 만납니다. 참가 인원이 점점 줄어드는 동아투위 점심 회동, 부디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 이글은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언론 사람' 11월호에 게재된 [손거울] 코너의 글입니다. 원문 보기 클릭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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