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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 실천’은 영원한 과제‘1974년 10월 24일’은 오늘도 살아 있다
[동아투위 자유언론실천선언 45주년 기념 성명]
  • 관리자
  • 승인 2019.10.2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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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꼭 45년 전인 1974년 10월 24일 오전 10시쯤, 서울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건물 3층의 편집국에 10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 한국 언론 역사에 굵직한 글씨로 기록될 ‘사건’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집회를 주도한 조직은 한국기자협회(기협) 동아일보사 분회였다. 그 시기는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쿠데타로 민주정부를 뒤엎은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온 나라를 공포정치로 위협하고 있던 때였다. 그 어떤 신문도 방송도 박정희나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에 대해 단 한 마디 비평도 할 수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 당시 영향력, 판매부수, 광고 수입 등 모든 부문에서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던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크게 자부심을 갖고 있던 젊은 기자들은 주권자들의 편에 서서 독재자를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오후 2시께 신문 제작(당시 석간)이 끝나면 회사 부근의 무교동이나 다동 등지의 술집에 끼리끼리 모여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우리가 이러려고 언론인이 되었단 말인가!’

기협 동아일보사 분회 대표 장윤환(문화부 기자)과 총무 홍종민(편집부 기자)이 편집국 한 가운데 시멘트 기둥에 ‘자유언론 실천선언’이라는 족자를 걸고 집회 시작을 알리자 장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홍종민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2)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3)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우 그가 귀사 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홍종민이 선언문 낭독을 마치자 편집국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글이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총회 참석자들은 열렬히 손뼉을 쳤다. 젊은 기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끼리 모여 선언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번에야말로 선언의 내용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결의를 내외에 밝힌다는 뜻에서, 오늘 기자총회가 열렸다는 사실과 자유언론실천선언 전문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을 통해 보도하도록 하자.” 또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회사가 보도를 거부할 수도 있으니 보도가 나갈 때까지 제작을 보류하자.” 참가자들은 만장일치로 그 제안을 채택했다.

당시 전국의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에는 ‘기관원’이라고 불리는 중앙정보부 또는 보안사의 간부가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문제의 기사나 논설’을 빼거나 수정하라고 제작 책임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을 거부하면 ‘남산’이라는 별칭을 가진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기협 분회 집행부는 기자총회 관련 기사와 ‘자유언론실천선언’ 전문을 동아일보 1면에 5단 이상으로, 동아방송에는 신문에 상응하는 비중으로 보도하기로 결정하고 편집국장 송건호를 통해 기자총회의 결의 내용을 경영진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경영진은 “편집국장이 기자들을 통제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보도를 거부했다.

10월 24일자 신문 1판이 나와야 하는 오후 1시에도 동아일보는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후 1시부터는 동아방송 뉴스도 중단됐다. 기자들과 경영진의 대립은 그날 밤 10시가 넘도록 지속됐다. 경영진은 선언문 내용 중 ‘기관원 출입 거부’ 부분을 삭제하자고 집행부에 제안했다. 집행부는 즉각 거부하면서 선언문을 ‘최소한 1면 3단’으로 축소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경영진은 밤 10시 40분쯤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자들은 곧바로 신문 제작에 들어갔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동아일보 10월 24일자는 이튿날 오전 1시에 편집국에 전해졌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봉기’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언론자유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다.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제작 간부들의 해묵은 공포증과 피해의식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그것을 ‘연탄가스 중독증’이라고 불렀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기협 동아일보사 분회는 ‘자유언론 실천 의지를 더욱 질서 있게, 효율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10월 26일 각 부서에서 뽑힌 30여명의 기자로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실천특위)’를 구성하고 그 안에 상임위원회를 두었다.

11월 11일 실천특위가 보도 금기의 벽을 깨트리기로 작정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왔다. 그날 저녁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천주교 교회들에서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는데, 실천특위는 그 기사의 중요성이 아주 크다고 판단하고 동아일보 1면이나 7면(사회면) 머리에 올려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경영진이 그 요구를 거부하자 기자들은 곧장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그날 동아일보는 1948년 8월 해방 이후 처음으로 휴간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자유언론의 길로 들어서서 한국 사회에서 ‘금기’로 되어 있던 사항들, 곧 야당의 정부 비판, 대학생들의 시위와 집회, 종교계의 인권 회복 운동, 진보적 문인들의 활동 등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자 박정희 정권이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낄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 탄압으로 드러났다. 12월 16일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오던 한 회사 간부가 광고국에 전화를 걸고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갔다. 그날부터 급히 줄어들기 시작한 광고는 1975년 1월 25일에는 광고 탄압 이전의 2%로 떨어졌다. 무려 98%가 떨어진 것이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던 독자들과 청취자들은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격려광고’로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1975년 1월 11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동아일보 1면에 광고 형식으로 실은 ‘언론 탄압에 즈음한 호소문’은 격려광고의 홍수를 터뜨리는 단초가 되었다.

존립이 위태로워졌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한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사 경영진과 야합해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1975년 3월 10일 장윤환·박지동 기자를 해임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기자들과 동아방송 직원들이 제작을 거부하고 편집국과 방송국에서 농성 또는 단식을 계속하자 3월 17일 새벽 3시 조금 지난 시각에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든 정체불명의 폭력배 100여명이 난입해 그들을 거리로 밀어냈다. 바로 그날 오후에 동아일보,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서 일하던 150여명이 결성한 조직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회사의 회유 또는 생계 위협 등을 이유로 복귀했고, 113명이 동아투위 위원으로 남아 다시는 동아일보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이후 반세기 가까운 기간에 옥고, 생활고, 난치병 등으로 30명이 유명을 달리해, 현재 동아투위 생존자 명단에 올라 있는 인원은 83명이다. 같은 회사에서 해직당한 언론 종사자들이 44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자유언론실천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실 역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 아닐까?

동아투위가 결성되던 1975년 3월에 비하면, 현재 한국의 언론 상황은 복잡하고도 미묘하다. 대다수 매체가 겉으로는 언론자유를 누리는 듯이 보이지만 진정한 ‘자유언론’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이라고는 회원들의 자발적 성금으로 운영되는 <뉴스타파>(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와 몇몇 ‘1인 매체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에 시작된 촛불혁명은 세계의 근대적 혁명들 가운데 가장 평화롭고 명예로운 모범적 사례이다. 단 한 건의 폭력도 구속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요즈음 대다수 언론매체들은 촛불혁명의 이념과는 정반대 길로 치닫고 있다. 조선·중앙·동아일보가 그 선두에 서 있음은 물론이다. ‘1974년 10월 24일’은 오늘도 살아 있다. 더 많은 언론인들과 매체들이 자유언론 실천이라는 대의를 성실하게 지켜야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것이다.

2019년 10월 24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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