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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의 대중조작과 3S 정책조선일보 대해부 4권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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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1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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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순치용 놀자판 ‘국풍 81’

전두환 정권은 반인륜적 탄압과 함께 국민의 정치적 비판의식을 순치시키기 위한 대중조작의 방법으로 각종 이벤트와 사업을 개발해 실시했다. ‘국풍 81’이  대표적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것만 보아도 언론을 통한 여론조작에  주요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 허문도를 중심으로 추진된 것으로 알려진 ‘국풍 81’은 일본의 가미카제(神風)에서 이름을 본 딴 것이었다. ‘전국대학생 민속국악 큰 잔치’라는 부제로 열린 ‘국풍 81’은 개막행사와 민속제, 전통예술제, 젊은이 가요제, 연극제, 국풍장사 씨름판, 팔도굿, 남사당놀이 등의 행사를 벌였고, 여의도광장을 중심으로 열린 ‘팔도 명산물시장’은 엄청난 인파를 모았다. 조선일보는 5월 28일자 7면에 ‘국풍 81’을 홍보하는 기사를 싣고, 2면 사설에서는 그것을 ‘일종의 문화운동’으로 포장했다.

겨레의 흥과 멋, 신바람을 일으킬 ‘국풍 81’이 오늘 개막된다. 4박5일의 낮과 밤을 축제로 펼칠 국풍행사는 오전 10시 여의도광장 중앙에 세워진 상징탑 장승백이 앞에서 위액을 물리치는 지신밟기로 시작된다.
오전 10시 20분에는 행사기간 중 별미의 전당이 될 ‘8도 미락정’이 개관되고, 11시에는 ‘8도 명산물시장’이 문을 열어 5일간의 손님맞이를 시작한다. 오후 4시부터는 국풍의 멋과 흥을 시민에게 선보일 ‘국풍행렬’이 옛 서울고교 앞에서 광화문을 돌아 서울역까지 행진한다.
(…) 오후 6시 30분에는 ‘국풍 81’ 행사를 축하하는 5대의 헬기가 5색 연막을 뿌리며 여의도 상공을 비행, 경축 분위기를 돋우고 동시에 제2무대에서는 올해의 대풍을 기원하는 ‘풍년 기원제’가 벌어진다. (…) 전야제에는 인기 연예인의 춤과 노래, 행사에 참가한 민속놀이팀의 흥겨운 한마당이 여의도광장을 화려하게 채색한다. (…) 국풍의 첫 밤은 8시 30분부터 20분간의 불꽃놀이로 장식된다(5월 28일자 7면 기사).

‘국풍 81’이 28일 개막된다. 행사의 내용들은 이미 익히 듣던 바이나 그것을 이런 대형기획으로 페스티벌화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 같다. 개별적인 무대나 장소에서 하나의 공연물로서만 선보이던 각종 전통예술과 민속놀이를 ‘국풍 81’이란 통합된 무브먼트로 가동한 셈이다. 까닭에 이 행사의 전체상은 단순히 종합 민속예술제라기보다는, 일종의 문화운동의 취지를 띠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도 같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는 시민들의 직접 참가가 권장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 서, 공동체적인 잔치의 성격을 갖고 있는 점도 함축한다. 행사를 장식하는 각종 무대에는 또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출연하고 있기 때문에, ‘국풍 81’은 곧 새로운 방식의 ‘젊음의 축제’라고도 부를 만하다. 그러나 이 행사의 가장 큰 의의는 역시 두 가지-고유문화의 현대적인 활성화와 국민적인 축제의 분위기라 할 수 있겠다. 하나의 너른 공간을 민족적인 에토스로 점화시켜, 거기 모이는 모든 젊음과 할머니·할아버지·아줌마, 그리고 이웃들이 마음껏 한번 흥을 돋구어보자는 것이다(5월 28일자 2면 사설).

조선일보는 ‘국풍 81’이 끝날 때까지 계속 행사를 홍보하는 기사와 화보를 내보내는가 하면 ‘민중의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풍 81’이 끝나자마자 6월 3일자 사설을 통해 “우선 ‘마당’에 참집한 연인원이 무려 1천여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했다”며 한국인의 ‘흥’과 ‘신명’을 예찬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9면에서 ‘국풍 81 닷새’라는 장문의 ‘기자의 눈’을 통해 이 행사를 ‘민중의 축제’라고 주장했다. ‘국풍 81’이라는 ‘관제’ 행사는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거대한 놀자판’이라고 재야세력이 비판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어쨌든 ‘국풍 81’은 전두환 정권의 야심찬 기획의 하나로 실행됐지만 결국 다음해부터 사라져버린 1회성 이벤트에 불과했다.

전통문화의 계승이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것이지만 막상 그 실천상의 방법론에 이르러선 이렇다 할 왕도가 별로 없었다. (…) 따라서 전통예술이나 민속예술의 계승이란 기껏해서 평면적이고 관람적인 ‘공연과 시청’의 양상으로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 그런 점에서 ‘국풍 81’은 민속행사를 단순한 공연물의 수준에서 격상시켜, 하나의 대대적인 집단축제의 형태로 접근시킨 첫 시도라 부를 만했다. (…) 우선 ‘마당’에 참집한 연인원이 무려 1천여만명에 달했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했다. 역시 한국의 민중들은 아무리 현대화했다, 경황이 없다 해도 이 ‘흥’과 ‘신명’에는 지극히 민감하고 또 목말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예술이나 놀이, 의식 잔치는 하나의 제전이기도 했고, 기원이었으며, ‘나눔’이었고, 또 슬기의 구현이었다. 덮어놓고 뛰어노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진지한 우주관과 지혜, 그리고 삶에 대한 그 나름의 철학이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 ‘국풍 81’이 일으킨 대중적인 흥겨움의 분위기는 이번에 주시해 볼만한 또 하나의 관심사였다. 사람들이란 원래 무슨 재미거리나 즐거움이 있어야 사는 법이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경황이 없이 삶에 쫒기며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건조한 우리 젊은이와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마음에 단 며칠이라도 신바람이 나는 풍악소리와 꽹과리 소리, 어깨춤, 굿놀이를 선물해 주었다는 것은 그래서 밝은 풍정었다(6월 3일자 2면 사설).

‘국풍 81’-민중의 축제가 끝났다. 4박5일 동안 여의도 광장을 겨레의 멋과 흥분으로 들뜨게 했던 신명나는 민주의 큰잔치는 1일 밤 횃불행렬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 ‘국풍 81’잔치는 행사 규모도 컸지만 사상 최대의 인파가 운집하여 행사로서보다는 축제의 성격이 강했다.
(…) 강요에 의하지 않고 제 발로 걸어온 민중들이 말보다는 몸으로, 구경꾼으로서가 아닌 동참자로서 주객이 함께 신명을 돋우었다는 것은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었다. (…) 따가운 햇볕, 인파에 치이면서도 여의도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세상사 툭툭 털고 마음껏 해방감에 젖어보려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가락과 장단에 맞춰 흐드러지게 어깨춤을 추는 모습도 보였다. 그 몸짓, 표정 하나하나에서 민중들이 축제적인 흥을 얼마나 갈구해 왔는가를 읽을 수가 있었다.
(…) ‘국풍 81’이 남긴 또 하나의 성과는 우리 민속과 전통에 민족적 관심과 열기를 부어주었다는 점이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는 아직 미치지 못했지만, 실낱처럼 가늘게 이어져온 전통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고 미력하게나마 그 계승방법을 함께 모색해본다는데 뜻이 컸다.
(…) 우리의 전통음식, 우리의 고유명물, 우리의 풍류가 최근 들어 대학생을 주로 한 젊은이들의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학에서 굿판이 벌어지곤 했었다. 민중의 것을 찾아내 민주의 편에서 그것을 이어가자는 분위기였다. 생각 있는 이들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사회적인 차원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아진 것이 바로 ‘국풍 81’이기도 하다. <정중헌 기자> (6월 3일자 9면 <기자의 눈>).

블랙홀- 88올림픽 유치

전두환정권이 추진한 또 다른 계획은 1988년 올림픽 유치였다.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면 정권안보에도 결정적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79년 서울시는 올림픽 유치계획을 발표했으나 박정희 사망 이후 올림픽 유치신청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11월 전두환의 지시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유치신청서를 제출했다.

한국 측의 국가적 유치활동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경쟁지인 일본 나고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치러진 88올림픽 개최지 최종결정 투표에서 서울은 예상을 뒤엎고 52표를 얻어 27표를 얻은 일본 나고야에 압승하고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조선일보는 그 소식을 10월 1일자 1면 통단 머리기사로 다루고 그 이후 사설과 시리즈를 싣는 등 88올림픽 유치 관련 기사로 지면을 온통 장식했다.

오는 88년의 제24회 하계올림픽의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었다. 30일 밤 IOC의 투표 결과를 TV 중계로 지켜본 국민들은 서독 바덴바덴에서 유치활동을 벌여온 대표단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민족적 긍지를 뿌듯하게 누리는 감격의 일순을 맞았다.
(…)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좀처럼 갖기 어려운 기회를 개발도상국이며 분단국이라는 여건을 무릅쓰고 세계에선 16번째 올림픽 개최국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 것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국력과 신망을 공인받은 결과이다. 스포츠 외교는 국력이 뒷받침이 되고 있다. 일부 공산권국가 대표를 포함하여 6대주에서 고루 서울에 찬표를 던진 것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입증한다.
IOC의 서울 결정은 올림픽정신이나 헌장에 비추어서도 적절하고 현명한 판단이다. 정치이념이나 체제의 차이, 인종, 종교, 문화의 다름이나 국력의 크고 작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기본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선택인 까닭이다.
(…) 올림픽 유치 과정만 해도 몇 해 전부터 기선을 잡은 일본에 비해 우리는 단기간 내에 초전박살의 기개로 총력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라인강의 기적에 못지않은 한강의 기적을 쌓고 경제성장의 세계적인 모범국이 된 것처럼 ‘하면 된다’는 새마을 정신으로 밀고 나간다면, 훌륭한 경기시설의 완비엔 어려움이 덜할 것이다(10월 2일자 2면 사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88올림픽 유치가 ‘민족의 긍지’이자 ‘한국의 국력과 신망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며 ‘새마을 정신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같은 날짜 올림픽 관련기사는 1, 2, 3, 4, 5, 6, 7면 등 12개면 중 7개면에 걸쳐 있다. 88올림픽 서울 유치는 물론 자랑스럽고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올림픽 유치가 전두환 정권의 통치명분을 위한 ‘만병통치’ 역할을 했고 탄압과 억압적 조치에 대한 정당한 구실로 이용됐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조선일보는 충실한 지원자로서 그 논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나팔수 역할을 자임했다.

조선일보는 1982년 1월 1일 연두사에서 올해 주제를 ‘정도(正道)’로 정했다고 썼다. 연두사는 “정도란 글자 그대로 ‘올바른 길’이며, ‘정당한 도리’이다. 그것을 우리는 내부에서 추구해보자는 것이다”라며 “우리는 이제 스스로를 비하하는 부정적 역사의식 아닌 긍정의 자신성과 자세로 우리 내부에 새롭게 ‘정도’를 추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도’의 보기로는 올림픽 유치에 따른 ‘자신성’을 강조했다.

(…) 최근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방의 한 외교관이 공개석상에서 우리 기억으로선 처음으로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문제”를 거론하여 우호 증진을 위해 자제하도록 충고를 한 일이 있다. 우리는 그의 진술에 내포된 선의의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야릇하게도 우리의 국제적 존재 증명을 외부가 역설적으로 반증해주었다는 일종의 자족감 같은 감회를 저버리지 못했다.
(…) 유사한 경험으로 올림픽의 경우가 있다. 국제사회가 이 대제전을 우리에게 안겨준 ‘의외성’에 우선 우리는 놀랐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감회는 결코 값싼 민족센티멘털리즘이나, 시대착오적인 쇼비니즘의 취미에서가 아니다. 우리는 민족집단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오늘의 정당한 자기 위치의 확인에 그만큼 소극적이었음을 반성하는 자료로 삼고 싶은 것이다.


37년만의 야간통행금지 해제

전두환 정권은 5공 2년차의 새해를 맞아 획기적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새해 첫날 문교부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고교생 교복과 두발의 자유화 방침을 발표했고 연휴를 끝낸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한 것이다. 특히 통금 해제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1월 5일자 1면 머리기사에서 “오늘밤(5일 밤 12시)부터 전방 접적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다”며 “이는 전두환 대통령이 지난 1일 ‘오는 5일 국무회의에서 야간통행금지 해제안을 상정, 당일 밤부터 통금을 해제하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라’고 내무부 등 관계부처에 지시한 데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통금해제가 전두환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1면에 1월 5일 새벽 4시 도로를 막았던 바리케이드를 걷어내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사진설명에는 “밤을 걷어내는 먼동이 텄다. 통금이여 안녕. 마지막 통금시간을 넘긴 5일 새벽 4시는 유보됐던 권리가 회복되고 ‘24시’가 비로소 시작되는 기억해야 할 시각이었다. 그것은 37년의 세월 동안 일상 속에 길들여졌던 밤의 통제와 제한이 마지막을 고하는 순간이었고, 또 다른 자제와 절제의 새로운 시민의식이 요구되는 시작이기도 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어 2면 사설을 통해 이 조치가 ‘비정상의 정상화’라며 ‘제5공화국이 성숙사회를 강조함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11면  머리기사에서는 ‘통금 시대’ 최후의 밤에 대한 ‘유쾌한’ 표정을 소개했다.

통금 해제는 새해 벽두에 국민에게 되돌려진 반가운 ‘권리 회복’이었다. 지난 날 이 권리가 유보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물론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 비정상이 정상으로 되돌려진 것은 일종의 대세였던 듯싶다.
통금 해제를 두고 그동안 각계에서 찬반양론이 무성하게 일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것은 핵심을 다소 벗어난 논쟁이었다. 현대의 발전된 문명국 에서 통금제도를 해제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 이 점에서 통금 해제 문제는 주부들이나 취객들 또는 상인들의 편의나 선호의 문제일 수가 없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법리와 기본권의 원칙에서 조명되어야 할 사항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제5공화국에 접어들어 모든 분야에서 성숙사회의 의미가 재강조됨에 따라, 이 문제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한다’는 원칙에서 처리하게 된 것 같다. 실로 통금 해제란, 자정 이후 새벽 4시까지 거리에 있어도 좋으냐 안 좋으냐 하는 편의의 관점에선 별로 대차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통금 해제를 위시해, 매사를, 그리고 국사를, 되도록 정상과 평상의 상태에서 처리하기로 하는 그 ‘정상주의’만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이다.
(…) 남은 것은 다만 시민 각자의 질서감각과 법규 존중의 정신이다. 이것이 기해지지 않으면 모처럼의 해금과 자율의 확대도 사회사적 발전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통금 해제가 우리 국민의 시민정신 발양의 적극적인 계기로 승화되기를 바란다(1월 5일자 사설).

이것도 마지막 종종 걸음이겠지. 언제나처럼 통금시간에 임박한 귀가 길의 바쁜 걸음들이 서울 도심을 누볐다. 얼큰히 오른 취객, 가게 문을 막 닫은 상인들, 역과 터미널에서 막차를 내린 여객들, 그리고 마지막 손님을 태운 택시들-.
모두가 바빴다. 그러나 평상시의 자정에 임박한 때와는 뭔가 달랐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공연히 유쾌한 걸음걸이들. “통금 해제가 오늘 밤부터인 줄 알았는데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는 통금 위반자. “오늘이 마지막 통금이죠”라는 경찰관의 친절한 말씨도 이날 밤의 유쾌한 풍경이기도 했다.
‘아, 내일이면 통금이 없는 밤.’ 마지막 통금이 있는 밤은 그런 기분 속에 밝았다. 마지막 통행금지가 임박한 4일 밤 11시, 서울 시내 중심가의 표정은 평소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밤 11시 10분, 중구 명동 입구 택시정류장에는 30여대의 택시들이 3겹4겹으로 마지막 손님을 부르고 있었고 이런 현상은 종로 1가, 무교동, 중앙극장 앞 등도 마찬가지였다(1월 5일자 11면 기사).

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1945년 9월 미국의 군정 치하에서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된 지 37년만이었다. 조선일보 사설의 지적처럼 통금 해제는 찬반론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지사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또 하나의 초점은 전두환 정권의 통금 해제 조치의 숨은 의도였다. 특히 무자비한 ‘인간사냥’으로 광주 항쟁을 초래했던 5공 정권으로서는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야간통행 지의 해제는 국민의 해방감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 풍속도도 바뀌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크리스마스와 제야의 통금 해제가 주던 자유로움을 1년 내내 가질 수 있었으니 밤의 문화가 발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통금이 해제된 후 숙박업이나 요식업 등 섹스 등과 관련된 산업의 호황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의 1970년대가 퇴폐문화 등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는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 완화와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의 시대였던 셈이다. 전두환 정권은 소위 ‘3S’(섹스, 스포츠, 스크린)으로 불리던 퇴폐적 대중문화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프로야구 출범과 전두환의 시구

전두환 정권이 공을 들인 프로야구의 출범도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 중의 하나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출발부터가 5공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88올림픽 유치와 함께 프로야구의 출범이 가져온 부정적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프로야구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관심은 이미 1981년 12월 11일 한국프로야구위원회가 창립총회를 가지면서부터 본격화했다.

조선일보는 12월 12일자 9면(체육면)에 창립총회 기사와 함께 전체 12회의 <프로야구 시대>라는 시리즈물을 재빨리 시작했다. 이 시리즈 1회 기사는 “한국의 프로야구가 마침내 출범의 닻을 올렸다. 거의 6개월에 걸친 부유 끝이었다. 그러나 그 6개월은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다. 프로야구 출범이 한국 야구사는 물론 한국 스포츠사에 새 장을 여는 거대한 역사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짧은 준비 작업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1982년 1월부터  체육면에 ‘프로야구 전광판’이라는 난을 만들고 프로야구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1월20일 청와대에서 구단주들을 불러 모임을 가졌고, 당시 관련 장관이던 문교부장관에게 전폭적 지원을 해주라고 지시했다. 3월 20일 전두환은 신설된 체육부장관에 5공의 제2인자 격인 노태우를, 차관에 이영호를 임명했다. 조선일보는 3월 21일자 1면에 이 뉴스를 전하고 체육면에 체육부 신설의 의미와 내용, 그리고 조직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정부기구 중 체육부의 신설은 60년 한국체육사에 일대 ‘혁명’으로 비유될 수 있다. 물론 체육부의 발족은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한 배려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만 교육의 3대 근간(지·덕·체)의 하나인 체육이 깊이 뿌리내릴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 이번 체육부의 발족으로 한국 체육은 국가적인 뒷받침을 얻게 돼 비약을 약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체육부의 신설은 상대적으로 대한체육회의 약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기능상 변화는 있을지언정 스포츠의 이상이 민간 주도인 만큼 존재의 필요성은 인정되고 있다. (…) 체육부엔 3국 9과 1담당관과 기획관리실, 감사관, 총무과, 그리고 공보관을 두고 있다(3월 21일자 9면 기사).

이러한 체육계의 경사 속에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전두환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경기로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다. 프로야구는 개막전부터 큰 사회적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관중석은 3만명의 운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특히 전두환의 시구는 프로야구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줬다.
조선일보는 3월 28일자 1면에 「전 대통령 제1구…프로야구 플레이볼」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싣고 자세한 설명을 달았다.  체육면 머리기사에는 경기 내용에 대한 상보를 실었다.
프로야구 개막 후 방송의 스포츠 중계시간은 계속 늘어갔고 활자매체들도 총동원됐다. 스포츠전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종합일간지들도 스포츠면의 중요한 뉴스로 프로야구를 다루었다. 과연 ‘스포츠공화국’다운 모습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의 새 장을 여는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 전 대통령은 27일 오후 2시 25분 유창순 국무총리,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의 안내로 운동장에 도착, 스탠드를 메운 3만 관중의 열광을 받으며, 마운드에서 시구했다.
이어 전 대통령은 6개 구단주들과 잠시 환담하고 2개의 야구공에 기념서명을 했다. 전 대통령은 첫 경기인 삼성라이온즈와 MBC청룡의 경기를 약 40분간 관람했다(3월 28일자 1면 사진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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