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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창건’과 출범조선일보 대해부 4권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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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8.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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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과 ‘관제 야당’의 등장

1981년 들어 전두환의 ‘제5공화국 창건’은 민주정의당(민정당)의 창당과 대통령후보 지명으로 시작됐다. 민정당은 1월 15일 창당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전두환을 초대 총재 및 제12대 대통령후보로 선출했다. 조선일보는 그 내용을 1월 16일자 1면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지탄받는 정치인 안 되겠다”는 전두환의 후보수락 연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민주정의당이 제5공화국의 첫 정당으로 출범했다”고 전했다. 이어 3면에서는 해설기사를 통해 민정당의 창당과 관련해 “책임정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찬양했다.
조선일보는 1월 17일일자 2면에 「정치활동의 본격화」라는 통단사설을 싣고 민정당 창당과 대통령 전두환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오는 2월과 3월로 예견되는 양대 선거를 겨냥, 창당을 서둘고 있는 뭇 정당 가운데 민정당이 15일 정식 출범함으로써 창당 1호를 기록했다. 민정당은 5·17 조처 이후 줄곧 사회 각 부문에 걸쳐 개혁작업을 펴온 개혁주도세력이 이끄는 정당이라는 점에서 그 창당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더구나 민정당은 창당대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당 총재로 옹립하고, 오는 12대 대통령선거의 당 추천 후보로 내세움으로써 명실상부한 집권당의 면모를 갖춰, 제5공화국 정치질서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 특히 민정당 창당에 크게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은 당의 핵심세력이 지금까지 제5공화국의 도정을 닦아온 개혁주도 세력이므로 당의 정식 출범에 따라 사회 각 부문에 널려 있는 부정과 비리에 대한 개혁작업이 더욱 활발해지리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 최고책임자와 집권당의 총수가 일치됨으로써 당·정 책임이 일원화되었다는 것은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반가운 일이다(1월 16일자 3면 해설기사).

민주정의당은 지난 15일 창당대회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을 당 총재 겸 대통령후보로 추대했다.
(…) 전두환 대통령의 총재·후보 수락연설과 당의 창당선언문, 그리고 기왕에 나온 정강정책 등을 검토해볼 때 민주정의당의 개혁 지향적인 의도는 각 분야에 걸쳐 의욕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민주·민족·정의·복지·평화통일이라고 한 5대 목표가 함축하듯이,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집념과 사회정의 의식은 이 정당의 가장 주된 정치노선임을 드러내고 있다.
사회개발 분야에 있어서도 복지 구현과 참가형 민주주의의 정책기조를 반영한 것은 개혁정당으로서의 이 정당의 특징적인 면모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개발도상국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권문제와 개발과제라 할 때 이것을 ‘민주·민족·복지’라는 개념으로 집약한 것은 의의로운 발상이었다고 평가되며, 단순한 성장개념에서 진일보한 발전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 다. 더욱이 전 한반도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최대 관심사항은 역시 북한공산집단을 상대로 한 민족적인 정통성의 수호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민정당의 ‘민족·복지’ 개념은 여러 모로 시대적인 절실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1월 17일자 사설).

5공의 출발은 이미 짜인 각본에 따른 진행에 불과했다. 전두환의 민정당이 1월 15일 창당된 데 이어 이틀 뒤에는 민주한국당(민한당, 총재 유치송), 그리고 일주일 뒤인 1월 23일에는 한국국민당(총재 김종철, 공화당 이념 계승)이 창당됐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관제야당’으로 불렸고, 심지어 민정당은 1대대, 민한당은 2중대, 국민당은 3소대라는 말이 정치계에 떠돌았다. 신군부 세력은 민정당을 집권정당으로 한 다당제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들러리 야당을 만들게 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개정헌법을 토대로 하고 있다. 개헌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5공 헌법은 유신헌법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간선제를 택하고 있었다. 그 대신 이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선출해서 선거인단이 정당의 추천을 받은 후보들 중에서 대통령을 뽑도록 했다. 간선제지만 직선제와 같은 효과를 내도록 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직선제를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신군부는 개정헌법의 발효와 동시에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 기능을 대신하는 입법회의를 설치해 입법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전두환이 임명한 입법위원들이 각종 법률을 제정하게 한 것이다. 새 헌법은 또 소급입법이 가능하게함으로써 정치인들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신군부의 집권에 방해가 될 정치인들이 활동을 규제하도록 했다.

게다가 기존 정당을 해산하고 국가가 정당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민한당과 국민당의 창당을 돕고, ‘관제 야당’으로 기능하게 한 것이다. 이렇듯 신군부는 대통령선거법과 국회의원선거법 및 정당법, 그리고 정치자금법 등 정치관계법을 일방적으로 재정비해 정당 다원주의 흉내를 내면서 ‘전두환 독재’를 합법화했다.

신군부는 이미 의도했던 대로 법과 제도의 정비를 완료하자 새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준비에 나섰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갖추어 놓은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신군부는 요식행위에 불과하지만 대내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고, 대외적으로는 합법적인 정권으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신군부의 요식행위에 따른 선거체제와 그 일정을 전두환의 ‘개혁의지’로 그렸다. 1981년 1월 18일자 사설(「선거체제의 발정(發程)」)을 사설을 통해 각종 선거관련법이 민주정치의 활성화를 권장하고 있다면서 법과 도의를 준수하는 공명하고 질서 있는 선거풍토를 요구한 것이다. 그야말로 철면피한 주장이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일이 2월 11일로 정해지고 대통령 선거일이 2월 25일로 확정됨에 따라 정국은 본격적인 선거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일정은 헌정질서를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정착시키려는 전두환 대통령의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과도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한 각계의 여망과도 합치하는 것이다.
(…) 선거법이나 정당법·정치자금에 관한 법률도 따지고 보면 활발한 정치 행사를 건실하게 보호·육성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축시키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 차례 선거에 있어서도 민주정치의 활성화라는 측면은 충분히 권장되고 보장돼야 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 활성화가 정치도의와 실정법규의 테두리를 벗어나 비정상적으로 일탈할 때 그것은 올바른 활성화가 아니라 문란이요 반사회적 부패·타락 행위가 되는 것이다.
(…) 공명하고 질서 있는 선거풍토의 조성이야말로 앞으로의 제5공화국의 안정기반을 다지는 근본이다. 관이 엄정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정당은 법과 도의를 준수하고 유권자는 정책을 향해 표를 던지는 근대적인 정치문화가 생성되기 바란다.


전두환의 ‘쾌거’, 미국 방문

1981년 1월 22일 전두환이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한미정상회담의 발표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우려곡절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 이후 워싱턴 방문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실패했는데, 결국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자 방문 계획이 급히 추진되었다. 이미 1980년 12월부터 한미 간에는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두고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에 대한 감형 등을 조건으로 전두환의 미국 방문이 성사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1월 22일일자 1면 통단기사로 전두환의 미국 방문 계획을 보도했다. 「2월 2일 한미 정상회담 / 전 대통령 28일 방미」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전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후에 첫 번째로 만나는 외국 국가원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또 1월 23일자 2면 통단사설(「한-미 정상회담」)에서 전두환의 방미를 “우리 외교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대 쾌거”라고 흥분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공식 초청을 받아 오는 28일 미국을 방문하여 내달 2일 양국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고 22일 서울과 위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이것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지 불과 26시간만에 나온 거의 최초의 집무사항이란 점에서, 그리고 레이건 시대의 개막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한국과의 정상회담을 그 첫 번째 외교일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근래의 양국 관계와 우리 외교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은 또한 전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의 현 정부와 그 시책을 미국이 확고히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한국의 정치안정과 당면의 정치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입장에서도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그동안 실추되었던 미국의 대외 공신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며, 우방에 대해서는 미국의 신뢰감과 ‘리더십’을 재천명하고, 소련과 북괴 등 경쟁 상대방과 적대방(敵對方)에 대해서는 불퇴전의 결의와 힘을 과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1월 23일자 사설).

1981년 1월 24일 전두환은 비상계엄 해제에 관한 대통령 담화를 발표하는가 하면 그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대중에 대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등 바쁜 하루를 보냈다. 비상계엄은 선포 4백56일 만인 24일 24시(25일 0시)를 기해 해제되고, 김대중은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전두환의 방미 발표와 시기를 같이한 그 조치에 대해 조선일보는 1월 25일자 2면에 「비상계엄의 해제」와 「김대중 사건의 청산」이라는 2편의 사설을 동시에 게재했다. 비상계엄령 해제와 관련해서는 ‘국민 각자의 조심’을 요구했고, 김대중에 대한 감형 조치는 ‘통치체와 그 지도자의 폭넓은 금도와 포용력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월 24일 24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 전 대통령은 ‘10·26’ 사태 이래의 국가적 위기상황이 극복되고 공명선거에 대한 자유분위기를 보장하려는 뜻에서 전국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것임을 언명했다.
(…) 이로 인하여 정치집회와 일반집회는 자유롭게 되었고 민간행정·사법당국의 책임은 그만큼 무겁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활동이나 일반집회가 개방되게 되었다고 해도 관계법이 엄존하므로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모든 관계자가 관계법규를 잘 살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전환기에는 흔히 사정이 바뀌었다고 방심하기가 쉽다. 그리고 그런 방심은 뜻하지 않는 불행을 초래할지 모르므로 국민 각자가 조심해야 할 것이다(1월 15일자 제1사설).

한동안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김대중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의 감형조치로 일단 원만한 끝막음을 보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우리가 굳이 원만한 끝막음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비단 김대중 피고라는 한 자연인의 생명을 부지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감형조처가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통치체와 그 지도자의 폭넓은 금도와 포용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덕을 가지고 사람을 복속시키는 지도자에게는 모두가 마음속으로부터 열복(悅服)한다고 맹자가 말했다지만, 뉘우치는 자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다스림 중에서도 가장 차원 높은 경지인 것이다.
(…) 생각해보면 세칭 김대중 사건이란 사안은 10·26 이전의 ‘과거의 김대중 사건’이든 그 이후의 ‘최근의 김대중 사건’이든, 두 번 다시 되살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10·26 이전의 그의 사건은 이를테면 권위주의와 극한저항의 자기소모적인 갈등이 초래한 달갑지 않은 매듭이었다. 그리고 10·26 이후의 그의 사건은 결국은 그의 무리한 집권기도가 빚어낸 결과였다.
(…) 새 시대 새 정치의 개막과 더불어 이제는 체제냐 반체제냐가 아닌 국민총화 참여의 화합의 시대, 단합의 정치를 이룩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이 때를 맞아 전 대통령과 정부가 구시대적인 부조리의 한 상징적인 매듭이라 할 김대중 사건의 묵은 체증을 과단성 있게 청산한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개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1월 25일자 제2사설).

전두환은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미국을 방문했다. 2월 2일에는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전두환은 외국 국가원수로서는 레이건의 최초 초청자가 되어 백악관을 방문하게 됐다. 특히 레이건은 백악관에 들어서는 전두환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는 대신 친밀함을 보이려는 듯 포옹을 했다. 그렇게 미국의 환대를 받은 전두환으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되다

전두환은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한당의 유치송, 국민당의 김종철, 민권당의 김의택이 대통령 선거에 들러리 후보로 나서 형식상 경선의 모습을 보여줬다.

조선일보는 2월 26일자 1면 머리기사(「전두환 후보 12대 대통령 당선」)에서 “전두환 후보가 5천2백71명의 투표 참가 선거인 중 90.2%인 4천7백55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또 1면에 「제5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친 기획기사의 1회 분을 싣고, 2면 사설을 통해 전두환과 그의 5공화국에 대한 찬사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제12대 대통령 임기 개시로 우리의 역사는 또 하나의 새 장을 펼쳐나가게 됐다. 12대 대통령의 임기 개시는 헌정의 측면에서 본다면 제5공화국의 출범을 뜻한다. 그러나 전 대통령의 제12대 임기 개시는 대통령의 대수가 바뀌고 공화국의 기수가 달라진다는 차원에서만 볼 수 없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10·26 사태라는 엄청난 소용돌이로 비롯된 혼란의 과도기에 종지부를 찍고, 갈등과 불화로 점철된 70년대를 역사 속에 청산하는 분기점인 것이다. 숱한 시련과 위기의 고비를 넘기고 안정의 바탕을 굳히는 전기이며, 제2의 도약을 기약하는 계기인 것이다.
(…) 선거인단이 25일의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 대통령을 12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이러한 현실과 역사의식을 통감한 민의의 결집이라 하겠다. 전 대통령은 11대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해온 지난 6개월간, 그리고 그에 앞서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서 난국 수습을 주도해온 3개월의 격동기 속에서 새 지도자로서의 철학과 역량을 내외로부터 평가받았던 것이다. 전 대통령은 이제 이러한 국민적 지지기반을 발판으로 제5공화국의 새 영도자로서 자신의 지도이념과 경륜을 소신껏 펼쳐나가게 됐다. <이현구기자>(2월 26일자 1면 「제5공화국」➀).

(…) 전 대통령의 ‘2·25 당선’으로 10·26에 의해 발단됐던 헌정의 동요는 완전히 끝났다. 이제부터는 명실 공히 구시대의 청산도 과도기의 관리도 아닌, 새 헌정의 원년이 시작되는 셈이다. 12대 대통령인 전두환 대통령은 11대에도 대통령이었고 그 이전에는 국보위 상임위원장이었지만 이 3개 직책의 성격은 분명히 구별된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직은 이를테면 과거의 청산과 개혁의 주도력이었다. 그에 비해 11대 대통령직은 미래를 향한 새 헌정의 기반을 닦은 산파역이었다. 따라서 25일 기산되는 12대 대통령직의 시대적 성격은 새로운 건설과 창조의 직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연속적인 작업을 주도하는 데 있어 전 대통령은 광범위한 내외의 공감과 실천적인 업적을 이룩했고 그에 대한 국민의 신임이 이번의 투표 결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 대통령의 임기가 한국 민주발전의 새로운 연대로 기록될 것을 기대하면서 새 공화국의 출범을 맞아 몇 가지 축원과 바람을 피력해 두고자 한다(2월 26일자 사설).

전두환은 3월 3일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부마 사태’, ‘사북 사태’, 광주 항쟁 관련자 등 모두 5천여 명에 대한 사면·복권·감형을 실시했다. 조선일보는 3월 3일자 1면 머리기사로 “정부는 3일의 제12대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광주, 부·마 사태 및 민청학련 관련자와 박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자를 포함한 2천4백17명을 특별사면하고 1백67명을 복권시키는 한편, 6백46명을 특별감형, 9백68명을 가석방과 함께 가퇴원 형식으로 석방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는 특히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 날인 3일자 2면에 「새 공화국의 정식출범」과 「사면과 화합의 계기」>라는 2편의 사설을 올리고 전두환의 평화적 정권교체 의지와 포옹력 있는 결단을 칭송했다.

(…) 전두환 대통령은 건국 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의 시범자가 될 것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왔다.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마련하는 것이 최대의 집념이고 신념이다, 정치풍토를 올바로 이끌어 놓고 임기를 마친 다음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를 심는 제일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등등. (…) 그리하여 전 대통령은 당선소감에서, 기쁨보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통감한다고 그와 같은 함축들을 담아 피력했던 것이다.
(…) 우리는 전 대통령의 취임을 보면서 안정의 기틀로 들어섰음을 확인케 된다고 말했지만, 단임제 헌법에 의한 전 대통령의 강렬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집념과 의지의 표명은, 필연적으로 불안의 근본인자인 불신풍조 자체를 우리사회에서 깨끗이 불식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갖게 하는 데서 더욱 그러한 것이다.
(…) 10·26 이후 특히 5·17을 고비로 어려운 국가상황을 수습해온 전 대통령의 탁월한 헌신적 공적을 새삼 돌이킬 것까지도 없이 이 땅에 새로운 정치질서와 사회번영을 기약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새 공화국의 정통성을 전에 없이 믿음직하게 획득하고 있는 오늘의 국가상황에서, 우리는 전 대통령의 제5공화국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명백하게 안정에 바탕한 우리 역사의 새로운 시동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3월 3일자 제1사설).

12대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한 대사면조치는 제5공화국의 국민화합 정신에 비추어 매우 뜻 깊은 일이었다. 이번의 조치는 특히 60·70~80년대의 모든 정치관계 사건들을 일단 다 골고루 고려했다는 점에서 더 그 감회를 깊게 하고 있다.
(…) 특히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충격을 던져주었던 광주 사태 관련자들이 특사된 것은 국민화합을 위한 전 대통령의 결단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관대한 조치가 나라에는 화기를 가져오고, 해당자와 그 가족에게는 더없는 기쁨이 된 것을 축하하면서, 흐뭇한 분위기가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 전두환 대통령은 이미 12대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이전부터 구시대적 갈등 청산과 참여의 시대를 역설해왔다. 그리고 그 화합의 의지를 1차적으로 이번의 대사면조치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부응하여 이번에 혜택을 입은 특사자들이나 복권자들도 과거의 행위와 생각이야 여하튼 이제부터는 심기일전하여 제5공화국의 발전과제에 흔쾌히 호응,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3월 3일자 제2사설).

조선일보는 3월 3일자에 이어 4일자에도 전두환의 12대 대통령 취임 소식과 함께 취임사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1면 머리기사(「<전쟁·빈곤·탄압에서 국민 해방」)는 전두환의 취임사와 관련해, ‘7년 임기 동안에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갈망해온 전쟁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정치적 탄압과 권력 남용으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능력과 충정을 다하겠다’고 한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2면에는 전두환의 취임사에 관한 해설과 사설, 3면에는 취임사 전문, 7면에는 「전국서 잔치, 경축일색」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조선일보는「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사」라는 2면 통단사설에서 전두환이 취임사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이른바 ‘3대 해방’에 대한 보충설명과 함께 전두환의 ‘차원 높은 지혜’를 떠받들고 있다.

(…) 전두환 대통령이 제시한 ‘세 가지 해방’은 평화주의, 복지주의, 법치주의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해방은 다른 나라에서도 어려운 과제이지만 한국과 같이 수다한 역사적 부채를 짊어지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최종적 목표를 언제 달성할 수 있느냐에 있다기보다는 이 목표를 지향하는 과정이 어떠한가에 있다고 할 것이다. 정치에서는 최종적 목표보다도 거기에 이르는 방법과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역사적 경험을 상기할 때, 전 대통령의 차원 높은 지혜가 모든 것에 앞서 요청되는 것이다.
(…) 전 대통령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거듭 거듭 천명하면서 생명력이 넘치는 개방사회,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와 능력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최대로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지향을 확신을 가지고 다짐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보편적 사조요, 특히 북한의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절박한 과제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전 대통령의 소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제11대 총선, 예정된 민정당 승리

2월 25일의 대통령선거에 이어 3월 25일에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그 선거 역시 대통령선거와 마찬가지로 민정당의 승리가 예상됐다. 이미 경쟁력 있는 정치인의 활동을 금지시킨 데다 선거제도 역시 민정당을 위한 것이었다. 지역구를 77개에서 92개로 늘리고 한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며, 전국구 의원은 지역구의원 수의 절반으로 했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도록 한 것은 민정당에 절대 유리한 구도였고, 전국구 의원 92명 중 제1당이 3분의 2인 61석을 차지하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지역구에서 90석, 전국구에서 61석을 차지해 1백51석을 확보함으로써 전체 의원 2백76석 중 과반수인 1백38석보다 13석 많은 1백51석을 차지했다. 그 결과로 국민의 의사는 왜곡됐고 민정당은 일당지배의 패권정당이 되었다. 조선일보는 11대 총선결과를 3월 27일자 1면 머리에 싣고 1면 해설기사를 통해 ‘국민은 안정을 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2면 통단사설은 ‘개혁에 대한 신임’임을 강조했고, 3면의 정치부기자 좌담은그것 뒷받침했다.

새 헌법 아래 처음 실시된 3·25 총선 결과에 대한 의미는 여당인 민정당의 압승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특히 이 완승이 종래의 여당이 그랬던 것처럼 농촌지역에선 강하고 도시지역에선 약했던 편중된 승리가 아니라 서울 14개 선거구 중 12개 지구에서 1위 당선자를 내는 등 전국에 걸쳐 고른 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 같다.
(…) 이번 총선의 결과는 지난번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서 보여준 대다수 국민의 지지와 어느 면에선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민정당에 대한 이번 총선에서의 압도적 지지는 깨끗한 정치풍토를 조성하고, 국민적 화합을 위한 대화정치를 펴며, 평화적 정권교체 전통 수립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개혁주도 세력의 대국민 약속을 소신껏 추진해보라는 국민의 ‘명령’으로도 볼 수 있다(3월 27일자 1면 해설기사).

마치 기나긴 터널을 통해가다가 마침내 출구 밖으로 뛰어나온 것 같은 감  회 깊은 느낌이다. 10·26 사태를 기점으로 시작된 1년 5개월간의 긴 과도기적 진통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정상적인 헌정이 그 원년을 맞았다. (…) 이 차분한 주권 행사를 통해 한국의 성숙한 국민들은 의정의 안정과, 안정에 바탕한 지속적 개혁의 필요성을 압도적으로 신임해 주었다. 민주정의당이 이번 선거에서 도회지와 농촌을 불문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국민의 지향을 뚜렷이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지금의 시점에서 짤막히 강조해두고자 하는 것은 새 의원 각자의 투철한 정의감의 다짐과 도덕성의 확립이다. 제5공화국의 국기 안정과 민주헌정의 발전이 바로 그들의 분발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1대 국회의원 선거의 성공적인 결실을 국민 모두와 함께, 그리고 참가정당 모두의 합의된 평가로써 다시 한 번 경하하려 한다(3월 27일자 사설).

조선일보에 따르면 제5공화국은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출범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이익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포와 폭력의 시대였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전두환 정권의 실체를 보여준 한 사례가 ‘한수산 필화 사건’이었다. 보안사령부가 중앙일보의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 5월 14일자와 5월 22일자의 내용을 문제 삼아 작가 한수산, 편집부국장 손기상, 문화부장 정규웅, 출판국장 권영빈, 출판국 기자 이근성 등을 연행해서 무차별 구타하고 전기고문을 가했던 것이다. 14일자 글에서 ‘정부의 고위관리’라는 표현으로 전두환을 야유했다는 것 등이 그 이유였다. 특히 시인 박정만은 한수산과 대학 동창이라는 이유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전두환 정권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도입하기도 했다. 대학에 상주하는 정보요원들이 문제 학생들을 적발해 강제로 군에 입영시켜 ‘녹화사업(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을 진행한 뒤 대학가의 동향을 파악하도록 하는 등 학원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이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녹화사업의 피해자들 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당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녹화사업이 정치문제화 하자 84년 9월 공식적으로 중단됐지만 그 이후 노태우 정권 시기에도 그런 공작이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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