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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봄, 도쿄 ‘추한 한국인’ 날조사건을 떠올리다영화 ‘주전장’에서 혐한 평론가로 주목받은 가세 히데아키, ‘추한 한국인’ 날조 사건
박수택 전 SBS 도쿄특파원, 일본 극우인사의 ‘추한 한국인’ 날조 어떻게 밝혔나
  • 관리자
  • 승인 2019.08.0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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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소련처럼 붕괴하면 한국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한국은 가장 친일적인 나라가 된다. 한국은 버릇없는 꼬마처럼 귀여운 나라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나라다.”
“많은 사람이 멍청한 문제(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포르노’적 관심이 아닐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주전장(감독 미키 데자키)’에서 일본 극우파 가세 히데아키가 한 말이다. 1945년 9월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가 미주리호에서 항복 서명할 때 비서관으로 뒤에 있던 가세 도시카즈가 그의 아버지다. 이들 부자는 일본 우익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를 이끌었고, 가세 히데아키(가세)는 현재 일본 극우파의 중심인 ‘일본회의’의 핵심 인물이다.

1995년 4월 박수택 SBS 도쿄특파원이 2년간 가세를 추적해 그 민낯을 알린 적이 있다. 1993년과 1995년 2탄에 걸쳐 일본 출판사 ‘광문사’에서 ‘박태혁’이란 언론인 출신 평론가가 ‘추한 한국인(미니쿠이 칸코쿠진)’이란 혐한서를 냈는데 이를 가세가 감수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박 전 특파원은 박태혁이 가상의 인물이고 이 책을 가세가 날조했다는 걸 확인했다. 

일본 극우 평론가 가세 히데아키. 사진=SBS 보도화면 갈무리


박 전 특파원은 가세와 출판사 편집장 대리 후지모토를 만나 이들이 장세순이라는 곤궁한 언론인에게 받은 원고를 왜곡해 ‘추한 한국인’을 낸 사실을 확인했다. 1993년 ‘박태혁’이란 한국인이 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주변의 압력으로 보도하지 못했고, 1995년 ‘추한 한국인’ 2탄이 나온 뒤 보도했다. 미디어오늘은 박 전 특파원의 기록 등을 토대로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추한 한국인’으로 시끄럽던 1993년 봄 도쿄 

“그 책 읽어봤소?”

93년 4월 주일대사관과 도쿄특파원들이 만나면 나누는 인사였다. 박 전 특파원은 “좀 읽다 말았죠”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당시 그는 매일 새벽 4시50분에 일어나 아침신문들과 방송뉴스를 훑어보고 서울 본사 아침 뉴스거리를 찾아야했다. 다른 방송사 지국처럼 특파원이 2~3명이면 교대가 가능하지만 개국 3년도 안 된 SBS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출간 직후 그는 책을 볼 여유가 없었다.

두해 전 일본에선 오선화라는 한국인이 ‘치맛바람(스카토노가제)’이란 제목으로 혐한책을 내 일본인들에게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엔 박태혁이란 언론인 출신 한국인 평론가가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일본 극우논지를 폈으니 역시 주목을 받았다. 일본 영자신문 재팬타임즈, 로이터통신 등에서 이 책을 다루면서 박 전 특파원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3월말 나온 책을 6월초에서야 읽었다.

추한한국인 1탄 한국어 번역판(오른쪽)과 추한한국인 2탄 일본어판. 사진=SBS 보도화면 갈무리

‘추한 한국인’은 일본을 찬양하고, 한국을 인정하는 듯하며 결국 깎아내리는 내용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진학열은 이 시대 이뤄진 교육 기회균등화에서 시작된 것”, “일한합병 후 일본인은 철도, 도로, 학교시설 건설을 비롯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작했다. 덕분에 일반 민중에 일자리가 생겨 크게 윤택해졌다”는 식의 주장이 담겼다.

책에는 “한국인에게 태극기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바르게 그리질 못한다.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엷어서인가”, “한국의 학자들이 조선통신사로 12차례 일본을 방문했지만 일본에서 무엇 하나 배우려하지 않았다. 일본을 배웠으면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도 적혀있었다.


윷가락이 5개? 의심스런 정황들

박 전 특파원 눈길을 끄는 대목이 나왔다. “한국 놀이 가운데, 윷놀이라는 게 있다. 윷은 나무 막대인데 양면이 평평하게 돼 있는 막대를 한꺼번에 다섯 개 던진다. 한 개가 위를 향하면 도, 2개면 개, 셋이면 걸, 넷이면 윷, 다섯이면 모다.”(추한 한국인 134쪽) 한국인이라면 윷가락을 다섯 개라고 쓴 ‘박태혁’은 분명 한국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박태혁은 자신을 서울대를 중퇴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한 인물로 소개했다.

그 외에도 세종대왕이 20여년간 학자들과 1443년 한글을 만들어 1446년 공식 반포했는데, ‘박태혁’은 1443년에 만들기 시작해 1446년에 완성했다고 적는 등 오류를 발견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지식인 사이에서도 박태혁이 쓰는 일본어가 어색하다거나 한국인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한국인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 전 특파원은 1993년 6월10일 가세를 만났다. 가세는 전두환 등 한국 유력인과 친분을 과시했다. 그는 실제 ‘지한파’로 알려졌다. 가세는 박 전 특파원에게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이 전부 잘못된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책에 나온 주장과 같았다.

박수택 전 SBS 도쿄특파원이 가세 히데아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SBS 보도화면 갈무리

박수택 “저자를 원래 잘 알고 계신 건 아닙니까.”

가세 “만난 적도 전화 통화도 한 적이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일어로 쓴 원고를 가져오면 한국식 한자표현을 일본식으로 고치고 점검했을 뿐이죠.” 

가세는 만난 적도 없는 박태혁을 “대단한 지식수준을 가진 저널리스트”, “한국인이면서 스스로 용기를 내 한국인의 오류를 반성한 건 대단한 일”이라며 칭찬했다.

박 전 특파원은 8월3일 ‘추한 중국인’에 이어 ‘추한 한국인’을 기획한 광문사 출판사를 찾았다. 후지모토 편집장 대리는 이 자리에서 박태혁을 수년 전 처음만났다고 했다가 1년 반쯤이라고 바꾸는 등 일관성 없는 표현을 했다. 가세의 말과 달리 후지모토는 가세와 박태혁이 인사 정도를 나눴다고 말했다. 저자가 한국인이 아닐 것이란 의혹은 철저히 부인했다.

다음날인 8월4일은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이 일본 정부 조사결과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갔다는 걸 인정하는 내용의 일명 ‘고노 담화’를 발표한 날이다. 이날 박 전 특파원은 가세를 두 번째로 만났다. 저자 논란을 묻자 가세는 박태혁이 보내 온 글이라며 원고뭉치를 보여줬다.

박 전 특파원은 미디어오늘에 “한국에선 안 쓰는 400자 원고지여서 속으로 ‘번뜩’했다. 원고를 보여주길래 힘을 줘서 살짝 빼앗아 내 뒤에 카메라맨에게 찍게 했다. 그게 3~4초 정도. 팩스로 받은 원고여서 오른쪽에 송신 기록이 남아있더라. 얼른 외워서 적어뒀다. 영어로 ‘The Si-Sa Journal Tokyo 3.2. 001813’이었다”고 말했다.

박 전 특파원은 시사저널 도쿄지국 편집위원 A씨를 떠올렸다. 하지만 A씨의 논조는 ‘박태혁’의 그것과 달리 역사의식이 뚜렷해 명쾌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영상에 찍힌 원고 내용은 정작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고통을 다룬 내용이었다. 박 전 특파원은 “어쩔 수 없이 A씨에게 전화해 ‘추한 한국인’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더니 A씨가 만나자고 했다. 이후 도쿄지국장 직함을 달고 있는 장세순씨가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취재중단 압력, 2년 만에 보도

박 전 특파원은 장씨를 찾았지만 장씨는 ‘박태혁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이후 사내외 언론인·정치인 등에게서 취재중단 압력이 들어왔다. 당장 보도는 막혔지만 박 전 특파원은 장씨 주변을 계속 취재했다. 하루는 장씨를 미행했다. 박 전 특파원은 “장세순이 집에서 지하철 두세개 노선을 갈아타 가세 사무실로 가는 걸 따라갔었다. 갈아탈 때마다 갈아타기 쉬운 칸으로 옮겨 다니는데 한두 번 다녀본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고베 대지진, 사린가스 테러 등 굵직한 사건을 취재하던 중 1995년 ‘추한 한국인’ 2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 전 특파원은 장씨를 다시 찾았다. 박 전 특파원은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며 설득을 했다. 결국 장씨는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 가세·광문사와 3탄까지 계획했다며 계약서까지 보여줬고, 언제 어디서 만나는지도 알려줬다”고 말했다.

출판사 광문사가 공개한 가세 히데아키(왼쪽)와 '추한 한국인'의 저자 '박태혁'씨 사진. 사진=SBS 보도화면 갈무리

'추한 한국인'을 비롯해 '추한' 시리즈를 기획한 출판사 광문사. 사진=SBS 보도화면 갈무리

박 전 특파원에 따르면 장씨는 당시 궁핍한 상황이었고, 가세는 이런 장씨에게 돈을 주고 비자 문제를 해결해줬다. 장씨의 원고를 왜곡해 박태혁이란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지만 장씨가 나서지 못한 이유다. SBS 8뉴스에서 95년 4월 장씨를 익명처리해 2년간의 추적을 보도했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이를 다뤘다.

광문사 측은 5월8일 SBS 보도를 반박하며 “저자가 날조한 일은 없었다”면서도 “책 만든 과정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장세순은 같은달 3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자신은 자료를 넘겨줬을 뿐이고 가세가 마음대로 왜곡했다고 주장했고, 폭로 이유를 “책이 많이 팔렸는데 인세를 적게 줘서”라고 했다.

보도가 나오면서 ‘추한 한국인’은 2탄에서 멈췄다. 박 전 특파원은 해당 보도로 95년 5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가세는 이후 2007년 4월 ‘뉴스위크’ 국제판에 “위안부는 매춘부”, “난징 대학살은 날조다” 등의 글을 써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박 전 특파원은 “95년 당시만 해도 한국에 가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많아진 것 같다”고 한탄했다. 이어 “당시 가세가 내게 ‘어떻게 부끄러운 역사를 자손에게 남겨줄 수 있겠느냐’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런(좋은 얘기만 알리자는) 식의 국수주의에 빠져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반민주·베트남전쟁학살 등의 역사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글은 2019년 08월 06일(화)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의 기사 전문입니다. 기사원문 보기 클릭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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