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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항쟁과 신군부의 유혈 진압조선일보 대해부 4권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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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0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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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에 대한 언론의 침묵

5월 21일은 시민군이 광주에서 계엄군을 몰아낸 날이었다. 조선일보는 이날에도 광주 항쟁에 대해 일언반구의 보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1면 머리기사(「신현확 내각 일괄사표」)로 5·17조치와 관련해서 “신현확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들이 20일 오후 최근 국내 소요사태에 인책, 최규하 대통령에게 일괄 사퇴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또 1면 사이드에는 「김재규 사형 확정」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내보냈다. 같은 날짜 조선일보의 사설은 「전통불교의 현대화」라는 제목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내용이었다.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는 동아일보가 19일부터 5일 동안 사설을 뺀 채 신문을 발행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 동아일보의 자발적 사설 배제는 검열로 언론사의 주장을 펼 수 없던 상황에서 최소한의 양식을 지키고 싶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5월 22일자 지면에 ‘광주 사태’를 처음으로 보도했다. 1면 사이드기사(「광주 일원 소요 사태」)와 관련 기사들은 온통 왜곡 날조된 계엄사의 발표로 가득하고 현장의 소식과 상황은 아예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일보는 그 기사에서 최소한의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계엄사의 주장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계엄사 발표에 관한 2건의 주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엄사령부는 21일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 지난 18일부터 연 4일째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 21일 오전 7시 현재 계엄사가 집계한 피해상황을 보면 이 소요에서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고, 군경 30명이 부상했으나 민간인 부상자 수는 공식 집계되지 않았다. (…) 계엄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광주지역 소요가 극심한 난동 현상을 보이고 있는 현상은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 학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린 데 기인됐다고 했다. 광주지역에 유포된 유언비어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고 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난다. ·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시내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 애들이 대검으로 아들딸들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게 한 후 장난질을 한다. ·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데모군중의 머리를 무차별 구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 학생들 50여 명이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다녔다. · 계엄군이 출동하여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계엄군이 점거하고 있던 가톨릭센터 건물에는 시체 6구가 있다. 데모 군중이 휴가병을 때리자 공수부대가 군중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 계엄군이 달아나는 시민들에게 대검을 던져 복부에 박혀 중상을 입혔다. · 진압군인들은 경상도 출신만 골라 보냈다는 등이다(5월 22일자 1면 사이드기사).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본인은 계엄사령관으로서 현재 광주시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를 냉철한 이성과 자제로써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광주시민 여러분의 전통적인 애국심에 호소하여, 간곡히 당부코자 합니다. 지난 18일 수백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방화·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을 통해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데 기인된 것입니다(5월 22일자 1면).

위의 두 기사 내용은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 기사들은 마치 광주시민들이 일방적으로 군경을 공격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도 서울에서 내려온 학원소요 주동 학생들과 깡패들이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광주시민들을 날뛰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계엄사령관은 북한의 간첩과 불순인물들이 광주 항쟁의 배후인 것처럼 현혹하고 있다. 18일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시작된 광주 학살의 과정은 계엄사에서 지목한 유언비어가 오히려 사실에 부합하거나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폭도’로 보도된 광주 시민

5월 23일부터 조선일보는 광주에서 임시취재반의 이름으로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날짜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광주 사태 수습 기미」이다. 그러나 내용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면서 ‘난동’이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5월 18일자부터 22일자까지 사회면(7면)에 실린 기사들은 날짜별로 상황을 보도했으나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폭동’으로 전하고, 진압군의 잔악행위는 ‘유언비어’로 소개했다. 주요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임시취재반] 전남 광주에서 지난 18일부터 22일 현재까지 연 닷새 동안 군경과 충돌, 유혈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22일 현재 군과 경찰이 전남도청에서 철수한 뒤 광주시는 일부 무장한 폭도에 의해 장악되어 행정은 완전히 마비됐다.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군은 조선대로 철수했으며, 경찰도 모두 빠져 나갔다. 소요는 21일 목포로까지 번져 광주에서 내려간 폭도에 의해 과격행위가 있었으나 대다수 시민들은 이들을 추종하지 않았으며 대학생들이 과격한 군중들의 해산을 종용했다. (…)
폭도들은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와 탄약을 탈취, 무장하고 광주 시청, 전남도청 등 주요 공공건물을 차례로 점거하는 한편, 광주세무서, 광 주 KBS, MBC 건물에 방화했다. (…) 이 사태로 광주 일원의 상가는 완전 철시했다. 또 사태가 발생한 지역들에서는 교통이 두절되고 있는 가운데, 광주와 다른 도시 간의 시외전화도 끊긴 상태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광주 일원을 비롯해 전국에는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조선일보는 5월 23일자 1면에 계엄사의 <김대중 씨 수사 중간발표>라는기사를, 그리고 3면에는 장문의 계엄사 발표 내용을 실었다. “김대중이 대중선동→민중봉기→정부전복을 위해 광주항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 골자다. 계엄사는 신군부가 날조한 ‘김대중 씨 수사 중간발표’의 내용을 의도와 목표, 드러난 범죄사실, 사상배경, 당부의 말씀 순으로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황당한 조작이자 국민에게 ‘자제와 자숙’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내용이다. 이를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 김대중은 대중선동→민중봉기→정부전복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복직 교수와 복학생을 사조직에 편입하여 각 대학과의 연계관계를 강화하면서 이들 사조직 추종분자들의 연대의식과 투쟁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김대중 초상을 음각한 신표(메달)와 볼펜을 나누어 주는 동시에 학원소요 사태를 민중봉기에로 유도 발전시킬 것을 기도한 것이며 (…)
김대중은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민주연합청년동지회 및 기타 사조직 등의 배후조종을 통한 전국적 학원소요가 비록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 나름대로 조직 동원에 성공하였다고 판단, 고무되어 앞으로 학생 가두시위를 대규모 반정부 민중시위로 유도하여 사회혼란의 결정적 계기를 조성코자 80년 5월 13일 한완상 부친 상사 등을 포함 전후 6차에 긍하여 국민연합 중앙위원인 예춘호·문익환·이문영·서남동·고은·한승헌 및 복학생 대표인 조성우(고대), 심재곤(서울대), 장기표(서울대) 등과 회동 계엄해제, 언론자유 보장, 특정인 퇴진 등 5개항의 요구사항과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는 의사는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단다는 등 3개 행동강령 및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서울은 장충공원, 지방은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일제 봉기를 획책하였다. (…)
본건 수사와 관련 혐의로 연행조사 중인 자는 김대중을 비롯하여 예춘호·김상현·김종완·김녹영·김홍일·이택돈·이문영·고은·김동길·문익환 등과 학원소요 주동학생으로 서울대 채정섭, 고대 이경재, 연대 서창석 등이다. 김대중을 비롯한 관련 주범들 대부분이 검거되었으므로 조사 진행과 더불어 사건 전모가 밝혀질 것인 바, 국민 여러분께서는 시국의 중대성에 비추어 더욱 자제, 자숙하면서 적극 협력해주심은 물론 근거 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됨이 없이 정부를 신뢰하고 생업에 정진하시기를 당부드리는 바이다.

조선일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 날짜 2면 사설(「 내각에의 절실한 기대」)은 새로 들어선 박충훈 내각에 ‘광주 사태’의 문제 해결을 기대한다며 “국민적 협조로 이 난국을 타개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또한 진압군의 잔학행위에 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이 광주 항쟁을 사북 사태의 연장선상에서 다루고 있다.

(…) 광주 소요 사태의 전모가 소상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18일 일부 대학생들의 가두데모와 군경의 충돌로 촉발된 이래 22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사상자를 냈고 공공건물과 재산이 파괴되었으며 방화 등이 자행되어 온 시가가 무정부상태로 화했으며 군경은 시 외곽으로 철수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부 군중들은 각처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화한 채 대치 중이라 하니 지난달 사북 사태 이상의 심각하고 우려할 사태가 국토의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 기자 김대중의 ‘광주 르포’

5월 24일자 조선일보는 1면과 7면(사회면)에서 ‘광주 사태의 수습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25일자 1면에 「총기 널린 폐허의 광주」라는 제목의 사진을 게재하고 사진설명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 헬멧에 복면까지 한 한 난동자가 무기 회수 광경을 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같은 날짜 1면 머리기사(「김재규 교수형」)는 5월 24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진행된 김재규 전 정보부장의 사형 소식을 전했다. 5월 20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4일 만에 형 집행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회면(7면)에 기자 김대중의 ‘광주 르포’를 내보냈다. 「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는 제목의 르포는 ‘난동자’에 관한 묘사로 시작된다.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m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각목·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그 뒤편의 거리는 차가 없어 더욱 넓어 보였다.
그 바리케이드를 마주하면서 6백여m쯤 떨어진 이쪽, 도로 중앙에 철조망과 함께 ‘무기 회수반’이라는 글자가 쓰인 5개의 입간판이 길을 막고 있다. 바로 이곳이 총기의 반납을 기다리고 있는 당국의 전초선이다. (…) 바리케이드와 무기반납소 사이에는 인도에 수십 명의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일요일에 교통이 차단된 어느 번화가의 모습과도 흡사했지만 사람들은 그 번잡했던 거리가 벌써 7일째 텅 비어 있는 것을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에는 간간이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했다. 시민들에게 계엄당국의 전단을 뿌리려 가거나 뿌리고 오는 헬리콥터라고 했다. (…)
오후 2시 30분쯤 도청의 수습위원들로부터 ‘허락’을 받고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본사의 서청원·이영배·박내명·조광흠 네 기자가 마치 4총사처럼 무기 반납소 쪽으로 걸어 올라왔다. 7일 동안 마치 몇 년씩 늙은 것처럼 느껴지는 얼굴들이었다.

조선일보의 5월 25일자 지면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2면의 사설이었다. 「도덕성을 회복하자」라는 제목의 통단사설 내용은 광주의 항쟁시민들을 향해 “도덕성을 회복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이 사설은 항쟁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을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며 광주시민들을 일본인 폭도들과 비견하기도 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다. (…) 행여나 호전집단에 의한 전쟁상태의 발발이 없지 않을까도 두렵지만, 그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저미고 불안으로 동요케 하는 것은 미풍양속을 자랑으로 살아온 우리네 전통의 도덕적 붕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뿌린 씨앗에 열린 열매를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매섭게 참회하고 반성함으로써 그 저지른 행실에 에누리 없는 책임을 져야 할 때인 것이다. (…)
우리의 위정자들이 북괴의 남침위협을 운운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경고함을 통치기술의 하나로 가벼이 인식하는 불신풍조와 ‘안보’라는 단어에 대해 식상증에 걸려 있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도덕적 비극의 한 인자가 돼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회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또는 격앙된 군중 속에서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파괴와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그런 증거가 포착되기도 했으며, 서울에서는 남파간첩이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이 지역감정을 촉발시키는 등 갖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흉흉케 함으로써 사태를 격화시켰으리라는 것도 십분 짐작이 가기도 한다. 피 흘림을 보고 불길이 솟고 군중의 격앙된 심리상태에서 이성을 잃게 되면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분별력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57년 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


광주의 최후 항전

5월26일 월요일은 조간신문이 나오지 않는 날이었. 그날 하루를 쉰 조선일보는 5월 27일자 1면 머리 「한때 잘못 최대 관용」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최규하가 광주 근교에서 5월 25일 방송한 특별담화 내용을 실었다. 계엄군의 천인공노할 잔학행위는 사라지고 오히려 광주시민이 일시적 감정과 흥분으로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래도 이에 대해 최대의 관용을 베풀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는 이 담화를 통해 “어떠한 문제가 있다면 대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일시적인 흥분과 또 일시적인 감정에 의해서 잘못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최대의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붙이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7면 기사(「혼미…광주사태 10일째」)를 통해 광주의 현황을 강경파의 탓으로 돌렸다.

5월 27일, 계엄군은 최후의 항전이 벌어진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사태 를 완전히 장악했다. 조선일보는 5월 28일자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이 소식을 알렸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일제히 광주시에 진입, 도청 도경을 비롯한 주요 건물과 전 시가지를 완전 장악했다. 이로써 지난 18일에 발생, 유혈사태까지 빚었던 광주 사태는 10일 만에 일단 수습됐다”는 것이었다. 그날도 조선일보는 계엄사의 발표를 인용해 저항 시민을 ‘폭도’로 기술하고 있다. 이어 2면 사설(「악몽을 씻고 일어서자」)은 “광주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가 하면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며 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광주시민에게 거족적 동포애를 모아 보내도록 하자”는 입발림이 오히려 분노스러울 정도다.

(…)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포함한 모든 안전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멀지 않은 평시에로의 회복을 또한 분명하게, 그리고 어김없이 약속하는 조건이고 환경이라는 사실이다.
광주 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도 있다.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군, 곧 국군은 광주시민을 포함한 온 국민의 아들이고 동생들이며, 그래서 국민의 국군이며, 국민으로 구성된 국가의 국군이다. 그러한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광주 민중항쟁은 초기인 5월 18일과 19일 유혈이 낭자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신군부의 강경진압 결정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이틀 동안 계속된 공수부대의 만행이 광주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결국 광주 시민군은 5월 21일 광주에서 계엄군을 몰아냄으로써 ‘해방구’를 만드는 민중항쟁을 벌인 것이다. 계엄사는 이를 ‘북괴의 조종에 의한 폭동’이라고 국민을 현혹하는가 하면 김대중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광주 항쟁의 배후조종자로 날조하기도 했다.

광주 항쟁은 유신독재체제 하에서 박정희의 친위세력으로 자랐던 신군부가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고 여러 단계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항거였다. 이 항쟁은 10일 만인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진압됐지만 향후 한국의 민주회복을 이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0일 동안 국민을 상대로 살육전을 벌인 신군부의 계엄사는 5월 31일 이른바 ‘광주 사태의 전모’를 발표하고 민간인 1백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백70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백27명, 군인 1백9명, 경찰 1백44명 등 3백80명이 부상했으며, 총 1천7백40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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