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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민주화 운동과 5·17 쿠데타조선일보 대해부 4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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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2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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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들어서자 언론계에서는 자유언론 실천운동이 벌어졌였다. 경향신문,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 많은 신문과 방송 기자들이 기자총회 등을 통해 언론검열과 언론자유 저해 요소를 거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기자협회 역시 검열 거부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가장 격렬한 민주화 운동은 대학가에서 2개월째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봄학기를 맞아 시작된 대학가의 시위는 학원민주화 등 학내 문제로부터 점차 계엄 철폐 등 사회 문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시위도 교내에서 교문 밖으로 이동했다. 서울과 지방의 대학가는 5월이 되자 일제히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계엄 해제와 민주화 촉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5월 중순에 접어들자 학생들은 드디어 도심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5월 3일자 사회면 머리기사를 통해 학원 사태가 제2단계로 가고 있으며 ‘정치 성토’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한 이후 거의 매일 학생들의 시위를 주요 기사로 다루었다. 5월 15일자 1면에는 「학원으로 돌아가자」라는 사설을 실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대학가는 농성과 성토와 교내 시위 등의 열풍으로 휩쓸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작금에는 서울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낮과 밤 가두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과 충돌하는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생들이 학내문제를 들고 항의와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학원 내에서 그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최근 학생들이 구호를 학내문제에서 정치문제로 바꾸면서 그들의 행동은 더욱 격렬해지고 결국은 도심지대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 학생들이 더 이상 가두로 나온다든가 더욱이 폭력적 행동에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민심으로 보아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학가의 시위는 5월 14일과 15일 최고조에 달했다. 14일에는 서울시내에서 3만여 명, 지방에서 2만여 명의 학생들이 가두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보도됐다. 서울의 시위는 을지로, 종로, 시청앞, 서울역, 영등포 등 도심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15일에는 서울 35개 대학 학생 5만여 명이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에 집결하여 경찰과 공방전을 벌였고 그 중 일부는 광화문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전경대원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과 지방의 50여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그날 자정 이후 고려대 학생회관에서 가진 회의에서 가두시위를 중지하고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19년째인 1980년 5월 16일은 매우 불길한 하루였다.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 1면 머리기사로 “중동을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16일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귀국, 이날 밤 청와대에서 신현확 국무총리를 비롯, 김종환 내무, 주영복 국방장관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관계 장관들과 시국관련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또 사회면에는 「가두시위 일단 중지…정상수업」 「국민 반응 차갑다 대학가 자성론」 등의 기사를 실었다. 정부는 그날 밤 중앙청에서 총리 신현확 주재로 긴급국무회의를 열고, 5월 17일 밤 24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5·17 쿠데타였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18일 새벽 1시를 기해 계엄령 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모든 정당의 정치활동 중지,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 금지, 각 대학의 휴교 등을 선포했다. 5월 18일 아침 시민들은 조간신문과 TV뉴스 등을 통해 5·17 쿠데타 소식을 접했다. 계엄포고 내용은 살벌했다. 포고령 전문은 다음과 같다.

1979년 10월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계엄법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 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 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지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신고를 하여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순수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하되 정치적 발언을 일체 불허한다.
나.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 포함)은 당분간 휴교 조처한다.
라.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한다.
마.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1)전·현직 국가원수 모독 비방하는 행위 2)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선동하는 행위 3)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소란시키는 행위는 일체 불허한다.
바.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상적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한다.
사.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 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쥐죽은 듯 했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을 광주로 이동시켰다. 이른바 ‘충정훈련(폭동진압훈련)’을 받은 병력이었다. 5월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 병력 1천여 명이 작전 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였다. 그러나 그 ‘휴가’는 차마 필설로 다하기 힘든 ‘인간 사냥’을 위한 것이었다.

일요일인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학생들이 교문 앞에 모였다. 교문에는 총장 명의의 ‘휴교령’ 공고문이 붙어 있고 교문 양쪽에는 공수부대원들이 늘어서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2백~3백명 정도로 불어난 학생들은 “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공수부대 지휘자가 공격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달려들어 쇠심이 박힌 살상용 진압봉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1권, 120~122쪽).

그 공격이야말로 광주 항쟁과 그 비극을 알리는 서곡이었던 셈이다. 학생들이 시내로 이동하자 계엄군은 가톨릭센터, 광주역, 광주고속터미널 부근에서 가혹한 진압작전을 벌였다. 충장로와 금남로, 유동삼거리 등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을 휘두르고 착검한 대검으로 시위대를 내리치기도 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패고 군용차량에 집어던지다시피 해서 끌어갔다. 5월 18일 ‘피의 일요일’은 광주를 붉게 물들였다.

19일과 20일에 진압군의 살육은 극으로 치달았다. 20일에는 금남로에서 2백여 대의 택시들이 차량시위를 벌이는 등 진압군과 시민들은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언론은 광주 항쟁 3일째인 20일에도 단 한 줄의 기사도 보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분노한 시민들이 20일 전남북 계엄분소의 거짓 보도문을 방송한 광주 MBC와 KBS에 불을 질렀다.

조선일보 역시 5월 20일 광주항쟁에 관한 기사를 전혀 싣지 않은 채 「김종필·김대중 씨 연행」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통해 “국민의 지탄을 받아오던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와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 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자 26명을 연행 조사중”이라는 계엄사의 발표를 보도했다.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에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김진만, 이세호 등이 포함됐다. 사회불안 조성 및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자에는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고은, 이영희 등의 이름이 올랐다.

같은 날짜 보도에서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전두환에 관한 뉴욕 발 1면 기사였다. 조선일보는 「한국 실정 맞는 정치제도 필요」라는 제목으로 전두환이 미국 타임지와 가진 단독회견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인 전두환 장군은 18일 공개된 타임지와의 단독회견에서 한국은 한국 자체의 조건에 부합되는 정치제도를 개발해야 하며, 민주주의가 서방식이건 다른 방식이건 한국 자체의 국가발전에 기여할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전 부장서리는 계엄령 확대조치가 있기 직전 타임지 도쿄지국장 에드언 라인골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끊임없이 침략의 위험에 직면해왔으며, 현재도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는 등 지극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고 한편으로 적과 대치하고, 또 한편으로 경제건설을 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스스로의 상태에 적합한 정치제도를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그는 이어 군사적으로 북괴는 모든 남침 준비를 완료, 지난 2월부터 그들의 육해공군의 대규모 군사기동훈련을 실시 중이며 현 한국 사태를 적화의 결정적 계기로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 장군은 또 북괴가 한국 국민을 분열시키려고 위장평화 공세를 증대하고 있으며,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창조적인 민족주의라고 말했다.

전두환의 얘기는 박정희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게다가 전두환의 주장은 조선일보가 1980년 1월 1일자 연두사에서 강조한 ‘오늘의 한국을 사는 한국인의 상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그 연두사를 통해 한국인의 상식은 “한국인이 미국인처럼 사는 신조도 아니며, 한국인이 일본인처럼 사는 미덕일 수도 없는 것이다. (…) 여기가 한국이라는 인식을 잊은 정치발전만이 정치발전이요, 그렇게 사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순리대로 살아가기가 힘들게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 똑같은 주장의 안팎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지면에 5·17 쿠데타를 피할 수 없는 조치로 설명하는 사설(「<백척 간두에 서서」)을 내보냈다. 조선일보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사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최규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비상계엄령을 전국화하는 ‘5·17조치’를 취하면서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을 국민에게 호소했다. “북괴의 격증하는 적화책동이 학원소요를 고무 선동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이 조성하고 있는 혼란과 무질서가 우리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으며 이와 같은 사태가 경제난까지 극도로 악화시켜 바야흐로 국기를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최 대통령은 지적하면서,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득이 ‘5·17’ 조치를 취한다고 밝히고 국민의 협조를 호소하고 나섰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지 않고 시국이 수습되기를 누누이 바라왔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선의 길로 시국을 수습하는 기회는 이미 지나가고, 이와 같은 비상사태를 맞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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