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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등장과 전두환조선일보 대해부 4권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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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0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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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밤 대통령 박정희가 죽음을 당한 이후 가장 주목해야 할 세력은 ‘신군부다. 다음 날인 10월 27일 새벽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언론검열이 실시됐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육군참모총장에 정승화를 임명했다.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올린 ’합동수사본부 안‘을 승인하고 그를  본부장 자리에 앉혔다.

전두환은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신군부는 박정희의 친위대로 키워진 세력으로, 10·26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정치군인 집단을 지칭한다. 신군부의 인맥은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였고 그 주도자는 전두환이었다. 하나회는 1963년에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된 군대 내 사조직이었다.

하나회의 태동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인 전두환·노태우·김복동·최성택·박병하 등 5명이 5성회를 조직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1955년 임관한 뒤 1961년에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후 정호용·권익현·손영길 등이 참여하며 7성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들은 다시 1963년 회원을 늘려 일심회를 만들었고 이 일심회가 한마음회로 바뀌었다가 하나회로 정착했다고 한다. 그들이 육사 11기의 영남 인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의 핵심이었다.

박정희는 군 출신 인사들을 정치권력에 충원해 통치기반 확립에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대통령 박정희가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주요 자원이었다. 그는 주로 군 인사를 통해 군부를 관리했다.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충성도와 군부 내의 세력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철저한 상호 견제의 원칙 아래군 주요 보직을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부 지휘계통을 공식(참모총장)과 정보계통(보안사령관)으로 이원화해 관리했다.

박정희는 민정이양 후에도 유사한 방법으로 통치기반을 관리했다.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을 견제하며 자신의 연고지인 영남 출신으로 새로운 군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박정희의 눈길을 끈 것이 육사 11기생들이었다. 그들은 4년제 정규 군사엘리트 교육을 처음으로 받으며 두각을 보였다. 특히 지연과 학연을 중심으로 각계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박정희의 친위세력으로 커나간 하나회는 10·26 사건 이후 권력 공백기를 이용하여 군의 정상적 지휘체계는 물론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찬탈하기에 이르렀다.

군내 각 요직에 배치된 하나회 회원들은 보안사 사령관이던 전두환의 뜻에 따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하는가 하면 그 이후 군의 핵심 요직에 올랐다. 또한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을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및 육군참모총장에, 황영시를 육군참모차장에 임명하도록 했다. 군사반란에에 참여한 하나회 회원들과 그것을 비호한 일부 장성들의 세력이 신군부로 불리게 된 동기다.

유신시대의 종말을 가져온 박정희의 사망은 유신독재에 순치돼온 언론인들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보다는 충격과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유신독재 미화하고 찬양해온 조선일보는 박정희 사망 이후에도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비호하는 논조를 보였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비등하는 민심의 분위기를 ‘유언비어’로 지목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10·26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인 10월 27일자 1면 통단 머리기사에 <박정희 대통령 유고>를 보도한 뒤, 10월 28일자 1면 머리에 올린 통단기사(「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2면 사설을 통해 유언비어의 확산을 우려하는 논조를 펼쳤다.

(…) 특히 모든 국민은 언행을 삼가 조그마한 실언이나 방언(放言)이 커다란 유언비어로 확대되어 민심을 소란케 하는데 뜻하지 않은 방조자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시기일수록 사람의 억측은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요, 실없는 말이 진언으로 해석될 가능성은 크다. 그런 상황은 어려운 시국을 수습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민심을 혼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조선일보는 10월 28일자 전체 지면 8개 면 중 7개 면을 통해 박정희 개인에 대한 칭송과 업적에 대한 찬사를 쏟아내고 있다. 「1917년 11월 14일~1979년10월 26일…민족중흥의 찬란한 금자탑 쌓고 비운에 가다」라는 제목 아래 그의 성품과 신조, 그리고 업적을 기리기에 여념이 없다. 10월 유신조차 「10월 유신 단행」으로 소개할 만큼 찬양 일변도이다. 그의 어록을 소개하며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어야겠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농민의 아들에서 국가원수까지」에 이르는 과정을 화보와 더불어 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0월 29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중간수사 발표가 있자, 이 사건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계획적 범행」이라는 제목으로 1면 통단 머리기사를 통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해온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28일 오후 중간발표를 통해 “이번 사건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전에 계획한 범행이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육군소장은 28일 오후 4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범행 동기는 평소 대통령께 건의하는 정책에 대해 불신을 받아 왔고, 자신의 모든 보고나 건의가 차지철 경호실장에 의해 제동을 당했을 뿐 아니라 차 실장에 대한 개인적 감정에다 업무처리 무능으로 인해 수차 대통령으로부터 힐책을 받았으며, 최근 요직 개편설과 관련, 자신의 인책해 임을 우려한 나머지 범행한 것”이라고 발표했다(10월 29일자 1면 머리기사).


신군부의 ‘선두주자’ 전두환

10월 29일 신군부의 선두주자인 육군소장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합수부) 본부장 자격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발표는 합수부의 박정희 피살 사건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두환이 10·26사건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발표한 것만 보아도 그 시각은 뚜렷이 드러난다. 시해는 신하가 왕을 살해했을 때 쓰는 말이다. 박정희 피살 사건에 대한 전두환의 가 치판단은 ‘신하’인 김재규가 ‘왕’인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전두환은 이미 육사 시절부터 사조직을 만드는가 하면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정치군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61년 대위 때 육사 생도들의 5·16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중앙정보부의 인사과장을 역임하는 등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인연은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1963년 박정희로부터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할 때 나보고 국회의원 나가라고 하는 것 안 나갔어. 장도영 사건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때였는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었어. 나 보고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라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하니,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라고 해.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 있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어. 박 의장이 ‘자네가 필요하다’고 해. 시간을 달라고, 의논도 해봐야겠다고 했더니 ‘남자가 하는 일에 상의는 무슨….’하더니 이틀 후에 오라고 해. 내가 윤필용 비서실장과 의논했어. 잘 말씀드려달라고 했는데 박 의장이 또 불러. 생각해봤냐고.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박 의장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지.”(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폴리티쿠스, 2012, 50쪽).

전두환은 그 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등을 거쳐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제1공수특전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1사단장 등을 지낸 뒤 1979년 박정희의 유신 치하에서 보안사령관에 올랐다. 전두환은 하나회와 함께 박정희의 친위대 역할을 했고 박정희 피살 사건 수사를 통해 권력에 다가갈 수 있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박정희는 계엄이나 전쟁 상황에서 보안사령관이 정보부나 검찰·경찰 등을 통괄할 수 있도록 하는 대통령령을 시달했다.

이에 따라 10·26 사건과 함께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 안에 합수부가 설치됐다. 합수부는 검찰, 군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헌병, 보안사 등 모든 정보수사기관의 업무를 조정·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들 기관장 회의에서 전두환은 언제나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10월 27일 새벽 전두환은 보안사로 수사기관장들을 불러 합수부 첫 회의를 열었고 그때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박정희야말로 전두환에게 유신독재정권을 넘겨준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조선일보는 박정희에 대한 엄청난 ‘추모 보도’와 함께 군에 대한 찬사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지금 국군은 실로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고 있다. 전 세계가 주시, 평가하고 있는 우리의 질서 있는 상황 진전의 기반을 튼튼히 지키고 있는 것이 일사불란한 계엄국군의 업무 기풍이라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 우리 국군의 30년사에서 두드러진 군사행동으로는 여순 반란 사건 진압이 있고, 6·25 동란 3년 간의 전투가 있고, 4·19 당시의 치안유지가 있고, 월남 파병에서의 선전을 들 수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 보여주고 있는 국군의 의연한 자세는 그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 말미암아 확립된 성장발전의 결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11월 1일자 2면 사설)

(…) 우리가 증오하는 것은 몰지각한 탈법행위이며 안정을 뒤흔드는 파괴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60만 우리 군을 절대 신뢰하고 그들을 지원하고 그들을 고무하자. 그들의 엄존으로 1백55 마일 모든 전선에 미동도 이상도 없음을 확인했다. 오히려 후방을 염려하는 우리 국군이었다. 그들에게 뒤를 돌아다봐야 하는 근심을 안겨줘서는 안 된다(11월 4일자 2면 사설).

당시 많은 외국 언론들이 신군부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1979년 11월 1일자 기사(「전두환 계엄사 합수본부장 , 한국의 실권을 잡다」)에서 일본 외무성의 소식통을 인용해 “한국은 현재 군부가 국정과 치안의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이 기사는 “육사 11기가 전후방 사단장을 맡고 있고, 합수부가 10·26 사건의 수사 책임을 지고 있다”며 전두환 소장이 실권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선일보의 군부에 대한 찬사의 배경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들로 볼 수 있다.

박정희의 국장 장례 절차가 끝나자 국무총리 최규하는 11월 10일 대통령 선거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시국에 관한 대통령 권한대행의 특별담화’를 통해 1980년 1월 25일에 끝나는 권한대행의 잔여 임기 이전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의견을 개진했다.
이 담화의 내용은 일단 유신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지 않고 기존의 틀을 유지하며 이른바 과정(過政) 대통령선거를 치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출된 대통령은 전 대통령 박정희의 잔여임기(1984년 12월까지)를 채우지 않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어 헌법을 개정한 뒤 그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신 철폐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의구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사설 등을 통해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의 담화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담화 발표 다음 날인 11월 11일자 2면 통단사설(「질서 있는 민주발전의 길」)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물론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는 정치발전의 방법론에 있어서 달리 의견이 있을 것으로 보지만,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고 안정과 질서 속에서 발전을 지속해 나가는 동시에, 혼란으로 북한 공산주의자에게 재침의 기회를 주지 않고, 동아시아 각국과 우방의 신뢰를 획득하는 최대공약수의 안전한 길은 이 길 밖에 없는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 대통 령 권한대행이 간곡히 당부한 것처럼 앞으로 3천7백만 전 국민이 ‘매사에 상호 자제’있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여기서 우리가 전 국민과 함께 인식을 새로이 하고자 하는 것은 최 대통령 권한대행이 영도하는 정부와 계엄사령부를 이끄는 군부가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이제까지 국정을 다스리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민심의 소재를 적확히 파악함으로써 이로(理路) 정연하고 공명정대한 업무 수행의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체육관 대통령’과 YWCA 사건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가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후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은 크게 반발했다. 11월 12일 ‘민주통일국민연합’ 공동의장단(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은 성명서를 통해 특별담화문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위해 민주헌법을 3개월 이내에 제정할 것, 최규하 대행체제의 즉각 사퇴와 과도정부로서 거국민주내각 구성, 민주화 인사들 석방과 복권·복직, 그리고 계엄령 해제 등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3권, 돌베개, 2003, 50쪽). 이밖에도 민주청년협의회 등 많은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통대 선거 반대를 천명했다. 11월 24일 발생한 ‘YWCA 위장 결혼식’은 10·26 이후 재야운동세력이 계엄령 하에서 집회와 시위를 주도한 첫 사건이었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11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계엄사령부는 26일 전 국회의원 박종태·양순직, 종교인 함석헌, 문인 김병걸 씨 등 96명을 지난 24일 오후에 있었던 ‘YWCA 결혼식 위장 집회’와  관련,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계엄사는 이들이 위장 청첩장 5백여 장을 돌리고 24일 오후 YWCA 강당에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밝힌 ‘11·10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반대하는 선언문 등을 낭독했으며, 유인물을 통해 서울 광화문 등 전국 중요 도시에서 일제히 궐기할 것을 선동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계엄사의 발표 전문을 그대로 보도했으나 해설이나 사설 등에서는 전혀 거론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없고 다만 계엄사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신문은 그러나 독자들이 많이 읽는 1면 하단의 <팔면봉>을 통해 “결혼식 가장한 불법집회. 법을 지키는 것만이 민주의 지름길인데….”라고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이 사건은 계엄사의 발표 3일 전에 일어났다. 집회에 참석한 민주인사들은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내란음모 등에 가담했음을 실토하라고 협박을 받았다(이들 중 17명은 1,2심 군사재판을 거쳐 1980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 10월부터 3년까지 선고받았다).

그들은 신군부의 야심을 감지했고 언론 역시 신군부의 정권욕을 알고 있었지만 보도 통제로 기사를 쓰지 못했다. 외신들만이 신군부의 출현을 예고하는 보도를 계속했다. 그런 와중에서 12월 6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가 제 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것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그날 오전 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새 대통령으로 최규하를 선출했던 것이다. 선거는 재적 대의원 2,560명 중 2천5백49명이 참석한 가운데 토론 없이 무기명투표로 진행됐는데 단독으로 입후보한 최규하가 찬성 2천4백65 표, 무효 84를 얻었다. 조선일보는 사설 12월 7일자 2면 사설에서 신임 대통령의 선출에 큰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배후의 신군부를 지지했다.

(…) 최규하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스스로가 제한을 가한 국정책임의 자리에 앉게 됐다. 최 대통령은 일반 국정을 개헌작업을 추진 마무리 짓고, 새 헌법에 의한 총선거를 거쳐 이른바 ‘제4공화국’을 탄생시키고, 전임 대통령의 잔여 임기 이전에 새 정부에 정권을 이양함과 함께 물러나야 한다는 조건을 안고 국정책임을 맡은 대통령이다. 그는 벅찬 2중의 책무를 짊어지고 비상한 때의 국정책임자가 됐다. 당면해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조건 속의 신임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정치발전’ 일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구상을 금명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동안 보도돼온 긴급조치 관계 처리 귀추 및 개각 작업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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