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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죽음과 조선일보의 유신체제 지키기조선일보 대해부 3권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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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2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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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청와대 옆의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총성이 울렸다. 천수를 다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머물듯하던 박정희가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1979년 10월 6일 저녁 궁정동 ‘안가’의 총소리

한 소설가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쓴 책에는 ‘그날 그때’의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김재규가 방 안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을 때 신재순(여대생이자 모델-인용자)이 차지철의 지명을 받고 노래를 하려고 일어서 있었다. 심수봉이 반주를 시작했고 신재순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다. 모기 소리만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두어 소절을 불렀을 때 옆에서 박정희가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신재순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대통령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음을 놓치고 갑자기 키가 높아졌다. 심수봉이 기타 반주를 멈추고 말했다.
“잠깐만요. 키 좀 맞추고 다시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제가 노래를 너무 못 불러서 그래요. 죄송해요.”
신재순이 울상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런데 각하께서 젊은 사람들이 하는 그 노래를 다 아시네요?”
김계원이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화제를 돌렸다.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방금 자리에 돌아와 앉은 김재규를 쳐다보며 말했다.
“김영삼이를 브라운 장관이 오기 전에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 한미 국방장관회의고 나발이고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야. 미국 놈들은 법을 어겨도 처벌하지 않나?”
박정희는 연거푸 양주를 몇 잔 마신 탓에 얼굴이 불콰했다.
“각하, 김영삼은 이미 총재직을 내놨고 국회에서 제명까지 시켰습니다. 구속까지 하면 이중 처벌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국민 여론이 나빠집니다.”
김재규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왔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간곡하게 전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부산 데모만 해도 그렇지. 선량한 시민보다 식당 뽀이나 똘마니가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선별 수리가 뭔지 알겠어? 다 신민당이 뒤에서 조종해서 하는 짓인데, 중정은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또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의 비행조사서나 움켜쥐고 있으면 뭐 하나? 딱딱 입건해야지.”
김재규는 화가 치밀었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싫어하는 말을 집요하게 반복함으로써 김재규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알겠습니다, 각하. 그러나 정치는 대국적으로 해야 합니다.”
김재규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로 가져갔다. 발터 권총의 딱딱한 손잡이가 손 안에 들어왔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발언을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재규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먼저 김계원에게 일갈했다.
김계원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김재규는 총구가 그를 향하는 줄도 모르고 끼어들 말을 궁리하고 있던 차지철을 향해 첫 발을 발사했다. 곧이어 김재규의 총구는 박정희를 향했고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김재규의 총알이 박정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저녁 7시 40분, 이 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총성 두 방이 어둠이 내려앉은 궁정동의 하늘을 뒤흔들었다(문영심, 〈김재규 평전-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시사IN북, 2013, 100~101쪽).

조선일보 10월 27일자 1면 머리에는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기사가 올랐다. 기사의 부제목은 「대통령 권한대행에 최 총리 / 유고 내용 심각…9시 반에 공식 발표 / 오늘 새벽 4시 기해…전국 비상계엄 / 제주도 제외」이다. 박정희는 10월 26일 저녁에 이미 숨졌는데 조선일보는 뒤늦게 정부 발표대로 ‘유고’라는 기사를 내보낸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10월 28일자 1면에 비로소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기사를 실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최규하는 “동요하지 말고 단결로 난국을 극복하자”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일보 10월 28일자 1면부터 7면까지에는 박정희에 관한 기사가 가득히 들어찼다. 일찍이 한국 현대사에서 그 어떤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죽음에 대해서 신문이 그토록 거창한 보도를 한 적은 전혀 없었다. 관련 기사들의 제목만 보아도 그것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 2면- 「사설: 이 중대한 순간에 / 박 대통령의 서거에 즈음하여」 「전 세계에 충격 / 박 대통령 서거 / 각국 수뇌들 조의」 「또 흉탄에 가시다니…눈물 / 비통 속의 공화·유정」 「나라 위해 불행한 일 / 신민당사에도 조기」
· 3면-「대통령 박정희 인간과 치적 / 큰 자취 18년 반 /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민족 중흥의 찬란한 금자탑 쌓고 비운에 가다」 「성품과 신조 /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 / 나의 행동은 후대의 사가가 판정해 줄 것이다 / 하면 된다 강력한 추진력 / 막걸리 즐기는 서민 풍모 / 가뭄 땐 빗소리 기다리며 뜬눈 지새고」
· 4면-「박정희 대통령 62년의 생애(화보)」 「주요 연표 /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정신과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밖에서 본 박 대통령 / 용기 있고 위대한 정치가…비전 지닌 영도자 / 원칙에의 충실성…행동의 확고성…말의 진실성에 감명 / 북한과 대화를 시작한 것은 한국 문제 해결에 큰 기여」
· 5면-「농민의 아들에서 국가원수까지(화보)」 「어록 /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어야겠다 /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하더라도 가장 귀중한 것은 인간 / 우리에게 있어서…남북대화는 숙명적인 시련이다 / 성실하게 노력하면 사는 사람 대접받는 사회 건설이 정의」
· 6면-「박 대통령의 마지막 하루 / 공사 경과보고에 이례적인 박수 보내 / 반나절 후의 비운 모르고 삽교호 준공식 참석…귀경 / 도고온천서 오찬 들며 수행원과 농담도」 「청와대 빈소 / 각계 인사 분향…유덕 추모 / 김계원 비서실장 면목 없다 고개 떨궈」 「박 대통령 향리 주민들 / 조기 내걸고 통곡」
· 7면-「이런 변이 있나…전국이 경악 / 선잠 깬 유고…믿어지지 않아 / 일찍 귀가…택시 잡기 어려워 / 나라 장래 걱정…혼란 없이 정상 근무 / 도심 유흥업소는 자진 휴업하기도」 「일손 놓고 방송 신경 / 관가, 이 박사 하야 때도 마(魔)의 26일」


‘추악한 박정희’ 대신 ‘영웅 박정희’ 띄우기

이 책의 거의 모든 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박정희의 상습적 헌정 파괴와 쿠데타,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수시로 선포한 긴급조치와 비상사태, 그리고 집권 18년 동안 헤아릴 수도 없이 자행한 인권 탄압과 반민주·반민족적 행위들에 관해 조선일보는 완전히 입을 막고 ‘죽은 박정희’를 영웅화 하는 데 앞장섰다. 생시의 박정희는 조선일보가 극도로 미화한 것처럼 훌륭한 인간이고 청렴한 대통령이었던가? 그의 난잡한 ‘밤의 향연’을 보기로 생활의 실상을 살펴보자. 그는 감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하던 날 저녁에도 그렇게 질탕한 ‘주색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대통령이 술을 좋아하고 그 자리에 여자가 있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을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해왔다면 그것이 과연 보호 받아야 할 프라이버시인가. 더구나 박정희의 그런 술자리 여자는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연예계와 요정 마담들을 동원해 조달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항상 내세우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서 일반에게 베일에 가려진 기밀부서다. 그런 허울 좋은 비밀보호 명분으로 국민의 눈을 가린 채 대통령의 은밀한 술판을 무분별하게 벌인 것이다. (…)
유신정권 말기 박정희의 비밀요정 행사는 지나치게 잦았다. 대통령이 혼자서 하는 소행사나 측근 권력자 서너 명이 함께하는 대행사가 한 달이면 열 차례씩이나 열렸다. 그러니까 사흘에 한 번 꼴로 주연을 벌였다는 얘기다. 그때마다 외부에서 술시중 드는 여자들을 불러왔다. 대통령의 주연 담당이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휴일도 없을 만큼 하루도 쉴 수 없었다. (…)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술자리 여인들에게 주는 화대(花代)는 지금 돈 가치로 쳐서 보통의 경우 1백만 원 정도였고 유명세를 계산해 더 보태는 경우 2백만 원이었다. 일반인들이 상상하기보다는 꽤 짠 편이었다. (…)
물론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의 유명한 ‘마담’들이 거느리는 화류계 여인 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 하는 자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그런 자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마담이 장충도 모 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로 뜨기 전인 2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신참들은 김 마담으로부터 은밀한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쾌히 승낙했다. 이들은 그 자리에 갔다 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그것으로써 연예계의 정상에 한 발 다가간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
술자리 여자를 최종 심사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요정에 소속돼 있는 여자들은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고위층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연예계 지망생이 가장 무난한 대상이었다. 그 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 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칙은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단골을 만들면 보안상이나 기타 부담스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 대통령이 국산영화를 시사관람 하거나 텔레비전 연예프로 등을 보다가 마음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 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러왔다(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책보세, 2012, 66~71쪽).

조선일보의 박정희 영웅화는 11월 3일에 치러진 ‘국장(國葬)’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국장 당일 조선일보 2면에 실린 사설(「박정희 대통령을 보내며」)은 평서문이 아니라 경어체로 씌어져 있다.

오늘 3천6백만 국민은 국장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을 국립묘지에 모십니다.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 드리며 삼가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1917년에 태어나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고인은 실로 ‘운명의 인(人)’입니다.
그 전반생(前半生)은 나라 잃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였고, 그 후 반생은 분단된 국토에서 살아야 하였습니다.
5·16으로 ‘불행한 군인’을 자처하며 국정의 책임을 한 몸에 지님으로써 ‘운명의 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인’으로서 살아온 이 20년을 우리의 유구한 역사 속의 ‘운명의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고인이 이룩한 업적은 많고 뚜렷합니다.
농촌을 일으켜 수천 년의 고질인 ‘춘궁(春窮)’을 없이 하고 농민의 의욕을 북돋아 농가의 소득을 증대시켰습니다.
국토의 근대화를 밀고 나가 처처에 공장을 세우고 일할 사람에게 일을 주었으며 수출에 힘써 후진국을 중진국의 수준으로 올려놓았습니다. 1960년에 80 불이었던 국민소득은 이제 1천  5백 불로 늘어났습니다. (…)
이제 고인은 3천6백만 국민과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역사 속의 ‘추억의 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어져야 합니다. 현재를 살며 미래를 향하여 그것을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 3천6백만 국민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을 애도하는 마음은 앞으로 이 나라와 이 겨레를 위하여 더욱 슬기롭게 나아 가야 하는 강한 의지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
고인의 서거는 우리 국민이 얼마나 정이 깊고 착한 백성인가를 새삼스럽게 깨우쳐주었습니다. (…)
정이 깊은 국민은 착한 국민입니다. 착한 국민은 이제 강한 국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신 고인이 3천6백만 국민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유가족을 생각하면 또 한 번 애달픈 슬픔에 빠집니다.
그러나 착한 국민의 깊은 정으로 뿌려지는 눈물로 하여, 결코 유가족은 외롭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유가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동시에, 저마다의 슬픔을 달래야 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고이 가십시오.

사설은 신문사가 지면에 공식으로 내보내는 의견이다. 주필 또는 논설주간이 논설위원들과 날마다 사설의 주제를 정해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을지를 정하면 한 사람이 집필을 하게 된다. 사설에 필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회사의 공식 견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사설은 고인이 된 박정희에 대해 조선일보사가 바치는 ‘조사(弔辭)가 된다.

조사라고 이해하고 너그럽게 읽어 넘기려 해도 이 사설은 사실 왜곡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박정희는 ‘천황 폐하’를 향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라는 혈서를 쓴 뒤 일제의 지배를 받던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그는 그 학교 과정을 마치고 다시 일본 육사에 편입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가 ‘골수 친일파’라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조선일보 사설은 “그 전반생은 나라 잃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였”다고 썼다. 청년 박정희는 나라 잃은 백성이 아니라 ‘천황 폐하의 충성스런 신민(臣民)’이었다. 그의 나라는 바로 ‘대일본제국’이었다는 뜻이다.

위의 사설은 3천6백만 국민이 ‘추억의 인’이 된 박정희가 이룬 역사를 이어받아 “현재를 살며 미래를 향하여 그것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사주나 발행인, 그리고 논설위원들이 박정희의 유지(遺志)를 떠받드는 것이야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3천6백만 국민 모두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유신독재와 맞서 싸우다 죽음, 고문, 투옥과 인권 유린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정희가 남긴 유산을 물려받으라는 것은 모욕일 뿐 아니라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조선일보의 논설진은 박정희가 외치던 ‘국민총화’를 조사를 통해 앵무새처럼 외친 것이다.

조선일보가 박정희에게 바친 ‘조사’는 고인에 대한 진정한 추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의 죽음 이후 붕괴될 수밖에 없는 유신체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조선일보는 1961년의 5·16 쿠데타 이래 박정희의 독재를 당당하게 비판한 적이 거의 없었고, 그에게서 유형무형의 특혜를 받아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게다가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마땅히 응징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사주와 간부사원들이 그런 일을 앉아서 당할 리는 만무했다.


김재규는 반역자인가 혁명가인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육군소장 전두환)는 11월 6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이 사건은 주범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은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은 전혀 없었다. 주범 김은 지난 6월부터 거사계획을 단독으로 구상했으며 거사 후 즉각 각의를 소집, 계엄을 선포하여 국민이 애도하는 정도에 따라 자신이 시해했다는 사실을 밝히거나 은폐하고 군부는 국가방위 임무를, 중앙정보부는 정국 수습과 정책 수행 임무를 전담케 한 후 현 체제 하에서 집권할 것인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에 출마할 것인지를 따로 결정할 계획이었다.”(조선일보 11월 7일자 1면)

조선일보는 같은 날자 2면에 실린 「밝혀진 10·26의 전모 / 이제 유언비어는 있을 수 없다」라는 사설을 통해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를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모든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 먼저 계엄당국의 신속한 조치와 처리 및 사건 진상의 진실된 공개에 이르기까지의 노고와 그 성실한 자세에 우리는 국민적인 치하를 보낸다. 이로써 구구했던 억측과 낭설은 깨끗이 일소되게 됐다.
몽상도 못할 미증유의 사건이었던 만큼,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가지가지 추리가 난무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겠고, 그것은 계엄질서가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불안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6일의 계엄당국 발표는 발표 내용의 기승전결이 일관해서 이치에 그대로 부합되는 석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발표 후 제한을 두지 않는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낱낱이 해명해주었다. (…)
놀라움과 함께 우리는 한 가닥의 인간적 비애를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국가원수를 때를 가리지 않고 지키고 보필해야 할 지근 측근자, 그리고 권력의 핵심에 있던 자들의, 그 추악한 배신성과, 비겁하고 비열한 행동성에 우리는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으로서의 비애를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차대(次代)들에게, 우리의 후세들에게, 우리의 일부였던 그들의 행동성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백일하에 밝혀졌다. 이제부터는 ‘10·26’ 시해 사건에 관련된 일체의 유언비어는 있을 수 없다. 북괴의 동태를 응시하면서 아직도 우리는 위기의 순간을 지나가고 있다. 이 이상의 낭설 유포는 이 나라의 존립과 이 나라의 이념을 거부하는 분자들의 악랄한 흉계이거나 그것에의 동조가 된다. 우리는 도리어 후방을 경계하는 우리 국군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거국적인 사회체제로 정부당국의 제반 노력에 협조하면서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만 모든 것을 다져나갈 때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현행범’이라는 사실은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 사설이 “발표 내용의 기승전결이 일관해서 이치에 그대로 부합되는 석연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박정희의 ‘친위대 간부’였던 전두환이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가 마치 각본을 쓰듯이 이치에 맞게 ‘기승전결’을 맞추었다는 뜻인가? 그렇게 단정하려면 적어도 계엄령 속의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인 합동수사본부의 조사관들이 김재규를 고문했는지 여부를 재판 과정에서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위의 사설은 ‘구구했던 억측과 낭설’ ‘시해 사건에 관련된 일체의 유언비어’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그런 것들이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로 일소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박정희의 목숨을 빼앗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박정희를 추종하던 세력과 보수언론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것을 ‘반역적인 시해(弑害) 사건’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혁명’을 위해 박정희를 쏘았다고 진술했고, 그의 변호인들, 그리고 학계와 종교계의 여러 인사들은 그가 단순한 ‘국가원수 살해범’이 아니라 민중의 거대한 항쟁에 몰려 유신체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박정희 정권의 유혈 진압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재규는 군법회의에서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전에는 유신체제를 가로막고 있는 핵심이 각하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전체가 각하입니다. 보십시오. 각하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바로 대통령 권한 대행께서 바로 민주주의 하겠다고 국민에게 공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혁명이 없었으면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었겠느냐, 따라서 그분도 혁명을 인정은 하면서도 시인을 안 한다 이것뿐이죠. 그분도 평소 국민의 생각을 알기 때문에 제일 먼저 내놓은 것이 자유민주주의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 유신체제가 계속되는 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막대한 희생자가 난다, 이건 불을 보듯 뻔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저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고, 동향이고, 동기생이고, 이런 관계이지만 그 순간에는 내가 마음을 야수의 마음으로 바꿔서 행동했습니다(〈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137~138쪽).

김재규는 2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한 분을 희생시켰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고, 역사적으로 엄청난 일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다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함세웅(신부)은 〈김재규 평전-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의 「추천사」에서 김재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추모했다.

‘박정희의 죽음’만이 한국사회의 희망이라는 확신을 가진 김재규 장군과 부하들의 의지는 재판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저희들이 느끼는 연민조차 이분들은 정중하게 거절하였을 것 같은 당당함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추구했던 가치는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공동선(共同善)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권력과 부패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권력자들의 오만함과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 이성을 마비시킨 부도덕과 부정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친일 반민족, 군부독재 반통일분자들은 침략국 일본이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고, 박정희 유신독재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지금도 펼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도 살인자가 내놓은 몇 푼의 돈을 자선이라고 예찬하는 것과 같은 모순입니다. 김재규 장군은 부마 항쟁의 원인이 개발독재를 통해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에 희생당한 서민들의 분노라고 법정에서 진술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가장 심각한 양극화 문제는 개발독재 시기 노동자와 사회구성원 모두를 희생으로 삼아 재벌에게 인적·물적 지원과 토대를 만들어준 박정희 군부독재의 불의한 정책 때문입니다. (…)
4·19 민주혁명정부를 전복시킨 5·16 군사반란의 어설픈 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리고 아픕니다. 유신의 핵을 제거했음에도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여 광주학살을 자행한 일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김재규 장군은 부마 항쟁 현장의 확인자입니다. 우리가 만일 김재규 장군을 살렸다면 광주의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재규 장군은 광주 항쟁 기간인 1980년 5월 24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김재규 장군은 부마 항쟁의 동지이며 광주 항쟁의 희생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김재규 장군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6~7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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