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소식
응답하라 1975〈안형준 방송기자연합회 회장〉
  • 관리자
  • 승인 2019.05.14 10:30
  • 댓글 0

Scene #1

새벽 3시 15분, 강력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와~와’, ‘쿵! 쿵!’

각목을 든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고함을 치며 건물 계단으로 뛰어오른다.

해머로 공무국 벽을 부수고, 산소용접기로 철문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청년들이 휘두른 각목에 PD 한 명이 쓰러지고, 아나운서는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간다. 1975년 3월 17일, 서울의 한 언론사에서 농성 중인 직원들을 상대로 벌어진 일이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는 ‘동아일보 농성사원 축출’ 기사를 보도했다.

‘사측이 동원한 150명의 청년과 농성 사원들 간의 충돌로 적어도 5명 이상의 기자가 부상을 입고, 그중 2명은 중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을 수습하려던 송건호 편집국장은 끝내 사표를 제출했다. 이번 분규로 쫓겨난 80여 명의 기자와 사원들은 현재 교회와 반정부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1974년 10월 24일 ‘언론인을 불법 연행·감금하지 말라!’는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촉발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건의 한 장면이다. 1975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DBS) 기자와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13명은 해직자의 길에 들어섰다. 여섯 달 동안 복직 투쟁을 하던 해직자들은 파탄 난 가정경제를 살리기 위해 각자도생을 선택한다. 하지만 해직자 중 상당수는 독

재정권의 방해로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없었고, 일부는 민통련과 민언련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에 헌신한다.

1974년 10월 24일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모습. 사진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Scene #2

12년 뒤인 1987년 1월 영등포교도소 면회실.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된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관이 가족을 만나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버지, 저 억울합니다. 저는 다리만 잡았어요. 죽인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순식간에 검은 양복의 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친다. 중앙정보부와 남영동 대공분실 요원들이다. 죄수복을 입은 경찰관과 가족들이 반대 방향으로 급히 끌려나간다. 중앙정보부 요원은 교도관이 쓴 면회 대화 내용을 거칠게 뺏어 찢어버린다. 잠시 후 교도소 보안계장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무자비하게 짓밟힌다. 이런 상황을 수감 중인 이부영 전 동아일보 기자가 파악한

다. 그는 마침내 보안계장으로부터 찢어진 면회기록을 넘겨받는 데 성공한다. 박종철 열사 물고문 치사사건의 전모는 이렇게 메모로 정리돼, 당시 유명했던 주간지 사이에 숨겨져 세상 밖으로 나갔다.

영화 ‘1987’에서 주간지를 전달하는 역할은 여대생(김태리)이 맡았다.

동아투위 출신인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은 1986년 5.3 인천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복역 중이었다. 해직된 기자가 역사에 길이 남을 특종보도를 주도한 것이다. 그는 지난 1월 ‘자유언론실천재단’의 두 번째 이사장에 선출됐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은 동아투위와 80년 해직 언론인 등이 공정언론 실현을 위해 2014년에 만든 단체다.

Scene #3

1979년 4월 30일 서울형사지법 대법정. 수의를 입고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일어나며 목청을 높인다.

“우리는 이런 불공정한 재판은 받을 수 없습니다. 법정을 나가겠습니다!”

법원 경위들이 달려들어 그를 잡아 앉히자 방청석에서 구호가 터져 나온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거부한 젊은이는 자유언론실천재단 초대 이사장인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다. 그의 두 번째 구속은 1978년 10월 24일에 발행한 소위 ‘민권일지 사건’ 때문이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일에 발행한 ‘동아투위 소식’은 제도권 언론이 외면한 125건의 ‘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사건 일지’가 담겨 있었다. 목숨을 걸고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한 목사님과 민주인사들의 외침도 빼곡하게 실렸다. 현직 기자들이 외면한 팩트를 해직된 기자들이 전하려 애쓴 것이다.

민권일지 사건으로 안종필, 임채정, 김종철, 정연주 등 7명의 동아투위 위원들이 긴급조치 위반이란 명목으로 1년 반에서 2년 반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칠순을 넘긴 후에도 공정언론을 위해 월급을 포기한 후배들 앞에 간간이 나타났다. 2012년 4월 한 언론사 파업집회, 낡은 버버리를 입은 그는 사자후를 터뜨린다.

“여러분은 언론인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월급만 바라는 직장인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그 기로에 있습니다. 지금의 노력은 언론자유의 기틀을 마련하는 소중한 저항이 될 것입니다.”

그의 뜻을 따른 후배들은 그 해 6개월 동안 파업을 이어갔다. 김종철 위원장은 자유 언론을 위한 고행길에서 세 번의 실형을 살았다. 취업도 할 수 없고 여권도 만들 수 없었으며, 경찰에 연행된 횟수는 기억할 수도 없다고 한다.

동아투위 선배들은 한국의 1970~80년대처럼 탄압받는 언론인이 곳곳에 있음에 주목한다. 동아투위가 주축인 자유언론실천재단은 독재정권에 맞서는 아시아 언론인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권위주의 정권을 비판하다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살해되거나 가택 연금된 인도네시아 언론인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직접 취재했다. 말레이시아 독재 권력이 식민지 유산을 그대로 답습해 언론자유를 탄압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해직 선배 언론인들의 이런 노력은 ‘현장르포 : 분투하는 아시아의 자유언론’이라는 단행본으로 결실을 보았다.

방송기자연합회는 지난해부터 월말에 열리는 ‘이달의 방송기자상 시상식’에 동아투위 선배를 초청한다. 특종으로 보도한 후배들의 수상을 축하하면서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기자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일본 정세와 미ㆍ일 관계를 고려해 남북문제를 풀어야 한다.’

젊은 기자 중 상당수는 1975년 동아투위 사건을 책에서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에게 칠순을 넘긴 해직 언론인들이 과연 어떻게 비칠까?

동아투위 위원들 중 일부는 세상을 떠나셨고, 팔순을 넘겼거나 거동이 불편한 분들도 적지 않다. 언제까지 동아투위 선배들이 시상식에 참가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3월 17일이면 어김없이 신문사 앞에서 손팻말을 든다. 폭력으로 쫓겨난 바로 그 날이다. 이 연례행사는 44년째 계속되고 있다.

내년이면 동아일보 창간 100년이다. 1919년 3•1운동의 열망을 모아 탄생한 신문이다. 동아일보는 1936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고, 그 이후 오랫동안 ‘민족의 신문’이었다. 100주년을 맞이하는 동아일보가 화합의 물꼬를 트는 모습을 꿈꿔 본다.

지난 3월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직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동아투위 44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이글은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언론 사람>(2019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언론 사람>PDF 파일 보러 가기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