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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민주구국선언’ 사건조선일보 대해부 3권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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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0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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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긴급조치 9호로 온 국민의 눈과 입과 귀를 막아버렸는데도 반유신독재투쟁은 잦아들지 않았다. 9호가 발동된 지 9일 만인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학생들이 관악캠퍼스에서, 4월 11일 시국성토대회에서 할복 자결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의로운 죽음 암장이 웬 말이냐”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운 학생들은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 추진위원회’ 명의로 된 「조시」를 읽고 「반독재선언문」을 낭독했다. 집회에 합류한 학생 1천여 명 가운데 5백여 명은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나갔으나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당했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총장 한심석이 사임하고 치안본부장과 서울 남부경찰서장이 보직해임을 당했다. 집회와 시위에 참가한 서울대생 3백여 명은 경찰에 연행되어 그 가운데 56명이 구속되고 2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오둘둘(5·22) 사건’은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이래 단일 대학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구속된 반유신투쟁으로 기록되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208~209쪽).


상업주의의 극치로 치달은 조선일보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적은 전혀 없었지만,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1975년 5월 13일부터 그가 김재규에게 죽음을 당한 1979년 10월 26일까지 4년 5개월 남짓이 가장 캄캄한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6월 7일 대통령령 제7645호로 학도호국단 설치를 공표하며 학원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해갔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가 자동적으로 해체되었고, 각종 서클도 함께 해체되어 자율적인 학생활동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1월 서울대 1·2학년생들이 학도호국단 사열식에서 ‘받들어 총’에 대해 야유를 보내자 청와대가 사열식을 다시 실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시기 대학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웃지 못할 사례라 하겠다. 대학뿐만 아니라 언론도 철저한 통제를 받아 기성 언론은 사회비판 역할은커녕 사실보도라는 기본적인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였다(같은 책, 210~211쪽).

그런 상황에서 모든 신문과 방송은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될 가능성이 있는 기사와 논설은 단 한 건도 실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언론매체들 간의 경쟁은 ‘장사속’을 중심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앞서나간 언론사가 바로 조선일보였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는 그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조선일보 1973년 12월 15일자 사보는 발행 부수가 56만부를 기록, 정상의 터전을 굳혔다고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전했다. 라이벌 지(紙)보다 15만부 앞질렀다는 사실과 효과적인 판매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을 덧붙였다. 조선일보는 1973년 말에서 1974년 초부터 발행 부수 선두 탈환을 공공연히 공표했다. 매체연구 분석기관인 미국 ASI가 1974년 2월 20일부터 3월 10일 사이에 1천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2차 주요 매체 실태조사’ 결과도 서울의 경우 조선일보의 정기구독률이 28.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창간 56주년을 맞은 1976년 3월 5일부터는 새로운 목표로 ‘1천만 부 돌파’를 설정하고 총력전을 폈다. 당시 조선일보 부수는 69만1천부였다. 회사는 1976년 신관 신축과 고속 윤전기 4대를 추가 도입해 모두 11대의 고속 윤전기를 보유, 시간당 120만부의 인쇄능력을 갖추면서 1백만 부 돌파를 위한 인프라를 갖췄다.
조선일보는 1백만 부 돌파 의지를 내부적으로 다지기 위해, 1976년 11월 1일부터 ‘거사적인’ 구독 권유 운동을 3개월 시한으로 펼쳤다. (…) 1백만 부 돌파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은 1978년 들어서였다. 이 해 1월 1일자 사보에서 전무이사 유건호는 현재의 부수가 90만 부라고 밝히고 “올해 반드시 1백만 부를 돌파해야 한다”며 ‘1백만 부 78작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1978년에도 1백만 부 달성은 이루지 못했다. (…)
1백만 부 달성의 목표는 마침내 1979년 3월 달성됐다. 3월 5일 창간 59주년 기념식에서 사장 방우영은 공식적으로 “사원들의 피와 땀으로 1백만 부 고지를 달성했다”고 선언했다. 3월 5일자 발행 부수는 1백만4천7백부였다. 1976년 3월 56일부터 진군에 들어간 ‘1백만 부 목 표’는 이렇게 정확히 3년 만에 달성됐다. 원래 목표였던 1980년보다는 1년 앞당겨진 것이었다(275~277쪽).

조선일보는 박정희가 죽기 7개월 전인 1979년 3월에 ‘1백만 부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글이나 민주화운동권의 반유신투쟁을 전하는 기사는 전혀 싣지 못하면서 조선일보 지면을 무엇으로 채웠길래 그렇게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나 농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유한계층’이나 퇴폐적 생활을 하는 남녀의 행태를 그린 상업주의적 소설을 연재하고, 〈명기열전〉 같은 봉건시대의 ‘야담’을 내보냄으로써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이 박약한 독자들을 끌어들여 ‘1백만 부를 돌파’한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운 일인가?


‘암흑 속의 횃불’ 3·1 민주구국선언

1976년 5월 22일에 일어난 서울대의 ‘오둘둘 사건’ 이후 학생운동권은 극도의 침체 상태에 빠졌다. 몇몇 대학 학생들이 간헐적으로 지하유인물을 배포하거나 반유신투쟁을 시도하기 전에 발각되어 구속을 당하는 사건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 상태로 1975년이 저물고 1976년 봄이 왔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 2부로 나뉘어 진행된 이날 기념미사는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가톨릭 사제들이 공동 집전하고, 신·구교 관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제1부에서는 강론을 담당한 김승훈 신부가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 즉, 유신헌법의 억압성, 사회기강 문란, 심각한 경제 문제 등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제2부에서는 신·구교 합동기도회가 개최되어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하였고, 이어 문정현 신부가 김지하 시인 구명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편지를 낭독하였다. 뒤이어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은 공동 명의로 발표한 선언문에서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서 국내외로 민주세력을 키우고 규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1인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야의 정치적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재야인사들은 긴급조치 철폐, 의회정치 회복, 사법부 독립 등을 촉구하고, 성장 위주의 경제 개발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민족통일이 시대적 당면과제임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민족통일이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임을 분명히 하였다. 끝으로 박정희 정권은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박정희 정권은 대외적으로 민주국가들로부터 신임을 잃고, 대내적으로 민주주의 파국과 경제 파탄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219~220쪽).

「민주구국선언」은 박정희는 물론이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9호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전 대통령 윤보선과 야당 지도자 김대중, 재야를 대표하는 함석헌 등이 서명한 그 선언은 박정희뿐 아니라 유신독재체제의 핵심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야말로 긴급조치 시대의 암흑을 깨뜨리는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놀라운 사건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긴급조치 9호 때문’이라고 이해해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검찰, ‘민주구국선언’을 ‘정부 전복 선동’으로 발표

민주구국선언과 관련해서 3월 1일 자정 무렵 이우정, 이튿날 문동환과 윤반웅, 3월 3일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해동, 이종옥(이해동의 부인), 문호근(문익환의 장남), 김석중(이문영의 부인)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3월 5일에는 이태영, 6일에는 함세웅과 김승훈, 8일에는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이 연행되었고, 9일에는 윤보선이 면담조사를 받았다. 언론에는 이런 사실이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서울지검은 3월 10일,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공식 발표를 했다. 조선  일보는 3월 11일자 7면에 실린 3단 기사(「일부 재야인사 정부 전복 선동 / 관련자 11명 구속 / 명동성당 3·1절 기념미사 이용」)는 검찰의 발표를 원문 그대로 옮겼다.

서울지검은 지난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 행사 때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 발생, 관련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했다고 10일 오후 5시 30분 발표했다. 이들 가운데 구속입건 된 사람은 김대중 씨, 함세웅 신부 등 11명, 불구속 입건된 사람은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씨 등 9명이다.
· 검찰 발표 전문
(…) 이들 일부 재야인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반정부인사들을 규합하여 그동안 각 계열별로 ‘민주회복국민회의’ 또는 ‘갈릴리교회’ 등 종교단체 또는 사회단체를 가장한 불법단체를 만들어 각종 기도회, 수련회, 집회 등 종교행사를 빙자하여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 철폐’ ‘정권의 퇴진 요구’ 등 불법적 구호를 내세워 정부 전복을 선동하였다.
심지어는 외세를 이용하여 이 같은 비합헌적인 정부 전복 선동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대한민국에 대한 각종 비방과 모함을 자행케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현 시점에 있어서 국가안전보장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다수 국민이 이들의 불법적 선동에 현혹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국민으로부터 아무런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임이 명백해지자, 이들은 초조해진 나머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이 주동이 되어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등의 동조를 받아 춘계를 기하여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

조선일보는 3월 14일자 2면에 검찰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통단사설(「한국민의 생각·1976 / 3·1절에 있은 정부정복 선동 사건에 대하여」)을 내보냈다.

(…) 작년의 월남 공산화가 없었던들 어쩌면 국민은 느닷없다는 인상을 받지 않고, 또 3,4월이면 부는 계절적 정치현상으로 받아들였을는지 모른다. 그 주장도, 그 주장을 하고 나선 인사도 이제까지 일관하여온 내용이요, 관련되어온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
사건에 관련된 인사들을 살펴보면 연로하거나 이른바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런 인사들이 갖기 쉬운 생각은 세속을 사는 국민을 가르친다거나, 잠을 깨운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아집과 독선에 흐르기 쉽다. (…)
만약 정치가 종교를 이용했다면, 거기 관련한 정치인은 종교를 현실정치의 차원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종교의 신성성을 모욕했다고 할 수 있으며, 종교가 정치에 간섭했다면, 거기 관련된 성직자는 정치를 우습게 보는 동시에 스스로 종교의 가치를 저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
(…) 가톨릭교와 개신교를 위해 주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에는 국교가 없고, 3천5백만의 국민은 모두가 그 신자는 아니며 오히려 비신자가 더 많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
그토록 끈질기게 정치에 간섭한 종교가 오늘날 어떤 꼴이 되었으며 그토록 정력적이던 성직자와 사원과 신앙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여기서 성직자의 타이름을 듣지 않았으니까 그런 꼴이 되었다고 한다면 아전인수의 비현실적 추상론밖에 되지 못한다. 적과 싸우는 나라에서 고고하기 짝이 없는 진리와 민주주의만 내세워 그토록 극성스럽게 세속의 현실정치를 몰아친 결과는 민심의 혼란을 일으켜 국민 사기를 떨어뜨리고 일체감과 국제적 신뢰를 잃게 함으로써 나라와 민주주의와 종교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다만 투쟁적인 성직자 몇 명의 허명(虛名)만 남기고, 아니 그 허명조차 남길 역사도 상실한 것이다. 스스로 불타 죽은 소신(燒身)자살의 순교인들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 (…)
이런 글의 말미에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는 형식적인 말도 이제 맹랑해지고 말았는데, 그것은 사건을 일으켜 들어갔다 나오면, 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이 몇 년 동안의 무수한 반복 때문이다. 그러니 한없는 관심을 보내기에는 이제 국민들도 고달파졌고, 달리 할 일도 많은 것이다.

이 사설은 베트남전쟁의 역사적 진실과 그 나라 불교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극단적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언론인 이영희가 일찍이 1973년에 발표한 글을 보면 이 ‘극단적 무지’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고 딘 디엠이 집권한 지 4년 만인 1959년에는 민중, 특히 농촌에서의 반정부 활동은 반란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농촌폭동은 초기의 산발적인 사이공 정부 관리, 밀정, 지주들에 대한 테러와 살해에서 조직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더욱 잔인해지고 대규모화하여 갔다. 1957년쯤부터는 농민의 테러와 정부에 의한 이들의 말살정책이 상승 작용을 이루면서 격화되었다. (…)
디엠 정권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1961년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의 사회적 개혁을 디엠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디엠과 기득권 계급은 이를 사보타지했다. 케네디는 1962년 2월 군사적 뒷받침을 더욱 강화하는 대가로 11개 항목의 개혁안을 들이댔다. (…)
4월부터 ‘평정계획’이 시작되었다. 농민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하는 ‘전략촌’의 설치는, 디엠이 군부 쿠데타로 살해된 1963년 가을까지 전국적으로 8,687 촌에 달했다. 조상 전래의 집에서 쫓겨나 포로수용소와 같은 강제집단수용소에의 이주는 농민의 반정부 감정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
이와 같은 사태 속에서 일어난 1963년 6월 11일의 노불교승(老佛敎僧)의 자살과 불교도의 비폭력 반정부투쟁은 마침내 케네디로 하여금 디엠의 제거를 결심케 하기에 이르렀다. 비폭력 불교도 집회에 대한 군대에 의한 살상은 유엔 총회의 의제로까지 되었다. (…) 불교도의 항의집회에 대한 남베트남 정부의 피비린내 나는 군대에 의한 탄압은 11월 1일 돈 반 민 장군에 의한 쿠데타를 촉발, 디엠 형제가 살해되고 9년간에 걸친 독재적 정권의 막을 내리게 했다(〈전환시대의 논리〉, 1974, 창작과비평사, 294~295쪽).

쿠데타 이후에도 남베트남 권력자들의 부정부패, 사회적 혼란, 지나친 미국 의존 등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불교 승려들이 잇달아 분신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부처의 뜻에 따라 비폭력으로 불의의 권력에 저항하던 남베트남의 불교도 다수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한 승려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바쳤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사설은 남베트남의 승려들이 “적과 싸우는 나라에서 고고하기 짝이 없는 진리와 민주주의만 내세워 그토록 극성스럽게 세속의 현실정치를 몰아친 결과는 민심의 혼란을 일으켜 국민 사기를 떨어뜨리고 일체감과 국제적 신뢰를 잃게 함으로써 나라와 민주주의와 종교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투쟁적인 성직자 몇 명의 허명만 남기고, 아니 그 허명조차 남길 역사도 상실한 것”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에는 정치인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이, 종교인으로는 함석헌, 윤반웅, 안병무, 서남동, 문동환이 참여했다. 그리고 선언문 작성과 ‘3·1절 기념미사’를 준비하는 작업에 참여한 종교인 문익환, 이해동, 김승훈, 함세웅이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기에 재야의 정치인과 종교인은 분리된 ‘둘’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하나’였다. 누가 누구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민주화운동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사설은 가정법에 기대어 “만약 정치가 종교를 이용했다면 (…) 종교의 신성성을 모욕했다고 할 수 있으며, 종교가 정치에 간섭했다면, 거기에 관련된 성직자는 정치를 우습게 보는 동시에 스스로 종교의 가치를 저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의 사설이 공동체를 위한 인간의 희생정신과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이념에 무지하다는 사실은 결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는 형식적인 말도 이제 맹랑해지고 말”게 된 이유는 “사건을 일으켜 들어갔다 나오면, 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이 몇 년 동안의 무수한 반복 때문”이라는 폭언이 바로 그것이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상습적으로 감옥에 드나들기를 좋아하겠는가? 조선일보의 발행인부터 논설위원과 평기자들에 이르기까지 긴급조치 9호에 묶여 박정희 독재에 대해 바른 소리를 한마디도 못하던 시기에 ‘민주구국선언’ 참여자들이 민족공동체를 위해 과감하게 일어섰다는 사실이 조롱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3·1 민주구국선언’을 ‘명동사건’으로 격하

검찰이 3월 10일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정부 전복 선동’을 위한 것이라고 발표한 뒤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그것을 ‘3·1 사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무총리 최규하는 3월 16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서 “명동성당 사건은 종교의식의 기회를 이용하여 법에 금지된 사항이 나타난 것이며, 선언문 내용엔 정치적 이야기가 들어 있고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분명하다”고 답변했다(조선일보 3월 18일자 1면). 그 이튿날부터 언론에서는 ‘3·1 사건’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명동사건’이라는 용어만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1976년 3월 24일 박정희는 캐나다의 〈토론토 스타〉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명동사건에 언급, 구정치인과 성직자 및 일부 교수 등 소수의 사람들이 정부 전복을 꾀하기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는 도박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은 1960년에 학생데모로 자유당 정부가 전복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범법자들을 방치한다면 데모와 폭력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조선일보 3월 26일자 1면).

1976년 5월 4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렸다. 한국민주화운동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된 ‘3·1 사건’의 공판들에 대해 모든 언론매체는 극도로 축소된 보도를 계속했다. 조선일보의 지면에 실린 기사들을 보기로 하자.

· 「명동사건 3회 공판 / 관련 11명 / 직접 신문」(5월 30일자 2단)
· 「명동사건 4회 공판 / 5명 직접 신문 / 윤보선 피고인엔 변호인 반대신문」(6월 6일자 2단) 
· 「함석헌 피고인 / 반대신문 끝내 / 명동사건 7회 공판」(6월 27일자 1단)
· ‘김대중 피고 등 / 징역 10년 구형 / 명동사건 15명, 최하 3년까지」(8월 4일자 2단)
·  「명동사건 18명 전원 / 최고 8년 실형 선고」(8월 29일자 2단)
· 「명동사건 18명 / 3~10년 구형 / 항소심서 원심대로」(12월 14일자 2단)
· 「명동사건 18명 / 5년~집유 선고 /항소심서 원심 파기」(12월 30일자 2단)

 
이 기사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피고인들의 진술과 변호인들의 변론을 거의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전직 대통령 윤보선과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에게 ‘무직’이라는 칭호를 붙였다는 것이다.

(…) 구속인사들은 법정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단호히 반대하기에 재판도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정당성과 양심을 밝히기 위해 재판에 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최후진술에서, 무죄가 아니면 학생들보다 중형을 선고하라고 요구하는 결연한 자세를 보였다. 12월 29일 2심 재판부는 관련자들에게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서 남동, 안병무, 김승훈, 장덕필 등 4인은 12월 29일 풀려나왔다. 그리고 재판은 상고심으로 이어졌다.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은 모든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하고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지었다. 고령인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과 여성인 이태영, 이우정에 대하여는 형 집행을 정지하였다. 문익환, 김대중, 문동환, 이문영, 함세웅, 신현봉, 문정현, 서남동 등 9명은 계속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222~223쪽).

3·1 민주구국선언에 대한 사법부의 새로운 판결이 2013년 7월 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나왔다.

1백여 석의 방청석은 함세웅·문정현 신부,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등 생존한 피고인을 비롯해 이희호 여사, 문성근 전 민주당 상임고문,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 등 고인이 된 피고 인의 유족들로 가득 찼다.
재판이 시작되자 검사는 작은 목소리로 무죄를 구형했다. (…)
함세웅 신부는 ‘최후진술’을 통해 “통치권자와 행정·사법부의 모든 분들이 진솔하고 정직하게 사죄해야 한다”며 “재판장께서 사법부를 대신해 속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8부 이규진 부장판사는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보상과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이 판결에 진실되게 담겨 있음을 알아달라”고 고개를 숙였다(연합뉴스 7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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