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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세력을 ‘봉기’시킨 민청학련 사건조선일보 대해부 3권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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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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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많은 학생과 교수, 종교인들이 구속되자 종교계를 중심으로 석방운동이 일어났다. 1974년 5월 7일부터 6월 10일까지 40일 동안 한신대 교직원과 학생들이 ‘구속학생과 교역자를 위한 연속 기도회’를 열었고,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기독교장로회 전국연합회, 예수교장로회(통합) 7개 노회장들, 예수교장로회 서울 각 노회가 ‘양심수들’을 석방하라는 성명서를 내거나 그들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민주세력의 민청학련 총력 지원

구속자 석방운동이 계속되는 중에도 재야인사들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계속 구속되었다. 당시 진보적 개신교의 근거지인 서울 종로 5가(실제로는 연건동)의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열린 목요기도회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과 재야인사들, 그리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뜨거운 마음을 주고받던 명소가 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이 전국을 돌며 개최하던 ‘인권회복기도회’ 역시 반유신·민주화운동의 보루로서 신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포함한 주요 언론매체는 목요기도회와 인권회복기도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긴급조치 4호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옥 밖에서 뜨거운 반유신·민주화운동이 계속되고 있던 1974년 초여름부터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6월 15일 오전, 국방부에 인접한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서 학생운동 지도자급 34명(이철, 유인태, 여정남 등)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자리를 메우고 앉아 있었으나 그야말로 ‘방청’만 했지 ‘메모’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그들은 국방부 대변인의 발표문을 데스크에 전달하는 일밖에 없는 듯했다). 군재 관계자 및 기관원들이 더 많은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개재판의 원칙을 무시했다는 국내외의 비난이 자자했다. (…)
피고인들은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가를 변란시킬 목적이 없었다고 한결같이 변소하고, 더구나 그런 목적을 가진 단체를 구성한 바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이 나라에 팽배해 있는 부정과 불법을 규탄하고, 사회정의와 민주정부의 확립을 촉구하고자 광범한 학생데모를 기도하였으며, 유신체제 하의 비리를 바로잡는 것이 구국의 길임을 확산한다는 요지로 공소사실을 부인하였다. (…)
한여름의 염천이 국민의 답답한 심정만큼이나 달아오르던 7월 13일, 사상 유례 없는 전격적인 ‘스피드’ 재판이 끝나고 군재에서의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가히 천문학적 형량이었다. 당초의 구형과 대비해보면 32명 중 29명에 대하여 ‘정찰제 판결’이 떨어졌으며, 사형과 무기징역을 면한 18명의 형기만을 합산해도 340년의 징역이 떨어진 셈이었다(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엮음, 〈실록 민청학련1-1974년 겨울〉, 학민사, 2003, 332~334쪽).

7월 11일에 열린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7월 8일 군 검찰부가 구형한 대로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9월 7일에 열린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도 그들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많은 청년·학생들과 진보적 운동가들이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 그들의 최후진술은 물론이고 변호인들의 변론 내용조차 신문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장 괴로워 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바로 동아일보사의 기자들이었다. 특히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와 천주교의 인권회복기도회에서 구속자 가족들의 피 맺힌 호소를 듣고 기사를 작성해서 동아일보나 동아방송에 내보내려고 해도 부·차장이나 편집국장 또는 방송뉴스 담당 부국장의 손에서 원고가 휴지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분노와 수치심에 몸서리치던 기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1974년 3월 8일 사장 김상만을 비롯한 경영진의 부당한 인사조치와 독선적 회사 운영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한 바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방해로 노조설립신고필증을 받지는 못했지만 동아 노조는 조직을 강화하면서 빼앗긴 언론자유를 되찾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1974년 10월 24일이 밝았다. 당시 한국은 유엔(국제연합)에 가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유엔데이’인 그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사에서 외근을 하던 기자들은 아침부터 회사로 출근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쯤 기협 분회장 장윤환이 신호를 보내자 기협 집행부 사람들이 편집국 한가운데 있던 사회부장 자리 앞으로 모여들었다. 조사부에 근무하던 기자 이계익이 자신이 붓으로 직접 쓴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일보사 기자 일동’이라는 세로 두루마리를 기둥에 걸었다. 편집국 안에는 감격의 외침과 함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편집국 기자들은 물론이고 출판국과 방송국 사원들도 달려왔다. 순식간에 180여명이 모였다. 장윤환이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자총회 개회’를 선언하자 사회를 맡은 기협분회 보도자유부장 장성원이 기자총회를 소집한 이유와 경위를 설명했다. 이어서 분회 집행부 총무를 맡은 편집부 기자 홍종민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  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엮음, 〈자유언론〉, 해담솔, 2005, 115~116쪽)

그것은 한국의 현대언론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의 집행부가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한데도 자유언론 실천의 깃발을 높이 들었을 뿐 아니라 ‘저승사자’나 다름없던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게다가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유신독재정권의 압력을 못 견뎌 그들을 해직할 가능성이 컸다. 정신과 육체가 극한적 고통을 당하고 직장까지 잃을 수도 있는 ‘거사’를 과감하게 일으킨 집행부,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운 노동조합은 10월 24일 박정희 정권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조선일보사 기자들의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곧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로 확산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150여 명은 10월 24일 밤 9시 20분께 편집국에서 모임을 갖고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진 당국의 부당한 압력에 너무나 무기력했음을 부끄러워 한다.
언론자유는 언론인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외부의 부르짖음을 외면했고 오히려 스스로 그 자유를 포기한 듯한 인상을 주었음을 자인한다.
우리는 최근 언론계의 여러 선배와 동료가 보도와 관련, 당국에 의해 불법 연행되는 등 우리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되어 온 것을 중시한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이와 같은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하나로 뜻을 모았다.
우리는 앞으로 언론 본연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결의문
1)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 발전과 조국의 번영을 위한 바탕임을 재확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의 수호를 위해 어떠한 부당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배제할 것을 다짐한다.
1)우리는 조선일보 기자는 물론 타사 언론인들이 보도활동과 관련, 부당하게 연행·구금될 경우 총력을 모아 규탄하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강력한 투쟁을 한다.
1)최근 사태에 대한 학생, 종교인 등 각계의 정당한 의사 표시는 그것이 국민의 주장이기에 반드시 게재되어야 하며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실력 투쟁을 한다.(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엮음, 〈자유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 두레출판사, 1993, 39~40쪽).

기자들이 그런 선언을 했는데도 조선일보는 반유신·민주화투쟁 관련 보도에서 굳게 침묵을 지켰다.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한 기자들의 실천의지가 약해서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선일보사 경영진과 편집간부들의 방해와 간섭이 너무나 심했던 것이다.

조선일보사 기자들의 저항운동은 12월 17일자에 실린 글 한 편을 계기로 터지기 시작했다.

(…) 그해 12월 18일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인 조선일보사 외신부 기자 백기범과 문화부 기자 신홍범은 ‘편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두 기자는 12월 17일자 조선일보 4면에 실린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 전정구의 ‘허점을 보이지 말자’라는 글에 대해 편집국장에게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글은 회사 밖의 청탁을 받아 실린 것이고, 특히 결론 부분은 현 사회를 일방적인 입장에서 보고 있으므로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두 기자는 12월 18일 ‘조선일보 동료기자들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저희들은 조선일보가 지금처럼 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더 올바르게 제작되어야 한다고 자기의 소신을 밝혔기 때문에 오늘 해임을 당했습니다. 저희들은 부당한 회사의 견책을 수락하는 대신 소신을 견지했기 때문에, 양심을 속이는 대신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해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에게 회사의 견책을 통고하는 편집국장에게 다시 한 번 국장도 기자의 양심으로 돌아가 신문을 바로 제작할 것을 호소했기 때문에 해임을 당했습니다. (…)
지금 우리는 기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에 의해 행동했기 때문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언론자유와 편집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알고도 조금의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부당성을 지적한 기자들을 징계한 사람들이며, 징계를 당해야 할 사람들은 한국언론사에, 조선일보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고도 조금의 뉘우침도 없이 신문을 계속 망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새삼스런 이야기입니다만 신문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자들의 것이며 국민의 것입니다. 편집권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기자들의 사회적 의무의 총화를 편집국장이 대행하는 것뿐입니다. 막중한 사회적 소임을 위임받은 만큼 편집권은 사내외의 부당한 압력에 침해당함이 없이 올바로 행사돼야 하는 것이며 기자들은 그것이 침해당했을 때 이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조선자유언론투쟁위원회 엮음, 〈자유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 1993, 두레출판사, 41~44쪽)

경영진이 정당한 절차를 밟지도 않고 두 기자를 파면하자 조선일보사 기자들은 12월 19일 저녁부터 ‘공정 보도와 해임 철회’를 요구하면서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은 경영진이 “두 기자를 3개월 안에 조건 없이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하자 20일 새벽에 농성을 풀었다(같은 책, 235~237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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