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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인혁당 사건조선일보 대해부 3권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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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0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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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조선일보는 4월 4일자 1면 거의 전부를 그 조치와 관련된 기사로 뒤덮었다.


최고 사형까지 처하는 ‘긴급조치 4호’

「데모학교 폐교 가능 / 위반자는 최고 사형 / 민주청년학생연 동조 등 엄단 / 지방장관 병력 요청할 수도 / 8일까지 자수하면 불문」이라는 제목만 보아도 가슴이 섬뜩해지는 기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3일 밤 10시 헌법 제53조(긴급조치권)에 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관계자 지도 감독 하의 정상적 수업, 연구활동을 제외한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적 행위(의례적 비정치적 활동은 예외)”에 대해 5년 이상 사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문교부장관은 긴급조치 제4호에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의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 결사 기타 학생단체의 해산 또는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치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 고무, 찬양하는 등의 일체 행위를 금하고 이미 이에 위반하는 행위를 한 자가 오는 8일까지 수사기관에 자진 출두할 때는 처벌을 면제토록 했다.
이 조치의 각 규정에 위반한 자, 또는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 회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유기징역의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 병과 가능)에 처하도록 하고, 군 지역사령관은 각 시도 지사로부터 치안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 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토록 했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이 조치를 발표하면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전모는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이므로 밝힐 수는 없으나 이제까지 수사 과정에서 얻은 문서 등 증거물품에 의하면 이 지하단테는 반국가적 불순세력과 결탁했고 또 그들의 지령에 의해 활동했다는 증거를 잡았다”고 말하고 “이들은 현 정부를 전복하고 이른바 노동자 농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기도한 것으로 현재 수사당국에서는 소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도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계속 중”이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그날 발표한 ‘특별담화’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 이른바 전국민주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와 같은 공개사회가 지니는 특성을 역이용하여 표면상으로는 합법성을 가장, 그들의 정체를 위장하고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 침투하려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인민혁명’을 기도하였던 것이다(조선일보 4월 4일자 1면).

박정희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에 씌운 혐의, 곧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소위 통일전선의 지하조직”이라는 것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래 열린 재심 공판에서 ‘사실 무근’으로 밝혀져, 민청학련에 관련되어 정보기관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한 청년·학생들 가운데 다수는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로부터 형사보상과 민사배상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면서 발표한 ‘특별담화’를 통해 민청학련 관련자들에 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무죄추정의 원칙’조차 무시한 셈이 된다.

그러나 1974년 4월 당시 조선일보를 포함한 모든 언론은 긴급조치 4호가 법적 타당성을 갖는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내려진 것인지에 관해 깊이 있게 취재를 하지 않은 채 박정희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활자화하기에 급급했다. 언론인들이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고는 “긴급조치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박 대통령의 비위를 거스르는 기사나 논설을 어떻게 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4월 4일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열린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혹 어떤 사람은 이번 긴급조치 4호가 일반적인 학원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편법인 것처럼 오해할 지도 모르나 과거 8·15 해방 이후 우리 국내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소위 통일전선 전략을 보아온 사람이라면 이것이 아무 근거 없는 오해요, 착각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번 조치는 그동안 합법성을 가장해서 우리 사회 각계각층 특히 학원 사회에 초점을 두고 교묘히 침투해온 공산주의 분자들을 초기 단계에서 근접, 다대수의 일반 학생들과 교직자들의 정상적인 학원 활동을 보장해주려는 데 목적의 하나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4월 5일자 1면).

조선일보는 4월 7일자 3면에 「불순세력에서 학원·사회 보호 / 긴급조치 4호 선포의 배경과 목적」이라는 기사를 싣고, 민청학련이 북괴의 조종을 받은 심증이 있으며, 불온 비라 내용이 대남 비방선전과 비슷하다는 내용을 전했다.

조선일보는 4월 7일자 7면에 「민청학련 관련 34명 자수」, 4월 10일자 7면에 「전국서 2백61명 자수 / 민청학련 관련자 자진 신고 마감」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 이후 한동안 조선일보에서는 민청학련에 관한 기사를 볼 수 없었다.


‘민청학련 배후는 인혁당과 조총련’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 사건에 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4월 16일자 1면 머리 기사(「민청학련 노농정권 수립 기도 / 인혁당·조총련서 조종 / 폭력데모…4단계 혁명 / 청와대 점거 계획도 / 2백40명 조사…일본인도 2명」)에 신직수의 발표문을 그대로 받아썼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25일 이른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관련, 2백40여 명이 조사를 받고 있으며 관련 학생들이 갖고 있던 각종 유인물 10여만 장과 관련 증거자료를 압수,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해 주동세력이 폭력데모로 노농정권을 세우려 했다는 증거를 잡았다고 수사 상황을 중간 발표했다. 신 부장이 이날 혐의를 캐냈다고 명단을 밝힌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는 모두 60명으로 이 중 ‘민청학련’의 배후 조종자 21명, 나머지 39명은 대학생 혹은 대학졸업자로 ‘민청학련’ 책임자들로 되어 있다. 신 부장은 2시간의 기자회견에서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순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 국내 좌파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밝히고 주동학생들은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농정권을 세울 것을 목표했었고 과도적 통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했었다고 밝혔다.
신 부장은 사건 주동자들이 폭력혁명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계열의 노선에 따르는 소위 노농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제1단계로 학원 내 각종 학생서클을 통해 유신체제와 정부시책을 비민주적 독재로 단정, 선전하는 한편, 세계적 경제파동으로 인한 국내 경제의 어려움을 정부의 실책으로 과장 선동해 반정부세력을 규합한 후 2단계로 4월 3일을 기해 일제히 봉기, 폭력 유혈 데모로 중앙청, 청와대 등 주요 정부기관을 점거해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3단계로 노농계급과 기타 계급과의 이른바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하고 4단계로 순수한 노농정권으로 탈바꿈할 계획을 세웠다고 신 부장은 밝혔다.

조선일보는 4월 26일자 2면에 「불순세력의 학원 침투 / 민청학련 사건의 중간발표를 보고」라는 사설을 싣고 신직수의 발표 내용을 모두 사실로 인정하면서 민청학련을 ‘반정부집단’으로 매도하는 논지를 폈다.

(…)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공산계열의 불순세력이 우리 학원에 침투하여 다대수 학생들의 움직임에 편승하면서 자기들의 독자적 계획을 획책했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 학원의 불행임에 틀림없다.
극소수자들이 어떤 일을 꾸미고 조총련이 어떤 비상한 조종을 한다고 해도 우리 대학생들의 압도적 다수는 건재할 것이며 우리 대학들이 ‘불온 대학’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 극소수자들이 무슨 화염병이다 각목이다로 유혈폭동을 유발한 다음 각종 정부청사를 점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모험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철없는 유희라는 인상을 먼저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폭동 지향적인 사고를 물론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몇몇 청년들이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극소수자들이 폭력으로 공산정권을 세우려 했다는 이번 발표는 절대 다수 학생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데모에 참여한 적이 있든 없든 간을 막론하고 우리나라 학생의 절대 다수는 사상적으로 건실하며 반공정신에 투철하다고 확신한다. 한편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강물을 흐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몇 명의 극렬분자가 학원 전체를 어지럽힐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학생답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극히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불순세력 침투로부터 자기들의 학원을 수호한다는 용기와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

조선일보의 사설은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공산계열의 불순세력이 우리학원에 침투하여 다대수 학생들의 움직임에 편승하면서 자기들의 독자적 계획을 획책했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 학원의 불행임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당시 ‘다대수 학생들의 움직임’은 어떠했던가?

역사학자 한홍구는 1974년 4월 3일 박정희가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기 전후의 대학가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대의 경우 이제까지 학생운동이 별로 활발하지 못했던 의대와 공대에서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 여자대학에까지 시위가 확산되고 있었다. 학생 운동 핵심그룹은 내심 제2의 4·19를 꿈꾸고 있었다. 특히 학생운동 내에는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 당시 강제징집 되었던 학생들이 복학한 데 이어 1971년 교련반대 데모 당시 강제징집 되었던 학생들도 속속 복학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 대학에서 강제징집 된 학생들은 강제징집 되었을 때, 같은 시기, 같은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아 자연스럽게 서로 교분을 쌓게 되었다.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강제징집이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화와 연대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3선 개헌 반대운동 당시, 강제징집 된 후 복학한 선배그룹과 70, 71학번 등이 주축이 된 후배그룹은 1974년 봄 큰일을 한 번 꾸며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학생운동의 인적자원이 풍부했던 서울대가 중심이 되어 전체 투쟁 총괄, 서울시내 각 대학 담당, 지방 소재 대학 및 여자대학 담당, 기독교계 학생단체 담당, 인쇄 담당 등 나름대로 역할 분담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거창한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의 여러 공안사건에 대한 학습효과로 이철, 유인태, 서중석, 황인성, 정문화, 나병식 등 당시 학생운동 핵심들은 강령이나 규약은 커녕 명칭조차 붙이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선언문 말미에 아무런 이름도 없이 나가긴 밋밋하다 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이란 명칭을 유인물에 달았을 뿐이었다. 학생들은 “전국 각 대학의 운동세력을 조직하여 일제히 봉기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4월 3일로 잡았는데, 제주 4·3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3월 21일 경북대에서 시범적으로 데모를 벌였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4월 3일 당일에는 서울대·성대·이대·고대·서울여대·감신대·명지대 등에서 시위가 발생했으나 예상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박정희는 4월 3일의 데모가 산발적으로 끝났음에도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4호의 내용은 1호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 유신정권은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면서 “민청학련이 북한 공산집단의 이른바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 지하조직으로 이 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우리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가변란의 음모를 꾸며 학원의 일각에 침투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수사도 하기 전에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보종 아래 인민혁명을 수행하려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후의 수사는 당연히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국정원 과거사위가 발굴한 민청학련 사건 관련 문건 중에 「민청학련 3·30 조치 수사상황 보고」라는 자료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정보부가 사전에 사건을 인지·수사하여 3월 30일부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곽성문 등 일부 학생회 간부들이 정보부에서 자기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찾아가 학생운동 내부의 동향을 고해바쳤다고 하는데, 중정은 자체 수집한 정보와 이들 프락치들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준비를 한 것이다(〈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12)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사건’, 한겨레, 2012년 8월 11일자).


고문으로 조작한 ‘인혁당 사건’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추가로 발표했다. 조선일보 5월 28일자 1면 머리에 오른 기사의 제목만 보아도 보통사람들은 간이 오그라드는 듯 했을 것이다. 「폭력혁명…공산화 기도 / 학원에 적화기지 구축 / 반정부세력 조직화, 동원자금 천만원 / 1천24명 조사, 7백45명 훈방, 26명 수배 / 일본 공산당 무기 지원 약속 / 대구·서울에 김일성 전략 교양아지트」가 바로 그 제목이었다.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의 발표문 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철, 유인태 등 평소부터 공산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불순학생이 핵심이 되어 작년 12월경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봉기를 획책하여 오면서 그 과정에서 1)서도원, 도예종 등을 중심으로 한 인민혁명당계 지하공산세력 2)재일조선인총연맹(조총련) 3)과거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조영래 등 용공불순세력 4)일부 종교인 등 국내의 반정부적 인사 5)기독교인 중 일부의 반정부세력 등 여러 세력과 결탁하여 이들과 반정부연합전선을 형성한 후, 국내외의 반정부 역량을 총집결, 전국에 걸친 유혈 폭력혁명으로 일거에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 과도의 연립정부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공산정권을 수립코자 했던 국가변란 기도 사건이다.”

민청학련이 종교인들까지 ‘유혈 폭력혁명’에 끌어들여 ‘공산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발표문에서 핵심을 이루는 ‘집단’은 ‘인민혁명당 등 지하공산세력’이었다. 학생들이 그런 조직과 손을 잡고 공산정권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실정법에 따라 극형을 선고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발표는 믿을만한 수사전문가나 국제적 기구에 의해 검증된 것이 아니었다.

민청학련 주모자들이 인혁당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고문에 의해 날조된 수사결과였다. 민청학련은 처음부터 외부의 지도나 명령을 받는 조직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만들었던 것은 1974년 상반기 유신반대투쟁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을 연결한 느슨한 연대에 불과하였다. (…)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단체로 지목된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의 존재는 더욱 근거 없는 것이었다. ‘인민혁명당’은 민청학련 사건 10년 전인 1964년에 문제가 된 단체로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격렬하게 전개되던 한일 회담 반대투쟁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낸 ‘북괴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였다. 처음부터 민청학련을 공산주의자들이 배후 조종한 인민혁명 조직으로 규정한 다음 수사를 진행하던 중앙정보부는 여정남 등이 인혁당 사건 관계자인 도예종 등과 교류한 정황을 활용하였다. 서도원, 도예종 등 인혁당 관계자들이 연행되어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1969년부터 인혁당을 재건하여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사주하였다는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수사기관들이 발표한 인혁당 재건 조직에 관한 물증은 아무것도 없었다. (…)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 관계자들에게는 온갖 비인간적인 고문이 가해졌다. 민청학련 학생들은 모욕이나 협박은 예사고 쉴 새 없는 구타와 물고문, 잠 안 재우기에 시달렸다. 인혁당 관계자들은 반복되는 전기고문과 구타, 물고문으로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었으며, 심지어는 공판조서조차 변조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당시 수사관들 중 일부조차 반발할 정도로 근거 없는 수사결과가 만들어졌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35~137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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