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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데모’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조선일보 대해부 3권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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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0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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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군대가 대학으로 진주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학생운동 주도자들이 제적당하거나 강제 입영됨으로써 대학가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1973년 8월의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본격적인 반유신체제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0월 유신’ 이후 최초의 학생 데모 터지다

서울대 문리대의 학생운동권 핵심 인물들은 1973년 2학기가 시작되자 곧바로 반유신독재 시위를 벌여야 하는 지를 두고 은밀히 논의를 했다. 군대를 다녀온 일부 복학생이나 4학년 학생들은 남아 있는 투쟁 역량을 보호하기 위해 더 기다리며 준비하자고 한 데 비해 다수의 학생들은 ‘선도적 투쟁’을 즉각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선도적 투쟁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1973년 10월 2일 오전 11시 서울대 문리대의 각 강의실에는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위 주동자들은 강의실 밖으로 몰려나온 학생들을 4·19 기념탑 앞으로 인도하여 준비한 비상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들은 “오늘 우리는 전 국민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이 참혹한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스스로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무언의 저항을 넘어서 분연히 일어섰다”고 밝혔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박정희 정권의 정보 파쇼통치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철저히 말살하고 입법부의 시녀화와 사법부의 계열화를 가져왔으며, 학원과 언론에 탄압을 가해 영구집권을 기도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경제적으로는 자립경제와 국민복지를 외면한 정권이 소수 독점자본에 영합하여 대일 경제예속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너무도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 의연하게 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이 땅에 정의, 자유 그리고 진리를 기어코 실현하려는 역사적인 민주투쟁의 첫 봉화에 불을 붙인다”고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4개 조항의 결의사항을 낭독하였다.
1)정보·파쇼통치를 즉각 중단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라.
2)대일 예속화를 즉각 중지하고, 민족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하여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3)정보·파쇼통치의 원흉인 중앙정보부를 즉각 해체하고, 만인 공노할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즉각 밝혀라.
4)기성 정치인과 언론인은 각성하라.

비상총회에 모여든 학생은 5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교내를 돌며 구호를 외치다가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이 교문을 막자 학생들은 연좌 농성을 시작했다. 12시 30분경 경찰이 교내로 쳐들어 와서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연행했다. 그날 연행된 학생은 18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0명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고 9명은 불구속 기소되었다. 57명은 구류처분을 받았고, 94명은 ‘훈방’되었다.
10월 4일에는 서울대 법대, 5일에는 상대 학생들이 유신반대 시위를 벌였다. 2일부터 5일까지 서울대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시위에서 215명이 연행되어 95명이 구속, 불구속 입건 또는 구류처분을 받았다. 10월 30일까지 서울대 학생으로 구속된 사람은 30명으로 늘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저항의 확산을 두려워하여 시위 관련 보도를 엄금하였다. 10월 2일 시위에 관한 기사는 어느 신문에도 실리지 못하였다. 10월 8일 이후에야 시위학생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06쪽).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에 관한 기사는 10월 8일에야 처음으로 신문 지면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은 데모 발생에 관한 보도가 아니라 「서울대생 21명 구속」이라는 제목이 붙은 정부의 발표문이었다. 학생들의 시위에 관한 내용은 마지막에 두어 줄 붙어 있었다.

10월 11일자 동아일보 1판 사회면에 1단으로 실려 있던 「경찰 교내 투입」이라는 기사는 2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중앙정보부의 압력 때문임이 분명했다. 그날 이후 기사 누락이 되풀이되는 것과 함께 동아일보사 젊은 기자들은 항의의 뜻으로 밤샘농성을 계속했다.


정권에 가위 눌린 ‘반유신투쟁’ 보도

동아일보가 젊은 기자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10월 8일자에 서울대 데모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자 조선일보는 10월 9일자 7면에 「서울대생 / 22명 구속 / 문리·법·상대 / 데모사건 관련」이라는 제목으로 1단짜리 기사를 실었다. 서울대 3개 단과대 학생들의 데모 경위를 간략히 소개한 그 기사에는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라”고 학생들이 외친 구호가 나와 있을 뿐, 유신독재정권을 규탄한 내용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조선일보는 10월 10일자 7면에 문교부장관 민관식이 전국의 대학 총·학장들에게 보낸 ‘공한’ 내용을 7단으로 크게 실었다.

문교부장관은 최근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생들이 벌인 시위를 ‘반정부적인 집단행동으로 규정,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고 “학생 선도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공한을 전국 대학 총·학장들에게 보냈다.
민관식 문교부장관은 이 공한에서 “최근 일부 대학의 극소수 학생들에 의해 빚어진 반정부적인 집단행동은 나라 안팎이 어려운 정세 속에서 국력 배양에 민족 역량을 결집하고 있는 국민총화체제에 역행하는 소행으로서 매우 유감된 일”이라고 말하고 “이 어려운 시기에 당하여 학구에 전념해야 할 학생들이 그 본분을 이탈하여 나라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고 결과적으로는 국력을 약화시키는 무분별한 언동을 자행하고 있음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불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민 장관은 “특히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북한 공산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허무맹랑한  구호에 영합하는 등의 반국가적 처사는 아무리 배움의 도상에 있는 학생들의 소행이라 할지라도 법 이전에 국민의 이름으로 크게 규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 대다수 선량한 학생들이 몰지각한 극소수 학생들의 선동에 현혹되지 않도록 각별히 지도할 것은 물론, 하루속히 학생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여 더욱 알차고 보람 있는 면학분위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학생 선도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강조하고 외부 불순세력의 학원 침투를 경계하는 동시에 교직원들에게도 경각심을 촉구했다.

이 기사는 문교부장관의 ‘공한’ 내용을 앵무새처럼 전달할 뿐, 서울대 3개 단과대학 학생들이 저지른 ‘반정부적 집단행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북한 공산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허무맹랑한 구호에 영합하는 등의 반국가적 처사”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정희가 1972년 ‘10월 유신’을 발표한 이래 국립대학의 대표 격인 서울대에서 학생들이 체포와 투옥을 각오하고 집단적 시위에 나선 동기도 추적하지 않고 문교부장관의 주장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10월 말부터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30일 오후 경북대 학생들이 “언론은 중립을 지켜야 하며 정의의 필봉을 들어야 한다”고 외치며 교내 시위를 시도한 데 이어 11월 5일 오전에는 10개조로 나뉜 학생들이 강의실로 뛰어 들어가 ‘경북대학교 반독재구국투쟁위원회’ 명의로 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을 뿌렸다. 그러자 강의실을 뛰쳐나온 학생 2백여 명이 “박정희 물러가라”고 쓴 현수막을 앞세우고 유신헌법 철폐, 민주헌법 제정, 언론자유 보장, 민중생존권 보장,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 규명 등의 구호를 외쳤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08쪽).

경북대 학생들의 요구대로 유신헌법을 철폐한 뒤 민주헌법을 제정하려면 박정희가 비상국무회의에서 개헌을 하고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하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박정희의 ‘정치적 아성’인 대구에서 종신집권을 포기하고 권좌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 무렵에 발표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시국선언문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지 않자 젊은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다시 밤샘농성을 하면서 2개항을 결의했다.

1)보도해야 할 중요한 기사가 누락되었을 때 그 누락 경위를 알아보고 그날 밤으로 편집국에 모여 가능한 모든 대책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2)선후배 동료가 기사와 관련, 부당하게 연행되었을 때, 이 사실을 즉시 보도하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편집국에서 기다리기로 한다(박지동, 「1970년대 유신독재와 민주언론의 말살」,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다섯수레, 2007, 373쪽).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이런 움직임은 대학가에 출입하는 기자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해졌다. 11월 초부터 격화된 학생들의 시위에는, 침묵하던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언론자유 되찾기 운동이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대학가의 ‘반유신투쟁’을 닭장에 가둔 조선일보

경북대에서 제2차 시위가 벌어진 9월 5일 서울대 사대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한 데 이어 7일에는 서울대 공대와 상대, 문리대 학생들이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 보장”등을 주장하면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동맹휴학의 돌풍은 8일 서울대 교양과정부와 가정대, 한국외국어대로, 9일에는 서울대 치대와 농대, 그리고 한신대로 확산되었다.

대학가의 반유신투쟁은 1973년 12월 중순까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10월 12일자부터 12월 8일자까지 조선일보를 보면 학생 시위와 집회는 한결같이 7면(사회면) 왼쪽의 네 칸짜리 시사만화 〈야로씨〉 옆이나 아래에 닭장 속의 병아리들처럼 갇혀 있었다. 그와 반대로 박정희 정권이 학생들의 투쟁을 탄압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관한 뉴스는 ‘중요 기사’로 다루어졌다.

그 기간의 조선일보 기사 목록을 간추려 보겠다.(면을 밝히지 않은 기사는 모두 7면)

· 「데모 관련 서울대생 / 97명 징계 / 제명 23·자퇴 18·무기정학 56명’」10월 12일자 2단)
· 「서울대생 21명 / 구속송치 / 시위 관련…9명은 불구속」(10월 14일자 2단)
· 「시위 서울대생 / 징계 해제」(10월 30일자 3단)
· 「서울대생 6명 / 추가 구속」(11월 1일자 2단)
· 「데모로 구속된 서울대생 30명 / 1명 기소 22명 석방 / 서울지검, 7명은 계속 수사」(11월 2일자 4단)
· 「서울대 치대생 / 동맹휴학 결의 / 농대생 3백명 / 2시간 연좌」(11월 10일자 1단)
· 「서울대 법대 당국/ 강의 재개키로 / 어제 하루 휴강」(11월 13일자 2단)
· 「학원 사태 등을 협의 / 김 총리·여야 간부, 국회 정상화 방안도」(11월 16일자 1면 3단)
· 「서울대 상대 등 맹휴·연좌 / 연대·이대 등도 / 맹휴·교내 시위 / 고대 2천여 명/ 가두 진출 충돌」(11월 18일자 1단)
· 「대학 조기방학 / 학교별로 7~10일 당겨」(11월 20일자 3단)
· 「국회, 오」부터 정상화 / 여야, 어젯밤 당직자회의서 일괄타결 / 건의안, 김 씨 사건·학 원·언론 포함’(11월 21일자 1면 머리)
· 「서울대 농·사·상·가정·약대·교양과정도 / 단대별 휴·종강」(11월 22일자 3단)
· 「연세대 각 대학 / 성토대회 벌여 / 서강대 학생회 기말시험 거부」(11월 27일자 1단)
· 「이화여대생들 / 4천여 명 데모」(11월 29일자 1단)· 「연대 2천여명 / 성토대회 / 고대·경찰 충돌 / 시국선언 채택」(11월 30일자 1단)
· 「성균관·중앙·덕성여대 등 / 오늘부터 방학」(12월 1일자 3단)
· 「이대·서강대. 전북대·홍익대 등 / 어제부터 방학」(12월 2일자 3단)
· 「효성여대생들 / 가두시위 벌여」(12월 5일자 1단)
· 「광주일고 시위 / 학생의 날 부활 요구」(12월 6일자 1단)
· 「구속학생 전원 석방 / 박 대통령 지시로, 어제 징계도 해제」(12월 8일자 1면 가로 6단)

조선일보는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반유신체제 데모가 일어난 뒤 석 달이 넘게 전국의 대학들에서 반유신투쟁이 펼쳐졌는데도 그 문제를 직접 다루는 사설을 단 한 편도 싣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가 12월 7일 ‘구속학생 전원 석방’을 발표하자 12월 8일자 2면에 「학원의 정상화 / 학생 처벌의 백지화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내보냈다.

이 해를 막는 막바지에서 우리는 한파와 함께 몰아친 연료난이며 생필품값 인상 파동 등 살림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추위와 어려움을 몰아내는 어떤 따스한 훈기가 간절히 바라지고 이 난국을 타개하는 가슴 트이는 조처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는데 점차 그 희망의 빛이 보이는 느낌이 든다.
그 첫째가 개각을 계기로 한 서정쇄신의 다짐이며 둘째가 오늘에 본 구속학생의 구제조처이다. 정부는 7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최근 학원 사태와 관련, 구속 또는 불구속 입건된 학생과 학사징계를 받은 학생들에 대해 그 처벌을 백지화하고 전원 구제조처했다. 민문교부장관은 이 조처의 발표와 함께 “정부는 교권 학립을 통해 학원 문제는 학원 스스로의 책임 아래 자율적인 사업 운영과 더욱 제고된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학문의 자유와 독립을 강조했다.
이러한 정부의 방침은 지난 10월 이래 경향 각지의 학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한 결과적인 청산인 동시에 발생요인을 적확히 파악함으로써 근원적으로 사태의 악순환을 막아보려는 정책 방향의 제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환부에 대한 치료는 빠르면 빠를수록 쾌유가 이른 법이고, 발병에 앞서 예방보다 더 좋은 건강의 비결은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때늦은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나마 위정당국이 현재 국민이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깨닫고 그 바람의 하나가 반영됐다는 점에서 정부당국의 학생 처벌 백지화 조처는 해당 학원이나 학생들에게 다행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전개에 분명히 일획을 보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 오늘의 기성세대는 어제의 학생이었고 오늘의 학생들은 내일의 조국을 짊어질 역군이 될 것이다. 오늘과 내일 간에 단층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때문에 기성세대는 학생들의 참여가 불필요하거나 허용되지 않게끔 이 사회를 탄탄히 다져야 할 책무를 완수해야 할 것이며, 설혹 참여의 소리를 듣는다 해도 어린이에게 길을 물어 가듯이 귀를 기울이고 사랑과 이해로 앞길을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때를 당해서 문교당국이 제시한 교권 확립과 학원의 자율화 시책은 시의적절한 것으로 우리는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스승과 제자가 합심합력하여 학원의 정상화에 힘써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1973년 3월 초부터 12월 초까지 한국사회를 뒤흔든 것은 대학생들이 앞장선 ‘유신반대투쟁’이었다.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투쟁은 젊은이들이 투옥과 제적을 감수하면서 과감하게 펼쳐나간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도 학생들의 끈질긴 싸움이 멈추지 않자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휴강과 조기방학 같은 강제조치를 통해 가까스로 시위의 불길을 끌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그 기간 내내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에 침묵하거나 극도로 축소된 보도를 되풀이하다가 박정희가 ‘구속학생 전원 석방’ 조치를 취하자, 위의 사설을 통해 “추위와 어려움을 몰아내는 어떤 따스한 훈기가 간절히 바라지고 이 난국을 타개하는 가슴 트이는 조처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는데 점차 그 희망의 빛이 보인다”고 섣부른 전망을 하고 있다. 그리고 “환부에 대한 치료는 빠르면 빠를수록 쾌유가 이른 법이고, 발병에 앞서 예방보다 더 좋은 건강의 비결은 없는”것이라면서 박정희가 마치 ‘명의(名醫)’라도 되는 듯이 칭송한다. 이 사설은 결론 부분에서 “기성세대는 학생들의 참여가 불필요하거나 허용되지 않게끔 이 사회를 탄탄하게 다져야 할 책무를 완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막연히 기성세대 전체에 맞서 반유신투쟁을 벌인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최고책임자가 저지르는 학원·언론 탄압을 중지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의 의혹을 밝히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이 기대하던 ‘희망의 빛’은 대학들이 정권의 압박에 못 이겨 강제로 방학을 앞당겼다고 해서 곧 쏟아지지는 않았다.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이 유신헌법을 실질적으로 폐지하자고 요구하는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겨울잠에 들어간 학생들의 투쟁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본부 발족

학생들의 반유신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던 1973년 11월 5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이하 민수협)에 참여한 인사들이 서울 종로 2가 YMCA회관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강기철, 계훈제, 김승경, 김재준, 김지하, 박삼세, 법정, 이재오, 이호철, 정수일, 조향록, 지학순, 천관우, 함석헌, 홍남순 등 재야 지식인 15명은 시국선언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공포정치로 국민의 양심과 일상생활은 더없이 위축되고, 우방 각국의 신뢰와 친선 관계는 극도로 실추되어 대한민국은 내외로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당시 정국을 진단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에게 “이 중대한 현실을 직시하여 무엇보다도 민주적 제 질서를 시급히 회복”하되, “결코 어떤 미봉으로 될 일이 아니요, 민주체제를 근저에서 재건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시국선언은 재야의 민주화운동이 다시 본격화됨을 의미하였다. 특히 유신 선포 이후 유명무실해졌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19~120쪽).

민수협의 시국선언은 언론·법조·종교계 인사들을 비롯해서 문인들과 청년운동가들이 참여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벌어질 유신헌법 철폐 투쟁의 서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그 시국선언에 관한 기사를 단 한 줄도 싣지 않았다.

12월 13일 민수협은 재야 각계의 원로들이 참가하는 시국간담회를 열었다. 조선일보는 12월 14일자 1면 하단에 「민주회복 안 하면 / 민족적 위기 초래」라는 제목으로 시국간담회 기사를 2단으로 실었다.

전 대통령 윤보선 씨 등 각계 저명인사 10여 명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알선으로 13일 오후 3시 서울 YWCA 알로하실에 모여 시국간담회를 갖고 “현재의 시국은 민주주의체제를 근본부터, 또 제도적으로 회복하여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않으면 민족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보아 이에 대한 대통령의 조처를 기대한다”는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정상적인 민주주의체제로의 회복은 적어도 1)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보장할 것 2)3권분립체제를 재확립 할 것 3)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 것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 가까운 시일 안에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그들의 의사를 문서로 전달할 예정이며 시국간담회는 앞으로 필요에 따라 수시로 갖기로 했다.
이들은 최고령자인 백낙준 씨를 의장으로 3시간 30분 동안 회합 끝에 이 같은 합의문을 채택, 발표했다.
참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함석헌, 김재준, 천관우, 계훈제(이상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김홍일, 윤보선, 백낙준, 유진오, 이병린, 김수환, 이정규, 이희승, 이인, 한경직, 김관석(이상 초청인사)

12월 25일자 조선일보 1면에는 「개헌청원 백만 서명 / 재야인사 30명, 본부 결성」이라는 기사가 3단으로 실렸다. 이 기사는 1면 머리에 오른 「원유고시값 128% 인상」이라는 기사에 눌려 잘 보이지 않지만, 1974년의 한국사회를 정치적 태풍권으로 몰아넣을 것을 예고하는 ‘기상예보’나 마찬가지였다.

천관우,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계훈제, 백기완 씨 등 6명은 24일 오전 10시 서울 YMCA에서 김수환, 박두진, 백낙준, 이인, 이희승, 유진오 씨 등을 포함, 재야인사 30여 명이 서명하여 현행 헌법의 개정을 목포로 하는 1백만명의 서명청원본부를 결성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장준하 씨는 이 서명운동은 이날부터 전개된다고 말하고 서명자 30명이 각자가 본부가 되어 개헌청원서명운동에 나서게 된다고 말했다.
이날 회합에 참석한 인사들은 「민주주의 회복, 현행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전개하면서」라는 성명서를 발표,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라고 서명 전개 이유를 설명했다. 성명은 “국민은 이와 같은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1백만명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라고 말했다.
장 씨는 1)민족의 성원이면 누구든지(대학생 연령층 이상) 서명하여 시· 도·군을 명기하여 30명 중 누구에게나 보내주면 되고 2)가정과 직장, 가두에선 먼저 서명한 사람의 책임 아래 서명을 받아 서명본부로 보내면 된다고 서명 방법을 설명했다.

조선일보는 12월 27일자 1면에 국무총리 김종필의 방송연설을 대서특필했다. 방송 내용은 바로 전날 1면에 조그맣게 보도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본부’ 발족에 관한 것이었다. 「난국 이길 국민 자세 호소 / 혼란 선동 다스리겠다 / 개헌 서명 삼가길 / 유신 도전은 자유 한계 벗어나」라는 제목의 기사는 1면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26일 밤 9시부터 1시간 40분 동안 전국 TV와 방송을 통해 현 시국에 관해 특별방송,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이 번영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며 이 강토를 통일해서 그 위에 우리 자손들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결코 다른 사람들이 책임질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하고 “국민 여러분은 이 어려운 시기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 자세를 국민 된 도리와 자기가 맡고 있는 위치에서 한 번 더 냉정하게 생각해서 정립해줄 것을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김 총리는 “유신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차원에서의 도전은 우리나라의 국가안전이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행위”라고 말하고 “헌법을 고쳐야 되느니 가두에서 무슨 서명운동을 하느니 혹은 민주회복을 하느니 하는 구호 아래서의 일체 행위는 삼가줄 것”을 당부했다. 김 총리는 “지난 유신 1년을 돌이켜 볼 때 시행착오도 있었고 또 유신체제를 굳히기 위해서는 국민 여러분에게 과도하고 어려움을 주었던 점도 없지 않아 그 점 저희들도 깊이 자성을 하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들려준 많은 건설적인 의견들에 대해서는 숙연히 듣고 과감하게 시정해 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 총리는 “유신체제는 우리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데 있어 약한 점을 고치고 국력을 조직화해서 합리적으로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체제를 만들자는 것뿐”이라고 설명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거나 어지럽게 하거나 하는 것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김 총리는 “어떤 사람은 헌법을 고치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내년 3,4월에 위기가 온다고 하고 있지만 그런 혼란을 바라는 국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국내가 시끄러워지면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여건만이 조성될 뿐”이라고 경고했다. 김 총리는 “자기 분수를 넘는 월선(越線) 행위를 할 때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면서 특히 대학생, 언론인, 종교인들이 자기 분수를 지켜줄 것을 요망했다.

개헌청원 서명운동은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청원권’에 따른 것이었다. 재야인사들이 청원권을 행사하기 위해 서명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시민을 상대로 서명을 받는 행위는 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종필은 그것을 “유신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차원에서의 도전”이라고 공격하면서 “국가안전이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행위”라고 비난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청원권을 행사한 것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려면 유신헌법의 청원권 관련 조항을 아예 없애야 할 것이다. 5·17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위기에 부닥칠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김종필은 개헌청원서명운동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여건만”을 조성할 뿐이라고 강변했다.

김종필이 그런 억지 논리로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반국가적 행위로 몰아붙였는데도 조선일보는 사설이나 논평을 통해 그 부당함을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12월 28일 문공부는 공화당 의원총회에 보낸 「정부 주요 시책에 대한 문답」이라는 문서를 통해 ‘언론 규제 3개항’을 밝혔다. “1)10월 유신의 이념과 체제에 대한 부정이나 도전 2)국가안보 및 외교상의 중대한 위협을 초래하는 것 3)사회불안을 조성하거나 경제안정 기반을 와해하는 것”이 규제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문공부는 이 같은 자율규제의 한계 설정 과정에서 언론계와 어떤 협의를 거쳤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문공부는 또 교회가 정치적 집회장소로 사용되는 데 대한 대책에 대해 종교가 종교를 빙자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하거나 사회에 해독을 끼치며 국가안보를 해치는 활동을 할 때에는 당연히 관계 법령에 의해 제재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2월 29일자 1면).

문공부가 공화당 의원총회에 통보하는 형식을 빌려 크게 보도된 ‘정부 주요 시책’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에 관한 언론의 보도를 철저히 막고, 서명운동을 주도하는 재야인사들이 기독교가 운영하는 건물에서 집회를 하는 것을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주하는 언론사 편집국이나 보도국에서 이런 ‘시책’을 어기는 보도와 논평을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긴급조치 1·2·3호’ 선포와 재야인사 구속

국무총리 김종필이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문공부가 극단적 ‘언론 규제 시책’을 발표했는데도 그 운동에 호응하는 국민의 수는 놀라운 속도로 불어났다.

(…) 먼저 신민당이 합류하였다.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폭발적인 지지를 얻자 제1야당으로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개헌 추진을 결정하였다. 민주통일당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어 개헌을 주장하는 시국선언이 시작되었다. 12월 31일 윤보선, 유진오, 김수환 등 15명의 인사들이 대통령에게 민주체제 회복 조치 등을 건의하였다. 이어 1974년 1월 7일 오전 공화당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이 탈당 성명을 발표하였고, 전 사무총장 예춘호도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정구영은 동아라디오방송(DBS)와의 대담에서 유신체제를 ‘3권귀일(三權歸一)체제’라 평가하고, 공화당을 본연의 자세로 되돌린다는 것은 헛된 생각일 뿐이며, 자신도 재야인사들과 함께할 시기를 기다린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문학인들도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월 7일, 이희승, 이헌구, 김광섭, 안수길, 이호철, 백낙청 등 문인 61명은 성명을 발표하여,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하고, 헌법개정청원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이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를 밝혔다(같은 책, 121~122쪽).

대학가의 집회와 시위가 긴 겨울잠에 들어간 뒤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불을 댕긴 반유신투쟁이 날이 갈수록 뜨거운 호응을 얻자 12월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나섰다. 그는 “개헌청원 서명운동 등의 움직임에 대해 담화를 발표, ‘나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행동이 자칫 국가안위에까지 누를 끼칠까 염려하여 그들에게 한 번 더 냉철한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는 동시에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현 유신체제를 부정하고 뒤집어엎으려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소위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두는 바’”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2월 30일자 1면).

박정희는 1974년 1월 1일 발표한 ‘신년사’에서 “‘10월 유신은 결코 한 정권이나 특권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안정과 번영, 그리고 평화통일을 바라는 민족적 염원을 성취하기 위한 민족사적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지금은 주저하고 회의할 때가 아니라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용기 있게 실천할 때’라고 강조했다.”(조선일보 1월 1일자 1면)

박정희가 그렇게 강한 어조로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중지하라고 위협했는데도 그 운동의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자 마침내 그는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8일 헌법 제53조에 의거한 대통령긴급조치를 발동, 1)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2)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3)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 4)이상의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하는 내용의 대통령긴급조치를 발표했다. 대통령긴급조치는 이날 오후 3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이날 오후 5시부터 시행됐다. (…)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에서 대통령긴급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15년 이하 자격정지 병과 가능)에 처하도록 하고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토록 했다.
이 조치 2호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 사건의 정보수사 및 보안 업무를 조정, 감독하며 또한 군법회의의 재판장 및 검찰관은 피고인 및 피의자에 대해 주거의 제한을 명할 수 있게 됐다(조선일보 1월 9일자 1면).

박정희가 발표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까지 무시하는 초헌법적 비상수단이었다. 헌법의 개정을 청원하는 행위조차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대통령 자신이 정해서 국무회의의 형식적 결의를 거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법의 개정, 폐지를 발의, 제안하는 행위를 불법화하고 그런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등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까지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았다. 유신체제와 유신헌법은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뜻이었다.

박정희는 1월 14일 긴급조치 3호를 선포했다. 1974년 12월까지 갑근세와 주민세를 대폭 감면하고 복지연금을 1년 동안 보류하며, 2월부터 버스통행세를 면제하고 텔레비전과 사치성 물품에는 중과세를 하는 한편 추곡수매가를 인상하고 재산세 면세점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긴급조치에는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긴급조치 3호는 반유신체제운동을 탄압하는 긴급조치 1호와 달리 박 정권이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발동시킨 ‘선심성 조치’라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긴급조치 1호에 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조선일보는 1월 15일자 2면에 「1·14 긴급조치의 함축 / 정국 극복을 위한 적절한 포석 되기를」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박정희가 취한 ‘경제긴급조치’를 높이 평가했다. “박 대통령이 어제 선포한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긴급조치는 국내외를 휩쓸고 있는 자원 파동과 다가오는 물가고 속에서의 불황의 징조에 비추어 시리(時利)를 택한 것이라 할 밖에 없다. (…) 대통령의 이번 긴급조치가 그 이름과 같이 국민생활, 특히 서민대중의 생활 안정에 초점을 두게 된 것은 극히 의당하고 극히 환영하여 마땅한 일로 보는 것이다. (…) 국내외로부터 도전해 오는 경제적 위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계제가 아닌 것이며 그 인과관계의 정확한 판단 위에 그 도전을 극복하고 안정과 발전을 추구하는 데 이번 조치가 최대한 유익한 것으로 되어졌으면 하는 것이 우리와 모든 국민의 공통된 염원인 것이다.”

(…)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14일 개헌청원서명운동의 주도 인물인 장준하와 백기완을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비상군법회의는 이들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2년을 선고하였다.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자 기독교계를 필두로 항거가 시작되었다. 1974년 1월 17일 이해학 전도사, 김진홍 전도사, 이규상 전도사, 박윤수 전도사, 김경락 목사 등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구국선언기도회를 개최하여 긴급조치 1호 철회, 개헌 논의 허용, 유신체제 폐지와 민주질서 회복 등을 주장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기독교회관 내 사무실에서 서명운동을 벌이다 즉시 출동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들 선언식 참석자들과 인명진 목사는 1974년 2월 7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구국선언 기도회 사건이 극심한 언론통제로 제대로 보도되지 않자, 권호경 목사, 김동완 전도사, 이미경(에큐메니컬 현대선교협의체 사무간사), 박주환(한신대 3), 박상희(한신대 3), 김용상, 차옥숭(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사무간사), 김매자(이화여대 3) 등이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를 작성하여 전국 교회에 우송하였다. 이들은 곧 구속되어 3~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같은 책, 121~122쪽).

박정희는 1월 18일 연두기자회견을 열고 남북한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이 불가침협정에는 1)남북한이 절대로 무력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만천하에 약속하고 2)내정 간섭을 절대로 하지 말며 3)여하한 경우에도 휴전협정의 효력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또 “국민들이 적극 협조해서 긴급조치가 필요 없게 되면 빠른 시일 안에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해마다 봄철이 되면 학생들이 술렁술렁 하는 풍조가 생긴 것은 불행한 일”이라면서 “앞으로 학원의 자유를 빙자해서 학원 내에서의 비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탈선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국민들이 적극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긴급조치는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가 비명횡사하기까지 한국사회를 실질적인 감옥으로 만들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연두기자회견에 대해 극진한 ‘찬사’를 바쳤다.

(…) 유신체제와 관련하여 박 대통령이 특히 강조한 것은 행정유신을 이룩하여 서정쇄신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무원은 윗사람이나 대통령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행정을 해야 하며, 행정 각 분야는 창의력을 발휘하고 책임의 한계를 명백히 하여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횡적으로는 긴밀한 협조를 하여 나라 일을 잘해야 한다고 공무원의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타이른 점은 바로 정곡을 찌른 것이며, 고하를 막론하고 관료들과 접촉한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한 ‘선배’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보낸 충고는 젊은 학생들이 곰곰 음미해 볼만한 일인 동시에 지금 사회에 책임을 지고 있는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 대한 책임이란 관점에서 깊이 생각해볼 여러 가지 문제를 던진 것으로 믿는다. (…)
이번 박 대통령의 발언에서 새롭고도 중요하면서 내외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남북한 불가침협정의 제의가 아닐 수 없다. (…)
합리주의와 현실주의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비단 박 대통령이 아니라도 오늘의 남북 간의 상황에서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이런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상호불가침협정 제의는 한반도의 평화유지와 평화통일에로의 접근방법으로 서는 극히 객관적 타당성을 띤 것으로 우리는 높이 평가해서 마지않는다.

이 사설은 ‘행정유신’과 ‘서정쇄신’이 이루어지려면 공무원이 “윗사람이나 대통령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행정을 해야” 하며, “행정 각 분야는 창의력을 발휘하고 책임의 한계를 명백히 하여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횡적으로는 긴밀한 협조를 하여 나라 일을 잘해야 한다”고 ‘훈시’한 박정희의 말을 ‘지당한 말씀’으로 추켜세우고 있다.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 박정희 밑에서, 전체주의적 공직체제를 강요당하는 공무원들이 어떻게 창의력을 발휘하고 긴밀한 협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박정희가 ‘한 선배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충고한 것은 “젊은 학생들이 곰곰 음미해 볼만한 일”이라는 위 사설의 해석은 또 무엇인가? 학생들은 박정희가 연두기자회견에서 주장한 것처럼 “해마다 봄철이 되면 술렁술렁 하는 풍조”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1960년 봄에도, 박정희의 학원 탄압과 부정선거와 유신쿠데타에 맞선 여러 해 봄에도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떨쳐 일어선 것이었다.

게다가 위 사설은 정권의 심각한 위기를 맞아 ‘정치적 수사(修辭)’로 던졌을 가능성이 큰 박정희의 ‘남북한 불가침협정’을 평화통일의 유일한 방안인 듯이 단정하고 있다. 남한이 당사자로 되어 있지도 않은 ‘정전협정’을 불가침협정으로 바꾸는 중대한 일이 그렇게 단순한 제의로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인가?

박정희가 연두기자회견에서 학생들을 향해 “앞으로 학원의 자유를 빙자해서 학원 내에서의 비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탈선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위협한 뒤에도 긴급조치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1월 21일 서울대 의대 3학년 이근후, 김영선, 김구상 등 3명이 유신헌법 반대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어, 3월 30일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5~7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1월 24일 연세대 학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향, 서준규 등이 학교 강당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가 구속되어 3월 2일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3~7년을 선고받았다(같은 책,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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