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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사건조선일보 대해부 3권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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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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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8월 9일자 조선일보 1면에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 2단으로 조그맣게 보도되었다. 기사 제목은 「김대중 씨 실종 / 한국말 하는 청년 5명에 / 어제 오후 1시 일본 호텔서」이다.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에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나서서 공화당의 박정희에 맞서 민주정부 수립을 강하게 외치던 정치지도자이자 많은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던 그가 한국도 아닌 일본 수도 도쿄에서 벌건 대낮에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뉴스를 그렇게 소홀히 다루는 것은 언론인들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대중 납치’ 제1보를 하찮은 사건으로 다룬 조선일보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경-외신종합] 야마시다(山田) 일본 관방차관은 8일 오후 한국의 전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 씨가 유숙하고 있던 그랜드팔레스호텔로부터 어떤 자에 의하여 연행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씨와 함께 있던 사람으로부터 경찰에 통보되어 김 씨가 8일 오후 1시 조금 지나 호텔로부터 한국말을 사용하는 5명의 남자들에 의해 사라졌다. 범인이나 기타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 조사 중에 있으며 아무 것도 알지 못 하고 있다.
김 씨는 작년 10월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후에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고 있으며 본국에서 대통령선거에 관련되어 기소된 바 있어 사실상 망명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 일본에는 지난달 상순부터 체류하고 있으며 관계자가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중 이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를 대변해서 관방차관이 이런 내용을 언론에 발표했다는 사실은 그 일이 보통사람의 단순한 실종과는 차원이 다름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었다. 게다가 김대중이 묵던 호텔 방에는 오랜 지인인 국회의원 김경인이 함께 있었는데 ‘괴한들’은 그는 남겨두고 김대중만 데리고 사라졌다고 일본 경찰이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이 ‘최대 정적’으로 여기고 있던 김대중이 실종되었다면 언론은 마땅히 현지 특파원을 통해서 또는 기자를 급히 보내서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취재해 기사를 쓰게 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김대중이 살아서 한국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의 발표나 사건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보도를 계속했을 뿐이다. ‘김대중 실종’에 관해 사흘 동안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 「김대중 씨 신변 보호 요청 / 윤 외무차관, 우시로쿠 대사에 / 실종 철저 조사도」(8월 10일자 1면 3단)
· 「김대중 씨 사건 / 일, 특수반(特搜班) 편성」(8월 11일자 1면 3단), 「아직 일본에 있는 듯 / 일경(日警), 실종 직후 검은 승용차 떠나」(1면 2단), 「양일동·김경인 씨 / 귀국 연기 수사 협력 권고 / 윤 차관, 대사관 통해」(1면 2단)
· 「장기수사 될 듯 / 김대중 씨 실종 사건 / 피 묻은 화장지 발견」(8월 12일자 1면 3단), 「양일동 당수 귀국 회견 / 16일께 다시 도일(1면 2단), 괴한 2명이 김경인 의원 밀쳐 / 로비에 있다던 경호원 전화 받고도 뒤엔 ‘몰랐다’ / 김 씨 든 방엔 독한 약 냄새 물씬」(1면 3단)

위 기사들의 공통된 특징은 제목의 활자가 아주 작고 내용을 좁은 지면에 빡빡하게 채워 독자의 눈에 잘 뜨이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다.


‘납치 뒤 강제 귀가’를 ‘자택 귀환’으로 보도

마침내 8월 14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에 김대중 실종 관련 기사가 올랐다.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뽑힌 제목은 「김대중 씨 자택 귀환」인데 가로 길이가 8cm도 되지 않았다.

지난 8일 오후 1시 반쯤 동경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실종됐던 신민당 전 대통령후보 김대중 씨가 약 1백29시간(5일 9시간)만인 13일 밤 10시 20분쯤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 1 자택에 나타났다. 오른쪽 아랫입술과 왼쪽 눈썹 위가 터져 피가 맺혀 있고 오른쪽 아랫다리에 상처가 있으며 양손을 붕대로 감은 김 씨는 몹시 피로한 표정을 지으며 그동안의 실종 경위를 설명, “8일 오후 호텔에서 6,7명의 건장한 청년들에게 납치, 자동차로 5,6시간 달린 뒤 배편으로 11일 오전 한국 근해에 도착, 13일 밤 10시 20분쯤 붕대로 눈을 가린 채 집 근방에 내려주어 돌아왔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납치될 때 마취제에 덮어씌워져 일단 정신을 잃었으나 곧 깨어났으며 한국에 돌아올 때는 줄곧 전신을 결박당했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자신을 집 근처로 데려다주던 사람들이 “우리는 구국동맹 행동대원이라고 신분을 밝혔다”고 말했다.

1면에 실린 관련 기사의 제목만 보더라도 김대중이 스스로 자택에 나타나거나 자기 발로 귀환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김 씨가 밝힌 사건 경위 / 엘리베이터→지하차고→오사카 근해→모터보트→대형선→한국 상륙→초가→양옥→자택 / 마취…오사카 검문 피해 / 바다서 사흘 육상서 이틀.」

8월 15일자부터 9월 4일자까지 조선일보에 나온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기사들 가운데 정치면 머리에 오른 것은 없고 사회면 머리에 단 한 건이 실렸을 뿐이다. 8월 15일자 7면에 내보낸 「하차 현장·사용물 등 다각 수사 / 김대중 씨 사건 수사본부 활동 시작 / 피랍 과정서 정밀 추적키로 / 전국 해인 검색…주민 접촉도 / 범인은 3개조 20명쯤, 김 씨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나머지 기사들은 한국 정부 당국자들의 기자회견 내용, 경찰의 수사, 한국과 일본 정부의 고위 관리들 사이에 오고간 ‘요담’을 피상적으로 전했다. 그 기사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납치범 정체 꼭 밝힐 터 / 이 검찰총장, 김대중 씨 사건 / 시경에 수사본부」(8월 15일자 1면 6단)
· 「하차 지점·자택 현장 검증 / 김대중 씨 왔던 길 답사 / 상황 설명도」(8월 16일자 7면 4단)
· 「양일동·김경인 씨 대질 / 오늘 김대중 씨와 교대로 계속」(8월 17일자 7면 3단)
· 「김대중·양일동 씨 방일 불가능」(8월 19일자 1면 2단)
· 「김대중 씨 사건 해결 노력 / 김종필 총리, 일본 수상에 서한」(8월 21일자 1면 3단)
·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 기사 전면 취소 요구 / 정부 김대중 씨 사건 보도관련 /불응 땐 서울지국 폐쇄’(8월 24일자 1면 3단)
· ‘요미우리신문 지국 폐쇄 / 정부, 김대중 씨 사건 보도 취소 안 해」(8월 25일자 1면 3단)
· 「김 씨 사건 영사 관련설 항의 / 한국대사관, 일 외무성에」(8월 26일자 1면 2단)
· 「우시로쿠 일본대사 / 김대중 씨 자택 방문 / 어젯밤 20분 동안 환담」(8월 29일자 1면 2단)
· 「한국정부, 김대중 씨 / 반국가죄 문책 안 할 듯 / 우시로쿠 회견」(9월 2일자 1면 2단)
· 「김 외무 방문 요담 / 우시로쿠 대사, 김 씨 사건 일본 입장 전달」(9월 4일자 11면 3단)

위의 기사들 가운데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 것은 8월 25일자 1면에 조그맣게 실린 「요미우리신문 지국 폐쇄」였다.

정부는 24일 오전 “김대중 씨 사건에 한국 정보기관이 관련됐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 소식통이 인정했다”고 23일자 조간에 보도한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대해 서울지국의 설치허가를 취소하고 서울에 체재 중인 기자 3명 중 가토 노부오 지국장 겸 특파원은 26일까지, 시마모토 겐로, 아사노 히데미쓰 등 두 기자는 이날 중으로 한국을 떠날 것을 명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이날부터 요미우리신문의 국내 배포도 금지했다.
문화공보부 당국은 “요미우리신문의 보도는 전혀 사실무근의 날조된 기사로 24일 조간까지 기사의 전면 취소를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성의 있는 자세로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고 부득이 이 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발표했다.

이 기사 밑에는 요미우리신문이 기사 취소를 거부했다는,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이 보낸 기사가 2단으로 실려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김대중 씨 납치 사건을 다룬 23일자 조간 기사를 전면 취소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거부했다. 하세가와 지쓰오 편집국장은 24일 조간의 사고(社告)를 통해 “이 기사는 충분한 확신을 갖고 게재한 것이므로 취소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기사의 뉴스 소스는 한국 정부의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소식통에서 취재했으며 각 방면의 정보도 종합 검토한 끝에 쓴 것이다.”


민간 조사위원회가 밝힌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기 초인 1993년 7월 16일 ‘김대중 선생 살해미수 납치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가 야당 인사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진상조사위는 2년 가까이 조사활동을 한 뒤 1995년 8월 11일 〈하늘이 김대중을 살리기까지〉(책이있는풍경 발간)라는 책을 펴냈다. 조사위원장 김영배는 이 책 앞머리의 「인사말」에 다음과 같이 썼다(이 글에 대해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들이나 박정희의 유족이 ‘허위사실 유포’라는 이유로 소송을 냈다는 보도는 없었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동경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김대중 선생님이 괴한들에 의해서 납치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신독재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이후락이 이끄는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에 의해서 살해를 목적으로 한 납치사건으로서,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를 경악케 한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추악한 정치 테러 사건이었다.
이 납치사건은 본질적으로 한국의 공공기관에 의해서 일본의 주권이 침해되었던 사건이요, 일본 정부는 김대중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김대중을 일본으로 원상회복시키고 그 납치사건의 진상을 밝힐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납치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의 1등서기관인 김동운의 지문이 증거로 채취되고, 납치된 지 5일 만인 13일에 KCIA에 의하여 자택으로 귀환조치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정부 간에 진상을 밝혀내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정치 결착으로 사건을 적당히 덮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
우리가 20년 만에 조사위를 구성하게 된 이유는, 한국의 경우 문민정부라 자처하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고, 또한 일본의 경우에는 40여년 간 집권했던 자민당 정권이 물러나고 사회당을 비롯하여 새로운 호소카와 연합정권이 수립되어 개혁을 주창하였던 까닭에, 이제는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 우리는 사건 당시 미국의 CIA 한국 책임자였었고, 뒤에는 주한미대사를 지냈었던 도널드 그레그 씨의 증언,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용금호’의 승무원 조시환 씨 등의 증언에 의해서, 김대중 납치사건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서 살해할 것을 목적으로 납치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우리 조사위원들은 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이후락을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을 각 방면으로 찾 아다녔고, 일본 정부를 방문하고 미국 국무성에도 찾아가 조사활동을 벌였다.
우리 조사위원회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은 모두 동원이 됐다. 이제 20개월 동안 조사한 내용을 담아 이 백서를 발간하는 바이다.

이 책에는 ‘공권력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증거’로 아래와 같은 사실들이 제시되어 있다.

· 범행 현장인 호텔 2210호실에서 주일 외교관 김동운의 지문이 채취되었고, 호텔 주차장에 근무하는 직원이 김동운이 범행에 이용된 승용차 조수석에 타고 가던 장면을 직접 보았다. 또 그 승용차는 요코하마 한국영사관 부영사 유영복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김경인 전 의원이 범인들이 “서울에서 왔다”는 유창한 한국말을 쓴 사람들이라고 한 사실은 명백한 증거이다.
· 1993년 9월 9일, 사건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으로 승선하여 일했던 조시환 씨는, 국회 민주당 원내총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 생생한 폭로를 하였다. 즉 용금호는 KCIA가 운영하는 공작선이었고 용금호에 김대중을 싣고 부산항으로 입항하였다.

김대중 자신은 1995년 2월 2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진상조사위원회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이후락 KCIA 부장이 총지휘를 하고 김치열 차장과 이철희 차장보가 한국 내에서 지휘·감독에 임했으나, 실질적 지휘는 이철희 차장보였다.
2)일본과 국내에서의 총지휘는 김기완 주일공사가 담당하고, 행동대장은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윤진원 KCIA 공작 제1단장이었다.
3)일본의 수사당국이 범인의 한 사람이라고 단정한 김동운을 호텔 복도에서 목격하였다.
4)이후락 전 KCIA 부장은 친구인 최영근 전 의원에게 “김대중이를 납치한 것도 나지만 살려준 것도 나다”라고 말하고 있다(같은 책, 109쪽).


김대중 납치 사건 정면으로 다룬 조선일보 사설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이 도쿄에서 ‘실종’된 뒤부터 8월 12일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동교동 자택으로 끌려오기까지 그 사건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보도하던 조선일보에 뜻밖의 사설이 실렸다. 9월 7일자 2면에 통단으로 나간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무엇이 그토록 알고 싶고, 무엇을 그토록 말하고 싶은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사건이라고 하겠는데 지금은 사건을 수사 중이니 수사결과가 밝혀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면 더 이상 다그칠 수도 없으니 더욱 답답하다.
우리는 김대중 씨가 실종 후 야반 자기 집 앞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뜻밖의 출현이어서 아연(啞然)하는 동시에 최악의 경우 씨의 죽음마저 추리할 수 있었던 만큼 씨의 생환을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씨가 살해되었을 경우의 음산한 내외의 반응에 비길 때 한 줄기 인간 구제의 밝은 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들려오는 일본의 여론 동향에는 우리로서 어딘지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그 말부터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어느 나라가 그런 종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개의치 않을 것이며 어느 국민이 대범하게 그것을 웃어넘길 수 있겠는가.
그런 불쾌한 반응을 탓하기보다 서둘러야 할 것은 실로 석연한 사건의 해결이다. 모멸적이 어서 불쾌한 반응에 대하여 섭섭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건 해결 연후에라도 조금도 늦을 것이 없다. (…)
(…) 일본과 일본인을 고깝게 생각하기에는 그 사건이 일본과 일본인에게 뒤집어씌운 오욕의 굴레는 우리에게 비길 것이 아니다. 감정으로서 감정에 대하기에는 김대중 사건은 무리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닌 만큼, 누가 저질렀던 간에 우리에게는 명예롭지 못하며 또한 그런 대립감정은, 일본인에게 한국인인 우리가 너무나 큰 핸디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김대중 사건 못지않게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란 말이다. (…)
사건의 전모가 밝혀짐으로써 그 관련 범위에 따라 혹시 어떠한 지위에 있는 소수 또는 상당수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도 범법자나 과격행동파는 있는 법이어서 그들이 법에 따라 조리 있고 엄정히만 다루어진다면 그것으로써 그 사회는 내외의 신뢰를 거두게 되는 것이며 그런 범법이나 사건을 앞으로 교훈으로 삼는다면 그 국민은 불행을 헤치고 도의적으로 구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넘어간다면 바빌론의 궁전도 무의미하며, 사회는 정신적인 퇴폐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점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중대한 이 시점에서 간절히 바라고 싶은 것은 위정당국 고위층의 단호한 결단이다.

이 사설이 조선일보에 실린 9월 7일은 한국 정부가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폐쇄하고 기자 3명을 추방한 8월 24일로부터 2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동안 일본과 미국에서는 “한국의 정보기관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동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정부는 한국의 중앙정보부 공작원들과 주일한국대사관 간부들이 납치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들어 “한국이 일본의 주권을 침해했다”면서 박정희 정권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그런 요구에 대해 “정보기관의 김대중 납치 개입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던 박정희 정권을 향해 조선일보 사설이 일본의 주장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논조를 폈으니 박정희 자신이 노발대발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정권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일보가 그런 사설을 실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에는 거기 대한 배경 설명이 이렇게 나와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수사가 지연되면서 국민의 의혹은 커져갔고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불편해졌으며 무엇보다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가 실추했다.
사건 발생 한 달이 넘도록 진상 규명을 위한 수사가 겉돌고 있던 9월 7일, 주필 선우휘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최고위층의 결단을 촉구하는 사설을 써서 발행인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한밤에 집어넣는 일이 발생했다. 9월 6일 자정을 넘어 편집국에 나타난 선우휘는 야근담당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어떤 위협에도 개의치 않고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고 선언한 후 윤전기를 세우고 사설을 갈아 끼울 것을 요청했다. (…)
이 사설이 실린 신문이 배포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조선일보 회수에 착수했으나 이미 신문은 독자들 손에 다 들어간 후였다. 선우휘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국가의 체면과 조선일보의 명예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독단전횡(獨斷專橫)한 소생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간결한 글귀와 함께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고 몸을 피했다. 결국 10여일 간에 걸친 중앙정보부와의 교섭 끝에 방 사장 명의의 편지가 이후락에게 전달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251~253쪽).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수사기관들이 ‘불온한 글을 쓴 언론인들’을 불법으로 연행해서 고문까지 자행하던 유신독재 시기에 신문사의 주필이 그런 사설을 써서 사장 몰래 신문에 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극히 보수적이고 박정희 정권에 우호적인 글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선우휘가 그런 ‘거사’를 일으켰다니·····. 그러나 사설이 나간 뒤 그가 신문사에 당당히 남아 있지 않고 몸을 피한 것이나, 조선일보 사장이 중앙정보부장과 은밀한 ‘교섭’을 해서 사태를 마무리한 사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1973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주일한국대사관 직원들이 관여한 사실 인정하면서 ‘사의를 표명’하겠다고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 그 이튿날 국무총리 김종필이 일본으로 가서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만나 ‘납치 사건과 주권 침해’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하는 ‘진사(陳謝)’의 뜻을 밝혔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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