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위수령 발동과 ‘국가비상사태’ 선포조선일보 대해부 3권 -14장
  • 관리자
  • 승인 2019.03.13 11:27
  • 댓글 0

1971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은 교련철폐투쟁을 다시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박정희 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해 나갔다.

1971년 9월 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교련백서>를 발간하여 “반역사적, 반민족적, 비지성적 군사훈련을 단호히 고발하며, 군사훈련 축출”에 대한 결의를 밝혔다. 9월 15일에는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등 4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교련의 ‘전면 철폐’를 재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9월 28일에는 연세대생 약 8백명이 “교련 담당 현역 군인은 즉시 학원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부정부패 규탄은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맞물리며 지배권력의 본성과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10월 5일 새벽 1시 30분경 수도경비사 제5헌병대 소속 군인 2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회관에서 농성 중인 서클 ‘한맥’ 간부 5명을 수도경비사로 불법 납치하여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경사 헌병대가 고려대에 난입한 이유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사령관을 대표적인 부정부패 인사로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대에서 9월 30일과 10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부정부패 원흉을 처단하라는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특히 10월 4일 벽보에는 대상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고, 거론된 이름 중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육군소장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589쪽).


‘수경사 군인 고려대 난입과 학생 납치’ 기사 없는 조선일보

무장한 군인들이 학원에 쳐들어가서 학생들을 납치한 사건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일로, 뜨거운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쩐 셈인지, 조선일보 10월 5일자부터 7일자까지 지면에는 그 사건에 관한 기사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10월 8일자 7면에 비로소 난데없는 2단 기사 두 건이 올랐다. 첫 번째는 「군인 학원 난입 규탄 / 고대, 연행학생 석방 요구」이고, 두 번째는 「적절히 조처하라 / 김 고대 총장, 국방장관에 공문」이다. 보도의 원칙은 먼저 발생 기사를 쓰고 다음에 속보(續報)를 내보내는 것인데, 조선일보에는 느닷없이 ‘속보’가 나온 것이었다. 같은 날자 2면의 사설(「외환과 내우의 직시 / 민심의 불안 상태를 빨리 수습해야 한다」) 중간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선거기간에서부터 계속된 ‘교련 반대 데모’가 여름방학이라는 수습기간을 통해 어느 정도 가라앉을 것 같이 보이더니 이번에는 ‘부정부패 규탄’의 새 구호가 첨가되어 수는 비록 그리 많다 할 수 없을지언정 그 과격한 행동 양상이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게다가 5일 새벽에 있었다는 고대 사건은 학교 측이 주장하는 대로 ‘무장군인의 학원 내 난입’이 틀림없다면 이 또한 국회의 침울한 분위기와 다름없는 불행한 징후라 아니할 수 없게 된다.

10월 9일자 1면에는 「군인 고대 난입 따져 / 유 국방 답변, 김 총장에 사과, 진상 조사 중」이라는 기사가 5단으로 실렸다. 같은 날자 7면에는 「대학가 데모·성토 / 고대 군인 난입 사건 등 항의」라는 제목의 기사가 7면 아래 구석에 2단으로 실렸다.

조선일보는 10월 10일에야 무장군인 고대 난입을 소재로 한 사설(「군기와 유 국방의 책무」)을 2면에 내보냈다.

(…) ‘무장군인의 고대 난입 사건’은 8일의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유 국방부장관이 야당 의원의 추궁에 답변하여 그 전말을 보고하고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헌병들이 저지른 소행이었음을 밝혔다. 우선 소관 장관이 국회에서 솔직히 있은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고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했으므로 이 충격적인 사건이 공개되지 않은 채 쑥덕공론으로 시민들의 입과 귀를 통해 꼬리를 붙여 퍼져 나가던 5일 아침부터 며칠간의 불안했던 민심을 가라앉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행하게 생각한다. (…)
(…) 유 국방이 국방위원회에서 “군인의 정치테러나 부정부패가 있다면 이를 발본색원하겠다”는 요지의 강력한 언명을 한 것에서도 그 신조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듯이 국내문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군만은 미동도 없는 자세로, 그리고 깨끗한 존재로 국민의 신뢰를 드높여 나가야만 된다는 것을 십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군에 ‘부패분자’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이번 고대 사건의 계기가 된 ‘장성 모욕’도 알고 보면 그것이 학생들의 창작이 아니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원의 연설 가운데 나온 속기록의 내용 일부를 학생들이 인용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의 원내 발언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처지를 분간하지 않는 허물을 면치 못하겠지만, 그러나 만약 유 국방이 언명한 대로 군기 확립을 위해 ‘발본색원’할 결의가 있다면, 엄중한 자체 감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발설한 의원에게 그 자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어쨌든 무장군인의 학원 내 난입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유 국방과 윤 사령관의 솔직한 태도 표명으로, 원만한 수습의 실마리가 된 것을 우리는 안도하는 것이며, 특히 유 국방이 ‘군기 확립’이란 중차대한 과제를 걸머지고 더욱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꿋꿋한 자세로 그 책무를 다할 것을 편달해 마지 않는다.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난입과 학생 납치는 단순한 ‘군기 문란’이 아니라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만행이었다. 수도 서울을 ‘경비’한다는 헌병들이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는데도 조선일보의 사설은 국방부장관이 국회에서 “솔직히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고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한 사실이 ‘다행’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솔직한 태도 표명’이 ‘원만한 수습의 실마리’가 된 데 ‘안도’한다.

조선일보가 정론지(正論紙)를 자처하려면 이 사건에 관해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를 촉구했어야 마땅하다. 대통령에게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위수령 발동과 7개 대학에 군대 진주

10월 7일 서울대 문리대·법대·상대 학생들은 ‘부정부패 추방’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특히 문리대 학생들은 교내에서 ‘부정부패 특권층 화형식’을 거행한 뒤 거리로 나섰다. 10월 12일에는 전남대 학생들이 부정부패를 척결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2일과 14일에 전국 여러 대학에서 가두시위에 나선 학생은 1만명을 넘었다. 그들은 부정부패자의 명단 공개, 무장군인의 고려대 난입 책임자 처벌, 중앙정보부 철폐를 요구했다.

2학기 들어 시작된 대학가의 교련철폐투쟁과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갈수록 뜨거워지자 10월 12일 국방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이 “교련수업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강제 징집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합세한 박정희 정권 비판투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박정희는 10월 15일 9개 항으로 이루어진 ‘특별명령’을 내렸다. ‘정권 안보’를 위협하는 집회와 시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9개 항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도 학생을 학원에서 추방 2)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 거부 수강 방해 등 난동행위 주동자는 제적 3)제적된 자에 대한 학생 신분상의 특권 박탈 4)학술 목적 외의 모든 대학 서클 해산 5)대학에서 정당히 인가한 것 이외의 모든 간행물 발간 중지 6)학원질서가 파괴된 대학에서는 모든 학생단체를 해산하며, 경찰은 학원 내에 들어가서라도 주도 학생을 색출 7)군은 필요한 때에 문교부, 내무부 및 지방장관의 요청에 적극 협조 8)교련은 중단될 수 없으며 교관단은 충실히 강의에 임할 것 9)각 대학은 학칙을 엄격히 보강해 질서 확립과 교권 확립을 기할 것(조선일보 10월 16일자 1면).

박정희의 ‘특별명령’은 법적 절차에 따라 국회의 동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독재자인 대통령이 내린 전체주의적 ‘명령’이었다. 그 명령은 대학의 존재이유를 부정하고 학원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파쇼적 만행 그 자체였다.

박정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서울대 문리대·법대·상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경희대, 성균관대, 한국외국어대, 전남대에 ‘무기휴업령’을 내리고 학교 문을 닫게 했다.

서울에 위수령이 발동됐다. 15일 오전 박 대통령의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이 내려진 직후 양택식 서울시장은 위수령 제12조에 의해 군당국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양 시장은 “작금의 학생들이 학원 내외를 막론하고 그들이 본분을 망각하여 성토, 데모 등으로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여 그동안 경찰이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해왔지만 경찰병력만으로는 완전한 사회질서 확보가 어렵다고 보고 위수령 제12조에 의해 15일 오전 10시 35분 군당국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출동한 군병력은 이날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비롯한 서울시내 7개 대학에 진주했으며 당국은 데모 주동학생의 색출에 나섰다(조선일보 10월 16일자 1면).

말이 위수령이지 그것은 학원에 대한 비상계엄령이나 마찬가지였다. 15일 고려대에서 학생들이 투석전으로 군대 진주에 맞서자 위수군은 70여 명을 연행했다. 그날 서울시내 7개 대학에서 1,889명의 학생이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국회 기능 발휘’를 호소한 조선일보 사설

박정희가 망나니처럼 칼춤을 추면서 대학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직후인 10월 16일자 조선일보 2면에는 「국회의 기능을 발휘하라 / 비상사태 처리를 우선시킬 의무가 있다」라는 사설이 올랐다.

위수령이 발동되는 등, 학원사태가 근래에 없이 심각하게 되었는데도 국회는 기능이 마비된 채 공전(空轉)만을 되풀이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리 여야 간의 대립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오늘과 같은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국회가 그 수습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야만 국회의 존재의의가 인정되는 것이다. 신민당 측은 이번 사태가 일어나자 공화당 측에 국회 본회의에 출석할 것을 호소하고 있으나 여당 측은 조건을 내걸고 계속 본회의를 유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여당 측이 내세우는 조건이란 추경 예산안 심의를 위한 예결위의 야당 측 명단을 제출하라는 것인데, 야당 측은 의원 신분 침해 및 군인의 학원 난입 사건을 다루기 위한 국회 본회의와 특조위 구성을 요구하면서 명단 제출을 보류해 왔던 것이다. 의원 신분 침해사건이나 군인의 학원 난입사건을 둘러싼 여야의 대립에 관해서도 할 말은 많다. 그러나 그 두 사건은 중대하기는 하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이고, 이번의 학원사태는 지금 진행 중에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여야는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은 차후로 미루고 우선 지금 진행 중인 사건을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
(…) 여야는 기왕의 일은 일단 보류해 놓고 어떻든 국회 본회의를 여는 데 협력하기를 바란다. 사태가 심각할 때에는 국회 본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것, 국회가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국민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고 사태를 부드럽게 하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다. (…) 이번과 같은 중대한 사태에 당면하여 국회가 이를 외면할 경우 국회의 권위는 물론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크게 저하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하루속히 국회가 열려 사태의 수습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사설은 여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국회에서 대립하면서 10월 15일에 일어난 ‘학원 사태’를 논의할 본회의를 열지 않는 것이 ‘직무유기’라는 투로 나무라고 있다. 그리고 신민당이 ‘의원 신분 침해’와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 사건을 다루기 위해 본회의를 열고 특조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는데도 공화당이 신민당의 ‘예결위원 명단 제출 보류’를 구실로 그것을 거부한 것을 대등한 행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 두 사건은 중대하기는 하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이고, 이번의 학원 사태는 지금 진행 중에 있는 사건”이니 전자는 차후로 미루고 후자부터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0월 15일 박정희가 ‘특별명령’을 통해 학원에 가한 쿠데타는 야당과 학생들이 박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을 규탄하는 데 대한 ‘비상조치’였다. 그런데 위의 사설은 10월 15일 직전과 그 이후에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듯이 여기고 있다. 그리고 설령 10월 15일에 일어난 위수령 발동과 군대의 7개 대학 ‘진주’가 아무리 중대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국회의 다수당이면서도 박정희의 거수기들이나 마찬가지인 공화당의 다수 의원들이 어떻게 야당의 국회 소집 요구에 응해서 대책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의 군사파쇼적 폭거에 대해 공화당이 신민당과 함께 “군대를 학원에서 철수시키라”는 공동결의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구색 갖추기’ 식 사설을 내보낼 바에야 차라리 사설을 싣지 않는 ‘침묵의 저항과 비판’을 택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느닷없이 선포된 ‘국가비상사태’

10월 23일 위수군이 학원에서 철수할 때까지 전국의 23개 대학에서 학생 174명이 제적되고, 35개 대학에서 교련 미수강자 6,322명을 포함한 1만3,505명이 ‘학적 이동자’로 병무청에 신고되었다. 한 야당 의원은 “그렇게 많은 학생이 제적된 것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시기에도 없었던 일로 전체주의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강요의 의한 침묵’ 상태에 들어갔는데도 박정희 정권은 새로운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고, 위수령으로 제적된 서울대생 4명(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과 사법연수원생(조영래) 1명을 검거했음을 밝혔다. 검찰은 이들이 폭력시위를 통해 정부 기관을 습격, 전복한 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및 학생 대표들과 ‘혁명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등 ‘9단계 국가전복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조작된 사건임을 밝히고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검찰은 이들에게 10년 형을 구형했지만, 1972년 12월 항소심 최종판결에서 이들은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 최종판결의 결과는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거창한 이름을 걸고 발표했던 중대한 사건이 국가비상사태 선포에 앞서 민주화운동세력을 미리 탄압하고 족쇄를 채우려는 의도 하에 만들어진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597쪽).

1972년 12월 6일 박정희는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 30분 청와대에서 긴급국무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 그 의결을 거쳐 1)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2)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지 않으며 3)최악의 경우, 국민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선언을 윤주영 정부대변인을 통해 발표했다. 이 선언은 그밖에 1)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갈 것 2)모든 국민은 안보상 책임 수행에 자진 성실할 것 3)모든 국민은 안보 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할 것 등을 촉구했다. (…)
박 대통령은 이날 선언에서 중공의 유엔 가입을 비롯한 국제정세의 급변과 북괴의 남침 준비 양상을 예의 주시, 검토해본 결과 한국이 “안전보장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으며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 비상사태를 극복할 결의를 새로이 할 필요를 절감한다고 선언 발표 이유를 밝혔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선언의 법적 근거를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해 “헌법상 대통령이 보유한 권한인 긴급명령 발동 직전의 통치권의 행사”라고 설명했다.
김 대변인은 선언의 기한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긴장, 북괴 침략 위협이 제거되지 않는 한 비상사태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2월 7일자 1면).


조선일보 사설,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적극지지

조선일보는 12월 7일자 2면에 「국가비상사태의 선언 / 국민의 정신적 총무장으로 난국을 극복해내자」라는 사설을 실었다.

(…) 사실인즉 ‘국가비상사태의 선언’이란 우리 국민들로서는 처음 당해보는 일이다. 헌법상에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제75조)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위험한 요건으로서의 국가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박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엄격한 의미로 해석한다면 계엄령이 선포되는 것 같은 국가 보위상의 불행을 사전에 막아보자는 ‘정치적 차원의 예방조처’로 인식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그동안 정부 측에서 여러 기회를 통해, 일반에게 최근의 북괴 동향을 알리고,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여 왔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악용하는 북괴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이번 ‘비상사태 선언’에 의해서 이제는 더욱 선열(鮮烈)히 파악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 판단은 정보기관의 세밀한 분석과 군사당국의 철저한 검토 끝에 이루어진 것인즉 국민들로서는 오직 박 대통령이 내린 ‘선언’의 뜻에 좇아 이에 적극 협력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가해졌으며, 법률적 차원에서의 어떤 특별한 규제란, 이 ‘선언’만으로서의 효과로써는 있지 않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전 국민의 정신적 총무장을 촉구한 박 대통령의 ‘대호령’이라 할 수 있고 이러한 ‘대호령’에 의해서 북괴의 야욕을 견제하는 쐐기를 박았다고 할 수 있다면 이번 ‘선언’의 정치적 의의는 실로 막중한 것이다. (…)
(…) 이 땅에서 다시는 6·25와 같은 참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항재전장(恒在戰場)’의 대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요즘과 같이 국제정세의 이상 기류 속에서 과거처럼 유엔을 믿을 수도 없고 미군에만 기댈 수도 없는 우리 처지에서 볼 때, 북괴의 재남침 야욕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우리의 만반 대비 이외에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다. (…) 그와 같은 대비는 현대전의 성격상 군비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며, 적어도 국민총력전으로서의 국민총화가 대북괴 대비의 기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박 대통령이 (…) 취할 다음의 과감한 조처를 주목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엄숙하게 이 난국을 극복할 마음의 자세를 전체 국민과 더불어 심각하게 자성해 보아야 할 순간이다.

박정희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주장한 주요 원인은 ‘국제정세의 급변’과 ‘북괴의 남침 준비 양상’이었다. 그런데 당시 실제 국제정세는 ‘데탕트(화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미국을 수렁에 빠뜨린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을 조속히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다. 그렇게 하려면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소련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닉슨은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데탕트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1971년 12월에는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10월 25일 중국이 유엔에 가입해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된 바 있고, 중국을 향한 미국의 화해정책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런 국제정세를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서 한국이 “안전보장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 비상사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의 12월 7일자 사설은 박정희의 그런 주장보다 훨씬 더 나가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악용하는 북괴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은 “정보기관의 세밀한 분석과 군사당국의 철저한 검토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설령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더라도, 남한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면 ‘조선·중국 군사동맹’의 당사자인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유엔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중국이 그런 모험에 동조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닉슨 행정부가 데탕트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북한군이 남침을 할 경우 막강한 주한미군이 뒷짐을 지고 보도록 할 리도 없는 것이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조선일보의 사설이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박 대통령의 대호령’이라고 떠받들면서 마치 봉건왕조 시대에나 있을 법한 ‘용비어천가’를 부른 사실이었다. 그리고 ‘국민총력전’ ‘국민총화’처럼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가 ‘천황 폐하’에게 바치던 충성 서약 비슷한 용어들까지 동원했다.

공화당은 12월 27일 새벽 3시 국회 제4별관에서 법사위와 본회의를 잇달아 열고 공화당 의원 111명과 무소속 의원 2명이 참석한 가운데 야당이 격렬히 반대하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안’을 3분만에 통과시켰다. 박정희는 그날 오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그 법을 공포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사후에 합법화하기 위해 공화당이 발의하고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가결한 국가보위법은 대통령에게 국가비상사태 선포권을 부여하고, 국회의 비상사태 해제 건의권을 인정했다. 이 법에 따라 대통령은 국방상의 목적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효율적 동원이나 통제운영을 위해 국가동원령을 발동하고, 동원 대상 지역의 토지, 시설의 수용·사용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하고, 옥외집회· 시위 언론 및 출판과 근로자의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독재를 일삼던 박정희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