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의 깃발이라 할 수 있는 ‘自由言論實踐宣言(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簇子)가 오랫동안 실종상태에 있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한참 위세를 떨던 1975년 하반기의 일이니 40년 이상이나 그런 상태가 지속된 셈이다. 그런데 종적을 몰라 찾아 헤맸던 그 족자가 40년이 훨씬 지난 2018년 가을에야 뒤늦게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우리 투위 가족의 집 서재에서. 투위의 일원인 강정문위원이 병을 얻어 세상을 뜬지 20년이 다 되어서다.

그 ‘自由言論實踐宣言’ 족자는 유신선포 2년차인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소속 기자 1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 때 편집국의 정중앙인 사회부장석 바로 뒷자리에 내걸린 이후 줄곧 동아일보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편집국을 지키고 있었다. 투위 위원이던 고 이계익 선배가 아현동 자택 서재에서 큰 붓으로 내려쓴 전장 3m에 이르는 대형 두루마리였다. 글씨의 크기를 담을만한 전지가 없어서 집에 있던 벽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족자는 1975년 3월 17일 신새벽 동아일보사 안에서 자유언론실천 투쟁을 하던 동아일보. 동아방송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50여명이 폭도들에 의해 밀려나 신문사를 퇴거하던 때까지도 걸려있었다.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 모습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 모습

3월 17일 그날, 우리는 2층 공무국을 지키며 단식 농성을 해온 동료 편집국 기자들이 농성을 풀고 편집국이 있던 3층으로 합류한 것과 동시에 긴급 비상총회를 열어 자유언론실천을 향한 우리의 결의를 다짐하고, 일단 신문사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 순간 편집국 밖에서는 일단의 술 취한 폭도들이 우리들을 언론 ‘현장’에서 들어내기 위해 총회 장소에 쳐들어오기 직전의 긴박한 상황이었다. 우리들이 ‘자유언론 만세’를 외치며 밖으로 나오자 동아일보사 앞에는 밤새 우리들의 안위를 걱정해마지않던 수많은 동아일보 애독자와 시민, 재야 민주인사들이 우리를 맞아 엄호해주었다.

그런데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 다들 정신이 없었던 탓인지 누구도 그 족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이걸 두고 가면 안될 것 같아서 족자를 둘둘 말아 챙겨서 서대문구 대조동 처가로 가져갔다. 그 당시 아내가 둘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나도 함께 팔자에 없는(?) 처가살이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1년여전 동아일보 노조 결성 주동자로 찍혀 신문사에서 해직돼 한 달 동안 공백기를 가진 일도 있었던 터라 또다시 ‘동아사태’로 상황이 유동적이 되자 처갓집에서도 나의 신상에 대해 내심 불안 불안해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가 해결점을 찾지 못한 가운데 교착상태에 빠지자 우리는 장기화에 대비하여 임시로 투위 사무실을 열었다. 문제의 족자를 처가에서 투위 사무실로 가져온 것이 그 무렵으로 기억되는데(적어도 나로서는) 언젠가부터 족자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날’ 새벽 그 두루마리를 직접 챙겨 나왔던 나로서는 그 소재에 대해서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내가 마음속으로 캥긴 것은 그해 6월 이화여대생들이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돕기 위해 손수건을 만들어 판매하다 당국에 적발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사법당국이 나 자신을 그 사건에 연루시키면서 내가 16일 동안이나 구속영장도 없이 경찰서에 유치해서 조사를 받았던 일 때문이다.

1975년 6월 24일. 이날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동아투위 발족 백 일째가 되는 날인데다 동아투위가 미국의 A.D (Anno Domini 의 약자)지로 부터 ‘러브조이 자유언론상’을 받은 날이기도 하였다.

이 상은 1837년 미국 일리노이주 엘튼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기사를 썼다가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이 신문사를 습격했을 때 목숨을 바친 장로교 목사 엘라이자 패리쉬 러브조이를 기리기 위해 1973년부터 해마다 시상되었는데, 외국인이 받게 된 것은 동아투위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동아일보사가 아닌 펜과 마이크를 빼앗긴 거리의 ‘동아투위’에게.

수상식과 함께 정리 집회를 마친 직후인 오후 5시경, 나는 신문회관 어귀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복형사 2명에 의해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서대문 경찰서 소속이라고 밝힌 형사는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잠깐 알아볼 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가자고 말했다. 다음날엔 이태호 기자가 연행되어왔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으나 경찰서에 도착한 다음에야 안면이 있는 형사가 귀띔을 해주어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투위 유인물이 발견됨으로써 우리 둘이 학생들을 뒤에서 선동하고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 이기자는 해직되기 전까지 각기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로 이 대학에 출입했었다. 사태 이후 우리들은 신문사 재직 중에 취재 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있었던 기관이나 개인 등을 상대로 ‘동아사태’의 진상과 우리의 활동을 알리는 유인물을 작성해서 나눠주는 일을 했었다. 이화여대도 내가 재직 중에 출입했던 곳의 하나였고, 그곳의 안면이 있는 교수나 학보사 등에 유인물을 나눠 준 것이 사실이었고, 그 중 일부가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 흘러갔으리라는 짐작은 갔다.

‘동아돕기 손수건 사건’으로 명명된 이 일은 일부 이화여대 학생들이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돕는 방법을 의논한 끝에 그중 하나로 손수건을 제작,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해직기자들을 도우려다 문제가 된 것이다.

문제의 손수건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뛰어노는 추상화와 논어의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邦無道危行言遜(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동은 대담하게, 말은 겸손하게 하라)’ 이라는 귀절, 윤동주의 <서시>등을 각각 디자인한 것 등 4종이었다. 이 일은 여대생이 일으킨 것으로는 첫 번째가 되는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내가 1년여전 동아일보 노조 사태 때 한 달 동안 해직을 겪은 일이 있는데다(이 사건은 해임 한 달 만에 회사 측이 해직 자체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해서 없던 일로 정리됐었다.) 또 다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자 처가로서는 청천 벽력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업자 사위에 둘째 아이를 출산한지 3.7일(세이레)도 지나지 않아서이다. 그 둘째는 아기 때 잔병치레를 자주 해서 돌잔치도 제대로 못해줄 정도로 몸이 약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리고 태어나서도 엄마 마음고생에 섭생이 원활치 못했던 탓이려니 생각하면서 늘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장성해서 의젓하게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사회에 나가서도 제몫을 하고 있어서 늘 대견스럽게 생각해왔다.

나의 신상을 염려해서인지 내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간 직후 신문사 재직 중에 서대문경찰서에 함께 출입했던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처갓집을 찾아와 혹시 경찰이 압수 수색에 들어갈지 모르니 의심을 살만한 것들은 다 없애라고 귀 띔을 해주고 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처가에서는 그 기자의 연통을 듣고 내가 써왔던 취재수첩은 물론 좀 불편한 책자, 자료, 그리고 집에 놔두었던 이대생들이 만든 동아돕기 손수건 등을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막스 웨버가 칼 막스(마르크스)와 발음이 비슷하다 해서 그의 책이 좌경서적으로 몰리던 세월이었고, 걸면 걸리던 시절이었음에야.

나와 이기자는 2주일여를 경찰서에서 지내다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이대생들은 실형을 받아 복역까지 했으니 참으로 미안하고 민망한 일이었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이 치죄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 한참 뒤의 일이지만 묘연해진 족자의 행방을 알아봤다. 나는 처가에서 태워버린 문건이나 물품 속에 문제의 족자도 들어있었지 않을까 의심을 했다. 아내도 경황이 없어 기억이 확실치는 않으나 대형 족자는 보지 못한 것같다고 했지만.

나나 투위 사람들 생각으로는 딱히 증거는 없지만 문제의 족자를 중앙정보부나 경찰 같은 수사기관에서 임의로 압수해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이 투위 위원들이 이런저런 일로 공안당국의 조사와 압수 수색을 수차 겪어왔기 때문에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 것이다.

1990년대 말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나는 이 족자의 행방을 알아보기로 했다. 마침 내가 잘 아는 한 언론인 출신 지인이 국가안전기획부의 요직을 맡게 돼서 그에게 안기부 내에서 그 족자의 행방을 찾아볼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해 두었다. 한참 뒤에 돌아온 대답은 ‘알 수 없다’ 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또 세월이 20년 가까이 흘러같고 문제의 족자가 작고한 동료의 집 서재에서 나왔다. 이사를 하면서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 족자가 나왔다면서 동아투위 쪽에 알려옴으로써 실물이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강정문위원이 당국의 압수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서재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모양인데, 후에 그가 취업한 직장 일에 쫓긴데다 득병까지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종적을 감췄던 것이다. 그동안 애꿎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던 것이 그쪽에는 약간 미안하지만 그것도 업보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동아투위는 40여년 세월이 지나면서 원본 자체가 마손 위기에 이른 이 족자를 전문기관에 의뢰해 보존처리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10월 17일 ‘생환(生還)’(?)한 자유언론실천 족자를 43년 만에 처음 일반에 공개하면서, 이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관장 주진오)에 기증해 영구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2018년 10월 17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 기증식 모습

2018년 10월 17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 기증식 모습

2018년 10월 17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 기증식 모습

2018년 10월 17일 열린 기증식에서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이 족자와 관련한 당시 상황을 추가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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