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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조선일보 대해부 2권-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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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0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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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거위원회는 1960년 3월 16일 오후, 전국 개표소 187 곳의 개표 결과를 발표했다. 자유당 대통령후보 이승만은 총 유효투표수의 88.7%인 966만3,376 표, 이기붕은 79%인 833만7,59 표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은 184만3,758 표로 이기붕에 무려 649만37만여 표나 뒤졌다는 것이 선관위의 발표 내용이었다.


마산에서 타오른 부정선거 규탄의 횃불

중앙선관위의 발표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사망한 이후 민주당을 대표해서 고군분투한 장면이 이기붕이 얻은 표의 4분의 1도 못 되는 득표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되었다. 한희석 선거대책위원장 겸 기획위원장 등 자유당 간부들은 1960년 3월 15일 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개표 상황을지 켜보다가 대표적 야당 도시인 대구에서 이기붕 5,000 표, 장면 32 표라는 비공식 보고를 받고 놀랐다. 국무위원들도 일부 지역의 개표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최인규·이강학 등은 한밤중에 경비전화로 이승만은 80%,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각지에서는 부랴부랴 감표(減票)에 들어갔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 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했다(<한국민주화 운동사 1>, 113쪽).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기획’하고 집행한 3·15 부정선거는 개표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대리투표, 사전투표, 3인조 투표가 진행되었다. 자유당의 완장부대는 경찰, 반공청년단과 함께 투표장 언저리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민주당 참관인들 다수는 투표소에서 쫓겨났다. 민주당은 전남과 경남에서 오전부터 참관인을 철수시키고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민주당 광주시당은 한낮인 12시50분경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외치며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30분에, 경남도당은 오후 1시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투표가 끝나기 전인 오후 4시30분 민주당 중앙당은 “3·15 선거는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3월 15일 오후 3시경 마산에서는 뒷날 ‘마산 항쟁’ 또는 ‘마산 의거’라고 불리게 된 역사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항쟁의 불길을 댕긴 주체는 민주당 마산시당이었다. 시당 간부들은 그날 아침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서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들은 오전 10시30분경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시위에 나섰다.

(…) 시위는 자연발생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3월 15일 오후 3시경 민주 당사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민중들이 민주당 경남도 의원 정남규를 선두로 “협잡선거 물리치자”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하다 마산시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
시청에서 개표가 진행된 오후 7시30분경 시민과 학생 1만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선거 무효를 부르짖었을 뿐 그 이상의 극렬한 구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경찰은 사태의 긴박성을 예측했음인지 전원 실탄을 장전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시청 입구는 물론 파출소마다 엄중한 경계를 폈다. 이때 정전이 되면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치안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는 경찰이 무장도 하고 있지 않은 민간인에 대한 발포를 명령받고 사격과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한 것이다. 총격을 피한 시위대는 변절 의원 하윤수(5·2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되어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김)의 집과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사(친이승만계로 정부 기관지 역할) 마산총국, 국민회 마산지부, 남성동파출소 등을 부수었다. 평화적 시위가 경찰의 발포와 폭력적 진압으로 격화되었고, 시위는 민중 봉기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독재정권의 하수인과 말단 통치기구인 자유당사와 자유당 의원, 경찰서, 각종 관제 어용단체를 공격했다. 이날의 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 8명(9명이라는 설도 있음), 80여명의 중상자를 내고 밤 11시30분경 완전히 진압되었다.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건국 이래 최대의 불상사였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모두 253명으로 이들은 예외 없이 경찰로부터 무자비한 보복성 폭행을 당했다. 이 중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이 공산주의자로 취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같은 책, 114~115쪽).


‘마산 항쟁’ 초점 벗어난 조선일보 1면 보도

3월 16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 머리에는 「마산에 일대 소요사건! / 학생·시민들 지서 습격코 방화」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경남지사 기자의 ‘지급전(至急電)’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기사는 몇 문장뿐이었다.

15일 하오 6시부터 동 9시반까지 사이에 마산시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데모가 유혈 소요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날의 소요사건으로 마산시내 수개 처의 경찰 지서가 소각 혹은 파괴되었으며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경찰에서는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다 못해 총격전을 감행하였으며 주모자 등 37 명을 연행 문초 중에 있다.

이 기사는 마산에서 군중이 왜 그렇게 과격한 시위를 벌였는지, 경찰이 왜 사격을 하고 최루탄을 발사했는지에 관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전하지 않은 채 학생과 시민들의 지서 습격과 방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기사 옆에는 ‘내무당국 발표’가 실려 있다.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한 사실들보다 ‘당국’이 발표한 내용이 ‘마산 항쟁’의 제1보로 제시된 것이다.

15일 하오 4시경 투표가 끝날 무렵 마산시내서 민주당 소속 경상남도 의원 정남규 씨, 마산시당 위원장 강선규 씨 등 10여명이 부정선거를 배격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시민을 선동, 약 60명이 데모에 참가, 경찰에서는 일단 해산시켰는데 7시20분경 다시 민주당원의 선동으로 시민 약 250명이 참가한 가운데 재차 데모를 감행하여 경찰이 데모를 저지했으나 경찰에게 투석 반항하고 계속해서 자유당 시당부 유리창을 투석으로 깨뜨리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고 9시30분 북마산으로 향하였는데 데모대는 북마산지서를 포위하고 방화, 경찰은 처음에는 공포를 쏘고 해산을 명했으나 안 되어 본격적인 제지를 한 결과 16일 자정 현재 2명이 사망, 15명의 부상자를 내었는 바 전원 다 민주당원으로 추측된다.
그 후 경찰은 해산하고 개표가 착착 진행 중이다. 경찰에서는 방화 또는 불법 혐의자로 37명을 연행 조사 중이다. 특히 마산은 밀수선 등을 이용하여 공산당이 침입, 도량(跳粱)한다는 정보도 있어 애국동포들은 신중을 기하기 바란다.
한편 최 장관은 경찰이 동 데모대를 해산시키는 데 있어 수 개의 최루탄을 사용했음을 밝히고 사망자와 부상자 등의 사인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조사를 한 다음 16일 상오에 공표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자 석간 3면 머리에 「마산 소요사건 상보(詳報)」를 실었다. 「주권 병들고 민의는 피 흘리고 / 남녀노유 시위행렬 장장 1킬로 / 경찰국 응원대 출동으로 세 시간 만에 진압 / 치열한 투석전 끝에 드디어 발포까지」라는 제목의 기사는 조간에 실린 ‘내무당국 발표’와는 내용이 판이했다.

[마산에서 경남지사 김형만 기자 발] 경향 각지에서 선거를 앞두고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학생들의 데모가 15일 선거일을 맞이한 마산에서는 드디어 소요로 화하고 이날 밤 10시까지 확인된 것만 8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날 데모가 악화되기까지의 경위를 살펴보면 하오 3시반경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 20여명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거리에 나가서 공명선거를 외치다가 그 중 6명이 경찰에 연행된 것이 직접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를 따르던 약 7백명의 군중이 마산시 남성동에 있는 민주당 시당 본부에서 시청으로 행진을 하자 그 뒤를 이어 점점 군중이 모여들어 하오 6시반경에는 수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던 것이다.
군중들은 돌과 몽둥이를 들고 본부에서 약 1킬로 떨어진 시청 앞까지 꽉 차게 모여들었다. 이 군중은 국민학교생으로부터 중고등학생, 남녀노소가 뒤섞인 것이었으며 이들은 ‘공명선거’를 외치면서 데모를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시청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펴고 군중이 모여드는 것을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포를 쏘기 시작하였으나 다시 해산시키지 못하고 데모가 시작된 지 세 시간이 경과된 밤 9시 반경 세 트럭에 분승한 경남경찰국 경찰대의 지원을 얻어 비로소 진압하였다. (…)
이 데모로 말미암아 발생한 경찰과 시민들의 사상자는 상당수에 이를 것이 예상되나 현지에서 기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시민이 4명, 부상을 입고 시내 각 병원에 입원 중인 중고등학생과 시민이 48명을 헤아리고 있고 시청 4층에서 부상을 입고도 경찰의 문초를 받고 있는 부상자만도 30여명인 바 이들 부상자 중 생명이 위독한 사람이 또한 10여명으로 확인되었다.


‘호헌구국운동’ 주장한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3월 17일자 석간 1면에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강경한 논조의 사설을 내보냈다.

허울 좋은 ‘한 표의 주권’에 얽매어 그지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 전율하던 3·15 정부통령선거도 이제 모든 부정·불법을 막후에 감춘 채 국회의 당선 선포라는 절차만을 남기고 어느덧 과거라는 피안에 흘러가려 한다. 이때 우리는, 아니 뜻있는 전 국민은 엄숙히 자문자답해 본다. ‘과연 이것이 선거인가?’라고. 민주주의의 골격이 될 ‘선거’라는 제도가 이렇게도 처절하고 그다지도 황량하다면 민주주의를 위해서 뿌린 동서고금의 선각자들의 혈(血)의 분투와 노고가 너무나 가엽지 않을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눈물과 함께 부르며 낙동강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용진하던 6·25 당시의 우리 젊은 병사들 모습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간다. 지금쯤은 어느 산비탈의 이름 없는 무덤에서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들 영령이 아까운 몸을 바쳐 수호했던 민주주의대한민국의 ‘선거’가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국민 앞에 나타날 것을 알았다면 지하에서의 곡성이 진동할 것이며 영겁의 유적(幽寂)도 요동될 것 같다. 3·15의 결론은 이제는 무슨 선거를 해도 집권당의 자유자재로 된다는 것을 알았다. (…) 조표(造票)의 노예로 화한 우리 ‘주권자’는 묵묵히 공개투표의 대열에 끼일 뿐, 항거하거나 반대하기도 어려웠다는 교훈을 이번에 잘 알았다. (…)
(…) 민주당에서는 3·15 선거의 불법·무효를 부르짖고 원내투쟁과 법정투쟁을 병행한다고 했다. (…) 원내투쟁도 좋지만 과거의 투쟁방식과는 달리 애절하고 비통하면 듣고 보는 이가 모두 숙연히 옷깃을 여미고 그러고도 방성대곡할 수 있는 저항방식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민주 패잔병의 발악이 되기 쉽다. 그보다도 민주당은 정당운동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박차고 나서라. 이제는 호헌구국의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2·4 파동’ 직후 우리는 민주당에게 의원직의 총사퇴를 권고했었다. 그때 이미 오늘과 같은 사태가 도래할 것을 우리는 미리 예견했기 때문이다. ‘2·4 파동’에서 벌써 민주주의적 정치방식은 지양되었던 것인데 민주당은 원내투쟁이란 이름 아래 굴욕적인 타협을 하고 말았던 것이니 오늘에 와서 그때의 오산임을 뼈에 사무쳐 깨달았을 줄 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원인들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3·15 선거를 몸소 겪고 이래도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희망을 걸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믿는다. 사는 길은 오직 호헌구국의 대의를 내걸고 전체 국민과 더불어 투쟁하는 국민운동의 전개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라.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에는 이 사설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3월 16일, 역사의 격동 속에서 조선일보 간부들은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를 놓고 간부회의를 열었으나 강경론과 온건론이 부딪쳐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논설위원들은 재차 회의를 갖고 이승만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그리고 “호헌구국의 국민운동을 전개하자”는 내용의 사설을 최석채 논설위원이 대표 집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렇게 하여 3월 17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에 게재된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제목의 사설은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 명논설이 되었다. (…)
이 사설이 나가자 경무대에서는 최석채를 구속하기 위해 대공 검사, 치안국장, 미군 정보기관(CIC) 대장 등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정부 공보실장 최치환이 “최석채를 구속하면 기름에 불을 붙는 격”이라며 “구속을 하더라도 민심이 수습된 뒤에 하자”고 만류했다. AP·UPI 통신 등 외신 기자들은 최석채가 구속될 것을 확신하고 취재하기 위해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진을 치고 대기하기도 했다(183쪽).


마산 제2차 항쟁에 관한 조선일보 보도

3월 15일에 터진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 항쟁은 이튿날부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잠잠해진 듯하던 4월 11일 이승만의 독재와 종신집권을 끝장내는 4월 혁명의 불씨가 될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오전 11시30분경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에서 낚시질을 하던 사람의 낚시에 교복을 입은 소년의 주검이 걸려 올라왔다. 눈에서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모습으로 인양된 소년의 이름은 김주열(1944년 10월 7일생)이었다.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나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상고 입시해 합격한 김주열은 4월 초의 입학을 앞두고 마산에 머물면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었다.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을 담은 사진과 함께 그 끔찍한 현장을 가장 먼저 보도한 사람은 부산일보 기자 허종이었다.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이 입으로 전한 소식과 부산일보 보도를 보고 격분한 마산시민들은 김주열의 주검이 옮겨진 도립병원으로 몰려들었다. 11일 오후 6시경 3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시체를 내놓아라” “살인선거 물리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유당과 관련이 있는 건물, 그리고 여당에 속한 인물들의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3월 12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은 마산 관련 기사로 뒤덮였다. 「마산에 또 대규모 데모 / 이번엔 유혈폭동으로 확대 / 만여 군중 경찰서와 신 주요 건물 파괴 / 시체 인도 시비가 발단 / 경찰 발포로 3명 사망/ 군중들, 일시 무기고까지 점령」이라는 제목의 머리 기사 옆에는 ‘학생 주동의 마산 데모 군중’이라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날 시위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부인들이 많이 참여해서 “죽은 자식을 내놓아라” “나도 죽여달라”고 울부짖었다.
조선일보 4월 12일자 석간 1면 머리에는 「마산에 제3 데모 진행 중이란 소식에 / 국회의사당은 흥분과 긴장 / 발포명령자는 누구냐고 맹추궁 / 국민에의 사과도 요구 / 야당, 홍 내무에게 질문전 전개」라는 기사가 올랐다. 그 옆에는 「제2차 마산 소요사건의 발생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자리를 잡았다.

11일 밤 마산시내에서 돌발한 제2차 민요(民擾)는 그 규모나 시간에 있어서 제1차(3월 15일) 사건을 훨씬 능가했다고 한다. 상세한 내용은 이미 보도된 바와 같거니와 불기(不期)해서 수만 시민이 운집하여 경찰서를 비롯한 몇몇 공공건물과 모 신문 지국, 민의원 사택, 국민회 사무소, 자유당 당사를 파괴하는 등 무질서한 폭력사태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볼 때 마산시민들이 지난 제1차 사건 이래 얼마나 관을 저주했으며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이 일순(一瞬)에 폭발시켰는가를 알 수가 있을 듯하다. 어쨌든 공산반란을 제외하고는 건국 이래 최대의 불상사라 아니 할 수 없으며 법치국가에서 차마 볼 수 없는 통탄 불기(不己)의 참경인 것이다. 비록 그 동기가 제1차 사건 때 행방불명이 되었던 김 소년의 시체가 표착(漂着) 발견됨에 따라서 너무나 참혹 무비한 타살 능학(陵虐)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이에 격앙한 나머지의 우발적 흥분이라 하더라도 이렇도록 이성을 잃고 폭민화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큰 유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침통한 심정을 억눌러가면서 마산시민들이 이성을 회복하기를 호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제1차 사건의 상흔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도 않은 이때 어째서 마산시민들이 그토록 생사 결단의 항쟁에 총궐기하였으며 무서운 총포 앞에 가슴팍을 헤치고 육박하게끔 만들었느냐에 정부 당국은 엄숙한 자가비판이 있어야 하겠다. (…)
(…) 자유당 정부는 지금까지의 독선적 정치가 가져온 총결산기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필부(匹夫)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한다 하거늘 수만 시민이 자신의 위험 내지 생의 애착을 버리고 일어섰다고 할 때 거기에 총검이 무슨 소용이며 체포·구금·투옥이 얼마만한 진압의 효력을 거둘 것인가. 정부는 지금 이때야말로 건국 12년 만에 중대한 대내적 위기를 맞이한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짓밟히고, 억눌림에 신음하면서도 찍소리 한 마디 못할 줄 알고 있던 우민관(愚民觀)을 과감히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골목이다. 다만 이번 제2차 마산 사건에 제(際)해서 현지 경찰이 취한 태도는 현재까지의 보도를 자료로 판단할 때 제1차 사건에 비해서 상당히 신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비록 몇 개 건물이 파괴되고 경찰관이 부상당했다고 할망정 데모 군중에 무차별 가함으로써 벌어질 수라장에 비하면 이것이 국가적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부의 과단성 있는 자가 숙청과 회오(悔悟)의 입증만이 민심 무마의 요체며 마산시민은 다시 냉정으로 돌아가 불행한 사태가 이 이상 확대되지 않게 되기를 우리는 절원(切願)한다.

‘제2차 마산 항쟁’이 터진 이튿날인 4월 12일부터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4월 19일 아침까지 조선일보가 조간과 석간에 내보낸 기사들과 사설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이 목록을 보면 4·19 직전의 상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기사
· 4월 12일자-「마산의 격분 시체 보자 폭발 / 애국가를 부르며 선거 새로 하자 / 관공서마다 투석 파괴 / 구마산·신마산 오고가며 시위 행진 / 3·15의 희생에 처절한 조의」 「마산에 제3차 데모 / 충돌 없이 질서정연히 / 고교생 5백명이 주동 / 첫 시간 끝나자 구호 외치며 / 구경턴 시민 박수 치며 합세 / 부녀는 물 떠다 주며 데모 성원」 「군대 동원 낳고 사태 」화를 방지 / 정부, 마산 사건 수습방안을 결정 / 경찰력 강화 시사 / 최악의 경우에만 발포」
· 4월 13일자-「마산 제2야(夜) / 캄캄한 거리거리에 고함소리 만세소리 / 7시 통금에도 데모는 계속되어 / 시청 재습(再襲)코 기물 파괴」 「오늘도 식지 않는 마산 데모 / 경찰선 빨간 물 세례 / 소방차로 / 여학생은 꽃다발 시위 / 죽은 김 군 가슴에 얹겠다고」
· 4월 14일자-「법대로 처리될 터이니 / 난동 중지하도록 / 억울한 일은 법원에 직소하라 / 이 대통령, 마산 사건에 담화」 「공산당 개입 증거나 혐의 없다 / 현지 도지사와 수사 관계자 언명 / 민주당 윤보선 의원, 마산서 귀경코 시찰 보고 / 수류탄 지거설(持去說) 사실 무근 / 경찰무기고 부서진 일도 없다」 「통금 강화로 데모 종식 상태 / 위반자 3백여 명 연행 / 화차(貨車)에 수용·문초 후 일부는 석방」
· 4월 15일자-「마산사건 국회 조사위, 신 지사 증언으로 혼란 / 2차 데모 오열(五列) 개재 암시 / 경찰국장 지휘권 없다고 둔사(遁辭)」
· 「공산당이 들어와 뒤서 조종 / 정부·민간은 심려(深慮) 필요 / 이 대통령 마산사태에 거듭 담화’ ‘열풍 일과(一過) 후…마산에 검거 선풍 / 흥분 갈앉은 자리에 공포만 오들오들 / 소년 등 20명 정식 구속」
· 4월 16일자-「마산사건 정부 강압책에 반발 / 민주당, 대책위 확대…원내 외서 극력 투쟁 / 수습안 묵살 부당 / 공산당 조종설 등을 비난」 「공산당 개입설에 최대 초점 / 민주당, 마산사건 질의서 대정부 공세 / 오열 운운의 근거 추궁 검거 선풍…싸늘한 정적 / 내 아들 찾아 통곡」
· 4월 17일자-「마산데모 오열 잠입설로 논쟁 / 국회조사단, 경찰 증언으로 험악한 분위기」「학생대표, 데모 않기로 약속 / 긴장 풀릴 듯한 마산 / 무단 연행 못하도록 / 즉시 개교 등 조건으로 타협 / 경찰·교장·학생대표자 연석회의」
· 4월 18일자-「데모 분위기 부산으로 서울로 / 부산에서 동래고생 천2백여명이 시위 / 마산에 간 경찰대도 급히 불러오고 / 경찰서는 공포 쏘고 최루탄 연막탄까지」 「서울서는 고대 전교생이 / 구보로…교문에서 의사당까지’ ‘전국 각지의 사태 긴박성에 긴장 / 여, 대야(對野) 고위회담 제의? / 초당적인 수습책 수립을 표명’ ‘민주당, 데모학생 구타를 중시 / 깡패단 타진 못하면 의아 난면(難免)」

*사설
· 「정부는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4월 13일자 석간)
· 「국회는 왜 잠자고 있는가」 「김주열 군의 사인과 최루탄의 출처를 밝히라」(4월 14일자 석간)
· 「3·15 선거 무효소송에 대한 국민의 기대」 「마산사태의 뒤처리에 부당한 점이 많다」(4월 15일자 석간)」 「마산사태를 공산당과 결부시키려는 경향을 보고」 「마산사건에 사용됐다는 수류탄에 대한 의문」(4월 16일자 석간)
· 「마산사건에 공산 오열 관여설을 재론함」(4월 17일자 석간)


혁명의 날 4월 19일

고려대 학생위원회는 4월 18일 오전 12시50분, 신입생환영회를 연다는 구실로 3천여 명의 학생을 교내 김성수 동상 앞에 모이게 했다. 학생대표가 그 자리에서 ‘4·18 선언문’을 낭독했다.

오후 1시20분경 고려대 학생들은 “기성세대는 각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 자를 즉시 처단하라‘ ’경찰의 학원 출입을 금하라” 등 구호를 외친 뒤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섰다. 학생 1천여명은 오후 2시20분경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해 연좌데모를 하면서 경찰의 학원 개입 중지와 대통령이나 내무부장관의 부정선거 해명, 그리고 정부통령선거 재실시를 요구했다.

오후 4시쯤 고려대 총장 유진오가 현장에 와서 해산하라고 종용하자 학생들은 연행된 학생들이 석방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오후 6시경 내무부장관 홍진기의 지시로 학생들이 풀려나자 연좌데모를 하던 학생들은 6시40분경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고려대생들의 귀교 행렬이 을지로에서 종로 4가 쪽으로 빠지려고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쇠갈고리와 곡괭이, 쇠사슬 등으로 무장한 정치깡패 1백여 명이 그들을 습격했다. 깡패들은 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 종로구단(단장 임화수) 특별단부와 화랑동지회(회장 유지광) 소속이었다. 그들의 공격으로 행렬의 선두에 섰던 학생들과 그 뒤를 따르던 기자 등 50여 명이 다쳤다. 정치깡패들은 당시 경무대 경호실장이나 다름없던 경무관 곽영주와 연결된 자들이었다.

4월 19일 아침 조간신문들 1면에는 정치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고려대 학생들의 사진과 함께 의사당 앞 연좌데모와 귀교 중 피습에 관한 기사가 상세히 실려 있었다. 나중에 오보(誤報)로 밝혀졌지만 동아일보 3면에 나온 「고려대생 1명 피살」이라는 4단 제목의 기사는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서울대, 연세대, 동국대, 성균관대를 비롯한 서울시내 10여 개 대학 학생들은 4월 21일에 일제히 데모를 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정치깡패들이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했다는 보도를 본 다른 대학 학생들은 19일 오전에 집회를 열고 거리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서울대 문리대를 비롯한 단과대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기 직전, 혜화동의 동성고 학생 5백여명이 “민주주의 사수하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사 30여 명의 ‘엄호’를 받으면서 문리대 정문을 지나 종로 5가 쪽으로 치달았다. 9시20분경 문리대 학생 2백여 명이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 있다” 등이 쓰여 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자 그 뒤를 이어 법대, 미대, 약대, 수의대, 치과대 학생들이 데모에 나섰다. 3천명 남짓이 된 서울대 데모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태평로 국회의사당으로 달렸다. 11시40분경쯤 의사당 앞에는 서울대 사대, 상대, 문리대, 법대, 미대 학생들과 고려대, 건국대, 동국대, 성균관대의 학생 1만5천여 명이 모여 있었다.

서울대 학생들이 토론회를 하는 것을 본 동국대 학생 2천여 명은 “경무대로 가자”고 외치면서 중앙청(현재 경복궁 자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동성고, 성균관대, 서울대 사대 학생들이 따라갔다. 서울시내 데모 군중의 수가 10만 명을 넘어선 오후 1시 5분경 동국대를 선두로 한 학생 데모대는 효자동 전차종점을 지나 경무대 들머리로 향했다. 경찰은 경무대 정문에서 가까운 언덕길 중간 최후 저지선을 펼치고 있었다. 오후 1시 40분, 소방차를 앞세운 데모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미터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경무대 어귀는 수라장이 되고, 길에는 7~8 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이것이 나중에 ‘발포 명령’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작업의 핵심이 된 4월 19일 최초의 총격사건이었다.

조선일보 4월 19일자 석간 1면 머리에는 특대호 활자로 된 제목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 대학생이 총궐기 / 열띤 데모의 홍수 장안을 휩쓸다」라는 제목 아래에는 경무대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도처에서 유혈난투의 참극 / 학생 측 사상자만 수십 명 / 경무대로 밀고 가며 일시 중앙청 점거」라는 부제가 달린 기사의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일대 시위로 돌입한 대학생들의 총궐기!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서울시내 주요 각 대학생들 수만여 명이 떼를 이룬 시위대의 분류(奔流)는 19일 정오경 경무대 못미처 중앙청 내와 해무청 앞에서 경찰대와 충돌하여 경찰 측에서는 공포와 최루탄을 발사하는 한편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붉은 물을 뿌렸고 학생들은 투석으로 대응하는 사태를 빚어냈다. 한편 동 데모학생들은 하오 1시반경 경무대 앞 효자동 종점에까지 이르러 바리케이드와 헌병 및 무장경찰의 완강한 제지를 받고 충돌 끝에 경찰 측의 실탄 발사로 사상자(수효 미확인)를 냈다. 한편 동 데모대는 중앙청 내를 완전 점령하여 공무원들은 전원 대피되었다. 이날 데모에는 서울대학교의 문리대, 법대, 의대, 사대, 수의대, 고대, 동국대학, 건국대학,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학, 연세대학 및 경기대학, 휘문고, 양정·대광·동성고교생이 참가하여 국회의사당 앞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사이를 중심으로 애국가, 교가, 군가, 만세를 부르는 한편 구호를 외치고 일대 시위를 전개하고 있으며 서울 중심 시가에서 하오 3시 현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 중에 있다.

4월 19일자 조선일보 조간과 석간은 온통 데모 기사로 도배되었다. 「데모 열풍 진주서 부산·서울로」 「폭력이 휩쓴 서울의 야음(夜陰) / 60여 명의 폭한들 난무 / 흉기로 데모대 급습 / 고대 학생들 귀교 중에 대소란」 「경찰 폭행에 흥분한 군중 / 종로서 데모하다 경찰과 충돌」 「청주서도 3천명 / 막는 경찰에 투석 항거」 등이었다. 특히 석간 3면 전체를 채운 기사들의 제목은 아주 자극적이었다. 「학해(學海)에 해일! 노호(怒號)는 암벽에서 포효 / 국립대 선도에 수만명이 합류 / 제지망을 투석세례로 뚫고 전진 / 최루탄도 소방차도 무위, 연도 시민들은 박수」 「피 보자 흥분 더 닳아 / 의사당서 일부는 서대문 이 의장 댁으로 / 경무대 앞 바리케이드 무너지자 실탄 발사」


계엄사의 검열로 얼룩진 지면

정부는 4월 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지구 일원에 경비계엄령을 선포했다가 오후 5시를 기해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으로 확대해서 비상계엄령을 공포했다. 언론이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되면서 기사의 일부나 논설이 깎이거나 삭제되는 사태가 날마다 일어났다. 조선일보 4월 20일자 조간 1면에 실린 3단 기사는 제목과 내용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

조선일보 4월 20일자 석간 1면에 실린 ‘만평’은 통째로 지워지고, 기사 2건이 완전히, 2건이 일부 삭제되었다. 같은 날자 석간 3면 머리기사 「장갑차 출동으로 질서 회복」의 부제목은 삭제되고 「파출소 등 소각·파괴 허다 / 경관·소방관 등 사상자도 다수 / 서울신문사·반공회관도 불태우고」처럼 권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기사 제목들은 살아남았다.

4월 21일자부터 모든 신문의 지면은 계엄이라는 굴레 안에서 유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4월 26일자까지 조선일보에 실린 주요 기사들의 제목을 간추려보겠다.

· 4월 21일자-「발포·보복·고문의 즉시 중지 / 여·야 원내대표, 정부에 정식 건의 / 계엄 조속 해제도 요구 / 무리는 오히려 사태만을 악화」 「이 대통령 담화 / 4·19 난동에 심대한 충격 / 질서 회복 후 시정 노력 / 불만 모두 풀어주도록 하겠다」 「국내 정국에 일대 전기! / 전 각료·당무위원 인책 사임 / 비상수습책 논의 시(視) / 이 대통령, 재야인사 4 씨를 초청」 「계엄사서 4·19 사상자를 발표 / 사망 115 명(민간 111 경찰 4) 부상 730 명(민간 561 경찰 169) / 유해는 유가족에 인도 / 심심한 조의 / 부상자는 원 따라 귀가 조치」
· 4월 22일자-「정국 전환 전야의 활발한 동태 / 여야 타합코 사태 수습 / 재야인사 접견은 의견 청취 정도」 「국회, 4·19 사태 보고로 대소란 / 데모대 폭력만 비난한 김 국방 발언에 흥분 / 욕설·고함·힐난으로 일시 정회」 「4·19의 유혈 원인 추궁에 착수 / 고대 데모 습격한 깡패집단을 수사 /「유지광 등 일당 60명 / 당국, 동대문서장을 바꿔치고」
· 4월 23일자-‘이 대통령, 시국 수습에 중대 단안 결의? / 경무「 방문한 변영태·허정 씨 시사 / 이기붕 씨 은퇴 등 포함 / 현행 선거법 대폭 개정도 고려」 ‘계엄 하루속히 해제 / 한인이 한인 살해한 악독하고 통곡할 일 / 이 대통령, 자유와 안전 회복 호소」 「보수합동 내각책임제로 제도 전환 / 경무대 방문 후 이 의장 성명 /대통령과 원칙에 합의 / 부통령 당선 사퇴도 고려」 「장면 씨, 부통령직을 사퇴 / 압제와 폭정에 경종 / 국가 위기 극복에 일조 되기를」 「깡패 13명을 긴급구속 / 고대 데모대 습격사건 수사 진전/ 임·유는 결백 주장 / 22일 자진 검찰에 나타나 변명」
· 4월 24일자-「불편부당 대통령직에만 전념 / 자유당과 관계 완전히 절연 / 이 대통령, 변·허 양 씨와의 협의에서 태도 명시 / 정계 은퇴 약속과 상반 / 국회의장직도 포기토록 돼 있다 / 이기붕 씨의 사퇴 고려 성명에 불쾌 표시」 「개헌 서두르는 자유당 혁신파 / 내각책임제 요강 작성 / 서명 공작에 49명 동조 / 각료 전원 경질토록 압력?」 「이기붕 씨 또 경무대 방문 / 공직 포기코 은퇴 / 24일 하오 의원총회에 공한 내기로」 「25일부터 통금시간은 종전대로 / 언론 제한도 일체 해제 / 계엄사 발표」 「영령은 눈」감을 수 없다 / 서울대 고대 등 위령제 참가를 거부 / 민주 밟은 자들이 / 집행부가 되다니’
· 4월 25일자-「이 대통령 담화, 정당서 완전히 손 떼겠다 / 국무위원 사표 수리 / 유능인사 물색으로 후임 발령 지연 / 행정부와 정당활동은 분리」 「모든 공직서 물러날 결심 / 책임 벗지 못함을 슬퍼할 뿐 / 이기붕 씨, 의원총회에 공한」 「오늘부터 경비계엄으로 / 4개 지구 비상계엄 해제 / 서울만 제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권고결의안 / 민주당에서 정식 제의」
· 4월 26일자 조간-「정부, 제1차 개각을 단행 / 외무부장관에 허정 씨 / 내무는 이호·법무엔 권승렬 씨 / 26일 중으로 전 각료 임명」

조선일보는 계엄이 선포된 뒤인 4월 20일자부터 25일자까지 11 건의 사설을 실었다.

· 「전국적인 불안사태를 시급히 극복하라」(4월 20일자 석간)
· 「사태의 완전 수습은 재선거를 실시하는 …」(4월 21일자 석간)
· 「국정 혁신을 위한 개헌 구상을 제의함」 「국회는 중대한 기로에 직면하고 있다」(4월 22일자 석간)
· 「장면 씨의 부통령직 사퇴와 이기붕 씨의 당선 사퇴 고려」 「역사를 속이는 김 국방장관의 사태 보고」(4월 23일자 석간)
· 「오호! 방혼(芳魂)과 영령들은 원(寃)을 풀고 원한을 거두라」 「이 대통령의 자유당 절연 결의는 정국 수습의 출발점」(4월 24일자 석간)
· 「4·19 사태 수습의 근본책을 논함」 「비상계엄 해제론과 현실적인 제 문제」(4월 25일자 조간)
· 「자유당 정권의 위장 연명책을 배격한다」(4월 15일자 석간)

이상의 사설들 가운데 계엄사의 검열에서 삭제를 당한 것은 4월 21일자 석간에 실린 「사태의 완전 수습은 재선거를 실시하는 …」뿐이었다. 제목에서 석자, 본문에서 6행이 지워져 있다.


‘만세! 민권은 이겼다!’

비상계엄 때문에 주춤했던 데모는 4월 24일부터 다시 거세어졌다. 전주에서 3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전북도청에 들어가 도지사에게 사표를 내라고 요구한 뒤 자유당 지부 사무실과 서울신문사 지국을 부쉈다.

4월 25일 오전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다수파인 자유당 의원들을 압박해서 비상계엄령 해제를 결의한 뒤 이승만 하야(下野) 권고 결의안을 제출했다. 같은 날 오후 3시경 서울대 의대 구내에 있는 교수회관에 대학교수들이 모였다. 이희승(서울대), 이종우(고려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등이 그날 모이기로 정한 것은 봉급날이라서 정보기관의 의혹을 사지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모임을 주동한 교수들은 50~60 명이 나오리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250여 명이 참석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된 회의에서 임시의장에 정석해가 선출되었다. 이희승 등 9명이 시국선언문 기초위원으로 뽑혀 교수회관 별실에서 선언문을 작성했다. 오후 5시30분, 이승만의 대통령직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자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했다.

당시 ‘상아탑’이라고 부르던 대학의 교수들이 무장한 군대와 경찰이 서슬 퍼렇게 지키고 있던 서울의 대로를 지나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한 것은 이승만과 자유당에게는 ‘최후의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교수단 데모에 합세했던 군중은 그날 밤 늦게까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이 오후 8시경부터 최루탄를 발사했으나 그들은 “국군 만세”를 외치며 애국가를 불렀다. 방독면을 쓰고 있던 병사들은 끝내 그들과 함께 울어버렸다. 데모대의 일부는 서대문의 이기붕 집으로 몰려가서 경비실을 부수었다. 계엄군이 진압하러 달려왔지만 군중이 환호와 박수로 맞이하자 군인들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서울시내 중심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경에는 3만여 명이 세종로 일대에 들어찼고, 오전 10시경 경무대로 다가갈 때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을 것은 물론이다.

오전 9시 10분 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는 국방장관 김정렬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가 매우 심각하므로 “즉시 이 대통령을 만나서 학생대표단 면담, 선거 재실시에 관련된 성명 발표, 이 대통령이 향후 정치적 역할에 대한 고려 등을 건의하라”고 말했다.  김정렬은 “국민의 뜻이라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한 4개 항의 대국민발표문을 기초해 이승만의 승인을 얻었으며, 이를 10시15분에 매카나기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매카나기가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와 함께 경무대를 방문할 때에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고 있었다. 이때가 오전 10시30분이었다.

4월 26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만세! 민권은 이겼다!」였다. 「이 대통령 드디어 사임 / 부정선거 무효화도 지시」라는 부제가 달린 기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대통령은 26일 상오 10시 요지 다음과 같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 대통령의 담화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 옆에 실은 사설(「역사의 전환은 엄숙하다」)을 통해 ‘애국동포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 정의에 불타는 청년학도들의 장거(壯擧)는 기어코 오늘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으니 비겁한 기성세대는 오늘이야말로 숙연히 젊은 세대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들 애국청년학도의 순혈(殉血)에 보답하는 사신(捨身)의 결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모든 불의와 부정을 이 땅에서 남김없이 숙청하고 새로운 민주대한을 씩씩하게 건설해야 할 중대한 단계인 것이다. 여기서, 애국동포들에게 우리는 호소할 말이 있다. 민주개혁의 혈로(血路)를 개척하는 데  보여준 젊은이의 용기는 대한민국 국민이 진정코 민주주의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불의의 타개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길러나갈 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민주역량을 발휘할 때가 바로 이 시점이다. 환희에 넘쳐흐르는 오늘 우리는 4·19 장거에 못지않은 더욱 중대한 시련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흥분에 지나쳐 무질서한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재선거가 있고 민주주의 재건사업이 산적되어 있지 않은가. 냉정한 이성을 발휘하여 우리의 민주역량을 정연하게 발휘하자. 이 대통령의 하야 용의 표명이 있었다고는 하나 무정부 상태로 둘 수는 없는 것이요 3·15 부정선거에 관계 없던 인사로서 과도적인 연립 선거관리내각을 구성하여 새로운 민의에 의한 책임있는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그에게 부하(負荷)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 부통령도 사임해버린 현재로서는 당장 새 정권이 등장할 헌법상의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前) 내각원들은 물론 현 자유당 인사로서 25일 보강된 각료들도 사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각책임제를 국민이 원하고 안하고에 관해서는 이미 하야 용의 성명을 하고 자유당 총재의 직을 떠난 이 대통령으로서는 무의미한 발언이라 아니 할 수 없고 오로지 현 국회가 자진 총사퇴를 단행하고 정당별로 개헌안을 준비하여 새로운 민의를 총선거에서 묻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갈 바가 스스로 분명한즉 전 애국동포는 오늘 이 순간부터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기분으로 평화롭고 명랑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만전을 다해주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동시에 현 정부는 최후의 일각까지 그 소임을 다해야만 할 의무가 있음을 우리는 다짐해 둔다.

4월 26일 오후 2시에 시작된 국회 본회의는 2시간에 걸쳐 격론을 벌인 끝에 “1)이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2)3·15 부정선거는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 3)과도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4)개헌안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즉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했다. 이승만은 사임하기를 망설이다가 허정 등의 설득에 굴복해 27일 정오 공보실을 통해 사임서를 발표했다. “나 이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4월 28일자 조선일보 석간 3면 머리에는 이기붕과 가족의 비참한 최후에 관한 기사가 올랐다. 「비극으로 끝마친 이기붕 일가 / 저주도 회한도 잊은 망령의 길 / 양친을 먼저 쏜 다음 / 동생 그리고 자신을 / 강석 군이 비장한 최후를 결행」이라는 제목을 보면, 이승만이 세상을 떠나면 당연히 후계자가 될 것이 분명했던 이기붕이 장남 이강석의 총탄을 맞고 죽음을 당한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를 후견인 삼아 권세를 휘두르던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도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기붕이 이승만에게 양자로 바친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 강욱의 목숨을 빼앗고 자살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기붕과 가족이 4월 28일 새벽 경무대 관사에서 세상을 등진 직후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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