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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파동’과 조선일보조선일보 대해부 2권-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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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1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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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 입후보 방해, 경찰을 비롯한 관권의 개입 등 광범한 부정이 저질러졌는데도 자유당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총의석 223석 가운데 과반수인 126석을 얻기는 했지만 정당별 득표에서는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도 서울에서는 16개 선거구 가운데 14개를 야당에 내주어야 했다.


신국가보안법을 적극 반대한 조선일보

총선이 끝난 뒤 야당이 부정선거 규탄운동을 치열하게 벌이자 당선무효 3건, 재선거 8건이라는 악재가 자유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민심의 이반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나 자유당의 위기는 이러한 정치적 현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빈곤과 침체 역시 그러한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었다. (…) 미국의 원조경제에 운명을 걸고 있었던 자유당 정권의 경제정책은 미국이 국제수지 적자에 따른 달러방위정책을 선언하고, 대폭적인 원조 삭감을 가하자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또한 미군정 이래 이승만의 후견인격이었던 미국조차도 점차 이승만 정권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대소 긴장완화와 한국·일본의 긴밀한 결합이라는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이승만의 무모한 ‘북진통일론’과 고집스러운 반일정책이 장애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민심으로부터 이반당하고 사회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도 궁지에 몰려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자유당 정권은 초조감과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다가오는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에서 패배할 것은 필지의 사실로 보였다.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라도 선거에서 승리하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1>, 1989, 역사비평사, 134~135쪽).

자유당 정권은 차기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켜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려면 비상한 법과 장치가 필요했다. 야당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규제하고 언론자유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방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전면 개정을 ‘최상의 방책’으로 여기고 공작에 착수했다.

1958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법무부와 검찰당국이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대한 최종 검토를 마쳤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개정안은 8월 5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9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전문 42조와 부칙 2조로 이루어진 ‘신국가보안법안’의 내용은 기존의 보안법보다 훨씬 많은 독소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일보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거나 ‘중립’을 표방해왔다. 이승만과 결별한 뒤 야당 노선을 걷기 시작한 김성수가 사주인 동아일보, 그리고 천주교재단이 운영하던 경향신문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조선일보가 장기간에 걸쳐 이승만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것은 ‘국가보안법 파동’ 때가 처음이었다. 야당과 언론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친 정부가 1958년 11월 18일,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철회하고 허위사실 유포 등을 처벌하는 언론조항(제17조 제5항) 등을 추가로 삽입한 새로운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조선일보는 11월 20일자 1면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박(駁)함」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11월 18일자로 정부에서 국회에 제출한 새로운 국가보안법 개정안도 그 목적은 여전히 “북한괴뢰정권의 흉계를 철저히 단속 분쇄하는 동시에 인권 보호에도 만전을 기하고자” 현행 국가보안법 기타 현행 법조항의 불비(不備)를 보정(補整)하려는 데 있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멸공통일을 염원하는 오늘날 만약 이북 괴뢰집단의 흉계를 분쇄하는 데 법조항의 불비가 있다면 의당히 그것은 만난을 배제하고 보정되어야 한다고 찬동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러한 법조항 불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원인 때문에 적의 흉계를 분쇄하는 데 지장이나 부족이 있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제거 시정하기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 멸공법규의 불비를 보정하려는 이 개정안에 무엇 때문에 제17조 제5항에다 허위사실 또는 왜곡된 사실의 유포방지 규정을 두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론기관이라고 하여 허위왜곡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 언론기관이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동시에 그 책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미 신문윤리강령을 자진 채택한 바 있고 그보다 앞서 신문의 허위보도를 금하고 진실만을 보도하도록 하는 일반 형법의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의 규정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협상선거법의 언론조항은 언론의 책임을 규정한다기보다는 그 자유를 억압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하였던 것이다. (…) 우리는 언론의 책임을 중시하는 나머지 공명치 못하였던 5·2선거를 공명선거라고 말하며 부정선거가 행하여진 영일을 구 선거 같은 경우에 부정사실이 없었다고 말한 정부 당국자나 여당의 성명을 그대로 보도함으로써 본의 아닌 허위보도를 한 것을 자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도된 사실이 허위인 경우에는 비록 그 소식의 출처가 정부 당국자나 정계 요인이라 할지라도 그 장소가 법원의 공판석상이나 국회 회의석상이 아닌 경우에는 신문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허위사실이나 왜곡된 사실의 보도가 결과에 있어 그 한도 내에서 적을 이롭게 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인데 이런 경우에 그 책임은 그런 발설을 한 정부 당국자나 정당인이 질 것이 아니라 신문이 져야 한다는 뜻으로 제17조 제5항을 두려는 것인가. 또는 이와 같이 정부 당국자나 집권당이 흑을 백이라고 억설(臆說)하거나 오인할 때 언론기관이 이와 반대로 흑을 흑이라고 했다 하여 그것이 대법원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흑으로 판정될 때까지는 영어(囹圄)의 몸이 될 것을 각오하고 싸우라는 것인가. 이와 같이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는 사필귀정만을 신조로 하라는 것은 너무나 과중한 용맹심을 언론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 (…) 우리 헌법은 군주주권설이나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독일 식의 국가주권설을 배격하고 우리의 주권 국권 또는 통치권으로 지칭되는 헌법제정권력이나 거기서 파생된 일체의 권력이 재민(在民)한다는 민주주의 발상 이래의 인민주의설을 택한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언론 단속을 빙자하여 국헌을 위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11월 23일 민주당은 “정부가 제출한 국가보안법은 공산분자를 더 잡을 수 있다는 이점보다는 언론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이 공사생활을 위협할 해점이 심대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신국가보안법은 12월 19일 법사위에서 자유당 법사위원 10명만 참석한 채 날치기 통과되었다. 자유당은 23일 밤 전국의 무술경찰관 3백명을 임시국회 무술경위로 특채하는 식으로 급조해 24일 새벽 국회의사당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무술 경찰관들은 농성 중이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 5시간 동안 지하실에 감금했다. 오전 10시경 무술경찰관들이 사회를 맡은 부의장 한희석을 에워싸고 본회의장에 들어온 뒤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개회된 본회의는 순식간에 국가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12월 24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이를 ‘2·4 국가보안법 파동’이라고 부른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정작 국회 본회의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자 조선일보는 12월 25일자 1면에 온건한 논조의 사설(「국가보안법 강행과 민주정치의 기로」)을 올렸다.

신보안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이래 비장한 각오로 강행 통과시키겠다는 정부 여당과 생사를 걸고 반대투쟁하겠다는 야당 측은 월여 간을 두고 종래에 보지 못한 치열 격화되는 험준한 정쟁의 길을 더듬어 오더니 드디어 24일 야당 의원을 강제 축출하여 국회 지하실에 감금하고 자유당 의원만의 참석으로 일부 수정통과를 선포함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계가 걸어온 경과를 바라보고 한낱 자위할 수 있다면 야당과 언론계 종교계 법조계 등 신국가보안법안에 반대하는 각계각층의 국민이 허다한 제약 밑에서도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 이제 경위는 여하간에 실력의 행사로 허사가 되고 만 것을 보았으니 앞으로 우리 민주정치가 과연 계속 발전될 것이냐 또는 반대로 전락 소멸의 길을 밟고야 말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섰다고 국민이 느끼게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야당 없는 국회의 의사 진행과 출석의 자유조차 박탈된 국회의원이 있어도 민주국회라 할 수 있겠는가하는 점은 오늘 신국가보안법안을 찬성 통과시켰다고 자부할 여당 의원들도 다시 한 번 손을 가슴에 얹고 냉정하게 그래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나 하는 점을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
(…) 남한의 질서가 다시 원하지 않은 휴전이란 쓰라린 경험의 덕택으로 평화화하자 양당정치의 대도를 걷기 시작하고 바야흐로 민주정치의 정상적 발전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 같았고 이것이 국내외에서 한국의 장래를 크게 기대케 하는 정치적 사유를 제공하였던 것이고 우리가 다 같이 그것을 축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면에 나타난 좋은 정치현상의 반면에는 사사오입개헌, 부정선거, 법관의 연임 거부 등 그 반대의 현상도 그 수가 점차로 증가되어 가는 것을 우리 언론은 항시 주의하고 지적 경고하여 왔고 야당 역시 이를 계속 경고하였다. 그러나 양음(陽陰)의 상반되는 두 갈래의 현상은 오늘 1958년 성탄절 전일에 합류하고 말았다. 어느 조류가 반대 조류를 제압하고 우세하여질 것인가. 여야 정치세력의 승패가 여기 달렸을 뿐만 아니다. 실로 국가민족의 장래가 그 대세 여하로 결정될 것이다.

‘2·4 파동’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에 목숨을 걸고 있는 자유당 정권이 대명천지에 국회의원들을 감금하고 여당 의원만으로 신국가보안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헌정사상 보기 드문 극악한 ‘쿠데타’였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사설은 앞으로 여당과 야당 가운데 “어느 조류가 반대 조류를 제압하고 우세하여질 것”인가에 여야 정치세력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맥 빠진 결론을 내리고 있다.

11월 18일 자유당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직후부터 12월 24일 ‘헌정 쿠데타’를 자행하기 직전까지 조선일보가 국가보안법 개정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설을 실은 것은 무려 13건이나 되었다. 사설의 제목들은 아래와 같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이 문제에 관한 사설을 내보냈던 것이다.

· 「보안법 통과 강행과 절차의 위헌성」(11월 21일자)
· 「언론자유의 본질과 보안법의 단속 규정」(11월 23일자)
· 「반공투위는 과연 유용한 것인가」(11월 25일자)
· 「보안법에 관한 각료 공동성명을 평함」(11월 29일자)
· 「국가보안법 개정의 선결조건」(12월 2일자)
· 「보안법 개정 강행 상의 두 가지 법률문제」(12월 9일자)
· 「보안법에 관한 대통령 회견담」(12월 14일자)
· 「보안법 개정을 위한 정치협상의 위험성」(12월 16일자)
· 「보안법 공청회가 밝혀야 할 문제점」(12월 17일자)
· 「보안법 공청회의 의의를 살리는 길」(12월 19일자)
· 「보안법 전면 거부에 대한 비난의 정략성」(12월 21일자)
· 「국회 질서 회복과 농성투쟁 지양의 방법」(12월 22일자)
· 「국회의 정상화와 국회 내외의 경비권」(12월 23일자)

조선일보는 이승만 정권 시기에 일찍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국가보안법 파동에 관한 기사를 1면을 비롯한 주요 지면에 대서특필했다. 11월 18일부터 12월 27일까지 1면 머리에 오른 주요한 기사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보안법개정반대투위 구성 / 민주당 의원총회서 결의」(11월 18일자)
· 「보안법안 통과에 총력 경주 / 자유당, 예산안 지연도 불구애」(11월 19일자)
· 「보안법안 전면 거부키로 / 민주당, 투쟁범위 확대 원칙을 결정」(11월 23일자)
· 「보안법안 원내투쟁위 발족 / 자유의 조종(弔鐘)에 분연 항거 / 범야당 의원 87명, 결사 투쟁 선언」(11월 28일자)」·「‘반공투위 정식으로 발족 / 용공회색을 타도 / 민주적 법률질서도 확립’(12월 3일자)
· 「보안법안 8일 법사위에 상정 / 야당선 불법 주장」(12월 6일자)
· 「법사위 혼란상태에 함입(陷入) / 야당선 불법 주장」(12월 12일자)
· 「보안법안 반려 동의를 부결 / 여야 의원들 격론 끝에 / 민주당, 악법 제정에 항거」(12월 13일자)
· 「보안법안 예결위서도 논란 / 옥외집회 금지 이유 규명」(12월 17일자)
· 「자유당의 전략 점차 동요 / 야측 지연작전으로」(12월 19일자)
· 「보안법안 3분만에 무수정 통과 / 야측 출석 전 표결」(12월 20일자)
· 「아수라로 화한 농성국회 / 여야 의원 간에 집단격투 / 단상은 야당, 의석은 여당이 점거」(12월 21일자)
· 「정부 여당 경화 일로 / 철수 않으면 의법 해결」(12월 22일자)
· 「사태 수습에 잠정책 모색 / 여야 긴장리에 협상」(12월 23일자)
· 「사태 긴박 격돌은 불가피 / 자유당, 본회의 성립 강행, 24일 경비권 발동 결정 / 민주당, 영수회담도 유산, 체념 속에 농성 100시간 돌파」(12월 24일자)
· 「통곡 속에 폭발한 국회 / 전 야당 의원들 감금리에 / 국가보안법 통과 강행」(12월 25일자)
· 「민주제단 위해 피 뿌릴 작정 / 조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의사당 유혈사건에 피력」(12월 26일자)

조선일보가 국가보안법 파동에 관해 두 달 가까이 실은 기사와 사설의 양은 1920년 3월 창간 이래 최대였으며, 그 이후로도 비슷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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