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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해직 언론인들이 한국 언론에 던지는 조언기획 세미나, 80 해직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 관리자
  • 승인 2018.09.0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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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기자들은 목숨을 걸고 전두환 세력과 싸웠다.” [1].

합동통신 김태홍 기자가 돌아가시기 전에 쓴 글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2]. 김태홍 기자는 서슬 퍼렇던 1980년 4월1일 한국기자협회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김태홍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말기와 1980년의 암흑기는 소름끼치는 공포가 지배하는 참담한 세월”이었습니다.

합동통신 김태홍 기자와 경향신문 고영재 기자, 중앙일보 정교용 기자, 한국일보 노향기 기자, 부산일보 이수언 기자 등이 김태홍 기자와 함께 기자협회 집행부를 구성했습니다. 4월25일, 이들이 만든 개정 헌법의 언론 조항 시안은 지금 봐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1. 모든 국민은 진실을 알고 양심적인 의사를 표명하는 권리를 갖는다.
2. 자유롭고 양심적인 언론 및 출판과 집회의 결사는 제한할 수 없다.
3.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은 금지한다.
4. 언론 매체의 독점은 인정되지 아니하며 편집과 편성의 독립은 보장된다.
5. 언론 종사자들은 취재와 보도, 논평 및 제작 활동에 있어서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아니하며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연행 또는 체포, 구금되지 않는다.
[3].

그러나 1980년 5월 들어 신군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5월13일, 서울지역 7개 대학이 철야 농성에 돌입했고 5월17일 급기야 비상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계엄 포고 10호가 발효됐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5월16일, 운영위원과 분회장, 대의원 연석회의를 열고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기자들의 처절한 자기반성과 결의를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이 선언문이 여러 언론사의 제작 검열 거부 투쟁의 정신이 됐고 결국 대량 해직 사태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언론은 사실 보도는커녕 사태를 편향 보도함으로써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 장기화된 비상 계엄 체제 아래 변질되고 있는 민주화 작업을 촉진하기 위한 대학생의 시위 운동을 계염 당국은 질서 있고 타당성 있는 측면은 봉쇄하고 파괴적이며 부정적인 면만을 보도되도록 강제해 학생과 언론, 학생과 국민, 국민과 언론을 이간시키는 작태를 감행하고 있다.

사회 정의 보다는 안정이라는 기득권의 유신 논리에 안주해 왔던 우리는 민주 새벽이 밝아옴에도 울지 못하는 벙어리 닭이 된 채 거리에 쏟아진 무수한 플래카드 속에서 민중의 적으로 매도되는 현실에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권력자가 제시한 매일매일의 검열 지침 속에 안주한 채 권력자의 홍보실 역할을 포기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 지금껏 게을리 해왔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제부터라도 구각을 깨뜨리는 진통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민중의 편에 선 자유 언론의 구현은 언론인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이뤄질 수 없으며 유신 언론의 질곡으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현재 언론을 속박하고 있는 계엄 당국의 보도 검열의 즉각 철폐를 요구하며 언론계 내부에 아직껏 온존하고 있는 유신 잔재 및 그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비상 계엄의 이름으로 설치된 검열 제도가 검열 당국에 의해 여론을 조직하고 왜곡하는 장치로 오용되고 있음을 국민 앞에 고발한다.
1. 우리는 검열 제도가 더 이상 합법적인 장치일 수 없음을 선언하며 이를 거부한다.
1. 언론계 내부의 유신 잔재를 추방한다.
1. 우리는 작금의 긴급한 상황이 진실되고 정확하게 국민에게 전달됨으로써만 타결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이를 위해 어떠한 간섭에도 투쟁한다.
1. 기자들은 검열 철폐를 위해 극한 투쟁을 불사한다.
1. 검열 지침을 무시한다.

- 1980년 5월16일 한국기자협회 운영위원·분회장·대의원 연석회의.

정당성 없는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기자들을 찍어 눌러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오후 기자협회 집행부의 고영재 기자와 정교용 기자 등이 체포돼 남영동으로 끌려가 호된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태홍 기자는 3개월 이상 도피 끝에 8월27일에 체포됐지만 김태홍 기자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합동통신 유숙렬 기자 등이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다음은 기자협회보 김동선 기자의 증언 가운데 일부입니다.

“고문이 어찌나 지독했던지 후유증으로 그날부터 피오줌을 쌌고 고열로 수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한 달 후 구속되기 직전 어느 수사관이 ‘당신 그때 죽는 줄 알았어’라며 혀를 찼다.” [4].

기자협회가 쑥대밭이 됐지만 언론사 단위 기자협회 지회와 분회에서는 제작과 검열 거부 투쟁이 확산됐습니다. 당초 5월20일부터 제작 거부에 돌입한다는 기자협회의 결정을 기자협회 지회와 분회에서 강행했습니다. 고승우 기자에 따르면 신군부가 광주 폭거를 저지른 것도 기자협회의 저항에 크게 당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김동선 기자는 나중에 언론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군부는 언론을 장악하면 천하를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언론인 대거 구속, 800명에 이르는 언론인 강제해직, 그리고 언론 통폐합 등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언론을 장악하면 천하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았지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사기집단입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의 공개 사직서.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5월18일과 19일, 끔찍했던 유혈 사태를 다룬 기사가 사라지자 집단으로 사직서를 냈습니다. 박화강 기자와 손정연 기자 등은 화순까지 가서 이 사직서를 2만 장 인쇄해서 거리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단 네 마디였지만 검열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지하 신문이었던 것이죠.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당시 상황은 전진우 동아일보 기자가 쓴 다음 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느 날 밤, 광주로 내려간 서정훈 기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서 기자는 거의 울다시피하며 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부탁했다. ‘이 기사 한 줄도 빼지 말고 보도되게 좀 해주라.’ 그러나 서 기자가 어렵게 부른 기사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광주 사태’가 계엄군에 의해 무력 진압된 후 서울로 돌아온 서정훈 기자는 6월3일 사표를 냈다. 그는 사표에 이렇게 썼다. ‘본인의 양심상 더 이상 기자직을 수행할 수 없음.’”

기자로서의 사명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기자들은 누구도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오홍근 당시 중앙일보 기자는 프레시안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때 광주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내가 기자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기사 한 줄 보도할 수 없는 거세된 무정란 기자였다. 마음 놓고 취채수첩에 메모도 못했다. ‘보도할 수 있느냐’는 악에 받친 시민들의 핀잔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5].

문순태 전남매일 편집부국장이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에게 청탁해 1980년 6월2일자 전남매일 지면에 실었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곳곳에 검열 흔적이 난무하다. 사진=박화강 기자 제공

당시 신문에 실리지 못한 기사 몇 가지를 제목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19일 이틀 동안 계엄군에 학생 시민 피투성이로 끌려가.
- 민주화 부르다가 숨지고 중태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광주 전역 공포 시민 전전긍긍
- 진압군 무차별 난타
- 사망 중상자 속출
- 데모 학생들 유혈 진압에 흥분한 시민들 대거 합세
- 총상 입은 학생 병원에
- 방송국 차량 등 불에 타고
(1980년 5월20일 전남매일신문.)

공수부대의 무차별 살육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 가담
- 18일 오후 3시30분 광주 요소요소에 공수부대 700명 배치
- 금남로 시민학생 무조건 구타, 칼로 찌르고 여학생 옷 벗겨
헬기 2대 공중 지상 입체전, 기자 신분 밝혀도 무조건 구타.
(1980년 5월20일 중앙일보.)

광주 시민정신은 살아 있었다
- 은행 강탈, 금은방 절도, 사재기 없어, 나눠쓰고 외상 거래도
- 자경단 만들어 자율 운영, 수상한 사람 신고 간첩으로 밝혀져
- 시내 대부분 병원, 1주일간 환자 보며 철야 근무.
- 병원에 부상자 들어오자 경증 환자가 자신의 침대 양보해
(1980년 5월20일 중앙일보.)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시위하는 학생을 계엄군이 연행해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덕한 경향신문 기자는 “그때의 그 피 끓던 울분과 불안, 좌절감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5월20일 광주에서의 학살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지만 당시 우리는 시대의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광주의 참상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는 외신부의 텔렉스로 들어오는 단편적인 외신 뿐이었다. 신문과 방송은 광주의 참상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고 계엄군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난동분자와 폭도로 몰고 광주시가 황폐화될 수 있다는 소위 계엄사령부의 협박 포고문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당시 계엄사령부의 이른바 포고문이라는 것은 광주 시민을 여타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이간질시키는 보안사식의 심리전 선전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론은 이제 전두환 군부의 대국민 심리전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신문 제작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짓이며 따라서 제작을 거부하는 것이 기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검열 지침의 타겟은 김대중과 광주였습니다. 날마다 기사용 원고와 방송용 필름을 들고 가서 검열을 받아야 했고 ‘전면삭제’나 ‘부분삭제’ 등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원고를 들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최성민 KBS 기자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나는 자백하고자 한다. 나는 기자라는 이름의 역사의 죄인이었다. 10·26 총성 뒤 어렴풋한 기대를 걸고 들어간 KBS에서 계엄군에 보도검열 심부름 다니는 것으로 수습을 마치고 전두환 계엄군에 학살당한 광주 민중의 관들이 즐비한 광경이 쏟아져 나오는 일본 컬러 TV 화면 아래 부산 코모도호텔 디스코텍에서 신입사원 환영을 받고 광주에 총알이 빗발칠 때는 보도국장의 ‘광주 폭도’라는 소리를 들으며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나중에 열린 길로 광주에 들어가 그을린 광주의 흔적을 기억에 담은 것 외에 기자로서 아무런 역사적 증언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면피용’ 죄를 지었음을 자백한다.” [6].

부끄러운 야만의 시대, 해직 언론인들은 비록 기사를 내보내지 않을지언정 펜을 꺾고 군사 쿠데타를 찬양하거나 양심을 팔지 않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기자들은 서슬퍼런 신군부의 보복이 뒤따르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신군부는 언론 대책반을 만들어 언론계 자체 정화 계획서라는 걸 만들게 하고 반체체 인사와 용공 또는 불순한 자, 이들에 동조한 자, 검열 거부를 주동하고 동조한 자, 부정축재자, 특정 정치인과 유착된 자 등을 해직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신문협회와 방송협회, 통신협회에 자체적인 정화 결의를 강요했고 8월2일부터 무더기 해고가 잇따랐습니다. 정부가 직접 정화 대상으로 선정한 사람이 298명, 그리고 언론사 차원에서 직접 선정한 사람이 635명, 모두 933명이나 됐습니다. 기자협회 집행부는 전원 해직됐죠. 11월14일에는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를 내세워 대대적으로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300명 이상의 언론인들이 또 길거리로 나앉게 됐습니다. 실제로 검열과 제작 거부 투쟁으로 해직된 사람은 230여 명이라는 게 80해직언론인협의회의 추산입니다.

조선일보는 편집국 전체 기자들에게 일괄 사표 제출을 강요했습니다. 이원섭 기자와 김형배 기자 등은 사표 제출을 거부했으나 결국 의원면직 처리됐고 나중에 한겨레 창간 이후 손해 배상 소송을 걸었으나 부당한 해고는 맞지만 복직에 따른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습니다.

MBC에서는 정상모 기자의 제안으로 제작 거부가 확산됐으나 보도국 전체 찬반 투표에서 부결됐습니다. 광주에 다녀와서 “은행이 털린 적 없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을 하는 등 민주적으로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고한 오효진 기자가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MBC에서는 7월5일 서울신문 출신의 이진희가 사장으로 취임한 뒤 120명이 강제 해직됐습니다.

1980년 8월11일, 문화공보부가 작성한 언론정화 중간 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신문 방송 통신 등 언론각사는 새 시대의 예비를 위한 사회정화에 발맞추어 자율정화를 추진중이며,
△ 중앙 언론기관은 일부 지방 비위자(추가명단)를 제외한 1차 정화인사조치를 완료하였으며,
△ 지방지·방송은 그 정화대상자에 대한 협의를 마치는 대로 곧 인사조치 예정이므로
△ 8월15일까지 언론계 정화는 일단락 될 것임.

19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언론인 정화 대상자를 A, B, C 3급으로 나눠 문화공보부에 통보했습니다. 이른바 언론 정화자 명단에는 정화 보류자 44명과 정화자 938명 등 982명의 이름과 등급이 적혀 있었습니다. 국시부정(10명), 반정부(243명), 부조리(341명), 기회주의·무능(123명), 근무태만(3명) 등이었습니다.

윤덕한 기자의 다음 글에 당시 기자들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언론계는 광주항쟁 기간 동안 군부에 집단적으로 저항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광주가 무너지면서 신문사 편집국은 깊은 좌절감과 함께 공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전두환 군부가 광주항쟁 기간 동안 그들에게 정면 도전한 기자들을 그대로 놔둘 리는 없었다. 광주 다음은 언론계라는 것을 기자들이라면 누구나 감지하고 언제 보복의 칼날이 들어올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7].

해직 이후에도 집요한 보복이 계속됐습니다. 보안사는 해직 언론인 711명에 대해 취업 제한 기간을 뒀는데요. 부국장 이상 42명은 1년, 부장 이하 627명은 6개월, 나머지는 영구제한 조치를 취했다. 이후 A급 13명은 영구, B급 96명은 1년, C급 602명은 6개월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보안사 정보처 정보2과에서는 해직언론인에 대해 계엄 해제 이후에도 동향을 파악했습니다.

해직 기자들은 해직 이후에도 감시와 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숙정 위해 언론인’이란 문건을 보면 해직 언론인을 A급(극렬비판 인물로 순화가 불가능), B급(비판활동 재개 가능성, 순화 및 미행감시 요구), C급(비판성향은 잠재해 있으나 특이동향 없는 자, 순화만으로 회유 가능자), D급(문제성은 있으나 자숙하면서 생계에 전념 중인 자, 거주파악 외 별도조치 필요 없는 자)으로 분류해 동향을 파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8].

보안사가 작성한 ‘정화 언론인 취업허용 건의’라는 문건에는 A급으로 분류된 언론인은 취업이 영구히 금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당시 보안사 사령관 노태우의 사인이 적혀 있고요. 경향신문에서 해직된 표완수 기자는 보안사의 반대로 취업이 좌절된 경험도 있습니다. [9].

해직 기자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재취업이 원천 차단되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겨레가 창간한 뒤 일부는 다시 현업으로 복귀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과도 없었고 배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은 모두 손해배상 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패소했고요. 언론인 대량 해직을 주도한 허문도와 이상재, 권정달 등을 검찰에 고발했지만 모두 무혐의 처리 됐습니다. 전두환의 지시를 받았을 뿐 직접 관여하지 않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만들 의도가 아니었다는 믿기 어려운 이유에서였죠.

김종량 전북일보 기자는 해직 이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회사는 해직에 대한 아무 이유도 밝히지 않았으며 편집국장 역시 피해다니며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신군부는 해직자들을 사회 부조리자로 지목해 누명을 씌워 척결한 것이다. 이들 기자들은 하루 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집에서도 친지들한테도 그 누구한테도 신문사에서 쫓겨났다는 소리도 못하고 공원으로 산으로 전전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했다. 여러 기자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 중에는 화병으로 또는 생활고로 시달리다 통한의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10].

김흥식 동양통신 기자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실의에 빠져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도 두 명이나 된다. 국내에도 생계가 어려운 사람이 여러 명 있어 해가 갈수록 안타까움을 더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11].

임동훈 MBC 기자의 증언도 절절합니다.

“단순한 해직이 아니었다. 언론계로부터의 완전한 추방이었다. 해직자들은 언론계로의 복귀는 고사하고 취업까지 제한했다. 산업 사회에서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격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국보위 사회정화위원회는 해직을 숙정으로 표현해 전과자나 된 것처럼 멍예를 취했다. 왕조 시대 역도들에 대한 처벌을 방불케 하는 처사였다.”

반면, 대량 학살의 칼날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만든 언론이 어땠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언론인 대학살로 이제 언론계에서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싹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언론의 체질은 완전히 체제 순응적으로 바뀌었다. 학살의 공포에서 살아남은 기자들에게는 위로금조로 특별 보너스가 지급됐다. 뒤이어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언론의 충성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신군부의 시책을 무조건 지지하고 전두환에 대한 날조된 찬양 작업이 전개된 것이다.” [12].

다음은 박권상 동아일보 기자의 글입니다.

“당근을 공급하는 수단으로 언론사주와 언론인들에게 턱없이 유익한 물질적 혜택을 베풀었다. 언론 매체의 통폐합으로 살아남은 언론 기업은 독과점의 단물을 만끽했으며 언론 종사자들에게 30%의 면세 혜택을 베풀고 언론인 자녀들에게 일정한 장학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해외 연수의 기회를 대폭 확대하는 회유책이었다. 전두환 5공 기간 동안 언론 매체와 언론인들은 배부른 돼지가 됐으며 꿀먹은 벙어리로 행세할 수밖에 없었다.” [13].

1980년 언론인들의 투쟁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부터 계속된 언론 자유 수호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 180여명이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집요한 광고 탄압이 시작됐죠. 1975년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대량 해직 사태가 계속됐고 기자협회보도 폐간과 복간을 거듭했습니다. 고승우 기자는 “동아·조선 사태 이후 10.26까지 4년여 동안 언론은 철저하게 권력에 유린 당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1988년 11월21일 국회 언론 청문회 첫날 정대철 당시 문화공보위원회 위원장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우리 국민은 16년 가까이 귀가 있어도 못 듣게 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며 눈이 있어도 못 보게 하는 언론의 불모지에 살아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론 청문회는 대량 해직 사태의 진상을 밝혀내고 명예회복과 국가배상 조치를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당시 청문회 진술 가운데 일부를 옮겨봅니다.

- (김근 증인에게) 동아방송 기자였는데 복직했는가.
“하지 않았다. 작년에 복직 통고를 받았지만 다른 동료들이 복직 통고를 받지 못했고 조건 자체가 해직 기간을 근무 경력에 넣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올해 초 복직을 거부하고 한겨레신문에 입사했다.”

- (김동선 증인에게) 복직 상황을 파악한 사실이 있는가.
“해직자 중 기자직이 717명인데 복직자는 10% 정도인 70명 밖에 안 된다.”

- (이경일 증인에게) 1980년 6월9일 경향신문 기자 7명이 남영동으로 연행됐다. 사내 제보 흔적이 있었나.
“핀셋으로 뽑아내듯 정확하게 언론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기자들을 집어냈다. 느낌이긴 하지만 편집국 내부에서 밀고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임재경 한국일보 기자도 내부의 적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었죠.

“밀실에 갇힌 나에게 가슴에 사무치는 분노는 내가 연행 당한 시점과 방식이었다. 어차피 찍힌 몸이라 언젠가는 당할 줄 알았지만 파면을 결정하고 바로 한 시간 뒤에 신문사로 버젓이 기관원이 나타나 연행하도록 하다니, 언론인 집단이라는 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분노였다. 나는 원한이란 표현을 남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아니면 평생 써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남영동 밀실에서 나를 밤낮으로 괴롭히는 것은 이 원한이었다.” [14].

이날 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5]. 다음은 표완수 MBC 기자가 쓴 언론인 해직 백서의 해당 부분을 다시 인용하고 요약한 것입니다.

첫째, 당초 보안사가 작성한 언론인 정화 대상자 명단은 33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298명이 해직됐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직된 사람은 933명이나 됐죠. 나머지 635명은 언론사가 끼워넣은 해직자였습니다. 언론사가 알아서 기었거나 내친 김에 눈엣 가시였던 기자와 사원들을 퇴출시킨 것입니다. 청문회에 출석한 보안사 요원이 “MBC와 경향신문, 신아일보의 경우 회사별로 10명 정도씩 제출했으나 실제 해직자는 100명이 넘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계엄사가 아니라 보안사가 언론 검열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검열단이 계엄사의 검열 지침 외에 보안사의 지침을 별도로 받았다는 증언이 있었고 계엄사에서 보안사에 협조하라고 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 (이병찬 증인에게) 계엄사령관 외에 보안사령관이 별도의 지침을 내렸다는 건 무슨 이야기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염사령관의 권한까지 찬탈한 것 아닌가.
“그런 것 같다”

- (한용원 증인에게) 언론 통폐합은 누가 초안을 썼나.
“언론 통폐합과 관련한 모든 정책 결정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허문도씨 선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광표 장관이 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전달한 언론 통폐합 서류에는 지방 언론사의 1도1사 원칙 아래 구체적 통폐합 방안까지 포함돼 있었다.”

셋째, 언론인 해직은 명백히 정권의 압박으로 진행됐습니다. 서울신문 주필로 있다가 MBC 사장으로, 문화공보부 장관까지 지냈던 이진희는 “강제 해직이 있었으며 형식은 자율 형식이었으나 실제는 강제였다”고 인정했습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다시 펴낸 보도지침 증보판.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는 “언론 통제는 홍보조정실의 보도지침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언론인 접촉을 통해서도 이뤄졌다”면서 “보도가 그들의 의사와 다르게 나올 경우 기자들을 불법 연행하고 구타했다”고 밝혔습니다.

언론 청문회에서는 언론인 해직과 통폐합이 전두환의 지휘 아래 권정달과 허문도, 이상재가 주도했고 5공화국 출범 이후 언론 통제는 허문도와 이진희, 이원홍이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왜 보안사가 작성한 70여명의 언론 정화자 명단이 298명으로 늘어난 뒤 933명까지 늘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정황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의원들은 정작 언론사 사주들을 제대로 추궁하지 못했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80해직언론인협의회가 2005년 3월 기자의 날 제정을 제안하면서 낸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당시 언론인들은 권력 찬탈에 눈이 먼 정치 군인들이 광주 학살에 대한 최소한의 진실 보도조차 언론 검열로 저지하자 이에 과감히 항거, 검열 및 제작 거부에 돌입했다. 기자들은 언론사별로 치열한 내부 논의 등을 거쳐 광주 시민 학살의 만행에 항거하고 진실 보도를 주장하면서 5월20일부터 27일까지 피비린내 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계엄사의 언론 검열을 거부했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광주를 매도하는 정치 군인들의 날조된 자료를 보도하는 신문과 방송, 통신 제작도 거부했다. 이는 언론인들이 전두환 군부의 광주 시민 학살에 저항하면서 언론 자유와 진실 보도를 외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그것은 세계 언론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권력 폭압에 대한 언론이 집단적 조직적 저항의 성격을 지녔다.”

평생을 해직 기자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온 이 분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1995년 12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긴 했지만 명예회복 대상이 5·18과 80년 민주화운동과 관련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로 한정됐고 해직 언론인들은 배제됐습니다.

고승우 합동통신 기자는 “특별법이 이토록 알맹이 없는 배상 내용과 함께 그 대상을 광주항쟁 당시 현지 피해자로 국한한 것은 광주항쟁을 과거 군사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특정 지역의 항쟁으로 한정시키려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해직 언론인 118명이 1996년 3월, 행정심판을 청구하기도 했으나 언론인 대량 해직 사태가 법률적 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 행위일 뿐이라 행정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기각됐습니다. 1996년 7월, 해직 언론인 105명이 국가배상을 청구했으나 시효가 소멸됐다며 역시 기각됐습니다.

결국 언론인 대량 해직과 관련해 실형을 받은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와 허화평, 허삼수. 4명이 전부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언론인 탄압 사건이 여전히 실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책임자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피해자 국가 배상 역시 아무도 언급조차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해직된 많은 기자들이 사회적 관계 단절과 경제적 고통은 물론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습니다. 동양방송 김준범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는 광주를 다녀온 뒤 밤마다 전에 못 마시던 소주를 몇 잔씩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잠을 자려고만 하면 광주 상무관에서 보았던 처참한 장면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 주량에 소주를 반명쯤 마시면 적당히 취기가 올라와 잠자기가 수월해졌다.그런 습관은 10년 가까이 지속됐다. 하지만 그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시에는 해본 적 없었다. 그때 광주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16].

소설가가 된 최일남 동아일보 기자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떠올립니다.

“1980년 대량 해직 조치는 원인 불명의 정신적 학살까지 겸했다. 그들의 목을 자른 주체가 불명히 있긴 있는데도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째서 평생을 걸었던 직업을 중도에 그만둬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붓을 빼앗긴 우리 해직 기자들은 일단 짓밟힌 상처 위에 누군가가 다시 소금을 뿌리는 격렬한 아픔을 치를 떨며 경험해야 했다.” [17].

“실직 기간을 통해 또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고 견디는 힘의 막강함과 아름다움이다. 세상에는 밀어내는 힘만이 강하고 밀리는 자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는 양 간주하는 의식이 일쑤이긴 쉽지만 겪어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하기야 신문 기자라는 재주라면 재주요 특기라면 특기 하나 믿고 살다가 그 자리를 뺏기고 나서는 여전히 자기 설 자리를 못 찾아 허망하게 좌절의 세월을 곱씹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직 내연하는 힘, 세상이나 자신이 이대로 끝날 수 없다는 희망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다고 보는 게 좋다. 굳이 정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느 계층이든 간에 그 소속원들에게 한을 남겨주는 것은 올바른 정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구기로 나아가서는 가족들에게 한의 꼬리를 남겨주는 것은 명분의 정당성 이전에 도덕적으로도 지탄 받을 일이다. 그런 궁지를 뚫고 일어섰을 때의 자신은 역경의 기간을 포함해 한 사회를 보는 눈에 역사를 다시 담고 진지하게 반추해 보는 당당함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18].

지금 국회에는 80 해직 언론인들의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위한 두 가지 법안이 올라와 있습니다.

민병두 의원이 대표 발의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5·18 민주화운동의 피해 보상 범위에 ‘해직된 언론인’을 포함시키자는 내용이고 설훈 의원이 대표 발의한 ‘1980년 해직 언론인의 배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 법안’은 해직 언론인 또는 유족에게 국가가 해직 당시부터 법 시행일까지의 근무 기간을 산정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민병두 의원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5·18을 광주만의 문제로 한정하고 왜곡하려는 일부 세력에 대응해 5·18이 독재에 항거한 전국적인 투쟁이었음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제작거부 등 독재에 항거하다 강제 해직됐지만 그동안 신군부 외압에 침묵한 ‘정권의 시녀’라는 오명을 써야했던 해직 언론인들에 대한 명예 회복 차원의 취지도 크다”고 밝혔습니다. [19].

고승우 합동통신 기자의 표현대로 “언론인들의 신군부에 대한 저항은 광주 지역에서의 민중 항거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엄청난 유혈 참극과 저항이 벌어지는데 기자들이 맨손으로 신군부에게 저항하는 동안 전두환 등의 언론사에 대한 협박과 공갈도 대단했다. 계엄 확대 조치로 언론사 앞에 장갑차와 무장군인이 진주하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돼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듯 긴박한 분위기였다. 기자들은 대부분 편집국이나 보도국에서 철야하면서 투쟁했다. 언론사 간부들은 계엄사의 협박과 경고를 전하면서 신문, 방송, 통신을 제작했다. 당시 언론법이 3일간 언론사의 발행 또는 방송 업무가 중단되면 회사 문을 닫게 돼 있는 악법이었기 때문에 검열 거부 등의 투쟁을 하던 기자들도 언론사 간부들의 언론 제작 행위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밖에서 보기에는 기자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신군부의 입맛에 맞게 요리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광주 시민들이 온몸으로 신군부의 폭거에 맞설 때 기자들은 펜을 놓고 광주 시민들과 뜻을 같이 했다. 그 때문에 광주를 점령한 신군부의 언론 탄압도 자심했다.” [20].

고승우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5.18은 광주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국적인 투쟁이었다”면서 “1980년 언론인 투쟁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 또는 확장으로 반영하는 것은 역사 바로 잡기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광주의 정신을 부정하는 일부 세력의 왜곡과 폄훼에 맞서고 5·18의 정신을 바로 계승하기 위해서도 절실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1980년 해직 언론인들은 그들의 삶으로 그들이 쓴 기사를 증명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곧 그들이 못다 쓴 기사였습니다.

비록 서슬퍼런 군사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지면에서 기사가 사라졌지만 이들의 결기를 꺾고 초유의 언론 탄압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전두환이 1980년 9월1일 체육관 선거를 거쳐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해직 언론인들의 투쟁은 계속됐습니다. 1984년 3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가 결성됐고 1984년 12월 민주언론협의회 결성으로, 그리고 1985년 6월 월간 말 창간, 그리고 1986년 9월 보도지침 폭로로 이어집니다. 월간 말의 주역이 김태홍 기자와 박우정 기자, 홍수원 기자, 박성득 기자 등 1980년 해직 기자들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그 엄혹한 시절, 여전히 기자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저널리스트로서 치열하게 권력의 횡포에 맞서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월간 말은 제도 언론이 외면하거나 묵살한 진실을 파고들었고 1988년 5월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는 1980년 해직 언론인들께 큰 빚을 졌습니다. 청년 기자들이 이제 백발의 노인들이 됐습니다. 이들이 겪었던 고난과 시련에 한국 사회가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늦기 전에 진상을 규명하고 늦게나마 부당하게 상처입은 이들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가 사과와 함께 배상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언론 자유는 한국 언론의 무거운 과제입니다. 한국 사회가 1980년 기자들의 정신을 다시 되새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태홍 기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과거 언론의 문제가 권력에의 종속이었다면 1990년대 제도 언론의 문제는 자본에 의한 언론의 지배와 언론 자체의 권력화, 상업주의화였다. 언론기업이 공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멀리하고 상업적 이윤추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상업주의가 언론기업을 이끌어 가는 기본 논리로 정착하면서 1999년 이후 조성된 자유로운 언론 환경은 언론사 간의 양적 경쟁을 불러 일으켜 제도언론 부실화에 기여한 결과를 초래했다. 신문사들은 신문지면의 내용 혁신을 통한 질적 경쟁으로 나아가기보다 광고따기와 부수 경쟁에 나섰다.” [21].

1980년 대량 해직 사태는 당연히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1980년 해직 언론인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동아투위 못지 않게 치열하게 싸웠고 혹독한 고초를 겪었으나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고 여전히 고통 받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자리잡기까지 이들의 투쟁과 희생이 묵중한 디딤돌이 됐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한국 언론이 당면한 숱한 도전과 위기에 이 분들의 투쟁의 역사가 귀중한 교훈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1980년 해직 기자는 아니지만 1975년 해직된 홍승면 동아일보 기자의 묘비 명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누가 나에게 전공을 묻는다면 나는 저널리스트입니다, 라고 말해 왔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의 전공은 인간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1980년 5월21일, 공수부대가 무차별 총격을 퍼붓고 퇴각한 뒤 광주는 잠깐이나마 해방 공간이 됐습니다. 금남로 도청에 모여든 시민들 사이에서 무기를 반납하고 사태를 수습할 것이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울 것이냐의 논쟁이 벌어졌는데 항쟁 지도부 역할을 했던 민주시민투쟁위원회는 이대로 항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굳혔습니다. 도청을 넘겨주는 것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5월28일 민주시민투쟁위원회의 마지막 기자회견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22].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윤상원 열사와 시민군들, 모진 고문과 강제 해직에 굴복하지 않고 진실 앞에 당당했던 1980년 해직 기자들 그들 모두가 영웅입니다. 펜을 꺾을지언정 거짓을 말하지 않았던 선배 기자들 덕분에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가 있고 지금의 한국 저널리즘이 있습니다.

미디어오늘은 9월6일 국회 소회의실에서 열릴 기획 세미나를 시작으로 1980년 해직 언론인의 명예 회복과 국가 배상 책임의 법제화를 위한 논의를 계속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미디어오늘은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80 해직 기자들, 그리고 월간 말과 민주언론협의회, 전국언론노동조합의 계보를 잇는 저널리즘 비평 신문입니다.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아 권력을 감시 비판하고 저널리즘의 본령과 저널리스트의 사명을 일깨우는 감시자의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다음은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가 확인한 707명의 해직 언론인 명단입니다. [23].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분들도 있을 수 있고 여기에는 제작과 검열 거부로 해직된 사람이 아닌 분들도 있습니다. 상당수는 돌아가셨거나 언론계를 떠나 다른 직업을 찾은 분들도 많지만 우리는 여러분들을 불의한 시대, 야만의 시대에 맞섰던 정의로운 언론인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존경의 마음을 담아 선배 기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봅니다.

기자협회 : 김동선 안양노.

경향신문 : 서동구 이경일 허경구 김종옥 이종전 강증모 전병환 이광영 정병우 신동백 김충용 이용선 김치강 김종식 조상기 고유석 이유환 윤덕한 홍수원 박우정 박성득 표완수 김효선 기남도 서병일 고영재 강관영 주재웅 김택환 김학수 이진우 김영서 노순도 신수철 임윤순 이봉지.

동아일보 : 박권상 최일남 박원근 한우석 김진현 강성재 김성익 이종각 이경재 김용정 심송무 전만길 배인준 최맹호 박병서 조용철 윤재걸 이혜만 이정구 신광연 박명용 여태섭 사상실 이종숙 박성동 김종진 박유선.

서울신문 : 유완식 김원기 최문옥 김주업 장석영 주효익 원형걸 신명철 성숙원 정인학 박기수 임정용 김세기 신경봉 최기화 김창진 조성호 김덕현 이용희 우상현 김웅태 최용문 김용상 김영수 이순석.

신아일보 : 김동진 홍화순 이영삼 박오안 신충우 이동훈 이명우 박진서 이상우 최용현 정민철 엄영철 이영만 강두모 김대성 이상근 이수남 김진규 심기한 이순철 김효도 임상구 백성원 김청은 김익서 유재주 장인만 민상기 김능화 최용주 한동순 김준석 안인숙 하두만 장영택 박용규 이원택 김교영 이한두 김교성 조계동 김병기 김상문.

조선일보 : 이의범 이원섭 김형배 김상길 강광균 이정규 박래명 위정철 김세영 송경섭 신원철 김문수 동문성 왕수완.

중앙일보 : 김승한 홍사중 김동호 윤호미 방인철 전택원 이흥재 정교용 박준형 최형민 이순동 최승호 권오중 도승진 전희천 김원태 최돈오 김송번 김창회 이헌익 유병무 허술 이춘욱 정연수 탁경명 황영철 신상범 김경렬 이호성 김형배 최근배.

한국일보·서울경제·코리아타임스 :  임재경 김용구 이형 박양주 이건섭 홍길 박실 김윤자 이영일 김영호 채의석 노향기 최욱 장병욱 박정삼 엄병윤 이수영 지봉재 이성준 박용수 임진숙 신연숙 권태선 김병규 홍순호 김환주 이상문 박희서 박재영 조규홍 안정숙.

동양통신 : 조홍래 임한순 문철호 김영진 이우성 백재우 김홍식 진태원 박길성.

합동통신 : 박석기 김태홍 이문승 박원근 윤후상 고승우 정수용 정남기 정동채 박영규 유숙렬 서재빈.

무역통신 : 이복형 서강민 윤춘 이상춘.

산업통신 : 문인석 정기백 이수삼 박삼태 정성화 박명용 유정자 곽정희 고명복 박동춘 지성용 임용빈 김정우 강완일 구교득.

경제통신 : 조진하 김예균 주영석 허도 최학원 김윤식 윤진원 강병호 장병현 전춘길.

시사통신 : 강현태 한명순 권열웅 문왕준 이준세 주몽 김선민 김병태 김혜성 이완우 정원구.

내외경제, 코리아헤럴드 : 문준철 배건섭 정영택 전정만 안혜성 성의경 권화섭 김기철 정원조 김완섭 김흥구 최영보 고성문 강붕익.

현대경제 : 이근수 김성원 이희호 김대곤 박동출 한균태 윤흥렬 이시호 왕길남 마기열 이기한 홍순권 현이섭 이상현 백맹종 노영 유흥걸 서광량 김연한 조광래 박윤환 이순 최성덕 방부성 조근영 손동훈 문승구 황한성 권영달 유태원 이희수 이상우 박덕근.

매일경제 : 김철수 최후근 서인경 이은재.

KBS : 김동석 민두식 장병칠 임연택 장두원 문청 박민웅 이윤배 심의표 박동영 전준모 남정판 양휘부 이규창 이몽룡 이홍기 이휘 이기우 곽순욱 박중흠 조정묵 박주견 안윤수 심상대 이희찬 전종옥 최성민 강경렬 김용관 김상월 김현성 박상용 신현석 박성하 한수환 강천섭 한상우 박영환 전응우 길방석 김정남 신의웅 최동주 이문구 김순경 강호경 탁병용 채철수 오방원 김용택 강태서 임준택 김영용 조영기 윤종철 김태욱 김동일 조운기 송영수 박영학 이명후 고대석.

기독교방송 : 박인석 한용상 정성진 권영국 송정민 이재천 노병유 손주영 황창해 임현모 이정일 김광수 최유철 정희창 김병채 박재건 김정남 전원식.

문화방송 : 김창식 노성대 공대식 최동명 조근재 정봉화 김해원 진용섭 이원구 임동훈 최승일 장일영 조규우 김정명 김광백 우원길 권오승 김택곤 김상균 이대우 오효진 최형무 정상모 주헌일 양영철 이기혁 김상기 홍기헌 정승철 이영회 김형호 김진석 정동길 전광소 이상익 김종옥 김종천 박명근 한성원 김영출 함승 이회태  국한준 김운용 지종성 김정호 김성재 이재인 이강원 강수문 손창익 최경준 김정회 서만교 정재웅 최종두 박형구 김규만 이홍우 정준모 이채훈 강영종 김광영 윤충환 김용대 박태찬 김현철 김옥중 김창섭 주경로 동조길 백홍관 양석완 강수문 김상호.

동양방송 : 황용복 정홍렬 오흥진 한동범 김준범 남성우 정훈 이병효.

동아방송 : 천승준 백환기 김근 최유찬 박종렬 서정훈 윤종규 이규민 전진우.

국제신문 : 이철호 김택환 조수은 조돈만 박형규 박기만 서해동 이창우 박건일 조희태 황영국 정원영 정요길 김달호 김연호 김휘 김영훈 양희주 이삼주 정대수 조갑제 조용하 장영기 정순태 변상홍 김정주 김형구 박숙자 안기태 조성환 이용진 장기연 조규윤 성백기 차영조.

부산일보 : 박두석 김수성 최주식 남치호 변재용 이수언 문호 윤상길 김홍현 김성훈 김형석 윤석관 이정덕 길주 최득수 정재철 최희수 변영주 김수평 박재호 조현모 윤철규 이장환 이홍도.

경기신문 : 김진동 장인상 조동기 홍복언 권수안 김정희 백상현 임보선 정세용 강영일 이기재 조용수 한상우 허문화 장천용 김필수 김종면 신식.

강원일보 : 김동주 이왕헌 유운소 김용재 장진기 김기석 정종덕 정종용.

충청일보 : 박노철 이관우 유영혁 송종헌 임상모 조승희 이병호 이상수 이창호.

대전일보 : 조준호 윤충원 김현수 이용호 성기훈 권귀열 우종근 김강덕 전용설 이남주 이홍구 노희관 오용근.

매일신문 : 황인석 정용수 장사무 임이섭 이상훈 안광은.

영남일보 : 이종명 김도현 정만교 이준노 이기룡 최영일 조학송 김송태 정동우 서원자 장수영 정경렬 최명환 이택기 서수호 김준영 박홍렬 안성백 이경훈.

경남매일 : 정재관 이생세 남부희 권동혁 김판완 황경호 공봉식 강경수 조석제 노현구 김길수 문경현 장재준 김정길 김무신.

경남일보 : 손강호 조동만 한길수 김용환 손석구 고여숙 김진갑 김종선 허홍준.

전북신문 : 서흥석 김종량 정종석 김현기 원유길 고정길 김승일 조용규 강병옥.

전남일보 : 박인성 양동균 김석학 강석오 이태희 김백운 김순무 이시형 김정용 윤재웅 김재창 김옥남 김영호.

전남매일 : 한상운 이홍재 서재일 문순태 양재윤 김원욱 손정연 양부량 최병연 민경관 박화강 윤유석 이건주 이운희 이상율 김남중 서명석 서흥룡 신현순 강계중.

제주신문 : 최현식 김지훈 김규필 문충성 강병희 김영훈.

전일방송 : 윤효춘 유상수.

서해방송 : 박진수.

합계 707명.

※ 이 글은 9월6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는 기획 세미나, ’80 해직을 말한다’의 주제 발표 원고로 쓴 글입니다.

※ 참고 자료.
[1] 김태홍, 80년 5월, 기자들은 생명을 걸고 전두환 세력과 싸웠다.
[2] 이 글에서는 해직 언론인의 해직 당시 소속을 그대로 살려서 씁니다. 복직된 기자들도 있고 다른 언론사로 옮겨간 기자들도 있지만 애초에 부당한 해직이었고 여전히 원직 복직이 유일하고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3] 이 책에 인용된 글의 출처는 나남출판에서 펴낸 ‘80년 5월의 민주언론 : 80년 언론인 해직 백서’와 5.18 기념재단이 펴낸 ‘5.18민주화운동과 언론투쟁’, 한국기자협회가 펴낸 ‘언론 자유와 기자의 날’ 등입니다.
[4] 기자협회보 1988년 10월28일.
[5] 오홍근, 극우가 파견한 북한 특수부대, 프레시안, 2011년 5월20일.
[6] 최성민, KBS 최성민 기자의 광주 항쟁 현지 잠입기.
[7] 윤덕한, 경향신문 기자들의 언론자유 운동.
[8] 고승우, 자유언론실천재단, 한국 언론사 속의 80년 언론 투쟁.
[9] KBS, 집중조명 언론 학살의 진상. 2000년 8월28일.
[10] 김종량, 전북일보 기자들의 언론 자유운동.
[11] 김홍식, 동양통신의 언론자유 운동.
[12] 윤덕한, 경향신문 기자들의 언론자유 운동.
[13] 박권상, 80년 언론 대학살이 뜻하는 것.
[14] 임재경, 계엄사 발표로 과도 내각의 경제 담당이 되다.
[15] 표완수, 1988년 국회 언론 청문회.
[16] 김준범, 1980년 5월 광주 취재기.
[17] 최일남, 기자가 신문사를 쫓겨날 때.
[18] 최일남, 같은 글.
[19] 연합뉴스, ‘정권 나팔수’ 오명… 80년 해직 언론인 명예회복 되나, 2015년 2월25일.
[20] 고승우, 한국 언론사 속의 80년 언론 투쟁.
[21] 김태홍,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와 민주언론운동협의회.
[22] 월간 '샘이 깊은 물' 1994년 5월호.
[23] 김태홍 전 기자협회 회장이 1984년 조사한 해직 언론인 명단.

* 이글은 2018년 09월 03일(월)자 미디어오늘 이정환 대표가 쓴 글 전문입니다. 원문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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