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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반공체제 강화와 김구 암살조선일보 대해부 2권-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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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0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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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1948년 9월 20일 의원 김인식 외 33명이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을 긴급히 제정하자는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9월 29일에 열린 제77차 본회의는 이 법안을 법사위로 이송하면서 기초 작업을 의뢰했다.


국가보안법을 반대한 조선일보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은 여순사건 같은 ‘내란행위’를 처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으나 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으로 바뀌었다. 국회 법사위는 전문 5조로 된 ‘국가보안법초안’을 11월 9일 제99차 본회의에 제출했다.

이 초안은 법사위에서 8 차례의 토의와 법제처장, 법무부장관 등 정부 당국자를 초청한 가운데 열린 간담회의 결과 등을 종합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초안에 대하여는 많은 국회의원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회에 출석한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조차도 상당한 법률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람에 제1독회 자체가 중단되고 말았다. 법사위원장 스스로가 ‘여순사건에 밀려서 여유를 두지 않고’ 기초한 사실을 자인하였고 다시 법사위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과 협의하여 그해 11월 11일까지 새로운 안을 기초하여 보고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던 국가보안법 폐기 주장은 다시 세력을 모아 11월 16일 열린 제105차 본회의에서 김옥주 의원 외 47인의 이름으로 ‘국가보안법 폐기에 관한 동의안’을 상정시키게 되었다. 이날 국가보안법의 통과가 “신생 대한민국에 천추의 오명을 남기리라”는 폐기론과 ‘공산당의 포위 진영 속에 있는 상황’에서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본의 아니게 공산당 좌익들에 춤을 추는 것”이라는 제정론의 대혈전이 온종일 벌어졌으나 폐기동의안은 37 대 69로 부결되고 말았다(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1>, 역사비평사, 1989, 85~86쪽).

국가보안법안이 제107차 본회의에 상정된 11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에는 「헌법의 권위를 위하여」라는 사설이 실렸다.

우리가 방금 국회에 상정된 국가보안법안을 반대치 않을 수 없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이 엄연히 인정하고 있는 바 국민주권의 민주주의국가의 국민된 명예를 가졌기 때문이다. 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국민 된 우리의 권리를 증진키 위한 충성이라 할 것이다. 국가가 전시사태임을 선언하고 그에 대한 조처를 취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우리는 어디까지나 헌법에 준거하여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며 그 가운데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구할 것이며 국가는 평화로운 국민에 대하여 이러한 발전을 확보하여야 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헌법이 보장코자 하고 또 발전시키고자 하는 민주주의정신과 그 방식은 첫째 국민의 언론자유와 인신(人身) 보호에 있는 것이니 앞서는 광무신문지법 적용의 부당(不當)을 지적한 바 있거니와 지금 국가보안법을 다시 반대하는 것도 언론자유도 겸한 국민의 인권자유가 보장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정부를 참칭(僭稱)하여 민국의 발전을 해할 살인, 방화 기타 일체의 파괴행동을 벌코자 한다고 하나, 실제는 광범한 사상적 단속과 정치활동의 억압을 전제로 할 것이 그 법안의 조문에 있어서 명료함을 볼 때 이 법은 이 국가의 법과 질서를 확립하기보다도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마찰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일제하에 사상 하면 불복종이요 항일이요, 적화(赤化)운동이라고 덮어놓고 구금 고문하던 예는 지금 정부 각  원(閣員) 중에서 그 고초를 몸소 당한 바로써 잘 알 것이다. (…)
다시 국가보안법 반대를 외치고자 하는 것은 그 실시가 사법에 의한 처벌에서보다도 행정권에 의한 경찰권이 강대해질 점이다. 결사의 해산이 행정권에 속하고 있는 그것부터 이 법안 이 행정권이 사법권에 우위(優位)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거니와 재판에 의한 처벌 이전에 경찰의 소위 ‘취체(取締)’란 것이 강화되어야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그 실제는 고등경찰적 성격이 본격적으로 제도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과 단체의 사상동향과 행동 일반의 사찰이 준엄하게 될 것도 생각할 수 있을뿐더러, 예비행위를 단속하려는 경찰권의 발동은 광범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구태여 의심 안 받아도 좋을 사람이 또 얼마나 이 법망에 신세를 져야 할 것이냐. 이는 경찰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경찰의 ‘기민(機敏)’을 전제로 할 때 불가피의 사실이라고 설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묻거니와 국회, 행정부, 사법부의 모든 당국자는 국가의 명예, 헌법의 권위를 위하여 또 국민의 평온을 위하여 재삼 숙고함이 있기를 간원(懇願)하노라.

이 사설은 ‘국가의 안보’나 ‘치안 유지’를 빙자해서 공권력이 사상과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탄압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조리정연하게 지적하고 있다. 1970년대 초반의 박정희 유신독재 시기부터 21세기의 현재까지 국가보안법 폐지나 개정에 극렬하게 반대해온 조선일보가 그때 실은 사설이 그런 논지를 펼친 것을 보면 새삼스럽게 격세지감이 들 것이다.


관제조직 남발에 입 다문 조선일보

이승만이 구성한 초대 내각에서 배제되다시피 한 한국민주당은 1949년 2월 10일, 대한국민회의 신익희, 대동청년단 지청천의 세력을 흡수해서 민주국민당(민국당)이라는 새 간판을 달았다. 민국당은 1949년 4월 말에 다른 정파와 제휴해서 국회의원 69명의 원내 제1세력으로 입지를 굳혔다. 국회에서 소수파를 거느리게 된 이승만은 민국당과 연합할 수밖에 없어서 내무부, 재무부, 상공부, 교통부, 체신부 장관을 민국당에 배당했다. 독자적으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정당들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기구와 관제적 민중 동원을 근거로 한 유사 국가기구에 의한 통치’를 시도했다.

대통령인 이승만이 헌법이나 하위법들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유사 국가기구들’을 잇달아 만들어내던 시기에 조선일보는 이렇다 할 만한 비판을 하지 않았고, 그런 단체들이 일으키는 폐단을 지적한 적도 거의 없었다. 국가보안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때와는 판이한 자세였다. 학도호국단 창설의 경우, 조선일보는 관할 부처 장관의 기자회견 내용만을 그대로 전달했을 뿐 사설을 통해 학도호국단이 지닌 문제를 분석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1949년 4월 20일 그 단체가 창설된 지 이틀 뒤인 22일자 신문에 조선일보는 「학도호국단의 조직은 / 사상 선도에 있다 / 안 문교장관, 출입기자단과 문답」이라는 기사를 내보냈을 뿐이다.

안호상 문교부장관은 지난 21일 출입기자단과 만나 제반 당면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일문일답이 있었다.
문: 유학생 일본 파견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는가.
답: 맥아더 사령부와 연락을 하기 위하여 일간 문교부 직원을 일본으로 파견하겠다.
문: 학도호국단 규칙을 보면 학생단체도 해산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실지는 어떤가.
답: 현재는 그대로 있지만 호국단의 강화와 더불어 자연 해체될 것이므로 이는 시간문제이다.
문: 호국단이 국력 증강에 얼마나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답: 군인은 반란에 경찰은 사건에 필요하지만 학생의 통일이 완성되면 치안도 확보됨은 물론이려니와 학생들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평화가 올 것이다.
문: 그러면 학생의 사상 통제가 아닌가.
답: 사상의 선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훈련도 군사훈련이 아니고 호국훈련인 것이다.
문: 그렇다면 학생들의 사상 선도란 일민주의(一民主義)에 의함인가.
답: 그렇지 아니하고 민족적인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기사는 안호상이 학도호국단은 ‘학생의 통일’을 위한 조직이며 ‘호국훈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백히 말한 것을 전달하고 있다. 안호상은 이승만이 주창한 ‘일민주의’의 대표적 숭배자이자 홍보요원이었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강조한 ‘민족적인 민주주의’는 일민주의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사 기자들이 그 이유를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후 얼마 안 되어 일민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일민(一民)이라는 두 글자는 자신의 50년 운동의 출발이요 귀추(歸趨)라고 천명하고, 일민주의를 신흥국가의 국시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일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요 우리 민족의 지도원리’라고 공언한 안호상이 이승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관제조직 가운데 하나인 학도호국단에서 일민주의를 배제했을 리는 없다. 학도호국단은 모든 중·고등학생들에게 군사훈련과 반공교육을 강요했다. 학생들의 비판적 활동은 금지되고 관제데모가 필요할 때는 학생들을 동원했다. 학도호국단의 총재는 대통령, 부총재는 국무총리, 중앙단장은 문교장관이었다. 학생들한테서 강제로 걷은 학도호국단비가 학교 경영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박정희는 1975년 5월 20일 유신독재를 강화할 목적으로 학도호국단을 부활시켰다. 그가 ‘군사혁명’이라고 주장한 5·16쿠데타 뒤에 내세운 구호가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 이승만 정권이 학도호국단을 비롯한 관제조직을 독재의 도구로 악용하는 것을 당시 언론이 준엄하고 냉철하게 비판했다면 그 이후에 전체주의적 조직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순 반란의 배후’로 몰린 김구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사흘째인 1948년 10월 21일 국무총리 이범석은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의 경위를 발표한 뒤 “좌익과 우익이 결탁했다”고 공언했다. 10월 22일자 조선일보 2면에 실린 기사에는 이범석의 말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번 반란의 성질을 말하면 본래 좌익계열은 수삭(數朔) 전부터 공산분자가 가장 싫어하던 극우의 일보 정객과 결탁하여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려고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책동 상통하였다. 그때는 불행히도 정권 이양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이 책동은 그 진공상태를 틈타서 교묘한 방법을 다하여 급기야 국군의 소령 장교급에까지 숨어들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여수 14연대장 오동기(소령)로서 이 자는 여수에 가서 하사관 훈련을 기화로 젊은 하사관들의 단순한 심리를 이용해서 좌익의 주의 사상을 불어넣고 교묘히 선동하는 한편 극우진영의 국내 국외에 결합된 정객과 손을 맞추고 러시아의 10월 혁명 기념일을 전후해서 기술적인 반란을 계획했던 것이다. (…)
현재까지 그들의 죄상을 알아보건대 정확한 숫자는 아직 모르지만 근자에 새로 부임했던 여수연대장 이하 수십명의 장교를 살해하였고 순천에서는 그 반수 이상의 경찰관을 살상하였다. (…) 여수 역시 이와 같은 비참한 도탄 속에 민중을 몰아넣어 신인(神人) 공노할 공산주의자들의 죄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보다도 시대에 몰락된 유치한 정치욕과 사리사욕을 만족시켜 반란을 조장케 한 일부 극우진영의 죄악이 백번 가증한 바이다. 정의에 입각한 세계의 사초 앞에서 이렇듯이 인민의 자유와 평화를 파괴하는 폭동으로써는 결코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법이 없다. 이 죄상이 백일하에 폭로되는 날 우리 대중은 더욱 분개할 것이요 정부는 결코 용인 않을 것이다.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제목의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의 음모와 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여순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암시했다. 수도경찰청장 김태선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었다. 이범석을 비롯한 정권의 실력자들이 주장하는 ‘극우정객’이 김구라는 사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족상잔으로 피바다를 만들고 있던 ‘여순사건’의 주모자로 자신이 지목되자 김구는 10월 27일 그런 모략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10월 28일자 1면에 그 내용을 2단 기사(「극우 관여 운운은 이해난 / 김구 씨 중앙사 기자에 담화」)로 보도했다.

(서울 27일 발 중앙사) 한국 정부 방면에서 반란 배후의 인물로 지목하고 있는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 씨는 지방 여행으로부터 귀경하여 중앙사 특파원과 회담하고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꽂히어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번 반란을 우려하고 있다. 이 불행한 사건은 제주도의 전투와 더불어 민생에 중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순진한 청년들을 유혈사태로 오도한 자들은 용납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다. 현재까지의 당국 발표에 의하면 반도(叛徒)들의 목적은 북한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금번 반란의 반향에 관하여는 예측키 어렵다. 그러니 이는 한국 정세에 대하여 중립적 입장에 있는 일부 유엔 회원국의 견해에 영향을 미칠는지도 모른다.

김구의 이런 해명 겸 반박은 그가 당시 이승만 정권의 모략을 얼마나 황당하게 느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비롯한 모든 보수언론은 김구의 주장을 ‘중앙사’ 특파원의 기사를 통해 전하기만 했을 뿐 국무총리 이범석과 그의 부하들이 끈질기게 퍼뜨린 ‘극우정객의 여순반란 배후설’이 증거가 없는 것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반란의 수괴’로 몰리던 김구는 그로부터 8개월 뒤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암살의 날 1949년 6월 26일

1949년 6월 26일 낮,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조선일보 6월 28일자 2면 머리에는 「김구 선생 조난(遭難) 상보(詳報)」가 「조국통일의 비원을 품은채로 / 희(噫)! 노애국투사 영영 가도다」라는 컷 아래 실렸다.

6월 27일 오전 11시 경교장 발표
6월 26일 오전 11시 반경에 소위의 복장을 한 안두희(34)라는 청년이 경교장에 와서 백범 선생께 면회를 청하므로 2층으로 인도하였다. 그 청년은 백범 선생께 인사를 드린 후 비서가 이실(離室)한 틈을 타서 휴대하였던 45식 미국제 권총을 발사하여 면부로부터 하복부에 이르기까지 4 처의 요처에 명중되어 우리 위대한 애국자 백범 선생은 마침내 악한의 흉탄으로 인하여 운명하시고 말았다. 범인은 곧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군모를 벗어놓고 복장의 포장(襃章)을 떼어버리면서 내가 쏘았다 하고 소리치는 찰나에 정문에서 경비하던 순경이 현장에 달려와서 체포한 뒤에 들어온 헌병의 요구로 인하여 즉시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백범 선생은 가장 평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애국자이신 까닭에 모든 겨레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마음으로써 대하시며 어떤 사람이 찾아오든지 반드시 면회하시었다. 이런 흉변도 백범 선생의 이런 정신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번 사건 경과는 이상과 같다. 이참에 어떠한 잡음이나 낭설이 있다면 이는 불순한 모략에 불과한 것이다.

조선일보 7월 1일자 2면에는 「안두희는 비밀당원」이라는 제목으로 헌병사령부의 발표문이 2단으로 실렸다.

안두희는 고 김구 선생에게 포탄약집 두 개를 화병으로 선물한 것과 안의 집에서 압수한 비밀당원증(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가 대한민국 31년 4월 14일 발행한 동 당원증에 첨부된 안의 사진에는 비[秘]의 날인이 있다)과 김구 선생이 안에게 4월 29일과 3월 26일에 써주신 휘호 등의 증거품으로 비밀당원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전(田) 헌병사령관 담
한독당 김학규 조직부장이 범인 안두희가 한독당원이 아니었다는 의미의 담화를 발표한 이후 그 왜곡된 사실을 진상과 같이 선전하여 고의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는 모략적 언동이 유포되어 심히 유감된 바 있으므로 이상의 증거로 본 명백한 사실에 비추어 일반은 안두희가 한독당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밀당원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모략적 언동에 넘어가지 않아주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고인에 최대의 조의 표한 조선일보

헌병사령부는 안두희가 한독당의 비밀당원이라는 ‘증거’로 그가 김구에게 주었다는 선물과 김구가 그에게 써준 휘호 등을 들었다. 한독당의 비밀당원이 그 당의 대표인 김구를 살해했다는 뜻이었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보수언론은 신빙성이 박약한 헌병사령부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7월 5일자 사설(「김구 선생 영여를 보내며」)과 기사를 통해 고인에 대한 극도의 존경과 추모의 뜻을 전했다. 김구의 단독선거 반대를 계기로 결별을 선언했던 방응모는 ‘조선일보사장’이라는 이름으로 7월 5일자 1면에 애끓는 「조사(弔辭)」를 올렸다. 7월 6일자 조선일보 2면 머리에는 전날 열린 국민장을 보도하는 기사라기보다는 목이 메인 듯한 영결사(永訣辭) 같은 글이 실렸다. 그 제목만 보더라도 내용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3천만은 삼가 명복을 비나이다 선생이여 고히 가옵소서 / 산천초목도 흐느껴 우는 듯 / 통곡 속에 영여(靈轝)는 발인 / 뒤덮인 애수(哀愁)에 장열(葬列)도 지지(遲遲)

고 백범 김구 선생의 국민장은 참변 제10일인 어제(5일) 전 국민의 애도리에 경건하고도 엄숙하게 집행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경교장 앞 넓은 전찻길은 선생의 마지막 길을 보내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었고 육해공군 악대를 비롯하여 경찰 학생 단체들이 각기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 거족적인 비애의 날을 조상(弔喪)코자 서울을 필두로 방방곡곡에서 조기를 내걸어 선생의 명복을 빌며 가두에는 거의 모두의 상가가 문을 닫고 마음속으로 조의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거늘 선생인들 어이 여기 벗어남이 있으리오만은 오직 선생이 그다지도 염원한 조국의 완전 통일을 보지도 못한 채 비원(悲願)을 남기고 쓸쓸히 사라지는 선생의 넋을 생각하고 누구나 눈물 짓지 않는 이 없었다. (…)
동자(童子)도 울고 백발도 목메어 울고 뿌리치고 가시려는 선생의 영여를 에워싸고 하늘도 산도 흐느끼는 듯 새하얀 옥양목으로 감긴 선생의 영여는 오열하는 군중 사이를 말없이 걸음도 무겁게 조용히 영겁의 여정에 오르는 것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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