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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와 반민특위 와해 공작조선일보 대해부 2권-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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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2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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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이루어졌지만,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이래 의병운동,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에서 치열하게 펼쳐진 독립투쟁에도 힘입은 바 큰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해방이 자동적으로 독립국가 건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미군과 소련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을 각각 점령하고 군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일파 청산에서 남보다 앞선 북

자주와 독립을 굳건히 하는 신생정부를 세우려면, 일제강점기에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하면서 민족을 배신한 자들을 응징함으로써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는 소련군정의 지배를 받던 북조선이 남조선보다 앞서 나갔다.

(…) 해방 직후 북한은 소군정의 지원 하에 인민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군정은 북한에 반일적 인민, 반일적 정당과 단체가 중심이 된 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지원하고 있었다. 친일파에 대해서도 철저한 소탕을 기본방침으로 정했다. 소군정의 친일파 배제 원칙은 미소공위에서 새로 수립될 임시정부의 각료 기준이 되었다. 북한은 이러한 소군정의 지원 속에서 특별법이나 반민재판을 별도로 두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친일파 숙청을 추진하였다. (…)
북한의 일제 잔재 청산작업은 북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48년 9월 5일 채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제1장 ‘근본원칙’ 제5조에서는 중요산업에 대해 일본국가와 일본인 또는 친일분자의 일체 소유는 국가의 소유라고 규정했고, 제2장(공민의 기본적 권리 및 의무) 제12조에서는 친일분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지 못함을, 제6장(재판소 및 검찰소)의 제85조에서는 일제시기에 판·검사로 근무한 자는 판·검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여, 친일파의 정치·경제·사회적 규제를 헌법에 명문화했다(이강수, <반민특위 연구>, 나남출판, 2003, 56~63쪽).

일제 관료 중심의 반민족분자 처단을 주장한 조선일보

미군정은 친일파 숙정을 반대했지만 남조선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그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자 1946년 8월 24일 공포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설치령’, 1947년 9월 3일 공포한 ‘입법의원 선거법’, 1948년 3월 17일 공포한 ‘국회의원 선거법’ 등에 그에 관한 조항을 포함시켰다.

미군정이 반대하는 데도 1947년 7월 2일 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숙청법이 의결되자 미군정은 인준 자체를 아예 거부했다. 미군정은 애초부터 ‘선(先) 선거법, 후(後) 친일파 숙청법 제정’을 주장해 왔는데 정작 두 법이 모두 제정되자 친일파 숙청법 인준을 거부했던 것이다.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이 반민법을 기초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긴급동의안을 제출하자 재석의원 155명 가운데 찬성 105명, 반대 16명으로 가결되었다. 그 동의안에 따라 구성된 ‘특별법기초위원회’는 미군정시기 입법의원이 제정했던 ‘특별조례법률’을 바탕으로 만든 전문위원의 안을 중심으로 일본의 공직자 추방령, 중국 장개석의 전범 처리,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법안을 참조해서 8월 16일 초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에는 「‘반민족분자 처단과 일제 이료(吏僚) 배격」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신정부는 조각에서부터 각 방면의 평판이 극히 좋지 못하여 무임소총무위원의 추임(追任)으로 내각의 보강 공작을 한 바도 있었는데 그것만으로 정부가 국민의 신뢰감을 얼마나 더했는지는 지금 말하기 어려우나 국민은 그렇다면 정부가 앞으로 일을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깊은 주의를 가지려고 하며 동시 감시 편달의 노력을 다 하겠느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정부의 첫 사업으로 국회에 제안된 것이 헌법 제101조에 규정된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이다. 반민족행위자의 법률상 처단, 행정적 조치 여하는 국권 회복의 목적이요 내용이요 또 수단의 대부분이 될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국가민족을 해한 적의 주구배(走狗輩)를 숙청할 것은 국가적 역사적 강기(剛氣)의 확립을 뜻하는 건국의 기본정신이다. 기미 독립정신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혁명적 법통을 고조(高調)하는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국민정신운동도 과연 여기에서 비롯한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정부의 역량 여하는 곧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의 추진 여하에서 국민의 역사적 판정을 구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국회의 국민적 신임도 여기서 경중이 나타날 것이다.
한일병합 이래의 민족국가 광복의 역사적 정신에 즉(則)하여서 뿐 아니라 친일반민족분자 처벌의 필요는 실로 해방 이후의 그 필요성이 가중되었고 또 시간적으로 급히 요청되어 온 것이다. 해방 직후는 오히려 그들의 분자는 세력을 차지하고 반민주적 반사회적 반역사적 행동을 주저 없이 감행하기에 이르렀으니 건설 도정에 있다는 이 사회의 강기가 이렇게도 문란하고야 누구를 위한 건국이 되겠는가. 일제하에 국권과 국민의 이익이 유린된 이래 민족의 거의 전부는 경제적으로 적실(赤實)한 일단 퇴각의 태세로써 새 국민으로서 회개에 힘쓰려는가 했더니 오히려 뜻밖에도 군정의 방임상태 하에 그들은 구태의연히 재계에서 관계에서 또 기타 사회 각 부문에 출몰 자재(自在)할 뿐 아니라 금권 관권으로 사회의 상층 부문에 지배적 일제의 노예가 되었고 혁명투사는 물론 적어도 조선 사람이라는 면목의 말살을 위한 잔악한 강압 밑에 무수한 동포가 희생된 것을 생각할 때 오늘의 이 문란된 건국의 강기를 바로잡지 않고야 무슨 일이 되겠는가. 지금까지도 그 필요는 각 방면으로부터 논의되어 전 입법의원에서도 입안했었으나 미군정 당국이 그 불필요를 논했던 때문에 민론(民論)의 격앙을 샀던 것도 지금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 전일 일제하의 관리로 고등한 지위에 있었던 자나 장기간 경관이나 그 유사한 직에 있었던 자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한다. 최근 신정부에서는 전일의 총독부 고등관으로 상당한 지 위에 있었던 인물을 등용한 바도 있고 또 많이 물망에 오르고 있는 모양인데 당시의 관료는 소위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들이 밟아 올라간 길이며 또 그 당시 왜의 철통같은 관료독재의 그 사회에서 일어난 그 형편, 그 당시에 행세한다고 추잡한 왜령(倭令)에 떨고 다니던 그 꼴을 보아 어찌 무슨 심사로 신정부에 등용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렇지 않아도 신정부에 경계하여야 할 것은 관료독재풍인데 그때 당년 왜의 억압, 지배, 침략의 전통적 관료로 훈육된 그 인물들을 등용한다는 날에는 정부 내의 관료풍은 어느덧 크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옳다는 데는 당시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을 것이고, 21세기 이 시점에도 그 역사적 과업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실을 통탄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위의 사설은 친일파 숙청의 범주를 유독 ‘이료(벼슬아치 또는 관료)’에 집중시키고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일행적이 두드러진 일제 관료나 경관 출신들을 중용한 사실을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입법의원이 제정하려다가 미군정의 인준 거부로 좌절된 친일파 숙청법에 명시되어 있던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 등에 관한 ‘처단’은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 ‘이료들’에 못지않게 ‘언론보국’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의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성전’이라고 찬양하며 조선의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보내는 데 앞장섰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의 사주 김상만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리고 그들 밑에서 친일과 반민족행위로 얼룩진 신문을 만들던 간부들은 아무런 응징도 없이 ‘사면’해야 할 것인가?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는 일제강점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등 모든 분야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인물들을 가차 없이 처단한 뒤에야 세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언론이 바로 서지 않으면 신생 독립국이 바른 길을 걸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아무런 반성이나 사죄도 하지 않고 신문을 사유물처럼 지배하던 사람들에 대한 응징과 처벌은 마땅히 있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런 당위성은 외면한 채 ‘반민족분자 처단’을 위한 입법과 반민특위 설치를 주장했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위의 사설이 나간 지 이틀 뒤인 8월 20일자에 「반민족분자 처단과 정부의 책임」이라는 사설을 다시 내보내면서 ‘처단’의 대상을 조금 넓혔다.

반민족행위처단법의 실시는 앞으로 동법(同法)에 의하여 구성될 특별재판부가 직접 책임을 가질 것이나 동법의 실시를 보기 전부터라도 정부 당국은 정부에 등용할 관원의 자격 심사에는 물론 시정(施政) 일반에 동법의 정신을 전면적으로 과감하게 현현(顯現)하여야 할 책임이 크다. 신정부가 각급 정부에서 반민족행위자를 제거하여야 할 것은 먼저 본법의 실시 여부를 물을 것 없이 우리 민족 피의 독립운동사가 이를 냉철히 명하고 있는 것이니 정부 자신은 그 지도적 입장에서 국민의 선두에서 솔선 실천하도록 함으로써 민간 각 중요기관의 개편과 그 운영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8·15 직후이면 이런 것은 그리 큰 문제도 안 되었을 것이 나 군정은 그 처단을 정식 거부하는 태도를 고집하였기 때문에 반민족분자들은 ‘이것 봐라’ 하는 듯이 전일의 지배적 지위를 각 방면으로 차지하며 민주혁신의 독립정신을 여지없이 흐려 놓았고 또 군정과 특히 경찰이며 재계 실업계에 그들의 흑수(黑手)는 마음대로 뻗쳐 왔기 때문에 오늘 이 문제가 더 커진 것이다. (…)
반민족행위자라고 하여 경찰이나 기타 관료로 있는 자들은 흔히 지도하는 것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구한국시대로부터 부귀를 그대로 누렸다든가 또 일제하에 부귀와 권세를 얻을 수 있었던 자도 표면은 무난해 보이면서 내막으로 자기의 부와 지위와 새 권세를 신장(伸張)키 위하여 가진 흉계를 다한 자 또한 얼마이냐 생각해 볼 것이다. 말하기는 장사해 먹으려니까 도리 없었다고도 할 것이나 장사는 어떤 수법으로 했던가. 총독 이하의 왜의 고관과 결탁하여 그의 적극적 원조를 얻어서 천만장자의 영화를 누리기까지는 누구를 짓밟았으며 누구를 희생하였던가. 양심이 있거든 모름지기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거든 해방 후 정계의 분산적 대립, 혼란의 틈을 타서 그들은 정계 이면에서뿐 아니라 근자에는 표면에까지 등장하여 정계의 흑막적 존재가 되어 있어 금권의 독점독재의 경향은 오늘 남조선 정계에 점차로 대두하고 있음은 민족적 격분을 금치 못할 바이니 그들의 흑수는 재계 실업계로 또 정계로 언론계에까지 부단히 암약하고 있음을 지금 식자로서 부인키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정부는 이와 같은 사정에 눈을 바로 떠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이 ‘반민족행위처벌법’의 해당자로 지목하는 자는 ‘구한국시대로부터 부귀를 그대로 누렸’던지, ‘일제하에 부귀와 권세를 얻을 수 있었던 자’이다. 총독부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지원받은 경성방직의 대주주인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광산업으로 벼락부자가 되어 조선일보사를 인수한 뒤 일본군에 고사포를 기증하기까지 한 방응모는 과연 그런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반민특위 와해공작과 국회프락치 사건

1948년 9월 29일 국회는 의원 김인식 외 19명이 긴급 동의한 대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9조에 따라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안건을 재석 145명 가운데 찬성 92명, 반대 1명으로 가결했다. 국회는 이 결의에 따라 10월 1일부터 특별조사위원 10명(모두 국회의원)을 선임한 뒤 23일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김상덕(경북), 부위원장에는 김상돈(서울)이 뽑혔다. 김상덕이 10월 28일 국회에 상정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기관 조직법안’은 11월 24일 제112차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이 법이 제정되자 반민특위는 서울에 중앙사무국을 두고 각도 조사부에 사무분국을 설치한 뒤 1949년 1월 12일과 2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도별 조사부 책임자를 선임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반민법 해당자들에 대한 검거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당시 제일 큰 기업체이던 화신산업의 사주 박흥식이 체포된 데 이어 일제 헌병의 앞잡이로 250여명의 독립투사를 밀고한 바 있는 대한일보 사장 이종영,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린, 언론인이자 소설가로서 적극 친일을 한 이광수, 역사학자이자 문필가인 최남선 등이 쇠고랑을 찼다.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1월 10일 활동을 공정하고 냉철하게 해달라고 요망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담화문에는 반민특위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은 이승만의 담화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즉각 열고 “누구를 막론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처사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며 또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반민특위는 국가원수인 이승만의 노골적인 언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1월 26일 수도경찰청(서울시경의 전신) 전 수사과장 노덕술을 체포했다. 그는 일제 경찰에서 경시(警視)라는 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서 무자비하게 고문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노덕술은 1948년 1월 24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 박성근(당시 25세)이 ‘범인’으로 체포되자 고문을 하다가 1월 29일 그를 죽게 했다.

이승만은 노덕술이 체포된 이튿날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등 6명의 위원을 불러 “노덕술은 공산당을 잡는 기술자인데 그를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의 짓”이라면서 그를 석방하라고 종용했다. ‘해방된 나라’에서 권력의 주구가 되어 날뛰면서 고문으로 ‘살인’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던 자를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라는 압력이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은 2월 12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에 끈질기게 시비를 걸면서 ‘친일 악질 고위 경관’까지 비호하던 시기의 조선일보를 보면 현직 대통령인 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기사와 논설은 없다.

1949년 3월 국회 안의 동성회, 일민구락부 등에 속한 소장파 의원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은 서울지검 부장검사 장재갑과 검사 오제도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를 중심으로 특별사찰반을 편성하고 내사를 시작하게 했다. 반민특위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5월 18일 경찰은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전북 익산)과 최태규(강원 정선)를, 20일 이구수(경남 고성)를 구속했다. 자수한 남로당원 전우겸이 세 의원이 국회에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것이 구속의 이유였다. 그들은 반민법 제정에 직접 관여하거나 입법을 지지한 의원들이었다. 5월 23일에 열린 임시국회는 구속된 의원들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두고 이틀 동안 격론을 벌였으나 검찰과 경찰의 거센 공세에 위축된 국회는 88 대 95로 결의안을 부결시켰다. 임시국회에서 결의안을 놓고 토론이 벌어지던 시간에 서울 시내에서는 “국회 안의 빨갱이들을 추방하라”고 외치는 관제데모가 벌어졌다. 친일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구속 의원들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 라고 몰아붙였다.

6월 6일 오전 7시쯤 서울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이끄는 무장경관 40명이 중구 남대문로에 있던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그들은 출근하던 특위 직원 33명을 한 사람씩 체포해서 중부서 유치장에 수감했다. 사건 발생 보고를 듣고 특위 사무실로 달려간 검찰총장 권승렬도 경찰에 의해 무장을 해제 당했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명백한 증거도 없이 구속되고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를 해가 훤히 뜬 아침에 습격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조선일보의 보도는 소극적이었다. 조선일보는 세 의원이 구속된 지 이틀 뒤인 5월 20일자 2면 중간에 「이문원 최태규 양 의원 검속 / 정계 2 요인도 문초 중」이라는 짤막한 기사를 실었다.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에서는 정사복 경관 10수명을 동원하여 지난 18일 밤 11시경 시내 모처에서 국회의원 이문원(43)씨와 최태규(30) 양씨와 황모와 이 모라는 정계 요인을 모두 긴급구속하고 방금 문초를 계속 중에 있다. 그런데 당 경찰국과 서울지검에서는 전기(前記) 양 국회의원의 구속에 대하여 일체 함구하고 있어 검거 내용을 규지(窺知)할 바 없으나 측문(側聞)한 바에 의하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것이라고 하는데 임시국회 2일을 앞둔 동씨들의 구속이니 만큼 일반의 주목처가 되고 있다.

6월 6일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해서 요원들을 체포한 사건도 조선일보는 6월 7일자 1면에 3단으로 다루고 사설은 아예 싣지도 않았다.

반민특위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제2차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6월 17일 국회 부의장 김약수 외 6명의 의원이 미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진언서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제출하면서 표면화했다. 6월 23일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은 그 진언서를 제출한 김약수 등 6명이 “남로당과 결탁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파괴하여 남한에 공산국을 세우려는 의도 아래 (…) 악질적인 공산당의 지령 아래 실천행동을 감행”했다고 발표했다(<반민특위 연구>, 215쪽). 6월 21일부터 25일까지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해서 의원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병희가, 8월 11일에는 배중혁과 차경모가, 8월 14일에는 서용길, 신성균, 김봉두가 체포되었다.

조선일보는 ‘관제프락치’ 또는 ‘용공 조작’의 의혹이 짙은 이 사건에 관해 깊이 있게 취재한 기사나 문제점과 의문을 제기하는 논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수사기관의 발표나 당국자의 담화를 싣는 것이 고작이었다. 6월 23일자 2면 머리에 올린 「노일환 씨 등 6 국회의원 / 보안법 위반 등으로 피검 / 김약수 부의장에게도 영장」, 6월 24일자 2면에 2단으로 나간 「공산계와 결탁 / 국회의원 검거에 김 국장 담」, 6월 25일자 2면에 3단으로 보도된 「남로당 프락치가 명백 / 6 의원 사건에 김 검찰총장 담」, 6월 26일자 2면에 3단으로 실린 「김약수 씨 드디어 체포 / 25일 이른 새벽 시내 운니동서 검거」가 바로 그랬다.

두 차례에 걸친 ‘국회프락치 사건’ 보도 과정에서 조선일보가 보인 미온적이고 권력추수적인 보도는 6월 26일 김구가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자 그나마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이승만 정권이 노골적으로 추진한 반민특위 와해 공작은 보수적 신문들이 ‘국회프락치 사건’을 ‘남로당 프락치 사건’이라고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데 힘입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949년 7월 2일,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은 1950년 6월 20일로 규정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로 앞당기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7월 6일 국회의 표결에서 이 개정안은 재석 136명 가운데 찬성 74, 반대 9로 통과되었다. 법이 바뀌어 사실상 조사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해서 위원 전원이 사퇴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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