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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하지 않은 성행위는 강간, '저항' 여부 따지면 안돼[한국적 미투 운동 SNS 시대의 사회운동(17)]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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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1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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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피해여성 70%, 성폭력 시 무기력증에 빠져 저항 못해

이탈리아 튜린의 한 법원 판사는 2016년 겨울 동료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46살의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법정에서 피고는 피해 여성이 충분히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여성 피해자는 폭행을 당할 당시 '그만 둬' '충분해'라고 말했지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판사는 피해 여성의 반항이 약해서 겁탈을 당한 것이라는 판결을 내려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그 여성은 불복해 항소했다. 여성이 충분히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앞세운 이 판결에 대해 전문가들은 여성을 보호해야 할 법관이나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에서도 미투 운동 속에서 성범죄 피의자로 전락한 일부 저명인사들이 공개적으로 '법정에서 보자'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한국의 관련 법체계가 이탈리아 경우와 유사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연합(EU)에서 15살 이상의 여인이 강간당한 수는 2018년 4월 현재 약 900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EU 소속 33개 국가 가운데 9개 국 -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공화국, 벨기에, 키프로스, 룩셈부르크, 독일 - 만이 '동의하지 않는 성행위는 강간'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법제화하는데 그치면서 여성 성범죄에 대한 법치가 유럽에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동의하지 않는 성이 범죄라는 사실이 법제화되지 않는 현실이 성 예비 범죄자들과 전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이는 여성 스스로 성폭행을 방어해야 한다는 책임을 뒤집어 씌우면서 되레 성범죄 피해자의 책임을 묻는 식의 반인륜적인 행태가 되풀이 되게 만들고 있다. 이런 관행이나 태도가 극히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이며 즉각 시정되어야 한다는 과학적 연구결과가 지난 2016년 제기됐다.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폭행을 당할 때 고함치거나 다리를 오므리는 식으로 저항하는 것이 정상적 행동인 것으로 흔히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 자기도 모르게 일시적인 무기력증세에 빠져 저항하거나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이 무기력증은 외부 공격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다른 수단이 없을 경우 발생하는데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심각한 우울증 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학적으로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라고 불리는 이 무기력증은 최면과 유사한 상태에 빠져 외부 자극이나 고통에 반응하지 않게 되는데 '긴장성 부동화'로도 불리는 이 현상은 곤충, 어류, 파충류, 양생류, 조류 그리고 포유류 등에서 발견된다. 해당 증세를 보이는 동물은 움직이지 않으며, 눈을 간헐적으로 떴다 감았다를 반복한다. 몸이 굳으며 때로는 머리를 든 상태에서 짧게는 수 초, 길게는 수 시간 동안 같은 자세를 지속한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사우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애나 뮐러 박사 연구팀은 성폭력 피해를 당한 뒤 1개월 이내에 스톡홀름 성폭력 피해자 긴급치료 센터를 방문한 298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 당시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를 경험했는지 여부에 대한 진단하기 위해 ▲얼어붙은 듯 마비 상태가 된 것을 느꼈는지,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여부, ▲고함치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었는지, ▲무감각 상태에 빠졌는지, ▲한기를 느끼거나 고립감을 느꼈는지 여부 등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298명의 피해자 가운데 70%는 폭행을 당할 당시 상당한 정도의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를 경험했으며 이들 가운데 48%는 그 상태가 극심했다고 밝혔다. 저항이 아니라 얼어붙어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 것이다. 피해 여성들은 저항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 여성의 70% 정도는 폭행 당시 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다. 특히 과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이 피해를 입을 경우 처음 겪는 경우보다 두 배 이상의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를 경험했다. 또한 심각한 폭력을 수반한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6개월 동안 검진을 받은 189명 가운데 38.1%는 PTSD를 겪고, 22.2%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는 PTSD를 유발할 위험을 2.75배 높게 만들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게 할 위험을 3.42배 높게 만들었다. 연구팀은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가 알려진 것 보다 매우 일반적이라며 이는 성폭력과 관련한 법적 조치와 심리적 치료 등에 유익한 정보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PTSD 증상은 감정 마비, 트라우마 상황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플래시백, 각성과민(주위 환경을 강하게 의식하거나 늘 '경계'를 취하고 있는 것) 등이 있다.

법정에서는 대부분 피해자가 동의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을 맞춰왔는데 일시적 마비로 인한 무저항 상태를 동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연구팀은 강조하면서 '성폭력과 같은 극단적인 위협에 노출될 경우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한 것을 탓해서는 안된다.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은 정상적인 생물학적 반응'이라고 말했다.

한편 성범죄에 대한 법적 판단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유럽 컨벤션 의회가 2011년 5월 제정한 '여성과 가정 폭력 예방과 근절에 대한 선언(The Istanbul Convention)'에서 강조하고 있는 논리다. 이 선언은 여성 폭력에 대항할 가장 포괄적인 법적 조치로 인정받으면서 2018년 1월 현재 EU회원국 중 20여 개 국이 비준했지만 그 절반은 자국 내 강간 범죄의 처벌법을 그에 맞게 고치지 않고 있다.

유럽의 이런 현상은 성범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여전히 구태의연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유럽인권위원회가 2016년 실시한 성범죄에 대한 조사에서 동의 없는 성행위로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 응답자의 1/3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타인의 집에 간 경우, 속옷이 비치는 옷을 입은 경우, 분명히 안돼 라고 말하지 않은 경우, 육체적으로 반항하지 않은 경우' 등을 들었다.

세계 최대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성범죄에 대한 광범위한 편견이나 피해자 비난논리 등이 성범죄 근절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인'라면서 '미 투 운동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강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인권이라는 점에서 정부는 동의 없는 성행위는 강간이라고 규정하는 법제를 추진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미투 운동도 관련법을 정상화하는 것을 목표로 이뤄져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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