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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서다조선일보 대해부 2권-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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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0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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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새해를 며칠 앞둔 12월 27일 조선에는 ‘신탁통치 결사 반대’의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문제의 발단은 그날 여러 신문에 실린 외국 통신사 기사였다. 그 기사를 전재(轉載)한 언론 가운데 동아일보 1면 머리의 제목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았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1국 신탁 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워싱턴-25일발 지급보[至急報]).

이 기사의 핵심은 미국이 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하는 데 반해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1국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우익은 물론이고 좌익도 조선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신탁통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위의 통신 기사는 주한미군 사령부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나온 ‘워싱턴 발’ 추측보도였다.

무엇보다도 미국 모 통신사로 되어 있는 기사의 출처가 의문시되었다. 당시 외신을 취급하던 국내 주요 통신사로는 합동통신과 조선통신이 있었는데, 합동통신은 우익 성향이 강했고, 외신 제휴사는 AP통신이었다. 조선통신의 제휴사는 UP통신이었는데, 조선통신은 삼상회의 결정을 빨리 보도하지 않았다 하여 좌경사(左傾社)로 낙인찍혔다.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그 당시부터 국제적 모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후 일부 연구자들은 배후가 있었거나 최소한 당시 언론기관을 통제했 던 미국의 고의적인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정용욱, ‘신탁통치 파동과 하지: 하지와 김구, 박헌영’,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55~57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 책 1940년대편 1권, 147쪽에서 재인용).

정작 12월 28일 오후 6시에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발표한 「‘한반도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는 AP통신의 추측기사와는 전혀 달랐다. ‘결의서’ 가운데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조선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영·소·중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합의한 내용은 동아일보가 AP 통신 기사를 옮기면서 단 제목과는 전혀 달랐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은 ‘결의서’에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하루 전에 동아일보가 보도한 외신 기사를 사실이라고 단정한 국내 여러 단체들은 발칵 뒤집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신탁통치 반대(반탁)’에 가장 먼저 앞장선 정치세력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김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조선일보는 12월 2일자 1면 머리에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 우리는 여하한 국가임을 물론하고 우리를 신탁통치 하에 둔다는 사실에는 절대로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합국이 우리를 해방한 데 대하여는 거듭 감사의 뜻을 표하나 이와 같은 조처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신탁보다 차라리 우리에게는 사(死)를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이번만은 한사코 이것을 막고 가령 섭정의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손으로 해결할 것이며 또 국제평화 유지 관계로 보더라도 동양에 있어 조선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곧 동양의 평화를 위하는 것이요 세계의 평화를 위하는 소이가 될 것을 단언하고 아울러 주장하는 바이다.


임시정부의 성급한 ‘신탁통치 결사반대’ 운동

임시정부 요인들은 12월 27일자 외신 기사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28일 밤 경교장(김구의 거처 겸 집무실)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을 선언하는 강력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5천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치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탁치세력을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이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

임시정부의 성명이 나오자마자 조선일보는 12월 29일자 1면 머리에 성명서처럼 보이는 기사를 올렸다.

오직 독립이 있을 뿐 / 모욕적 신탁통치 절대 반대
절대(絶大)한 기대를 가졌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는 결국 우리 조선에 대하여 5개년 부(附) 4국 신탁제라는 청천벽력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보도를 전하여 왔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3천만 민족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아닐 수 없으며 우리들의 분격이 이에 넘칠 바 또 있으랴. 세계 어느 민족 어느 국가보다도 빛나는 4천년의 역사를 가졌고 가장 우수한 단일민족에 대한 대우가 겨우 이것이랴. 40년 동안 악독한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바친 무한한 피의 대가가 이것이냐! 허울 좋은 해방 이것은 필경 우리를 번롱(翻弄)한 결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 굴욕적 결정책에 대하여 3천만이 한결같이 최후의 피 한 방울이 다 할 때까지라도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굳게 굳게 맹서하자.

같은 면에 실린 사설(「죽임이냐 독립이냐」)도 앞의 기사에 못지않게 강경했다.

  (…) 오호라 하늘을 우러러 통곡할지요 땅을 치고 발버둥칠지로다. 경술년 8월 29일이 다 시 오지 않았는가.
  오호라 3천만 동포여 우리가 다시 무슨 소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늘도 무심하다 할까. 이 백성의 명수(命數)가 기구하다 할까. 이제 우리 또 다시 남의 종이 되고 우마(牛馬)에 지나지 않는 신세가 되었으니 살아 있은들 산 것이 아니요 살아 있어도 아무 의미가 없지 아니한가!
  오호라 이 나라가 또 한 번 망한다는 말인가. 이 백성이 또 한 번 노예가 된단 말인가. 아 이것이 몽환(夢幻)인가 현실인가. 아니라, 울음도 쓸데없고 탄식도 쓸데없다. 3천만이 하나로 싸우자!
  “독립을 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다고.” 이 한 마디의 표어로써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세력에 반항하여 싸우자. 피를 흘리자. 아! 3천만 형제의 최후 일전의 시기는 바로 이때다. 일어나라! 나아가자! 독립전쟁의 길로!

조선일보 12월 29일자 2면은 격문(檄文)으로 뒤덮였다. 지면 한가운데는 “죽음으로 신탁통치에 항거하자”라는 구호가 크게 실려 있었다. 한 면을 가득 채운 격문의 제목들은 아래와 같다.

· 「전쟁 없이 독립 없다 / 일어나서 자유의 날까지 싸우자」
· 「한임시정부가 / 정부로서 지도하라」
· 「3천만이 하나로 / 정당은 해체하라」
· 「국기 걸고 싸우자 / 독립 만세 부르자」
· 「경술국치의 되풀이 찾자 조국의 강토」
· 「공동식민지화 방지에 궐기」

‘반탁 신중론’ 주장한 송진우 암살2월 29일 밤 각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대표 200여명이 경교장에서 회의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좌와 우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뜻이 같았다. 그날 회의에선 신탁통치 반대엔 이견이 없었지만 반대의 방법론에 있어선 미군정을 임시정부가 접수하자는 임시정부파와 미군정은 부정하지 말고 국민대회를 열어 반대여론을 미국에 알리자는 한민당파가 대립했다.

열띤 논쟁 끝에 임시정부가 주권을 행사해서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한편 상인들도 모두 나와 반탁운동을 벌이게 하자는 의견이 대체로 자리잡아갈 무렵 송진우가 냉정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그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송진우는 이튿날인 12월 30일 새벽에 암살당했다. 조선일보는 12월 31일자 2면에 그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민주당 수석부총무 고하 송진우 씨는 30일 시내 원서정 자택에서 저격을 받아 오전 6시 15분 별세하였는데 향년 56세이다. 측근자의 말을 들어보면 오전 5시쯤 하여 어떤 청년 4, 5명이 자택 뒷담을 넘어 침입하여 6시경 한 명이 송 씨 침실로 들어가 6시 15분경 깊이 잠든 송 씨에게 권총으로 10여발을 발사하고 어디로 사라졌는데 같이 자던 친척노인 한 분도 발에 총상을 받고 송 씨는 머리와 오른편 가슴 등 여섯 군데에 탄환을 맞아 유언도 할 사이 없이 가족 동료 의사의 간호를 받으면서 절명하였다.
경찰은 나중에 한현우(당시 34세), 유근배(당시 21세) 등 6명을 범인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의 배후를 둘러싸고 한민당 쪽에서는 좌익세력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그리고 임시정부와 갈등을 빚던 쪽에서는 김구를 지목했으나 재판에서도 배후는 명확히 가려지지 않았다.
12월 30일 임시정부는 내무부장 신익희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포고 제1호 및 제2호’를 발표했다. “미군정청 산하의 모든 한인 직원들은 임정의 지휘를 받을 것” “모든 국민은 임정의 지휘 아래 반탁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 그 포고는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의 38선 이남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포고문이 나가자 서울시내 경찰서장 7명이 임시정부가 들어 있는 경교장을 방문해 충성 선언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쿠데타 기도’는 미군정청장 존 하지가 김구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다시 나를 거역하면 죽이겠다”고 말한 뒤 차츰 기세를 잃고 말았다.


1946년 새해 사설 ‘자손을 위하여’

반탁운동으로 나라 안이 들끓던 1945년 말이 지나고 새해가 왔다. 그러나 모든 정치세력과 시민단체들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도 설날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반탁의 거센 구호만 들릴 뿐이었다, 조선일보 새해 사설(「자손을 위하여」)에 그런 현상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새해라 하나 우리에게는 새해가 없고 설이라 하나 우리에게는 설 인사가 없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나라가 없으니 새해가 새해일 수 없고 백성이 도탄에 들었으니 설의 기쁨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어찌 할까. 우리는 영원히 새해도 없고 설도 없는 불쌍한 민족으로 지내야 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팔자라 할까 명수라 할까 오늘날 이 슬픔 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의 장래 우리의 자손을 위하여 우리는 무슨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요 어떠한 대비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 우리는 자손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옳을까. 첫째, 지나간 날의 잘못을 사과하고 우리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고치자. (…)
둘째, 우리에게는 나라가 없다. 자손을 위하여 집 한 칸을 염려함은 사람 사람의 상정이니 우리도 세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이라 하면 먼저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셋째, 나라를 찾자 하면 ‘내 일은 내 힘으로’ 하여야 하고 ‘내 일을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실행하여야 된다.
넷째, 이러한 의미로 우리는 ‘신탁통치’를 죽음으로써 저항하여 막아내지 아니하면 안 된다.
다섯째, “조선 사람은 조선 혼으로 살자.” 어떠한 주의든지 어떠한 사상이든지 조선 혼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조선 것이 못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적자 하면 적을 말이 뒤틀리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 다섯 가지만 실행하자.
거듭 말하노니 설날 인사 대신에 자손을 위하여 다음의 다섯 가지를 맹서코 실행하자.
가) 형제 싸움을 하지 말자.
나) 먼저 나라를 찾자.
다) 내 일은 내 힘으로 하자.
라) 신탁통치를 반대하자.
마) 조선 사람은 조선 혼으로 살자.

이 사설은 겨레의 단합과 나라 찾기, 자주정신, 반탁, 민족혼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것이 당시의 사회적 요구임은 분명하지만 사설이 외치는 구호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추상적이다. 미군정의 통치를 받는 엄연한 현실에서, 그리고 미·영·소·중의 연합국이 분단된 조선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나라를 찾아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 방법론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나 독립투쟁의 차원에서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임시정부조차도 미군정의 위압적 태도와 식민지를 점령한 듯 오만한 행태에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나라를 찾아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를 건설할 것인지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통해서만 방향이 정해질 것이다. 1946년 설날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의 대립과 갈등은 통일이 아니라 분단의 길을 더욱 굳혔을 뿐이다.


방응모의 연두소감 ‘통일 일로(一路)’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1946년 1월 4일자 신문 1면에 ‘연두소감’을 실었다. 제목은 「통일 일로」이다.

8월 이래 정정(政情)이 혼미한 와중에 서서 나는 오로지 일의전심(一意專心) 민의 반영과 여론 지도라는 신문인 본래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건국대업에 이바지할 것을 감히 기하고 그동안 미력이나마 전력을 다해온 바이지만 탁치(託治) 운운을 전기(轉機)로 한 정계 작금의 동향에는 진실로 용이치 않은 것이 있음을 통찰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사람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조선을 아끼며 귀여워하며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탁치 운운의 보도를 계기로 한 작금 양 3일의 대중의 애국심의 비등(沸騰)이야말로 그것이 무구(無垢)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이니만치 ‘조선은 아직은 살었댔구나’ ‘이것만 있으면 조선은 반드시 살아난다’라는 느낌을 한층 더 새롭게 하고 있어 머리가 수그러짐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대중의 애국심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계는 과연 어떠한가. 통일은 고사하고 의연히 중상과 비방과 책임 전가만을 일삼고 있음은 어찌 된 일일까. 유감이나마 각자가 좀 더 넓은 아량과 호양(互讓)의 정신을 가질 줄 모르고 자기의 고집만 내세우는 탓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정계 제공(諸公)의 애국심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자는 결단코 아니다. 반대로 그네들의 대부분은 내가 일찍부터 존경하여 마지않던 높은 절개와 굳은 지조를 가진 애국자들이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시기에 있어서는 단순한 애국심 그것만으로써는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사태를 수습하려면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도량 있는 애국심, 아집 없는 애국심이 필요할 줄 안다.
솔직히 나 개인의 경우를 말한다면 나는 나 개인으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거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임시정부는 기미 이래의 면면(綿綿)한 역사를 가진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해서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나처럼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
(…) 나는 이제 당분간 완전 자주독립국가가 설 때까지 나 개인의 고집인 ‘임정 지지’를 보류하고 오로지 통일국가 건설에 매진할 생각이다. 3천만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같이 그들의 ‘임정 지지’ ‘인공 지지’를 보류할 수만 있으면 약체이든 말든 간에 통일국가라는 것만은 설 수가 있을 것이다. (…)
책임 전가나 자기 변명은 분열에는 도움이 되어도 통일에는 유해무익이다. 대중이 바라는 바는 오직 민족통일 이것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시시비비는 건국된 후에 가리자. (…) 나는 이제 동인(同人) 일동의 선두에 서서 협심육력(協心戮力)으로 ‘통일 제일’을 유일무이의 구호로 삼아 통일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일로 돌진할 것을 맹서하는 동시에 오직 우국(憂國)일념에서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여 널리 대방(大方)의 비판에 걸고자 하는 바이다.

<계초 방응모>(이동욱 지음, 방일영 문화재단 발행, 1996)는 이 ‘연두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글의 전문(全文)은 계초의 정치사상과 시국관 등을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 글로 우국충정이 묻어나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해방된 지 채 1년이 안 된 시점에서 분단을 예견하고 우려를 표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힘과 동시에 자신과 입장이 다른 세력에 대한 배려를 강조해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글을 통해 시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계초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429쪽)

방응모는 조선일보 사장이자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이 글을 썼다. 따라서 이 ‘연두사’의 내용은 그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일보사의 공식적 입장을 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에는 그 뜻을 깊이 새겨보아야 할 대목이 몇 군데 있다. “통일은 고사하고 의연히 중상과 비방과 책임 전가만을 일삼고 있는” 정계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방응모 자신은 임시정부를 지지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임정을 지지하라고 강요할 생각이 없다든지, 시시비비는 건국 뒤에 가리고 ‘통일 제일’을 유일무이의 구호로 삼아 통일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자는 주장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방응모가 이 글에서 드러내는 중대한 문제점은 자신을 ‘진정한 애국자’ 또는 ‘통일지상주의자’로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8·15 해방 이래 오로지 “민의 반영과 여론 지도라는 신문인 본래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건국대업에 이바지”하려고 전력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친일 행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은 이렇게 반문하지 않았을까? ‘대일본제국의 신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조선일보 사장이, 그리고 나라 안팎에서 독립투쟁을 하는 이들을 토비(土匪)나 불순분자라고 몰아붙이던 신문의 사장이 세우려는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극한으로 치달은 ‘반탁’과 ‘친탁’의 대결

1945년 연말을 뜨겁게 달구고 1946년으로 넘어온 신탁통치 반대 운동은 1월 초 좌익 진영이 갑작스럽게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그 시발점은 1월 4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가 발표한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는 성명서였다.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은 여운형이 이끌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6일 전국국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창설한 단체로 ‘정부’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 우익을 대표하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1천여 명은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을 타도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한 뒤 9월 8일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성수, 송진우, 서상일, 김준연, 장택상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1945년 12월 1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관한 ‘추측보도’가 나온 뒤 좌익과 우익은 며칠 동안 ‘신탁통치 반대’에 한 목소리를 냈으나 1월 4일자 ‘인공’의 성명서를 계기로 찬탁과 반탁으로 날카롭게 맞서게 되었다. 1월 5일자 조선일보 1면에 보도된 인공의 성명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삼상회의의 조선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긴급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신중 토의한 결과 최후적 결정을 내리고 1일 정식으로 4개국에 대하여 결정서의 전문(電文)을 보내었는데 4일 그 해석과 태도를 전 인민에게 선명(宣明)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서를 발표하였다. 조선의 해방이 우리 민족의 분열로 인하여 자력으로써 그 길이 열리지 못하고 연합국의 원조 밑에서 국제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진행되기 때문에 완전 독립의 기대에 있어서 수다한 국제적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금반 모스크바 회담이 조선민족해방에 대하여 가지는 의의를 지극히 크게 평가하며 그 규정과 이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첫째로 그것은 카이로, 포츠담 양 회담의 구체화라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조선의 독립은 이 회의에서 약속되었으나 그것은 시기도 방법도 결정되지 않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었으며 그 후의 국제문제 해결과 조선민족의 노력에 의하여 금반 모스크바 회의에서 건립의 시기와 방법이 처음으로 구체적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적당한 시기’가 ‘최고 5년’으로 되었고 ‘적당한 순서’가 ‘신탁제도를 거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소위 ‘배신행위’나 ‘사기’도 아니요 하등의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
둘째로 공동위원회는 그 존재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하고 조선의 자유독립국가 건설을 원조 촉진하는 데 사명이 있는 한 완전히 독보적 의의를 갖는다. 또 신탁제도 역시 그 내용이 조선 독립을 달성하는 순서, 과도적 방법인 한 충분히 진보적 역할을 노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 전진이다. 그것은 을사조약이나 위임통치와는 전연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신탁과도 아주 판이할 것이다.
셋째로 금반 신탁제도는 그 책임이 3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자신 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역적 필연이라고 본다. (…)
이러한 견지에서 중앙인민위원회는 친일 반민족 반역자, 데마고그,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정보 부족으로 인하여 전일에 범한 오류 반신탁의 태도를 솔직히 극복하고서 신탁반대위원회를 해산하고 세계 민주주의의 원칙에 합치되는 강력한 민족전선에 총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에 의한 모든 국제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천하에 명시한다.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가 발표한 이 성명서가 반탁에서 친탁으로 돌아서는 이유에 대한 해석에는 찬반 이론이 있겠지만, “친일 반민족 반역자, 데마고그, 파시스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더욱 더 강렬하게 전개”하겠다는 선언은 임시정부와 함께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한민당을 크게 자극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일에 범한 오류 반신탁의 태도’라는 표현은 우익세력의 반탁운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노골적 비판임이 분명하다.


공산당 대표 박헌영 ‘타도’에 나선 우익

1월 15일(미국시각) <미국의 소리> 샌프란시스코방송은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특파원 리차드 존스턴에게 “자신은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장래에 조선이 소연방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조선을 소련 속국으로-샌프란시스코방송이 전하는 박헌영 씨 희망」이라는 표제를 달아 크게 보도했다. 한민당은 1월 15일 간부회의를 소집해 박헌영의 발언은 “조선의 독립을 말살하고 소련의 노예화를 감수하는 매국적 행위”라고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박헌영을 타도하라”는 전단을 유포시켰다.

1월 17일자 조선일보는 「박헌영 씨는 사실을 부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 하단에 2단으로 실었다.

지난 15일 오전 7시 5분 샌프란시스코방송은 “뉴욕타임스지가 보도하기를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 씨는 지난 1월 8일 내외기자단과의 회견석상에서 조선은 소련의 1국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몇 십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 연방으로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하니 과연 조선인의 의사는 어떠한가”라는 내용을 전하여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자못 컸다.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 씨는 16일 이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뉴욕타임스 기자 존스턴 씨와 나와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이 있었다.
문-조선의 소비에트화 혹은 사회주의 건설 여하?
답-오늘날 조선의 발전단계에 있어 사회주의 건설 혹은 소비에트화란 전연 문제되지 않는다.
문-조선의 소련 1국 신탁제는 여하?
답-연합국의 결정이 있기 전에는 말할 필요가 없다.
문-조선이 소비에트화하면 소련에 편입되는가?
답-소비에트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나 가령 된다 해도 소비에트조선은 언제든지 독립국으로 나간다.

이상과 같은 말의 교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스턴 씨는 내가 소련의 1국 신탁을 반대치 않는다느니 혹은 조선이 몇 십년 후에는 소련에 편입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무근한 테마(언어 관계로 오해인지 그렇지 않으면 왜곡인지)가 미국으로 타전(打電)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1월 12일 나는 존스턴 씨를 방문하고 이 사정을 설명하고 언어 관계로 기인됨이라고 전후 사정을 밝혔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사회주의 건설이니 소련 즉시 편입이니 하는 문제를 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우리는 민주주의 건설만이 조선 독립의 유일한 길임을 다시 강조하여 둔다.

1월 25일 소련은 타스통신을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고, 소련은 조선의 신속한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청장 하지는 1월 27일 미 국무부로부터 모스크바 협상에 대한 소련 측 설명이 정확하다는 메시지를 받고서도 조선의 정치계나 언론에 전달하지 않고 있다가 2월 18일 공보국 명의의 발표를 통해 뉴욕타임스 특파원 존스턴을 비호하려고 했다.

38도선 이남의 조선사회가 반탁과 친탁의 살벌한 대결 때문에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던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참여 속에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회의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의 자격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논란을 벌이는 한편 임시정부 수립에 앞서 38도선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바람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5월 21일에 시작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협의에 참여시킬 조선의 정당과 사회단체에 관한 의견이 엇갈리고, 남북 각각의 입법기관을 설치하자는 미국의 제안에 대해 소련이 ‘남북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라며 거부하자 10월 21일 결렬되었다. 4개 연합국을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되어 조선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최장 5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방안은 거기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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