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권위주의 시절 기성 언론이 숨죽일 때 정당의 당보는 훌륭한 언론역할을 했다. 필자가 보관하고 있는 신민당 당보 <신민주전선> 1986년 4월 23일자 <호외/특보>에는 ‘개헌 태풍…전국강타!’라는 메인 제목으로 ‘서울·부산·광주·대구·대전에 이어 충북 청주도’ ‘백만 인파…그 함성…총선민의 재확인’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사진 제공 = 원희복

그리고 3월 30일 개헌추진 전남도지부 광주 결성대회가 열린 광주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 1가를 꽉 메운 30만 인파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다. 개헌추진 1천만 서명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개헌작업은 이런 국민적 열망에도 1년 반이 지난 1987년 10월 29일에야 이뤄졌다. 현재 헌법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가 32년 전 <신민주전선> 호외를 소개한 것은 바로 최근 개헌운동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결정판이라고 했던 개헌작업은 사실상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우리 자유언론실천재단이 공식 헌법개정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이사진과 적잖은 회원이 ‘헌법개정과 정치개혁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지난 4월 11일 발표한 이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회단체가 957개, 개인적으로 서명한 각계인사 351명은 대부분 지난 촛불혁명을 주도한 단체와 인사들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에서 타 올랐던 소위 1700만 촛불은 개헌열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불과 1년 만에 촛불의 열정은 왜 싸늘하게 식었을까. 박근혜 탄핵성공이 촛불혁명의 명(明)이라면 개헌 실패는 촛불혁명의 암(暗)이다. 개헌실패는 촛불의 앞날을 판단하는데 중요하다. 

사진 출처 = 경실련 홈페이지

앞서 <신민주전선> 보도대로 32년 전 개헌추진 서명에 광주에서만 30만 명이 몰렸다. 그러나 대단히 창피한 얘기지만 이번 대통령 개헌안 마련 지역 공청회는 채 100명이 모이지 않은 곳이 태반이었다. 물론 국회가 공청회를 열어 개헌안을 마련하지 않은, 정치권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근본 원인이다. 그렇지만 무작정 개헌을 밀어붙인 청와대도 책임이 크다.
이를 맹목적으로 뒤따라간 1000개 시민사회단체도 처절한 문제의식이 없었고, 추동세력은 아마추어였다. 다들 제왕적 대통령제라니까 그러려니 생각했다. 결국 4년 중임제라는 ‘기형아’가 태어났다. 대통령 권한이 제왕적이라는데 오히려 연임을 가능케 한다? 단임제에도 정보기관이 동원됐는데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연임을 위해 무슨 짓을 못할까.

대통령선거는 미국처럼 1등이 승자독식 하면서 국회의원 선거는 비례원칙을 따르는 다당제를 채택하자는 것도 정치개론에도 맞지 않았다. 미국식 승자독식 대통령제는 양당제로, 연정이 가능한 내각제는 다당제로 가는 것이 자연스런 정치과정이다. 언론도 이런 정치의 기초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뒤늦게 개헌안에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했다)

개헌세력은 무엇보다 기성 정치권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개헌을 위한 1차 조건이 국회 3분의 2찬성이다. 그런데 116석 제1야당은 개헌 불가’를 공언했다. 물론 이는 제1야당의 약속위반이고 정략이지만, 그것은 예상된 정치 행보였다. 나중에는 제3당, 제4당, 심지어 진보정당조차 개헌에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오히려 개헌불가가 국회 과반을 넘었다.

개헌과 비례민주주의를 추진했던 시민사회 세력의 아마추어적 모습은 지방의회 기초의원 선거구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현재 지방의회 기초의원 선거구는 2명을 뽑는 중선거구가 대부분이다. 비례민주주의 확대를 위해선 4명을 뽑는 대선거구로 바꾸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비례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다당제는 이렇게 풀뿌리부터 정착돼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에 안주한 여당은 개선은커녕 기존 3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바꿔 오히려 개악해 버렸다. 비례민주주의를 추진했던 시민사회단체는 완전히 여당에 뒤통수를 맞았다. 제3당, 제4당, 진보정당마저 개헌에 반대하는 빌미를 준 것이다. 이런 정부 여당의 이중적 태도에 진보언론은 분명히 질타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개헌작업에서 드러난 많은 문제는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분위기로 묻혀 버렸다. 개헌 논의는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개헌 논의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어설픈 개헌 논의에 촛불주역들이 동원된 것이 아닌지 영 씁쓸하다. 이 과정에서 진보언론은 어설픈 들러리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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