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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람들’의 친일 기록(5)조선일보 대해부 : 부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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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2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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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원(金炯元, 1900~?)-“기생 경호원 둔 ‘조선의 휘트먼’”

(…) 1919년 여름 매일신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같은 해 시 「이향(離鄕)」을 발표한 것을 비롯해 여러 편의 시를 잡지 <개벽>과 <별건곤> 등에 실었다. 1923년 5월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이 해에 문학단체 파스큘라(PASKYULA)의 결성에 참여했다. 1924년 5월 동아일보 개혁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뒤 퇴사했다. 이후 조선일보로 옮겨 사회부장과 지방부장을 지냈다. 1925년 1월 잡지 <생장>의 창간을 주도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일보 사설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1926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금고형을 살았다. 1926년부터 중외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다 1928년에 편집부 차장을, 1930년에는 편집부장을 지냈다. 1933년 조선일보 편집국차장을 지낸 뒤 1934년부터 1937년 11월까지 편집국장을 지냈다.

1938년 4월 매일신보가 주식회사로 재편할 때 편집국장을 맡았다. 193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군·관·민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 개전 2주년을 기념하여 매일신보사가 각 방면의 권위자를 초빙하여 “일반 민중의 시국에 대한 인식을 더욱 강화하고 새롭게 하기” 위한 ‘성전 2주년 좌담회’를 개최할 때 매일신보사 측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이 좌담회는 1939년 7월 6일부터 12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위대한 황군 전과(戰果)--지나 판도의 삼분일(三分一)을 점령」, 「비록 일매지(一枚紙)라도 절용(節用)하는 것이 필요—현대전쟁은 물자전쟁」, 「현하 조선 청년의 활동무대는 중국—지원병들은 믿음직하다」, 「지원병훈련소는 지방에도 증설 예정—내선일체를 구체화하는 데는 상호원조가 극히 필요」 등과 같은 부제로 매일신보에 실렸다. 같은 해 7월 배영동지회 평의원을 맡았고, 12월 조선문인협회를 발기할 때 참여했다. 1940년 2월 매일신보를 퇴사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결성식에 참석하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복간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아 1946년 1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서울신문 전무와 대동신문 부사장을 역임했다.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6월까지 공보처 차장을 지냈다. 1950년 7월 6·25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함상훈(咸尙勳, 1903~1977)-‘최후의 편집국장’

(…) 1928년 3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일하다가 5월 퇴사했다. 1929년 5월 동아일보사에 재입사하여 논설반 기자로 활동했다. 1933년 9월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사로 옮겨 정치부장을, 1934년 5월 정치부장 겸 편집국차장을 맡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주필 서춘이 조선총독부의 의향대로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게재할 것을 지시하자 함상훈은 서춘을 “이완용보다 더한 자”라고 비난하면서 지시 이행을 거부했다. 1937년 11월 조선일보의 보도방침을 놓고 대립하던 주필 서춘과 편집국장 김형원이 동반사퇴하자 1938년 1월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맡았다. 조선일보 지면을 책임지는 위치에 올랐지만 1937년 7월 이래 주필 서춘과 사장 방응모의 주도로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방향으로 바뀐 조선일보의 논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후부터 친일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다수의 일제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다.

1937년 7월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 차원에서 적극적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무이사로 선출되었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면서 편집국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조광>의 주요 필진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한 글을 쓰는 한편으로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잡지인 <반도의 빛>에 시국해설 기사를 맡아 연재했다. 1941년 8월 “물질·노무 공출의 철저, 국민생활의 최저표준으로 인하, 전시봉공(戰時縫工)의 의용화”를 표방하면서 민간의 전쟁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가 결성될 때 ‘노무공출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 주제는 ‘물자 및 노무 공출의 철저한 강화책’이란 임전대책협의회의 첫 번째 의제였다. 이 강연에서 정부의 물자배급에 불균등한 점이 있더라도 불만을 토로할 것이 아니라 정부의 일에 이해와 동정으로 언제든지 자숙할 것을 당부했다. 또 체면과 유행을 따르는 폐풍을 버림으로써 물자절약에 앞장서며 이러한 실행방법을 협의할 민간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민간조직을 통해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고 여론을 일으켜 당국의 좋은 협력자가 되면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전쟁협력의 실천과 선전을 목적으로 1원짜리 채권판매 활동에 나설 때 채권가두유격대 동대문대에 소속되었다. 같은 달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를 통합한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경성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에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6월 “내선일체의 이상을 구현하고 대동아건설에 몸을 바침, 언론의 총력을 결집하고 사상전에 감투함” 등의 강령을 내걸고 황국신민화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조선언론보국회 참여를 맡았다.

언론인으로서 시사문제를 다룬 글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홍보했다. <반도의 빛> 1942년 2월호에 기고한 시국해설 「‘대동아전쟁」에서는“대동아전쟁은 동아공영권의 확립에 있는 동시에 세계 신질서 건설에 중대한 역할”을 할 것이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했다. <신시대> 1942년 3월호에 기고한 「동아공영권과 민족정책」이란 글에서는 1941년 12월 8일 미국에 선전포고한 이래 “황군은 육(陸)으로, 해(海)로, 공중으로 대전과를 거두어 서남태평양 일대는 황군의 위압 하에 있다”면서 개전 후의 전과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런 뒤에 ‘제국’의 점령이 침략전쟁이 아님을 주지시키기 위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의 시정연설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 설명에 따르면 “동경 180도에서 동경 90도에 이르는 지역이 제국의 지도권 내에 들면 각각 민족적 문화 정도, 군사적 관계를 참작하여 독립, 자치 또는 직할민지”로 되어 “제국을 맹주로 한 일대 블록이 형성되고 동아의 공존공영권이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블록(공영권)은 “미국을 주체로 한 남아메리카,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구주와 아프리카의 블록보다 못하지 않다”면서 조선인을 비롯한 일본 국민의 활동범위가 매우 확대되고, 따라서 그 책임이 중대해짐을 강조했다. 이 밖에도 <조광> 1940년 10월호의 「성숙하는 신정치체제」, 1941년 1월호의 「태평양의 위기-영미의 대일 전투력」, 1942년 11월호의 「산업전사에 부치는 말」 등과 같은 전황(戰況)을 분석하는 글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총후보국을 강조했다. 또 <조광> 1943년 1월호에 기고한 「조선 학령아동의 의무교육 실시」라는 글을 통해 의무교육은 국민의 지력, 체력, 도덕을 향상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며 의무교육 실시의 정당성과 의의를 강조했다.

해방 후,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 공보부장, 한국민주당 선전부장·조사부장, 대한문필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신용욱(愼鏞頊, 창씨명 眞原勝平, 1901~1961)-‘언론사 최초의 비행사’

“신용욱은 1935년 1월 1일 조선일보가 언론사 최초로 전용 비행기를 구입하자 조종사로 특채됐다.”(<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 323쪽)
(…) 1923년 일본의 오구리(小栗)비행학교와 1925년 3월 도아(東亞)비행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33년 미국 ‘힐라’헬리콥터학교 조종과를 졸업했다. 1925년 말 3등 비행 면허를, 1927년 6월 2등 비행면허를, 1932년 5월 1등 비행 면허를, 1934년 2월 2등 항공사 면허를 받았다. 1927년 12월 모국방문 비행대회를 마친 뒤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28년 6월 민간과 조선총독부 인사를 망라하여 조선비행학교 창립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설립위원장 박영효 외 15명의 설립위원이 선출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철도국장 오무라(大村卓一)가 교섭위원을 맡았다. 1929년 5월 조선비행학교가 개교하자 교장을 맡아 항공기술자와 비행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일본에서 4인승 쌍엽기를 들여와 경성 상공을 일주하거나 경성·인천 간을 왕복하는 유료 유람비행 사업을 개시했다.

1935년 9월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북선(北鮮)·베이징·난징을 순회하는 동아친선 방문비행회를 개최했다. 비행회의 목적은 조선총독부의 치적 선전이었다. 1936년 9월의 북선 방공연습과 1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린 남조선 방공연습에 ‘신용욱기’를 몰고 참가했다. 같은 해 9월 신(愼)항공사업사를 설립하여 항공수송사업을 개시했다. 경성·이리 간 주 2회 정규항로를 개설하였고, 곧이어 광주까지 연장 운행했다. 사업이 확대되자 필요한 비행기를 일본군에서 불하받아 충당하였으며, 1940년까지 10대의 군용기를 불하받았다. 1939년에는 미국에서 DC-3기를 도입하여 중국 하이난섬에 부정기적으로 취항시켰다. 중일전쟁으로 중국 남방에 가는 군인과 상인이 많아 정기운항 이상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국책적 견지’에서 유망한 사업인 어군탐견비행(魚群探見飛行)을 동해안 등지에서 시행했다. 한편 1936년 9월에는 장제스(蔣介石) 정권을 지원하는 영국을 타도하자는 관제 배영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의 이사를 맡았다.

1940년 3월 왕자오밍(汪兆銘)이 일본군 점령 하의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자 ‘동아친선비행’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에서 난징까지 비행하여 신정부 수립을 축하하고, 조선총독 미나미와 조선군사령관 나카무라(中村孝太郞)의 메시지를 왕자오밍 등에게 전달했다. 그해 11월 열린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5월 신항공사업사를 조선항공사업사로 개칭한 후 민간항공수송사업을 개시했다. (…)

1942년 1월 경성일보사 항공부 고문을 맡았다. 1942년 5월 5일 조선항공사업사에서 글라이더 제작 완성을 계기로 경성비행장에서 진공식(進空式)을 거행한 후 조선국방방공단 본부에 글라이더 1대를 헌납했다. 같은 달 8일에는 남방지역에 파견되어 있는 일본군을 위해 히노마루부채 1000개 대금 280원을 매일신보사에 기탁했다. 1942년 6월 조선항공사업사가 군수공장으로 지정되면서 부산에 항공기 부품·조립 공장을 설립했다. 이 해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대되면서 조선항공사업사의 비행기와 인원을 징발·징용하는 일본군에 협력했으며, 징용자·군대 수송, 연락·초계(哨戒) 비행 등을 통해 전쟁에 협력했다. 1943년 9월 항공일을 기념해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항공과 반도의 사명’ 좌담회에 참석해 “조선인은 황민정신이 부족하니 황민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라며 황민화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44년 10월 자신의 사업체를 모체로 자본금 1000만 원을 투자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상무이사는 사쿠라이(櫻井忠武: 해군중장), 카야마(香山蕃), 다테노(舘野一夫: 전 조선식산은행상업금융부장), 이사는 고바야시(小林宗之助: 해군중장), 고원훈, 카시이(香推源太郞), 감사는 야마자와(山澤和三郞: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 방응모였다. (…) 신용욱은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창립에 즈음해 매일신보 1944년 9월 23일자에 “전국(戰局)의 전황은 공수방관(空手傍觀)의 시기가 아니고 맹연(猛然) 제 장애를 돌파 극복하여 증산진(增産陣)에 돌진할 때다”라며 비행기 증산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어 10월 17·22·28일자 담화에서도 비행기를 많이 만들어야 미국을 물리칠 수 있다며 증산에 박차를 가할 것을 결의했다. 이 해 12월 군수회사법 시행에 따라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는 군수회사로 지정되어 군용 비행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1945년 2월 경상남도 진해에서 고위직 군·관계 인사를 비롯한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에서 제작한 해군기 1·2호에 대한 성대한 진공식이 열렸다.

해방 후, 여의도비행장에 있던 일본군 비행기의 알루미늄과 쇳조각을 팔아 폭리를 취한 혐의로 검찰의 취조를 받았다. (…) 1948년 10월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 1961년 8월 말 행방불명된 뒤 26일 여의도공항 주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회사의 경영난을 비관한 자살로 알려졌다.

김동진(金東進, 창씨명 金本東進, 1902~?)-‘베를린올림픽 때 사상 첫 국제전화 취재’

(…) 1924년 1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1933년 5월까지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1935년을 전후하여 조선일보 도쿄지국장을 지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선만척식회사의 참사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매일신보 총무국장을 맡았고 곧이어 상무이사를 겸했다. 1941년 1월부터 1945년 1월까지 매일신보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41년 8월 ‘자발적 황민화운동의 실천방책’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에 참가하고, 이어 9월에 임전대책협력회가 주관한 채권가두유격대 광화문대에 편성되어 활동했다. 같은 달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에 평의원을 맡았다.
1943년 이후 매일신보 전무이사로 활동했다. 1945년 2월 ‘황도공민(皇道公民)의 연성’과 ‘결전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심의원과 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6월 ‘사상전(思想戰)에의 정신(挺身)과 감투’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언론보국회 참여(參與)를 맡았다. 조선언론보국회는 ‘언론총진격대강연회’ ‘본토결전부민대회’ ‘국민의용대 대강연회’ 등의 행사를 개최했다. 1945년 6월 ‘대의(大義)’를 앞세우며 전쟁협력을 강령으로 삼은 대의당의 발기인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선만척식주식회사에 재임하던 1938년 3월 <재만조선인통신>에 「지나사변에 나타난 조선 동포의 애국운동」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1937년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군인 지원과 원호, 국방헌금 납부 등 조선인의 전쟁협력 사례를 국내외를 통틀어 열거하고, 이러한 행위를 ‘조선동포의 자각’이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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