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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폐간 뒤 방응모의 친일 행각(2)조선일보 대해부 19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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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2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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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은 동양의 원구자(怨仇者)’

방응모는 <조광 >1942년 2월호에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 아래 「타도 동양의 원구자」라는 글을 실었다. 원구자는 원수라는 뜻이다.

나는 그동안 마침 시골 농촌에 갔다가 이번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것을 3일 늦게야 알게 되어 매우 유감으로 생각했다. 이미 선전포고가 내렸고 그 서전(緖戰)에 있어 그들이 항상 자랑하던 미국 태평양함대가 황군의 기습작전 일격 아래에 박멸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그 순간 나는 실로 한없이 감격하는 동시에 통쾌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새삼스러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미국과 영국, 이 두 나라는 바로 동양의 원구자요 동양 전체의 죄인이다. 한 민족을 멸망케 하고 한 국가를 쇠퇴케 하는 아편을 밀수입한 것도 영인(英人)이요 이것을 금지한다고 군함을 몰고 와서 청국을 위협하고 전쟁까지 일으킨 것도 영국이었다. 이 유명한 아편전쟁의 결과 지나 즉 당시의 청나라는 소위 남경조약에 굴욕적 조인을 당하여 상해 광동 외에 3개 항을 개방하게 되고 홍콩도 그때에 할양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계기로 해서 이른바 불탈불압(不奪不壓)주의로 전 동아에 자기들의 이권 상권 모든 야욕을 마음대로 확대시키어 마침내는 전 동아의 대부분을 거의 식민지화시키고 말았다.
이보다 좀 뒤떨어져 미국이 또한 동아의 침략자로 등장했다. 미국은 서양에 대해서는 몬로주의를 표방하면서 동아에 대해서만은 지나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문호 개방, 기회균등주의를 고집하여 광대한 상품시장을 획득 보존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동양을 침략하고 유린하고 또 임의로 착취하여 동양인을 멸시 천대해 왔다.
그들의 소위 박애주의 그들의 소위 인도주의는 오직 가면에 불과한 것이요 침략을 위한 위선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리하여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고 교묘하게 동아를 침략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동양인의 원한은 가위 충천하였다 할 것이므로 이제 이 이상 더 은인(隱忍) 또 방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서 동아를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는 원한의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

방응모가 이 글의 앞부분에서 “미국 태평양함대가 황군의 기습작전 일격 아래에 박멸되었다”고 한 것은 진주만 공격을 가리킨다. 1941년 12월 7일(미국 시각) 아침 일본 해군의 전투기들이 미국 하와이의 오하우섬에 있는 태평양함대 본부와 그곳을 지키는 공군과 해병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함선 12척을 침몰시키거나 파손하고, 188대의 비행기를 격추하거나 파괴했다. 미국 측에서는 군인 2403명이 사상을 당했고 6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일본군 사망자는 64명에 불과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태평양함대 전력에 결정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일본은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방응모는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박멸’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한없이 감격하는 동시에 통쾌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도발은 1945년 8월의 패망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방응모 같은 친일파의 ‘거두’는 그것이 ‘대동아 신질서’의 결정적 계기라고 보았던 것이다.


‘미영 격멸로 성전 완수에 매진’

진주만 공격 1주년을 맞아 <조광> 1942년 12월호에는 「12월 8일과 우리의 각오」라는 글이 실렸다.

작년 12월 8일 미영 격멸의 대조(大詔)를 봉배(奉拜)한지 1년, 1억 국민은 황군의 혁혁한 전과에 감격하여 일로 성전 완수에 매진하게 되었다. (…)
(…) 그러나 전쟁에 이르러는 국민은 황군에 충분히 신뢰하고 총후 국민은 오직 자기의 직역(職域)에서 기업자나 노무자나 또는 그 업무가 농업이거나 공업이거나를 불문하고 모든 노력을 전승(戰勝)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농부가 식량공출을 더 많이 하고 소비를 절약하면 이것도 봉공(奉公)이요 한 광부가 광석을 더 많이 운반하는 것도 봉공이다. (…)
반도는 불원에 징병제가 실시되어 장병들은 모두 영예의 군문으로 가겠지만 다수한 총후의 인(人)은 생산전에서 제일선과 똑같은 전쟁을 하여야 한다. 혹 민간에서는 일부 지도자의 과도한 간섭으로 국민으로서의 대접이 부족하다는 불평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국가에  대한 봉공의 열의에서 나온 것이니 양해하여야 할 것일 뿐 아니라 가사 백보를 양(讓)하여 그를 개인의 수양 부족에서 생긴다 할지라도 국민의 생산전에 봉공은 국가의 전승을 위한 것이요, 결코 그 지휘하는 기인(幾人)을 위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여 이때야말로 참으로 지성보국(至誠報國)의 추(秋)인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이 글은 모든 국민이 일제의 전승을 위해 ‘봉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의 청년들을 ‘황군’의 총알받이로 나가게 하는 징병제도 봉공을 위한 것이고 생산을 위한 전쟁도 ‘공(公)을 받드는’ 애국이라는 뜻이다.


‘해군지원병제는 반도 동포의 광영’

<조광> 1943년 6월호에 나온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 청년의 영예」 역시 ‘성지(聖智)’에 감격하고 있다.

5월 11일 각의(閣議)에서 조선에도 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그 예비훈련을 소화 18년 중에 개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명년의 징병제를 앞두고 또 다시 해군지원병제의 실시를 보게 된 것은 반도 동포의 광영으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에 감격하여 오직 봉답(奉答)에 지성을 다할 바이다. (…)
적 미영은 19세기를 대서양의 시대라고 하고 20세기를 태평양의 시대라 하여 아세아인 10억이 생존을 위하여 활약할 아세아의 전정(前庭)에 놓인 태평양을 감히 아세아 정복의 무대로 삼으려 하여 금차의 대동아 성전을 도발한 것이다.
이러한 세기적 아세아 10억의 대(對)미영전쟁이 진행하는 한가운데 태평양을 중심으로 치열한 결전이 계속되는 중에 반도에 해군지원병제가 실시된 것은 그 의의가 중대한 바이다. (…) 이제 반도인도 황국 해군의 일원으로 동아 10억인을 대표하여 태평양의 수호자가 된다는 것은 저대(著大)한 감격에 잠기는 바이다. 이 공포(公布)를 보자 반도의 청소년이 다투어 혈서 지원을 함도 격정의 소치로 당연하다 할 것이나 그보다도 책임의 중대함에 숙연히 자계(自戒)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
생(生)을 이 결전적 시기에 타고나서 동아인의 천년 운명을 결정하는 태평양전에 나선다는 것은 남아의 본회(本懷)라 할 것이다.

징병제가 실시되어 조선의 청년들이 강제로 전쟁에 끌려가게 되자 온 나라 안의 기차역에서는 ‘출정’하는 젊은이들에게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어깨띠를 걸어주며 눈물을 쏟는 부모형제들의 모습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그러나 일제에 부역하거나 친일하는 자들의 자식들은 어떤 수단으로든지 징병을 피하던 것이 당시의 ‘습속’이었다.


‘중일전쟁과 강요당한 친일 지면’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 8월까지의 조선일보가 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데 대해 <조선일보 역사 단숨에 읽기 1920~>(조선일보사 시사편찬실 엮음, 2004)은 ‘불가피함’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군국주의 파쇼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37년 7월 중국을 침략해 베이징(北京)을 점령하고 12월에는 난징(南京)을 점령, ‘난징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소위 황민화 운동을 벌여 온갖 모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강요하며 조선인의 혼을 빼앗으려 했다. 고등보통학교 과정에서 조선어 과정은 사라지고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되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명목 하에 ‘신사 참배’와 ‘창씨 개명’이 강요됐다.
조선어 신문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 종래 ‘일본군’이라 표기해오던 것을 ‘황군’ 또는 ‘아군’으로, ‘일본’을 ‘내지(內地)’로 쓸 것을 요구하는 등 글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통제를 가했다. 수시로 신문사 간부들을 총독부로 불러 ‘언론보국(言論報國)’이라는 이름 하에 어용 여론을 강요했다. (…)
이런 상황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에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신년호에 일왕의 사진이 실리는 것은 모든 신문의 정형이 되었다. 3개 조선어 신문인 민간지 조선·동아일보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사설 제목과 머리기사가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1938년 3월 10일과 11일자의 「육군기념일」 사설, 4월 16일자 「총후 보국의 강조」, 5월 21일자 「주  함락」 등 세 신문의 사설 제목과 머리기사가 모두 똑같았다. 총독부가 사실상 신문을 편집했기 때문이다(72~74쪽)

이 글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변명 또는 해명’이다.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어 신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져서 ‘신문사 간부들을 총독부로 불러 어용 언론을 강요’한 것이 신문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조선일보뿐 아니라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의 사설 제목과 머리기사가 비슷한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상 총독부가 신문을 편집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현실이 그렇다면 왜 굳이 일제에 비굴하게 굴종하면서 신문을 만들어야 했을까? 독자들과 사원들의 생계를 위해서? 여기까지는 조금이라도 양해할 수 있다고 치자. 1945년 11월에 복간된 이래 왜 조선일보는 그런 사실을 지면을 통해 솔직히 밝히고 불가피성에 대해 양해를 구하지 않았는가? 왜 오늘 이 순간까지도 “항일 민족언론을 대표한다”고 자랑하고 있는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해방 이후 아무런 응징을 받지 않고 복간되어 지금까지 막강한 ‘언론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숙정’이 주는 교훈

1944년 8월 26일 파리가 나치 독일군의 점령에서 해방된 뒤 샤를 드골이 이끌게 된 ‘자유 프랑스’에서는 ‘나치협력자 숙정’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부문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었다. 1945년 말부터 신문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어 노르망디의 지방신문 <주르날 드 루앙>의 공동대표 중 한 명이 종신강제노동형, 다른 한 명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신문사 재산까지 몰수하라고 판결했다.

(…) 파리지방법원은 94건의 나치협력 언론사(출판사 포함) 사건을 다루었다. 이 중 (…) 70건이 본 재판부에 직접 기소됐으며 여기에는 독일 찬양언론으로 유명한 <내가 도처에 있다>, <르 마텡>, <프티 파리지엥>, <파리 스와르> 등 일간신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언론사들은 재판 결과 모두 해체되었고, 지방지 <르 프티 니소아지>는 르전 사장이 사형선고 후 총살당했는데, 신문사도 역시 해체 판결을 받았다. (…)
1948년 말 모두 538개 언론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이 중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모두 폐쇄됐다. 나머지 64개 사가 전 재산 몰수, 51개 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다. 30개 언론사만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나머지 393개 사는 나치협력의 불순언론으로 분류됐으며 이 중 35개 사는 재판을 대기하는 상태였다. 무죄를 선고받은 언론사는 복간했으나 재산몰수형을 선고 받은 언론사들은 복간을 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242~243쪽).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왜 프랑스처럼 과감하고 단호하게 ‘친일·반민족 언론’을 단죄하지 못했을까? 아니 왜 안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총서의 다음 편에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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