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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의 눈물[내 인생의 취재기] “1987년 6월, 난 사건기자였다”
〈조병래 전 동아일보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8.02.2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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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나간 뒤에 되짚어봐야 소용없다고 한다. 최근 영화 ‘1987’을 보면서 언뜻 든 생각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필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필자가 엄청 좋아하는 장준환 감독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용없을 것을 감수하고 역사를 되짚어보려 한다,

필자도 그 영화 속 역사적 사실의 당사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윤상삼 선배(필자의 개인 기록이기에 개인적 호칭을 쓴다)는 여러 해 동안 현장에서 같이 뛰어다녔고, 박종철의 부검을 결정한 최환 부장검사는 그후 검찰 출입 때 자주 만났다. 영화 초반에 잠깐 언급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도 범인인 문귀동이 기나긴 재정 신청 후에 기소됐을 때 그 사건을 수사 지휘한 김수장 부장검사와 공소유지 변호사인 조영황 변호사를 자주 만나 취재했었다.

김수장 부장검사는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정구종 선배와는 동향으로 막역한 사이였다(필자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관련 팩트는 듣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그 당시 박종철 사건을 집중 보도했던 〈동아일보〉의 사건기자 팀원이었고, 그 다음해에는 검찰청을 출입하면서 그 사건의 후일담을 취재했다. 기억이란 왜곡되기 쉽고, 오래 되면 그것도 희미해진다. 아래 글은 기록이 아니라 오로지 기억에 의존했기 때문에 실제와 약간 다를 수도 있다.


1986 알아야 1987 이해할 수 있어

필자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79년 10월 ‘부마항쟁’ 직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으나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사살되고 12월 7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석방돼 학교에 복귀했다. 졸업 후 1983년 12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1986년은 특기할 만한 해였다. 필자가 취재한 사건은 아니었으나(당시 필자는 부평 대우자동차 파업 등 노사 현장을 주로 취재했다) 그해 6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있었고, 10월 초에는 이른바 ‘상지대 사태가 있었다. 당시 상지대 안에서 발견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제작 살포됐고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상지대 재단이 교내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일부 교직원을 동원해 조작한 공작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10월 말에는 학생운동사의 최대 사건이라고 불리는 ‘건국대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정부는 이들 사건을 용공으로 몰아가면서 ‘사태’라 불렀다. 필자는 사흘 밤낮을 현장에서 지내며 이 사건을 취재했다. 당시 날씨는 몹시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흘 내내 최루탄이 땅에서도 날고 하늘에서도 떨어졌다. 1980년 5월의 봄 시위 때보다도 더 심했다(필자는 1980년 5월 시위대와 함께 서울역까지 진출하는 동안 신림4거리와 아현동 고가 밑에서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았다).

워낙 추워 사복 경찰들이 교정의 벤치 나무를 뜯어 피운 모닥불을 함께 쪼이며 교정에서 밤을 지새웠다. 전두환 정권은 헬기까지 동원해 진압작전에 나서 사흘 만에 농성을 해제하고 1,200명이 넘는 학생을 구속했다. 필자는 이 사건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크게 흔들었다고 본다.

상지대 사건과 건국대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정권은 대학생에 대한 대대적인 공안 단속에 나섰다. 이 와중에 박종철 사건이 터졌다. 박종철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이 같은 공안 정국 조성 움직임이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이해한다. 영화에서는 기자들의 활약이 중심이 됐지만 영화와는 다른 측면에서 언론의 문제도 있었다.


영화 속 언론과 현실 속 언론

언론은 앞서 언급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정부가 발표한 그대로 “극렬 운동권의 자작극”이라는 식으로 베껴쓰기에 급급했다. 언론은 자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인용구 표시의 따옴표 제목 뒤로 숨었다. 진실은 달랐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표면화되자 검찰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섰다(이 사건에 대한 필자의 서술은 1988년 조영황 변호사와 김수장 부장검사의 말에 의존한다).

조 변호사와 김 부장검사의 말에 따르면 수사 초기에 부천경찰서의 모든 경찰이, 성고문을 저지른 날 문귀동은 야유회를 가서 경찰서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그 진술이 거짓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검찰의 수사 의지가 없이는 찾아낼 수 없는 증거였다. 경찰서 인근 다방에 검찰 수사관을 풀어 커피 배달 전표를 뒤지게 했다.

다방에서 사건 당일 문귀동이 커피를 주문한 전표를 찾아냈다. 검찰은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결론지었다. 그러나 경찰은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검찰의 결론을 무시하고 불기소를 관철했다(당시 언론은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필자도 당시에 거의 모든 공안 사건의 처리는 여기서 결정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언론은 정권의 발표대로 보도했다. 진실을 향한 접근을 하지 못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언론, 검찰 모두에게 양면적인 문제를 던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사건이 영화에서는 박종철 사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온다. 필자 의견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동아일보〉의 다른 사건도 있었다. 그 전 해인 1985년 8월 중공기(당시는 중국을 중공이라 불렀다) 귀순 사건의 처리를 보도한 이채주 편집국장과 이상하 정치부장, 김충식 기자가 안기부(현재 국정원)에 연행돼 기사 소스를 추궁당하며 고문을 당했다. 김충식 선배는 폭행당하던 중 귀의 고막이 터지기도 했다(김 선배는 후일 필자에게 “미국 대사관 행사에 갔더니 한 미국 외교관이 ‘터진 고막이 나았느냐’고 물어 깜짝 놀랐다. 얘기한 적이 없는 사실을 미국 대사관이 알고 있었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 사건으로 성명서를 냈다. 그뿐이었다.


박종철이 살려준 김문기?

앞서 쓴 것처럼 1986년 일련의 사건을 보면 군사독재 정권의 임계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였다. 1987년 1월초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전두환 대통령 면담 보고를 요청했다. 면담 일정도 잡혔다. 안건은 상지대 사건이었다.

상지대 사건의 그 유명한 유인물인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는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 재단 비리 척결을 주장하며 농성 중인 학생들이 만든 게 아니라, 경찰을 학내에 끌어들여 학생을 연행케 하려는 상지대 김문기 이사장의 자작극이었다. 김문기는 인척인 서무과장을 시켜 유인물을 만들어 밤중에 교정에 뿌리게 했다. 강원도 경찰국은 수사를 통해 김문기의 소행임을 밝혀냈다. 유인물을 조사한 결과 서무실에 있던 복사기에서 인쇄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당시 여당인 민정당 청년 분과 위원장이며 전국구 국회위원 예비 승계 1순위인 김문기를 기소하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고 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면담을 기다리던 중 박종철 사건으로 해임되고 상지대 사건은 보고되지 않았다. 김문기는 자리를 보존하다가 정권이 두 번 바뀐 후에야 다른 일로 이사장에서 해임됐다. 상지대 사건 당시 치안본부 출입기자 중 일부는 이 사건의 수사 결과를 알고 있었으나 기사로 쓰지 않았다.


그날 나는 내근 당직이었다

1987년 1월로 돌아가자. 〈중앙일보〉 신성호 선배가 박종철이 숨진 다음 날인 1월 15일 단신으로 대학생 사망 사건을 보도했다. 곧이어 〈동아일보〉 윤상삼 선배에게도 후속 취재 지시가 있었다. 윤 선배는 어렵게 중앙대 용산병원 오연상 의사를 만나 고문치사임을 방증하는 검안 내용을 들었다. 그날 밤 최환 부장의 지시로 한양대 병원에서 박종철의 부검이 있었다(최환 부장검사가 당시 화장을 허가하지 않고 부검을 지시한 사실은 10여 년이 지난 뒤에 밝혀졌다).

영화와는 달리, 부검 결과는 안상수 검사가 16일 새벽 1시쯤 부검 직후 황적준 부검의를 대동하고 한양대 병원에서 직접 브리핑했다. 조간신문 기자들은 부검 결과를 회사에 보고했다. 조간신문에는 부검 결과가 보도되지 않았다. 당시 정권에서 보기에 문제(?)는 〈동아일보〉에서 발생했다.

필자는 그날 내근 당번이었다. 아침 편집회의가 끝나자 정구종 사회부장이 송석형 차장에게 부검 결과 기사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부연 설명이 없이 조용한 말투였다. 송 차장은 장병수 시경캡에게, 시경캡은 황열헌 기자에게 지시해서 부검 결과를 송고 받았다(당시는 외근 기자가 전화로 기사를 불러주면 내근기자가 받아 적었다).

윤상삼 선배의 취재 기사와 합쳐 사회면 사이드 기사로 게재했다. 제목은 사이드지만 기사 분량은 10단, 즉 통단이었다(당시는 세로쓰기로 지면은 기사가 10단, 광고가 5단이었다). 이 기사는 지금도 〈동아일보〉가 일제 시대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과 함께 가장 자랑하는 기사로 남아 있다.


신문 용지 공급 중단 협박

박종철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정권은 이 사건을 2단 이상으로는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신문사로서는 군사정권의 폭력도 무서웠지만 당시 신문 용지 공급 중단 협박이 더 무서웠다. 신문 용지의 공급 권한을 사실상 정부가 쥐고 있었다. 신문 용지를 공급받지 못하면 당장 그날 신문을 발행할 수 없었다.

군사정권은 물리적, 폭력적 언론 통제 수단을 모두 갖고 있었다. 영화에는 보도지침을 칠판에 써놓는 설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전화로 전달되어 편집 간부만이 알고 있었다. 〈동아일보〉가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고문치사를 시사하는 기사를 내보낸 그날 편집회의 경위는 듣지 못했다. 보도 후 정권의 직접적인 보복은 없었다(정권의 위세가 한풀 꺾인 것인가, 아니면 검찰 권력과 언론의 반발인가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의 사정은 영화에 나온 것과 유사하다. 박종철의 시신을 화장하고 아버지가 유골을 임진강에 뿌릴 때 황열헌 기자가 취재했다. “아비는 할 말이 없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며칠 뒤 고문 경찰 2명을 구속하고 검찰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현장 검증할 때 검찰 출입기자 2명만이 취재할 수 있었다. 취재기자는 기자실에 있던 화투로 뽑았다. 〈동아일보〉 황호택 선배도 운이 좋게 패를 잘 잡아 취재할 수 있었다. 현장 검증 때 사진은 허가되지 않았다(취재도 허가받는 시대였다).

황호택 선배는 취재 후 현장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고 편집국장은 고문 상황을 삽화로 그려서 게재하도록 했다. 점심 때 신문이 배달된 후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당장 삽화를 빼라고. 2판부터 삽화를 뺐다. 후에 들은 애기인데 청와대는 다른 조간들에게도 전화해서 고문 장면이 들어가는 삽화를 일체 게재하지 못하게 보도 지침을 보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날 조간 중에서 정부가 대주주인 〈서울신문〉에만 유사한 삽화가 나왔다. 청와대가 〈서울신문〉에는 당연히 알아서 게재하지 않으리라 여기고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들렸다.


엔딩 자막과 함께 쏟아진 눈물

5월18일 고문 경찰의 축소 은폐 사실이 폭로되고 6월 10일 국민항쟁이 본격화되면서 거의 매일 최루탄을 마시면서 서울과 부산을 취재하고 다녔다.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됐다.

그렇게 1987년이 저물어갔다. 연말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정권은 다시 민정당이 잡았다. 노태우가 당선된 것이다. 판매부수 1위였던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영화 ‘1987’의 엔딩 자막이 올라가면서 문승현이 만든 노래 ‘그날이 오면’이 흘러나오자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지금은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된 50명이 넘는 그 젊은이들의 꿈은 어디로 갔던가. 대부분이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스러져갔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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