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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미디어 10] 찬반토론의 탄생〈이용재 시나리오 작가ㆍ재단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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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2.1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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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 (Best of Enemies, 2015)
[연출] 로버트 고든, 모건 네빌
[작가] 톰 그레이브스, 로버트 고든, 모건 네빌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방송판은 CBS와 NBC의 양강 구도였고, abc는 만년 3등이었다. 상위 2개사가 월터 크롱카이트(CBS), 데이비드 브린클리(NBC) 같은 스타 앵커를 내세워 공화, 민주 양당의 전당대회를 통째로 생중계(full coverage)하는 물량 공세 앞에서 abc가 꾀를 냈다.

돈이 많이 드는 현장 생중계 대신, 입심 좋은 패널을 초대해 각각 공화당과 민주당 입장에서 토론을 하게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다. 양당의 전당 대회 기간에 맞춰 기획된 10부 짜리 찬반토론이었다.

공화당 편에 설 보수파 선수는 당시 43세의 윌리엄 버클리. 석유재벌 집안에 예일 대학 출신의 인물로 1955년, 29세의 나이에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를 창간, 미국 보수주의 이념을 설파해온 ‘보수주의의 사도바울’이었다.

민주당을 대변할 진보파 선수는 42세의 고어 비달. 이미 1950년대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던 그는 “성 경험이 1000회가 넘는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소설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25권의 책을 출간한 그는 영화 〈벤허〉의 각본을 공동집필했던 극작가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둘이 생방송으로 벌인 찬반토론을 다룬 다큐멘터리. 당대의 두 논객은 보조 패널, 방청객도 없이 10회의 토론 동안 어느 한쪽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 호각의 설전을 벌였다. 제목(Best of Enemies)처럼 둘은 호적수였다.

그러나 토론은 회를 거듭하면서 정책과 대선 후보를 평가하자는 취지에서 벗어나 점점 산으로 가고, 논쟁이 논점을 벗어날수록 시청률이 높아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이윽고 토론의 막바지. 흥분한 비달이 버클리를 나치당원이라 비난하자, 버클리는 비달을 호모라고 칭하며 “면상을 갈겨 곤죽으로 만들겠다”고 핏대를 올린다. 생방송이었기에 이 장면은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다.

버클리가 비달을 지칭한 단어는 ‘퀴어’였다. 지금은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중립적인 말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경멸적인 호칭이었고 그래서 지금도 나이가 많은 성소수자들은 이 단어를 매우 싫어한다.

결국 그해 abc는 대선 관련 방송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이후 NBC와 CBS는 전당대회를 실시간으로 전하는 풀 커버리지 방송을 폐지했고, 방송가에서는 (개싸움이나 다름없는) 찬반토론이 단골 포맷이 된다.

찬반토론은 매체가 저널리즘을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짐짓 중립인 척 찬성과 반대를 맞붙이는 이 방식은 중립성은 물론 진실을 왜곡하기 일쑤다. 예컨대 진화론(혹은 창조론)을 찬반토론에 부친다면 인류의 과학문명이 쌓아온 빛나는 성과는 졸지에 일부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빗나간 신념과 같은 급의 대접을 받게 된다. 또 왼손잡이는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동성애라는 이슈를 아무렇지도 않게 찬반토론에 부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어떤 이슈든 찬반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전선을 확인하고 자기편을 확보하는 데만 몰두한다. 이 작품은 다음의 내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같은 언어로 논쟁하는 능력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관심사에 따라 양분되고, 양편은 서로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생각을 나누지 않으면 같은 곳에 산다고 할 수 없다.”


그밖에

* 둘의 갈등은 방송 이후 잡지로 옮겨갔고 결국 소송으로 비화됐다. 버클리는 줄곧 비달을 국가를 타락시키는 악마라고 비난했고, 비달은 버클리가 죽었을 때 ‘지옥에서 안식을 찾으라’고 저주했다.
** TV드라마 〈웨스트 윙〉, 〈뉴스 룸〉의 각본을 쓴 아론 소킨은 이 작품이 나오자마자 판권을 사서 극영화로 개발 중이다.

평점 : IMDB(7.6/10), 로튼 토마토(94/100), 왓챠(3.8/5)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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