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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된 ‘동아’와 비대해진 ‘조선’의 친일 경쟁조선일보 대해부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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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1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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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27일 무기정간을 당한 동아일보가 1937년 6월 2일 복간되기까지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갖은 노력을 다했다.


동아일보의 굴욕적 복간과 일제에 대한 충성 맹세

사장 송진우는 조속한 정간 해제 요청을 위해 미나미(南次郞) 총독 및 조선총독부 고관을  지낸 일본인들의 모임인 ‘조선중앙협회’의 줄을 찾아 동경에까지 손을 쓰는 과정에서 “사(社)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일 기자의 독단으로 (일장기 말소를) 저질렀다는 것이 조사에 의해 분명해진 일 가지고 정간을 장기간 끌고 가는 총독부 처사에는 명분이 없다”고 학무국장을 지낸 세키야(關屋貞三郞), 정무총감을 지낸 미즈노(水野疎太郞) 등에게 호소하였다. 어디까지나 이 사건은 회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저질러진 몰지각한 행위라는 것이 그 당시 사장, 사주 등 경영진의 논리였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223쪽).

그런 과정을 거쳐 복간된 동아일보는 6월 2일자 신문에 낸 「속간사고(續刊社告)」에 이렇게 썼다.

본보에서 일장기 마크 말소사건을 야기하여 당국의 기휘(忌諱)에 촉(觸)하게 된 것은 실로 공축불감(恐縮不堪)하는 바이다.
이제 당국으로부터 발행정지 해제의 관대한 처분을 받아 금후부터 일층 근신하여 경(更)히  여사(如斯)한 불상사를 야기치 않도록 주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통치의 익찬(翼贊)을 기하려 하오니 독자 제위께서는 특히 조량 (照亮)하시와 배전 애호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속간사고」는 일장기 말소사건이 총독부의 분노를 일으킨 데 대해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사죄하면서 동아일보가 앞으로는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를 적극 돕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1920년 4월 1일 창간된 이래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을 부정하면서 ‘자치론’을 주장하는 등 친일적 논조를 펴면서도 ‘민족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던 동아일보가 복간이라는 일제의 은사(恩賜)에 감지덕지 하면서 노골적으로 ‘대일본제국’에 충성하기로 서약한 셈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유언비어’로 얼버무린 ‘동아’와 ‘조선’

동아일보가 복간된 지 한 달 남짓 지난 1937년 7월 7일 중국 베이징 교외의 소도시인 노구교(蘆溝橋)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보병 1연대 예하의 한 중대가 야간 전투훈련을 하던 중 몇 발의 총성이 울린 뒤 일본군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됐다. 그는 20분쯤 뒤에 중대로 돌아왔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의 사격을 받았다” “중국군이 일본 병사를 납치해갔다”고 주장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국 본토에 대한 본격적 침략을 앞두고 정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초조해진 일본이 전단을 마련하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국제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이튿날인 7월 8일 베이징 서쪽의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연대 주력이 출동해서 중국군을 공격해 철수시키고 노구교를 점령했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7월 28일 일본군이 북경과천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자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중일전쟁(일본은 ‘지나사변’이라고 부름)의 시작이었다. 우세한 전투력을 지닌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해서 12월 말 남경을 점령하고 30만여 명의 중국인을 무참히 살육했다. 그것이 유명한 ‘남경 대학살’이다. 중일전쟁은 1941년에 일본이 일으킨 하와이 진주만 폭격 사건 때문에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7월 7일에 일어난 노구교 사건은 9일에야 국내언론에 보도되었다. 7월 12일 경무국 도서과는 서울의 신문사 대표와 지국장 50여 명을 불러 ‘지나사변’에 대한 언론기관의 협력을 요청했다. 13일에는 총독 미나미가 재선(在鮮) 언론계 대표들을 초치한 뒤 「금 시국에 제하여 신문 통신 관계자에 망(望)함」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나 총독부의 보도자료만을 충실히 전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7월 16일에야 그 사건에 관한 사설을 실었다. 동아일보는 「비상시국과 우리의 자중(自重)」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유언비어와 경거망동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때는 바야흐로 비상시인지라 이런 시국이면 시국일수록 우리의 행동이 자중스럽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항간에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기 쉽거늘 이에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감정에 맡기며 이성이 이른 바의 궤도에서 그 행동이 벗어나는 일이 있기나 한다면 우리가 뜻하지 아니하였던 결과를 초래하고서도 수습할 길이 없을 터이니 어찌 경솔하다는 혐(嫌)을 벗을 수 있으리오. (…)
또한 우리는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자중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 우리의 기억에서는 아직도 저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사라지지 않고 있나니 그 얼마나 경거망동이었던가. 그러므로 우리들은 왕사(往事)로 하여금 장래의 귀감을 삼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을 형제자매에게 힘있게 권고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안전하다. 재류(在留)형제도 평안하다. 우리는 일치하여 이성에서 살아야 할 것이니 이리하여서만 비로소 우리는 유언비어를 물리치고 감정의 격동을 억제하고서 냉정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의 대금도(大襟度)는 발양될지니 형제자매여 자중하라.

동아일보의 이 사설이 “유언비어를 물리치고 자중하라”고 경고한 것은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다”는 국제 언론의 보도와 국내에 전해진 노구교 사건의 진상을 곧이듣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일보도 같은 날짜 신문에 「유언비어에 대하여」라는 사설을 실었다.

비상시에 처하여 가장 무서운 것이 유언비하다. 그 일(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대개 막대한 바가 있다. 이런 의미로 보아 최근 북지(北支) 사건이 재악화하자 당국이 빨리 그 취체(取締)를 엄히 할 방침을 취한 것은 부득이한 처치라 할 것이다. 유언비어란 무엇이냐 하면 민심을 공포 또는 격앙시킬 종류의 전연 무실(無實)의 또는 사실이 약간 있은 말이라도 침소봉대의 과장적 전언(傳言)의 유포를 지칭하는 것이다. 민중은 무실의 공포에 망동(妄動)을 개시하며, 과장으로 인한 격앙에 폭동을 감행하여 적게는 그 개인의 일신일가(一身一家)를 망치며, 크게는 사회 국가의 안녕 질서를 파괴문란하기에 이르는 수도 있나니, 이 얼마나 큰 해독이며, 얼마나 심한 죄악이냐? (…)
물론 체질이 원래 연약한 사람은 육체적 전염병에 걸리기 쉽듯이 무식하고 우매한 사람은 유언비어에 전염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콜레라, 페스트는 원래 악성이기 때문에 건장한 사람으로도 걸리는 율이 많듯이 초비상시에 있어서의 유언비어는 총명 유익한 사람으로도 전염되기가 쉽다는 일점(一點)도 특히 일반의 주의를 요할 점이다.

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당국(총독부)이 북지 사건이 재악화하자 그 취체를 엄히 할 방침을 취한 것은 부득이하다고 지지하면서 ‘유언비어론’을 독자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무지몽매한 사람은 물론이고 총명한 사람도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노구교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일본군의 중국 침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해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무조건 유언비어만을 사회적 해악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같은 날 ‘유언비어’를 주제로 사설을 내보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총독부의 ‘보도지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중국 침략을 ‘신나게’ 중계한 조선일보

7월 19일자 조선일보에는 ‘아군’ ‘황군(皇軍)’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동아일보도 ‘호외(號外)’에서 ‘아방(我方)’ ‘아군’ 등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7월 30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는 일본군의 무차별 중국 공격을 대서특필하는 기사가 실렸다. 「천진시 완전 암흑사가화(暗黑死街化)!」라는 시커먼 컷 아래 「지나군 4개 근거지를 완전히 폭파 완료 / 천진시의 참혹한 광경」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기사는 일본군의 공세를 ‘신명나게’ 전달했다.

[천진 29일 발 동맹 지급보] 아(我)공군은 시정부, 시재정국, 진포, 북령 양 철로국에 대하여 오후 3시 완전히 폭격을 마쳤는데 천진시 북부 일대는 흑연(黑煙)에 덮여서 이것이 하운(夏雲)에 반영되어 처참한 광경을 정(呈)하였다.
[천진 29일 발 동맹] 목하 천진시 상공에는 아공군의 정예 00대가 폭음을 진동하며 지나군 진지에 향하여 장렬한 공폭을 감행하였다.

이 기사 바로 위, 1면 머리에 실린 사설(「전시체제에 들어서의 각오」)는 ‘비상시국’의 실상  을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해 달라는 총독 미나미의 요구를 충실히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하  고 있다.

지난 11일부터 북지사변이 중대화하자 미나미 총독은 언론계 대표자, 경제계 대표자 또는 중추원 고문 참의를 각별히 초집(招集)하고 그 석상에서, 또는 임시 지사회의를 소집하고 비상시국에 대처할 3대 원칙을 게시(揭示)하여 시국의 중대성을 주지 철저케 하였다. 1)반도주민에 대하여 시국의 중요성을 주지 철저케 할 것. 2)동아의 안정세력으로서 아세아 전국(全局)의 안위를 쌍견에 짊어진 일본제국의 지도적 지위를 내선일체(內鮮一體)인 반도의 민중으로 하여금 화인케 할 것. 3)지나의 전모를 바르게 일반에게 이해시킬 것의 세 가지가 미나미 총독의 시국대응의 3대 원칙이다. 이래 2주간여를 두고 북지사변이 각일각으로 거익(去益) 악화의 일로를 취하여 돌진하고 있음을 본 미나미 총독은 지난 27일 오후 8시 왜성 대 관저에 긴급 국장회의를 열고 시국은 바야흐로 종래의 준전(準戰)체제로부터 전시체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고조(高調)하여 시국 대응에 대한 관민 쌍방의 주의를 환기했다. (…)
생각건대 비상시의 비상시인 것을 아는 일방, 그 비상의 정도가 얼마나 하다는 것을 민중에게 알리는 것은 가장 필요한 일의 하나다. 왜냐하면 한갓 물이 깊은 줄만 알고 수심이 얼마나 되는 것까지를 알지 못한다면 대처방법에 오산이 생기기 쉬운 까닭이다. 이런 견지로 보아서 미나미 총독이 시국은 벌써 종래의 준전체제를 떠나서 본격적 전시체제로 옮아왔다는 것을 절규하여 이것으로써 관민 쌍방의 주의를 환기한 것은 시의적절한 조치라고 할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당국의 시국 인식의 철저에 관한 대책이 지금까지는 개론적, 감상적 추상적인 점이 불무(不無)하다는 일점(一點)이다. 따라서 좀 더 상세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이유를 구(具)하여 민지(民知)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는 일점을 우리는 부언한다.

8월 2일자 조선일보는 「총후(銃後)의 임무 / 조선군사후원연맹의 목적」이라는 사설로 ‘총후(전선의 후방)’에서 ‘황군의 사기를 고무’하는 데 열성을 다하자고 주장했다.

북지사변이 중대화하기 시작하자 조선 역시 제국신민으로서의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자 시국대책을 강구 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그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다. 조선군사후원연맹은 1)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며 2)출정장병으로 하여금 후고(後顧)의 우려가 없이 제일선의 임무를 다 하게 하여 총후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하는 자로 조선 전도(全道)를 통괄하여 조선군사후원연맹이 있고 그 아래 각 도는 각 도별로 도군사후원연맹이 있고 도 아래는 다시 부(府) 군(郡) 도(島)별로 각 부 군 도 군사후원연맹이 있어 가지고 상하가 긴밀한 연락과 통제 밑에서 목적을 달성하기를 기하도록 조직된 것이다.
군사후원연맹의 목적은 이미 그 규약 중의 목적에 관한 문구를 보고 알 바와 같이 총후의 임무를 다하자는 데 있다. 그런데 총후의 임무는 2대별 할 수 있다. ‘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여’는 정신적인 것에 속한 것이요, ‘출정장병으로 하여금 후고의 우려가 없이’는 물질적에 속한 것이다. 황국의 위무(威武) 선양과 동양평화를 쌍견에 걸머지고 제1선에 선 출병장병으로 하여금 안심과 용기를 가지고 신명을 도(堵)하여 제일선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데는 총후에 선 일반국민의 정신 물질 양 방면에 긍하여서의 후원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것을 출정장병 측으로 본다면 이 후원의 유무가 사기의 증감에 하등 영향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정의 기미는 일반국민으로 하여금 총후의 성의를 다할 수밖에 없이 만드는 것이요, 국민 측이 이것을 다하면 제일선의 사기는 진작되는 것이다. (…) 요는 국민 각 개인은 각각 힘자라는 데까지를 목표로 하고 응분의 성의를 다하는 데 있을 것이다. 있는 이는 있는 이로서 기만원을 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요, 출정장병을 향하여 위로와 고무 격려의 편지 한 장을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일 것이다.

8월 12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은 ‘대일본제국을 위한 국방헌금’을 모은다는 「‘사고」를 일제히 실었다. “북지사변 발발 이래 민간의 국방헌금과 군대위문금은 날로 답지하는 형편인데 본사에서는 일반 유지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접수 전달하려 하오니 강호 유지는 많이 분발하심을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고는 그 뒤 신문의 고정란으로 자리를 잡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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