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전’ 보도에 실종된 진실

홍준표 대표나 트럼프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고 치자. 이런 가정은 현실적이다. 언론이 영향력 있는 뉴스메이커의 발언을 보도하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거짓이든 아니든 그런 발언을 한 것 자체는 기자들이 좋아하는 ‘팩트’니까.(정말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하지만 유력 정치인들의 발언이 사실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것, 명백한 거짓이거나 거짓의 개연성이 높은 발언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발언을 액면가대로 보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사회적 쟁점, 특히 정치적 쟁점에 대한 기사의 경우 언론이 손쉽게 처리하는 방식은 ‘공방전’ 기사 쓰기다. 진실을 말하든, 개소리를 하든 싸우는 양쪽의 발언을 동질로 취급하고, 동량(同量)으로 다루면서 공방 중계로 끝낸다. 공방전 속에 감춰진 진실 또는 거짓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된다. 오히려 개소리를 재미있고 자극적으로 하는 자들이 지면과 화면에서 대접받는다. 정치는 진흙탕이 되고 희화화된다. 클릭으로 돈 버는 시기에 더욱 기승이다.

NYT의 ‘트럼프의 거짓말’ [스튜어트 톰슨 트위터 캡처](한국일보. 2017.06.26 보도)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트럼프는 취임 후 10개월 동안 거짓말을 103회 했고, 오바마는 재임 8년 동안 18번 한 것으로 나타났다.(문재인과 홍준표의 거짓말을 비교하면 어떻게 나올까?) <허핑턴 포스트>는 트럼프와 힐러리의 1차 TV 토론에서 트럼프는 거짓말을 16회 했으며, 힐러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힐러리는 거짓은 없지만 과장은 몇 차례 있었다고 한다.

‘색깔론’ 공세 아닌 거짓일 뿐

홍준표와 자유한국당 그리고 바른정당 등 구여권 인사들이 입만 뻥긋하면 쏟아내는 거짓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이 거짓말을 그냥 옮겨 적는 데 그칠 뿐 그것이 거짓이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예컨대 이런 것. “현 정권은 주사파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기득권 좌파세력을 위한 것”(홍준표), “문재인 정권의 개헌은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악랄한 의도”(장제원), “주사파·전대협이 청와대를 장악했다.”(전희경),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다.”(고영주) 등등.

수구 언론들은 저런 발언을 짐짓 심각하게 다루기도 하고, 이에 비판적인 언론은 ‘색깔론’이라며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기사들은 일단 옮겨 적는다. 그러고는 ‘논란이다’, ‘논란이 예상된다’는 식으로 문장을 마무리한다. 전형적인 공방전 기사다. 거짓말도 수없이 반복해서 들으면 진실이 된다. 괴벨스의 유명한 거짓말 철학이다. 괴벨스류의 인간들이 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옮겨 쓰는 일은 사실 보도가 아니라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공정에 일조하는 것이다.

위에 예시한 것과 유사한 수많은 거짓을 그저 ‘색깔론’ 공세라고 치부하고 넘어가지 말자.  어쩌면 정말 필요한 것은 말 뜻 그대로의 색깔론일 수 있다. 각 정당은 정책과 이념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내세워야 하고, 언론은 정파들의 진짜 색깔들을 독자들에게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다양한 색깔들이 경쟁하는 게 정당 정치,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썩은 사과는 사과인가?

남한의 역사적 기득권 세력들이 휘둘러온 좌파, 빨갱이, 주사파, 종북 등 시대착오적 이념 공세는 ‘거짓말’일 뿐이라는 점을 지치지 말고, 귀찮아 말고 지적해야 한다. 이런 거짓말이 그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방식 중 하나가 이른바 ‘프레임론’이다.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야권이 현 정권을 좌파, 종북 프레임으로 가둬놓고 지지층을 단단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동의하기 힘든 설명 방식이다.

요즘은 자유한국당까지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며 지금 세상이 좌파 천지라고 우기는데, 좌우가 아니라 거짓과 사실/상식이 맞선 구도다. 좌우파 대결 구도는 사실 유럽의 ‘선진적’ 정치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썩은 사과도 사과이긴 하지만 먹을 수 있는 사과는 아니다.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편견과 증오를 동원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건 정치인이 하는 일이지, 언론인이 할 짓은 아니다. 현실에선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 많지만.

만고불변의 좌우파 구분 기준은 없다. 그렇지만 민주당 이름을 다양하게 변주해서 사용해온 정당을 진보 또는 좌파 정당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분단이라는 근원적 조건, 한자리 수 지지율이라는 국민들의 외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진보정당이 뿌리내리기 쉽지 않다. 민주노동당 이후 정의당까지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물론 진보정당 스스로 실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일차적 원인을 찾아야 하겠지만.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지역에 기반을 둔 보수 양당 체제였다. 지금은 보수 양당이 갈라져서 4개 정당이 됐지만 그들은 극우부터 개혁 보수까지 망라된 정당들일 뿐이다. 언론인들이 정치인들의 거짓 이념 공세에 편승하지 말고, 정명(正命) 운동에 나서는 한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PS : jtbc의 ‘팩트 체크’가 다른 매체에 적잖은 영향을 줘 유사한 꼭지들이 생긴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NYT와 <허핑턴 포스트>가 한 것처럼 어떤 매체가 나서서 주요 정치인들의 거짓말 횟수를 세어보고 분기별 랭킹을 매기는 꼭지를 만들어 보시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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