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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 친일로 들어선 조선일보(1)조선일보 대해부 13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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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0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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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중국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일제는 조선에서도 군국주의를 강화하면서 언론 탄압의 도를 갈수록 높였다. 대표적 민간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잔뜩 위축되었음은 물론이다.


민중의 현실 외면한 1936년 새해 사설

그런 경향은 1936년 들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일보 1월 1일자 신년호를 보면 그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1면 머리에 실린 사설의 제목은 「청소년에게 소(訴)하노라」이다.

새로 한 살을 먹어 30이 넘거들랑 이 글을 보지 말라. 그것은 시간의 낭비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다. 보라, 새로 어떤 결심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 신년 제1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설사 순간적으로 가져본다고 할지라도 그 결심의 실행을 기(期)치 못할 자에게 신년 제 1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냐? 양(洋)의 동서를 통하여 고왕금래(古往今來)를 상찰(詳察)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사회 국가의 발전 흥륭을 초치한 위인은 다 입지(立志)도 30 전에 시작된 것이다. 석가와 더불어 자비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청년 중에 있었고, 예수와 더불어 십자가를 나누려는 자도 청년 중에 있었다. 고로, 진시황, 나폴레옹의 사적(史蹟)을 들을 때에 전신에 열혈이 끌어오를 수 없으며, 무솔리니, 히틀러의 행적을 들을 때에 흉저(胸底) 깊이 충격을 받을 수 없으리만치 노쇠한 무리들에게는 역일(曆日)에 의한 신년은 있을지언정 백년대계를 위한 신년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신년 제1일을 맞을 때마다 2천 3백만을 향하여 소한다는 구관(舊慣)으로부터 탈출하여 30세 이상의 노쇠한 무리와 10세 이상의 무분별급을 배제하고, 오직 유위취능(有爲取能)의 청소년을 향해서만 소(訴)함이 있으려는 소이(所以)다. (…)
역사는 유구하고, 인류는 구원(久遠)한 것이다. 최근 4,50년만 본다는 근시안적 관찰을 버리고 구원유구한 인류사를 본다면 적게는 민족사회의 은인, 크게는 전 인류의 사표(師表)는 그 십중팔구가 다 빈한빈곤한 처지로부터 일어났으며, 그가 행한 사업도 다 물질의 배경을 요(要)치 않고 된 것이다. 공자는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사람이었더냐? 자기 심내(心內)에 용출(湧出)하는 확신에 입각하여 정천(頂天立地)하여 하물(何物)도 무서워 하지 아니하는 성의와 용기를 가지고 부단한 노력과 끊임없는 전진을 계속해 가노라면, 구구한 물질쯤은 오지 말라고 해도 이용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만치 저절로 따라온다는 확호부동의 진리는 청소년 제군이 가장 명심을 요할 바가 아니면 안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만천하 청소년 제군에게 공중(空中) 나는 새도 먹을 것이 있고, 들에 피는 백합도 입을 것이 있다는 확신 하에 오직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전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하는 일사(一事)만을 흉저 깊이 간직하고, 신년 제1일에 새로운 결심과 실행을 기하기를 소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무책임하면서도 무지한 ‘철학 강의’나 ‘인생 강론’처럼 들린다.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할 전국적 일간지의 사설이 새해 아침에 “30이 넘거들랑 이 글을 보지 말라”고 오만하게 명령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이 사설을 쓴 사람은 서른 살이 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 글이 석가와 예수, 소크라테스를 거론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진시황,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를 예로 들면서 ‘노쇠한 무리들’은 그들의 사적이나 행적을 들어도 전신에 열혈이 끓을 수 없고 가슴 깊이 충격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서른 살 미만 청소년들이 외국의 독재자나 파시스트의 본을 받아 무엇을 하라는 뜻인가?

이 사설은 절대 다수가 일제의 폭압통치와 가난에 시달리는 조선의 청소년들에게 “오직 사회를 위하여, 전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하는 한 가지 일만을” 생각하고 실행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민족의 당면 과업이자 숙원인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젊은이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조선총독 우가키의 연두사를 처음으로 싣다

1936년 새해 첫날부터 조선일보가 일제의 대변지로 변해간다는 증거가 1월 1일자 지면」 명백히 드러나 있다. ‘신년호 기 칠(其 七)’이라는 면에 실린 「각계 인사의 연두사(年頭辭)’가 바로 그것이다.

그 면의 머리에는 조선총독 우가키(宇垣)의 이름으로 된 「연두(年頭)의 사(辭)」가 실려 있다.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없던 일이다.

(…) 조선에서는 지난 가을, 통치사상의 한 획기(劃期)를 의미하는 시정(始政) 29주년 기념식전을 거행하여 과거의 사적(事蹟)을 명백히 하는 동시에 장래의 이상을 게(揭)하여 강내(疆內-조선영토 안) 관민의 심기일신을 촉(促)하였는데 나는 조선의 영춘(迎春) 재5회째의 연두에 재차 이 지의(旨意)를 강조하여 관민 제군에 소(訴)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문화, 산업이 금일의 역(域)에 달하여 병합 당시에 비해서 거의 면목을 일신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황헌(皇獻)을 체(體)하여 영영시위(營營施爲)한 많은 선인(先人)이 공헌에 기(基)한 것이요 이 기초 위에 서서 금후에 유종의 미를 기하는 것은 마땅히 현재 관민이 후대에 부(負)할 중임이 아니면 안 된다.
다행히 최근의 정치적, 경제적 사정은 조선에 혜택이 많아 문화조선, 산업조선의 전도(前途)는 양양춘해(洋洋春海)와 같음을 알고 있고 (…) 민중의 심의(心意)가 발연(勃然)히 흥기(興起)해온 자취를 보고 있는 터로 이 민심에 숙(宿)한 자각력이야말로 신흥조선을 추진할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
나는 이에 영광이 빛나는 신춘을 맞이하여, 소회의 일단을 술(述)하여 연두사로 삼아, 강내 관민 제군의 유의(留意)와 분기(奮起)를 절망(切望)하여 만지 않는 바이다.

조선총독 우가키의 이 「연두사」는 마치 임금이 신민(臣民)들에게 내리는 교지(敎旨) 같다. 그는 일제가 1905년에 조선을 ‘보호’하기로 하고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이 발효된 것을 ‘시정(始政)’이라고 표현하면서 조선의 문화와 산업이 1910년의 병탄 이래 크게 발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가키의 연두사가 실린 지면 왼편에는 ‘억조일심(億兆一心)’이라고 그 자신이 쓴 ‘시필(試筆)’이 크게 실려 있다. 무수히 많은 ‘황국신민’이 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같은 면에는 총독부 경무국장과 식산국장의 연두사도 올라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위압적인 반말 투이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묵살한 조선일보

1936년 8월 10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던 제13회 올림픽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세뇌공작에 휩쓸려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굳게 믿고 있던 메인스타디움의 독일 관중은 으레 흰 피부의 독일선수 아니면 게르만족 계통의 서양인이 1위로 들어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일장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골인했다. 3위 역시 같은 학교 학생 남승룡이었다.

그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그야말로 ‘2천3백만 동포’가 열광했다.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가 월계관을 쓰고 꽃다발을 든 채 시상대에 서 있는 손기정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그런데 그 사진에는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일장기가 지워진 채 사각형의 윤곽만 남아 있었다. 조선중앙일보의 기자들이 고의로 그런 사진을 내보낸 것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몽양 여운형이 1933년 2월 16일 중앙일보(1931년 11월 27일 창간) 사장으로 취임해서 이름을 고친 일간지였다. 진보적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는 짧은 기간에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3대 일간지로 올라설 수 있었다.

조선중앙일보의 인쇄시설이 나빠서,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의 사진이 총독부 검열관의 눈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사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열이틀이 지난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일장기가 말소된 손기정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그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해 그때까지 언론사상 최장기간인 279일 동안 신문을 내지 못했다.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이길용, 신낙균, 서영호 등 기자 8명은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해직당했다. 사장 송진우를 비롯해서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신동아> 부장 최승만, 사회부장 현진건은 총독부의 압력에 밀려 회사를 떠났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로 조선중앙일보가 열이틀 전에 감행한 ‘선구적 거사’도 총독부에 발각되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사장 여운형이 물러난 뒤 ‘근신’의 뜻으로 자진 휴간했으나 1937년 11월 5일 발행허가가 취소되어 폐간되었다.

동아일보는 1940년 8월에 강제로 폐간당했다가 1945년 말에 복간된 때부터 지금까지 ‘일장기 말소’는 자기 신문의 독보적 거사(擧事)였다고 자랑해왔다. 그러면서 조선중앙일보가 훨씬 먼저 그 일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 동아일보 사주 인촌 김성수는 기자들의 용감한 행동을 ‘몰지각한 짓’이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보전(普專-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 이사실(理事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 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 신문가에 도착하니 밖에는 수많은 정사복 경관들이 지켜 섰고 사내(社內)는 마치 독립 만세를 부르고 난 것 같은 흥분에 싸여 있었다(<동아일보사사[東亞日報社史] 권 1, 364쪽).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며 이길용을 비롯한 ‘일장기 말소’ 주동자들을 큰 소리로 꾸짖고 있었다.

동아일보가 창간기념일마다 내세우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대표적 사건 일장기 말소’는 기자들이 감행하고 사주나 경영진이 개탄하고 질책하던 ‘몰지각한 짓’이라는 사실이 지금은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당시 조선의 민중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를 보고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그 사건을 어떻게 보도했던가? 8월 28일자 2면에 「동업(同業) 동아일보/ 발행정지 처분」이라는 제목 아래 단 한 문장으로 기사를 썼을 뿐이다. “동업 동아일보는 27일부로 신문지법 제21조에 의하여 당국으로부터 무기정간의 처분을 당하였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조선일보는 8월 30일자 1면에 세로 2단으로 「동아일보 정간 이유/ 경무국장 담(談)」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자체 취재가 아니라 총독부 관리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금번 발행정지 처분을 당하였다. 전일(前日) 백림(伯林)에서 거행된 세계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기에서 조선 출신의 손기정 군이 우승의 월계관을 획득한 것은 일본 전체의 명예로 일본 내지(內地)와 조선 공히 함께 축하할 것이며 또 일본 내지와 조선 융화의 자료로 할 것이지 이를 역용(逆用)하여 조금이라도 민족적 대립의 공기를 유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신문사 등의 기사는 자칫하면 대립적 감정을 자극함과 같은 유치(誘致)를 취하는 것이 있음은 일반으로 유감시하는 바이다.
동아일보는 종래 누차 당국의 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월 25일 지상에 손기정 군의 사진을 게재하였는데 그 사진에 명확히 나타나야 할 일장기의 마크를 고의로 말소한 형적이 있었으므로 즉시 정간처분에 붙이고 그 실정을 조사하였던 바 8월 23일자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게재된 손기정 군의 사진을 전재하면서 일장기가 신문지상에 나타남을 꺼려하여 고의로 기술을 사용하여 말소한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마침내 그 신문지에 대하여 발행정지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비국민적 태도에 대하여는 장래에도 엄중 조치를 가할 방침인데 일반도 과오가 없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이 기사가 나간 뒤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무기정간을 당한 동아일보의 상태에 관한 보도를 볼 수 없었다.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한 1936년 8월 27일부터 복간된 1937년 6월 3일까지 279일 동안 언론계는 조선일보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3대 일간지의 하나이던 조선중앙일보까지 자진 휴간을 했기 때문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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