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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시대’의 개막(2)조선일보 대해부 9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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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2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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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방응모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초판 1쇄를 발간했을 때 언론계 인물로 가장 화제가 된 사람은 방응모와 김성수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실질적 창업주로서 후손들에게 ‘가업’을 세습한 그들이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방응모는 조선일보사의 공식 기록이나 숭배자들이 쓴 책에 나오는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를 아래 인용문에서 확인해 보기로 하자.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10월에는 조선신궁 설립 1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조선신궁봉찬회에 발기인 겸 고문으로 참여했다.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에 추대되었다. 이 단체는 조선 총독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과 일본인 합작으로 만들어진 대아시아주의 황도사상단체다. (…)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정간과 강제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 전선지국(全鮮支局) 시찰에 나선 방응모는 진남포·원산·함흥·청진 등을 전전하면서 자비로 강연회와 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1937년 2월 원산의 순 회강연에서는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 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아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 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이에 반대하자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후 조선일보 지면은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의 평가를 받았고, 조선일보 안팎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집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지면의 변화와 함께 방응모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에 나섰다(「인명편 2」, 173쪽).

일제를 위한 방응모의 ‘활약’은 종횡무진이었다.

1937년 7월 “일반 국민에 대한 황군(皇軍) 원호 철저, 응소(應召) 출동이나 개선 군인의 환송·접대” 등의 활동으로 후방에서 군인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직된 경성군사후원연맹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 9월 6일 오전에 의정부 양주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지나사변의 원인과 지나에 대한 세계 열국의 대세와 금후 국민의 각오’에 대해 열변을 토했으며, 오후에는 연천 공립보통학교 대강당에서 ‘지나사변과 제국의 결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에서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달 조선지원병 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으로 조선에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을 축하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같은 책, 173~174쪽).

방응모와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해서는 뒤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바탕으로 상세히 살펴보겠다.

해외독립운동세력 폄하

1933년 8월 13일자 2면 기사(「해외00운동자들이 남경에서 국무원 개조」)

조선00의 뜻을 품고 조선을 떠나 남북만주와 중국본주 또는 멀리 미국 등지로 다니는 사람들은 기미년 이후 상해를 활동무대로 삼고 기관으로써는 00정부를 조직하여 다년간 파란을 겪어가며 여러 가지 책동을 하여 왔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전과 같은 존재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고 더구나 이 방면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근자에 모처로부터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얼마 전 남경에서 국무원(國務院)을 개조하고 다시 새로운 운동을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경과를 듣건대 작년에 상해에 있던 김규식 씨는 중국 기타 구미의 정객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구라파로 건너가 국제연맹총회가 열린 제네바나 기타 여러 지방을 다니며 조선문제 내지 극동문제를 가지고 활동하여 왔다. 또 미국에 있는 조선인들도 국민회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여 왔으나 이래 활동의 중심이 되어 있던 상해의 국무원으로서는 근자에 그 활동이 지둔(遲鈍)하고 미국방면의 조선인 측으로부터 비난이 높아 이에 상해에 있는 송병조, 차이석 등이 전심 분주하여 7월중에 남경 윤기섭, 신익희 기타 8명이 모여 국무원을 개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구, 이동령 등은 해임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사는 일제 당국이 흘린 정보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한 이유가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이런 기사를 싣게 한 다음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친인척 또는 지인들을 접촉하여 그들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는 일제당국에 충실하게 협조한 셈이다. 위 기사 가운데 김구와 이동녕의 해임이란 표현은 와전된 것이다. 김구는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처음부터 고사했다. 국무원을 개편하는 과정에서도 사표를 냈지만 반려된 바 있다.

윤봉길 의사를 ‘이봉길’로 오기

1933년 9월 4일자 기사(「이봉길00 30명 만주 일대에 잠입활동」)

(봉천)작년 4월 29일 상해에서 백천대장에게 폭탄을 던져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조선 00당 이봉길(李奉吉) 일파의 잔당은 그 후에도 암중활약을 계속하여 중국 남방에서 항일반만(抗日反滿)분자를 모아 작년 7월 남경에서 구국자간단(救國刺奸團)을 조직하고 뒤이어 동아동맹회(별명 중한의용군)를 조직하여 이봉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일본 측 요인 암살, ××운동의 촉진과 항일반만공작을 목적으로 한 테러단체를 조직하고 그 조직은 중국에서 유명한 비밀결사 청방(靑幇)을 모방하여 행동 일체에 대해 비밀엄수 하도록 하고 있는데 회원은 1천2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 종래 항일반만운동은 남방에 한하여 있었는데 이번은 남경을 본부로 하고 상해 북평, 신경, 천진 방면까지 손을 뻗쳐 각지에 지부를 두었다고 한다. 만주국 내에서는 오는 18일 사변기념일을 기하여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려고 30명의 자간단 간부가 농민과 상인으로 변장하여 벌써 만주에 잠입시킨 형적까지 있다고 한다. 이  정보를 접한 일만당국은 엄중히 감시 중이다.

윤봉길 의사를 이봉길이라고 쓰거나 편집한 일은 참으로 통탄스럽다. 사람의 성을 바꾸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이 해외 독립운동가들에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다. 더구나 윤봉길 의사는 공산당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젊은 농민 출신이다. 이 기사는 윤 의사가 일파를 거느렸다고 썼지만 윤 의사는 일파를 거느릴만한 시간도 자금도 없었다. 전형적인 과장 왜곡 기사이다.

「한문을 없애고 한글을 전용하라」(1933년 10월 29일자 사설)

한글날 오늘은 지금부터 487년 전 세종께서 한글을 반포하신 날이다. 한글은 동양의 단 하나인 단음식의 진보된 문자로 조선인의 자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한글날을 기념함은 한갓 그것을 자랑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아무쪼록 이 기회를 타서 한글의 효용을 일반에게 널리 알려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을 쓰는 이가 더 생기게 된다면 그만큼 조선문화의 진보에 대하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배우기 쉽고 쓰기 좋은 한글은 신시대에 가장 맞는 대중의 문자로 이로부터 조선인이 신문화를 개척함에 있어서 이 글이 막대한 이기(利器)가 될 것이다. (…)
그러나 조선인의 노력은 과거에 있어서 얼마나 부족하였던지 이 좋은 글을 가지고도 잘 활용하여 일대 문학을 건설하기는커녕 그 글 자체의 용법까지 흩뜨려서 지금 와서 학자 사이에 문자 정리 및 그 통일을 부르짖게끔 되었으니 한끝으로 생각하면 크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중국 같은 데서 요새 겨우 새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것을 보면 우리는 오늘날부터 이 한글을 사용하여 그것을 활용하기에 노력만 하게 된다면 아직도 꼭 만시지탄이 있는 것은 아니다. (…)
한글날을 당할 때마다 세종대왕의 그 거룩하신 뜻을 받들어 한글 보급에 필요한 몇 가지를 강조하니 첫째는 한문을 폐지하고 한글을 전용할 것, 둘째는 전 민중적으로 한글을 배우게 하여 한 사람의 문맹이라도 없게 할 것, 셋째는 한글을 더욱 더욱 연구하여 오늘날보다도 한층 더 완전한 문자를 만들 것, 넷째는 로마자보다도 우수한 문자임을 온 세계 사람에게 널리 알릴 것 등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 이후 한글보급운동을 꾸준하게 전개한다. 이 운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민족혼이 담긴 한글을 가꾸고 보존하려는 조선일보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더구나 국한(國漢)혼용시대의 한자 폐지 주장은 상당히 진보적으로 보인다.

황태자의 탄생을 ‘봉축(奉祝)’하는 사설

1933년 12월 24일자(「황태자 전하 어탄생[御誕生]」)

12월 23일 오후 6시 39분에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위를 계승하옵실 황태자 전하께옵서 탄생하시었다. 어모자 두 분 다 건전하시다니 황실을 비롯하여 내외가 다 축하의 건성(虔誠)을 아뢰옵고 있다. 대정 14년에 조궁 전하의 탄생으로 비롯하여 사내전하께옵서 탄생하시었으나 아직 친왕(親王)의 탄생이 없으시다가 이번에 황태자 전하의 탄생이 겨오시니 천황, 황후 양 폐하를 비롯하여 상하와 내외의 기쁨은 더욱 큼이 있을 것을 봉찰(奉察)할 수가 있다.
일본은 다른 나라와 달리 건국 이래로 황실은 곧 일본 전 민족의 대종가(大宗家)라는 신념이 있고, 더욱 명치천황의 어우(御宇)에 이르러 일본이 껑충 뛰어 세계의 대국이 됨에 일본  국민의 황실을 존숭하는 정은 더욱 깊어졌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황실중심의 국민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본다. 일본 국민에 있어서는 황실은 영국, 기타의 황실과 달라서 혈통적 친근성과 종교적 존엄을 가지신다. 오늘도 동경전(東京電)을 보면 황태자전하 탄생의 사이렌을 듣자 봉축의 군중이 이중교(二重橋) 아래로 모여들어 만세를 봉창하고 길에서 서로 만날 때에도 “경축합니다!’(오메데도)”를 부른다고 한다. 세계 어디든지 일본 국민이 사는 곳에는 황태자 전하의 탄생을 봉축하는 기분으로 오늘을 지낼 것이다.
일본은 지금 비상시에 있다고 한다. 이 비상시가 결코 오래 갈 것은 아니겠지만 국가의 생명이 영원함과 같이 국가의 비상시도 무시로 있는 것일 뿐더러 국가의 문화적 사명은 무궁할 것이니 새로 탄생하신 황태자 전하께옵서 건전하게 자라시와 후일에 일본을 세계의 문화와 평화와 따라서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하는 큰 힘이 되도록 하시는 영주(英主)가 되시옵소서 하고 축원을 올린다.

여기서 말하는 ‘황태자’가 바로 지금의 일왕 아키히토(明仁)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을 자발적으로 썼을 것이며 이를 통하여 일제와 조선일보의 관계를 명백하게 정리했다고 본다. 즉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이며 ‘조선일보는 식민지 언론’임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민족지’니, ‘민중지’니 하는 말은 더 이상 믿을 사람도 없고, 앞으로는 조선일보 스스로 그런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만일 조선일보가 앞으로도 민족지니 민중지니 하는 말을 다시 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거짓말이 된다. 오직 일제의 나팔수가 되어 조선일보(주)라는 기업의 번영을 전제로 하는 언론활동을 펼칠 것으로 본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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