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딸, “폐위된 왕”이 부럽다

‘(어린이들은)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부모간의 싸움(15.5%), 부모가 집에 없을 때(13%), 형제간의 차별대우(5.7%)로 나타나 우리 가정에는 동심을 멍들게 하는 요소가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경향신문, 1975년 5월5일>

수십년 전의 기사 부분인용이다. 당시 어린이들이 꼽은 ‘집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 가운데 ‘형제간의 차별대우’가 눈에 박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차별’이란 말이 눈에 박힌다. 5.7%. 작은 숫자가 아니다. 당시 집에서 차별받던 저 어린이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5.7% 안에는 셋째딸이 상당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첫째아들, 막내딸보다 많았을 것이다.

1970년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표어가 거리 곳곳에 붙어 있던 시절이다. 사람 많이 모이는 역 광장에 어김없이 ‘인구 탑’이 세워지던 시절이다. 정부는 전국민적 출산억제 캠페인을 1962년부터 벌였는데, 초반에는 ‘셋 낳기’를 권장하더니 그것도 성에 안찼는지 70년대 들어서는 ‘둘 낳기’로 바꾸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셋째, 넷째를 낳고 있었다. 특히 ‘고추의 탄생’을 메시아 기다리듯 하던 집에서는 일곱째, 아홉째까지 줄줄이 낳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첫경험은 강렬한 법. 부모로서 처음 맞게 된 첫째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그만큼 각별하고 유별나다. 그러다 둘째나 셋째에 대한 부모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점점 줄어들게 된다. 막내는 극적으로 역전극을 펼친다. 다시 한번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 막내가 아들이라면 십중팔구 왕자님이 된다. 중간에 낀 아이들은 점점 관심에서 멀어진다. 그 아이들이 딸이라면 상황은 십중팔구 더 열악해진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첫째 아이는 둘째가 태어나게 되면 ‘폐위된 왕’과 같은 심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동안 혼자 누려왔던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새로 태어난 동생에게 빼앗기는 그 상실감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런데, 많은 형제 가운데 둘째, 셋째 등 중간에 낀 아이들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의 강도도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그 기간도 짧다. 하지만, 막내는 비록 사랑과 관심의 강도가 첫아이 태어날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평생 폐위되지 않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아들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니 유럽의 가정과 가족관계를 살펴봤을 것이다. 한데 아들러가 예전 한국의 가정과 가족관계를 관찰해봤다면 연구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 상상해본다. 아들러는 관심사가 많았지만 형제간 ‘서열’에도 주목한 사람이다. 근데 우리나라처럼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깊은 문화권이 이 지구상에 또 있는가. 아이들을 둘러싼 심리적 환경이 훨씬 더 복잡하다. 아들러의 연구 역시 아마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서열’에 ‘성별’까지 추가해 연구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들러는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셋째딸’이라는 키워드를 건져냈을 것이다. ‘셋째딸’은 ‘중간에 낀 딸’이다. ‘둘째딸’이 될 수도 있고 ‘넷째딸’이 될 수도 있다. 이 주목받지 못하던 셋째딸, 중간자들은 세월이 흘러 신문지상에 조금씩 얼굴을 내비친다.

맏딸에게 첫 정을 듬뿍 쏟은 엄마 밑에서, 언니 어깨너머로 저 혼자 한글을 깨쳐도 기특하단 칭찬 한번 못 받고, 둘째딸 아니면 그 설움을 모른다. 맏이나 막내 또는 외동이의 특권도 없다. 게다가 아들도 아니어서 집안 내 정권교체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믿을 건 ‘나밖에 없다’란 치열한 생존본능과 열정적 에너지, 적극성과 성취욕을 갖추게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동아일보 1988년 8월 29일>

우리 친정은 딸부잣집이다. 딸만 줄줄이 넷을 낳으신 어머니는 늘 미역국이 써서 목에 넘어가지 않으셨다고 하고 아버지는 셋째딸을 낳은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이모가 보았다고 들었다. <경향신문 1993. 03.12>

앞의 글은 1980년대 말의 ‘둘째딸 보고 또 보자’란 제목의 ‘여’기자 칼럼 한 부분이다. 두 번째 글은 ‘아들선호 유감’이란 제목의 ‘딸부잣집 셋째딸’인 ‘여’독자의 편지다. 이런 글들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으니 아주 반가운 현상이었다. 근데 ‘둘째딸 보고 또 보자’는 <보고 또 보고>란 당시 엠비시 드라마에 기대 쓴 글이었으며, ‘아들선호 유감’ 역시 <아들과 딸>이란 같은 방송사의 인기 드라마에 기대 생산된 글이었다. 그나마 저런 ‘페미니즘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위와 같은 글이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씁쓸하다.

소설 한번 써보자. 그녀, 셋째로 태어났다. 운이 없어 뭘 달고 나오지도 못했다. 둘러보니 이미 언니, 오빠들이 엄마와 아빠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얼마 뒤 밑으로 동생들이 또 줄줄이 태어났다. 그녀는 더 뒷전으로 밀렸다. 이런 고약한 상황에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전략적이어야 한다. 셋째딸 그녀는 ‘애어른’ 혹은 그 비슷한 ‘착한아이’ 전략을 쓰기로 한다. 참고, 양보하고, 떼 안쓰고, 안 울고, 요구 안 하고, 심부름 잘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효과가 제법 있었다. 부모 포함 어른들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애가 참 속이 깊고 어른스럽네” “애가 벌써 철 들었네” “셋째 딸은 선도 안 보고 데려간대”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셋째딸’의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녀의 내면에는 그늘이 있다. 우리의 주인공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 인정욕구에 목말라 진작부터 ‘애어른’이 되거나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빠졌다. 일찍 철든 아이, 부모여, 칭찬하지 말라. 일찍 어른 된 아이, 부모여, 걱정하며 얼른 대책 세우라.

낀 존재로 태어난 분들, ‘셋째딸’로 태어나 폐위될지언정 ‘왕’의 자리에 단 한번도 올라보지도 못했던 분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 불안하고 외롭던 환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된 그들께 영광 있으라. 사족. 이 글 쓰고 있는 내가 4녀1남 가운데 셋째딸이다. 남편 누군지 마누라 하나 잘 얻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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