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9개월간 보인 온갖 해괴한 행태가 전 세계를 때로는 아연실색케 하고 때로는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그야말로 미국의 재앙이자 세계의 재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그의 행태나 국제사회의 불안은 일찌감치 예견됐던 바였다. 애초에 그 국민들 스스로 세계 최강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해 온 나라의 대통령으로 뽑힌 것부터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2016년 11월 8일) 1주년을 불과 며칠 앞둔 지금에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이 희대의 ‘망나니’ 같은 사내의 대통령 당선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라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2016년 05월 04일자에 소개된 <[영상] 트럼프 막말 모음 ... "한국은 미쳤다"> 제목의 기사. 이 기사에는 트럼프가 "시정잡배의 언어로, 상대방을 향해 거침없는 막말을 퍼부었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향한 조롱이나 허위 사실을 막무가내로 주장하기도 했다"면서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트럼프의 막말 모음(Trump’s greatest insults)을 소개하고 있다.

트럼프의 부상과 당선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미디어가 특히 큰 ‘기여’를 했다는 건 분명하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발언이라도, 아니 문제가 많은 발언이면 더더욱 경쟁적으로 중계방송하다시피 한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가 트럼프를 띄우고 지탱해줬다. 그리고 그 같은 ‘중계방송’에는 미국 언론이 떠받드는 ‘사실보도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은 신성한 것’이니 ‘사실을 보도하면 사실이 스스로 말하고, 사실끼리 경쟁하며, 사실들이 스스로 진실을 드러낼 것’이라는 신조다. 이는 사실에는 인간의 주관이 개입하지 않으며 공정하다는 믿음과 결부돼 있다. 이 사실보도주의의 특징적 현상 중의 하나가 ‘인용 저널리즘’이다. 중요한 인물 누군가가 무슨 말이든 내뱉기만 하면 일단 인용 보도하고 보는 태도가 ‘객관주의 저널리즘’으로 포장돼 미국 언론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 온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의 신성성’은 거짓 신화라는 게 이제 적잖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사실이 스스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것, 결국 사실은 인간에 의해 선택되고 그 선택에 의해 ‘발언권’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 언론학자인 미쳴 스티븐스 뉴욕대 교수가 ‘비욘드 뉴스(Beyond News)’란 책에서 현대의 저널리즘의 위기의 큰 원인이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갇힌’ 보도 태도라고 비판하는 것도 사실보도주의의 위험성과 한계를 꿰뚫은 것이다. 그는 인터넷 등으로 위기에 처한 전통 저널리즘에는 ‘사실 너머’에 미래가 있다면서 이를 ‘지혜의 저널리즘’이라고 명명했다. 언론이 추구해야 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지혜라는 것이다.

‘사실’에서 ‘지혜’로의 전환. 사실보도주의에 대한 믿음이 강고하고 또한 인터넷의 위협 등으로 결코 미국에 못지않게 어려움에 처한 한국의 언론도 주목해야 할 방향의 제시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은 신성하다’는 말에 대해서부터 새삼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 천상의 복음과도 같이 신성한 지위에 올라와 있는 이 금언은 그러나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가령 어떤 사안에 100가지의 팩트(사실)가 있다고 할 때 그 중 99개의 팩트를 얘기해서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나머지 한 개의 팩트에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절대시에는 전체를 놓치고 부분에 갇히는 위험이 있고, 사실이 진실과 충돌하는 역설이 있으며, 세부에 충실함으로써 전체를 부실케 하는 함정이 있다.

사실은 진실의 빛에 비춰봐야 하며, 부분은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지엽을 근원에 의거해서 봐야 하고, 말단을 본질에 비춰서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세부와 부분만을 전체인 양, 진실인 양 내세운다면 이는 인체의 한 국부(局部)를 그 전부인 듯 확대경을 들이대는 포르노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실보도의 추구는 반(反)진실로서의 사실, 비(非)진실로서의 사실을 준별할 수 있는 양식과 안목을 언론에 지우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사실보도의 탈을 쓴 궤변과 억지의 중계가 횡행하고 있는 오늘의 혼란스런 공론장에서 사실보도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기자윤리강령에서는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우리는 권력과 금력 등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내ㆍ외부의 개인 또는 집단의 어떤 부당한 간섭이나 압력도 단호히 배격한다”고 밝히고 있다.언론의 ‘독립성’을 내세우는 것이랄 수 있는데 이때의 간섭과 압력이 단지 외부로부터의 간섭과 압력으로만 해석돼서는 안된다. 사실 너머의 진실에 이를 수 있도록 언론 자신의 무지와 편견과 부실로부터의 간섭과 압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또한 요구하는 것이다. 헌법 제103조가 법관에 대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것을 명한 것과 같이 양식과 상식과 사려에 의해 사회와 사안을 볼 것을 명하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저녁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 43돌에서 다시 낭독된 ‘자유언론선언문’은 ‘자유언론’에 대해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언론의 자유의 노정에는 결코 끝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노정이란 더 높고, 더 깊고, 더 넓은 언론자유를 향한 과정이랄 수 있을 것이다. 43년 전 선배들의 자유언론 정신을 오늘에 발전적으로 이어받고자 하는 후배 언론인들이라면 언론의 자유를 더욱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시민적 양식과 상식이라는 책임으로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라는 자각에 이르러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에 대한 구속으로써 오히려 언론을 자유롭게 한다는 역설, 43년 전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제대로 계승하는 하나의 길이 거기에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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