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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업’으로 개량주의화한 조선일보조선일보 대해부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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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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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기사와 논설이 사회주의 계열 기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혁신’을 추진할 수 있었음은 앞에 적은 바 있다. 신석우, 이상재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조선일보사를 경영하면서 좌파 기자들의 그런 움직임에 심한 제재를 가했다면 1922년 봄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조선일보 지면은 그런 면모를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국내외의 ‘민족진영’은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이나 공산주의를 신봉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혁명적 수단’으로 성취하려는 좌파에 비해 우파는 1919년에 성공한 러시아혁명 방식보다는 무장 독립투쟁이나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또는 자치운동에 치우쳐 있었다. 거칠게 보면 〈조선일보〉의 기자 다수는 좌파적 성향이 강했고, 동아일보 기자들의 주류는 우파에 치우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25년 4월 17일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은 숱한 내분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국내의 항일투쟁을 선도하면서 일제의 모진 감시와 탄압에 밀려 1928년 봄에 해체되었다.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의 중심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계열이었음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생활개신운동’

1929년 말에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밀어닥치기 전인 그 해 3월 하순부터 조선일보는 생활개신(改新)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그 운동을 선전하는 사고(社告)는 2월 20일자 2면에 나갔다.

생활개신운동
상세(詳細) 추가 발표
색의(色衣)단발(斷髮)운동
건강증진운동
상식보급운동
소비절약운동
허례(虛禮)폐지운동

조선일보는 “생활부터 달라져야 힘을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5월 5일 생활개신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으로는 유진태, 허헌, 김활란, 최현배, 안재홍, 최두선, 백낙준 등 1백명이 참여했다. 그것은 조선일보 지령 3000호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조선일보는 5월 10일자부터 그 운동에 대한 보도와 선전을 대대적으로 펴나갔다. 그야말로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에 시작한 ‘새마을운동’의 원조(元祖) 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날부터 5월 하순까지 조선일보 지면을 보면 현란한 제목을 단 기사들이 날마다 2~4면 상단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 「생활개신운동 각 지방의 향응」(5월 10일자)
· 「16일은 생활개신 선전일 /전조선에 포스터/수천 소년은 기(旗) 행렬(5월 12일자)
· 「조선 사람아! 새로 살자 / 생활개신의 표어/ 천공(天空)과 지상에 충만(5월 15일자)
· 「자동차와 인력거마다/ 찬란한 생활쇄신기」(5월 16일자)
· 「생활개신 논문과 5대 표어 현상모집 /다 같이 실행하게 되고/ 전조선적으로 일으킬 운  동(5월 17일자)
· 「개신의 활기 띤 경성 천지 / 웅장한 축하비행, 감격에 넘친 행렬 / 본사 주최 생활개신    선전일의 성황」(5월 18일자)

조선일보는 ‘생활개신과 색의’, ‘생활쇄신과 건강 증진’ 등 제목으로 10회에 걸쳐 연재기사를 실었다. 5월 16일부터는 조선일보 사원들부터 색의 입기에 앞장서기로 했다.

조선일보가 거국적으로 벌인 생활개신운동의 목표 가운데 맨 앞에 색의 폐지를 내세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일찍이 조선일보 1927년 12월 17일자에 실린 사설에서 찾을 수 있다. 제목은 ‘백의(白衣) 폐지의 고조(高調)’이다.

백의를 폐지하자! 볼꼴 사납고 불경제요 외인(外人)의 조소조차 받고 있는 백의를 폐지하자! 말로만 하지 말고 반드시 실행하자! 간단한 주장이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풍속개량적으로 식자들의 화제로 웬간치않게 거론되었지만 지금부터는 실행하자는 것이 본 란을 다시 쓰는 목적이다. (…)
백의인 백의민족! 이 말은 무슨 명예나 자랑삼아서 내세울 것은 못된다. 그는 다만 백의 입는 것이 보편적 사실인데 미루어보아서 그렇게 주장할 뿐이다. 백의의 좋지 못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경제 되지 않는 것이 한 가지이다. 하얀 옷이 처음에는 해사하여 보이는 때도 있지만 수삼일이 못 가서 곧 때가 묻고 때가 정히 묻으면 아무리 체면을 아니 보는 사람들도 진작 벗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흰옷에 꾀죄죄하게 묻은 때는 그 사람까지 천박무모한, 웅원(雄遠) 용견(勇堅)의 기풍을 결한 것 같아서 보기에 매우 흉하다. 때가 많이 묻은 뒤에는 남달리 더러워 보여서 결국은 백의인인 조선인은 전체로서 매우 불결한 인민인 것 같이 오해된다. (…) 집무상 활동상의 지장과 손실은 자못 막대한 것이다. 만일 세탁을 자주 하고 수선을 때 없이 함으로 인한 물자상 시간상 따라서 민족적 정력상에 막대한 손실을 당하는 사정 같은 것은 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사설의 논지는 조선 민중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궁핍한 생활을 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외인의 조소조차 받고 있는 백의’라는 표현에서 외인은 바로 조선을 병탄하고 무자비한 식민통치를 하고 있는 일본인들 아닌가. ‘백의인, 백의민족’이 명예나 자랑이 못 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우리 겨레가 수천년 동안 흰옷을 사랑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백의가 좋아서뿐 아니라 생활상의 이유 때문에도 그것을 입을 수밖에 없는 민중의 사정이 있었다. 봉건시대의 왕후장상들과 부유한 사람들은 갖은 색을 섞은 화려한 복색을 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무명에 물을 들일 여유도 없었고 비단 같은 비싼 색의를 살 수도 없었다. 그들이라고 왜 ‘웅원 용견’의 기풍을 보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1950년대 말까지도 농촌과 도시에는 흰옷 한 벌로 봄, 여름, 가을을 나야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생활개신운동에서 백의 폐지를 가장 앞세운 조선일보는 일제가 3·1운동 시기는 물론이고 1945년 8월 해방이 오기까지 시골이나 소읍의 장처에서 조선사람들이 입은 흰옷에 먹물을 뿌리곤 하던 만행을 모르고 있었을까?

(…) 백의 폐지운동은 일제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며, (…) 지방단체에서    벌써 흑의(黑衣) 선전을 여행(勵行)하는 자가 많이 있었는데 일제의 방해가 전혀 없었던 것    이다. (…) 백의 폐지 캠페인은 결과적으로는 조선민족,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의도    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155쪽).

조선일보사가 창사 이래 최대 규모로 벌인 생활개신운동에서 ‘색의·단발’과 함께 추진한 ‘건강 증진’ ‘상식 보급’ ‘소비 절약’ ‘허례 폐지’는 20년 가까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신음하던 조선 민중의 절대적 소망이었을 독립이나 해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동아일보의 ‘자치론’을 격렬히 비판해온 조선일보가 개량주의화하는 두드러진 증거였음이 분명하다.

광주학생운동과 조선일보의 밋밋한 논조

1929년 11월 3일 한국 학생운동사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광주학생운동’이 터졌다. 조선일보 11월 4일자에는 그 사건과 관련해서 2면에 두 건의 기사가 실렸다.

광주고보생과 중학생 충돌/ 20명 중경상
단도와 기타 흉기로 난투/ 경관과 소방대 출동

(별항보도)=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일본인)중학생과의 충돌은 용이히 침식되지 않아 3일    오전 11시경에 단지역전에서 일대 격전이 일어났다는 바 중학생들은 단도 기타 흉기를 함    부로 사용하여 중경상자 20여명을 낸 후 경관 소방대와 선생들의 진무로 겨우 그치었다더라(광주 전보).

일본인 중학생이 조선인 여학생 놀려/ 그 전날부터 사이가 좋지 못하여/ 불상사 내기까지 원인

지난 30일 오후에 나주역전에서 광주중학생 복전(福田) 외 두 명이 광주보통학교 여학생에게 ‘히야카시’한 것이 원인으로 광주고보교 학생 박준세와 격투가 되어 일장 활극을 이룬 바 경관의 저지로 싸움은 그치었으나 밤사이에 그들은 다시 충돌되어 중학생이 조금 맞은 것을 분풀이하려고 오후 4시경에 중학생 50여명이 배트를 휘두르며 유도선생과 더불어 광주역에 모여서 고보생들이 돌아가는 길을 엿보고 있었던 바 고보생도 이에 응하여 대격전이 일어날 것을 양편의 선생과 경관의 제지로 일시는 진정되었으나 중학생들은 배트를 들고 방황하며 고보생들도 지지 않을 용기로 대치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뒷일이 매우 근심된다더라 (광주 전보).

일제 경찰이 조선인 학생만을 일방적으로 탄압하자 항의 시위가 전남 지역은 물론이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거국적 항쟁으로 발전해서 1930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참가한 학교 194개, 학생 수 5만4천여명, 퇴학 처분자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이었다.

11월 3일에 터진 항쟁이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의 극한 대결로 치닫던 무렵에 조선일보 11월 3일자 사설(「광주의 학생 충돌 사건」)은 모호한 ‘중도적 견해’를 밝혔다.

(…) 이 사건은 원래 무의식한 과정을 밟아온 학생간의 돌발적인 사건이므로 그다지 중대  시할 바 아니나 이것이 단순한 갑을 양교 학생의 우연한 충돌로 그치지 않고 그 사이에 미묘한 피아관(彼我觀)이 곁들이는 고로 단순평범해야 할 일이 분규 훤소(喧騷)를 가하게 되고 잘  못되면 이 이상으로 사태를 악화시킬 가연성(可燃性)이 없지 않다. 양교의 학생들이 충돌될  때 경관이 출동하고 경종이 울고 소방대가 응원을 하였으되 그간에 아무 편곡(偏曲)한 행동이 없었다면 그는 근래에 드문 태도일 것이다. 다만 중학측의 유도교원인 이전(伊田)모가 가뜩이나 혈기에 뻗치는 50인의 생도에게 그릇된 용기를 고조(高調)하여 그들에게 냉정한 자제를 잃게 하였고 기차 중의 일본인 승객들이 2등객 될 만한 신사적인 신분이면서 좀 더 고처적(高處的)인 태도를 보이지 못하였다 함은 그들 평소의 이러한 과오가 많은 점으로 보아 개탄할 만하다.

이 사설 이후 조선일보는 1930년 1월 학생운동이 멈출 때가지 단 한 편의 사설도 내보내지 않았다. 1930년대 들어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제의 살기등등한 기세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것일까?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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