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니 이번 추석연휴 기간 동안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를 오간 여행객들이 무려 207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가장이자 남편이신 당신은 어떤가? 그 행렬에 끼어 동남아 패키지 여행이라도 다녀오셨는지? 글쎄, 그런 축복받은 가장들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졸음과 씨름하며 꽉 막힌 고속도로를 뚫고 돌진하는 진격의 거인 노릇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시댁 방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바가지 박박 긁는 아내 때문에 운전이 더 피곤했을 수도 있겠다. 고향의 부모님께 드릴 용돈 액수를 두고 아내와 차 안에서 토론하다, 아내의 바가지가 마침내 핵폭탄으로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부글부글, 징글징글. 이런, 애새끼들마저 스마트폰과 몰아일체가 되거나 시끄럽게 떠들며 애비 말은 귓등으로 듣는다. 당신은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므로 축하한다. 어쨌거나 이 또한 지나갔으니까. 어쨌거나 대부분의 가장들은 무사히 귀가했으니까. 어쨌거나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왔으니까.

일요신문, 2014.09.07. 〈명절 스트레스 증후군 ‘남편도 괴롭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생겨난지 오래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가부장적 권위가 낮아지면서 주부들의 명절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명절 증후군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된 남성들 사이에 상당한 명절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올해처럼 극도의 불황기에 겪는 가장들의 명절 고통지수는 심한 경우 위험수위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여러 사례들과 전문가 의견을 종합한 결과다.

가정과 직장에서 운신의 폭이 줄어든 가장들의 명절 스트레스가 주부 스트레스 뺨치게 불거지고 있다는 얘기다. 우선 여성들의 명절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해주지 않으면 싸움에 이어 이혼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남편책임론’ 자체가 적지 않은 심적 압박이다. 아내 눈치보기에 이어 얇아진 지갑에 시댁·처가 부모님 용돈과 조카들 세뱃돈을 망설여야 하는 것은 이 시대 가장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하이라이트’가 아닐 수 없다. (중략)

다른 네티즌은 “명절이라야 1년에 딱 두번인데, 일년 열두달 고생하는 남편들이 명절 때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아내 눈치만 봐서야 되겠느냐”면서 명절 스트레스 증후군을 너무 여성 측면에서만 부각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중략)

인천 황원준 신경정신과 원장은 “명절 스트레스=주부명절 증후군 등식이 팽배하고 있지만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는 모든 연령층에서 명절 스트레스가 생길 수 있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생겨나는 남편들의 문제가 가장 큰 것 같다”면서 명절 후에 우울증, 불면증, 신경성 신체장애 등을 호소하는 남편들을 실제 임상에서 많이 접하게 된다고 밝혔다.(하략)

- 경향신문, 2009.01.28, 〈‘남편 명절증후군’을 아시나요〉

명절. 어떤 가장은 오랜만에 만난 부모형제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 들어야 한다. 그의 가장이란 타이틀은 계급장 아닌 멍에가 된 지 오래다. 가장들의 명절 스트레스는 진작부터 신문기사에 오르내렸다. 십수년 전의 위 인용기사도 그 중 하나다. 하필 2009년 초의 기사를 인용한 이유가 있다. 2008년이라는 연도 때문이다.

동아일보, 2017.01.31 〈명절증후군으로 대판 싸울 바엔… ‘나 홀로’ 본가로 간 부부들

명절, 집단적 스트레스에 정점을 찍는 날

2008년, 금융위기. 1997년의 IMF 악몽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해 끔찍한 경기불황이 불어 닥쳤다. 그 여파로 2008년은 명절 스트레스가 더이상 기혼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만천하에 예언해 준 ‘기념비적인 해’가 되고 말았다. 경기불황은 ‘45세 정년’이라는 ‘사오정 세대’를 만들어냈고, 당시의 사오정 남성 특히 가장들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그 집단적 스트레스에 정점을 찍는 날은 365일 가운데 추석과 설 등 명절이었다. 당시의 사오정 가장들은 명절의 명 자만 들어도 명이 짧아지는 듯한 자괴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런 현상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 ‘기혼남성의 가장 큰 명절 스트레스’는 여전히 ‘목돈 지출에 따른 경제적 부담’(49.7%)이다.(경기도여성능력개발센터, 2015) 명절의 경제적 스트레스는 아래 기사의 내용처럼 극단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전략) 지난 19일 설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가던 B씨(35)가 차 안에서 가족에게 수면유도제를 먹인 후 흉기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제 일가족 5명 사망사건’이 대표적이다.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B씨는 아내 이름으로 1억 5000만원 상당의 빚을 졌고 아파트에서 작은 원룸으로 이사했다. (중략)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어려움이 있어도 명절에는 여유로운 척, 잘사는 척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

- 중앙일보, 2015.02.24, 〈“가족 만나면 갈등, 없으면 박탈감”....평일 자살 40명, 명절 직후엔 43명〉

드러내지 못하니 속병이 된다

이제 종손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요즘은 ‘종손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종손의 명절 스트레스는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대부분 ‘종손이라는 이름의 중압감으로 드러내 놓고 하소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니 속병이 된다.

(전략) 명절 때마다 ‘종손’이라는 죄(?)로 조상이란 조상의 묘는 빠짐없이 벌초하고 제사 지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시화, 핵가족화와 함께 조상의 묘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떨어진데다, 도와줄 친지나 연고자도 거의 없어 종손들의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하략)

- 경향신문, 2007.09.27.

한 종가의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공훈을 세워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신위) 제사 장면.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전통적 가족가치관 하에서는 조상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전담하는 것은 종손의 권리-권력이며, 가부장권의 상징이었다. 종손은 가문의 제사장이었으며 집안의 리더였다. 그러나 제사장의 역사, 그들의 시대는 이제 종언을 고해가고 있다. 사회적 변화와 함께 종손의 역할은 당사자들에게도 이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당신이 세상이야!

당신은 그동안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가장, 남편, 기둥, 종손, 장남, 아들.... 그 이름들에는 명이 있고 암도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명이 사라지는 속도는 빠르고, 암이 사라지는 속도는 느린 것 같다. 그러므로 가장, 남편, 기둥, 종손, 장남, 아들인 당신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우선은 그 이름들을 지우는 상상을 해보라. 머리로나마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보시라는 말이다. 생각이 바뀌면 몸의 움직임도 바뀌는 법이다. 그러면 당신의 어깨는 조금씩 가벼워질 것이다. 점점 자유로워질 것이다. 오, 당신은 이렇게 화를 낼 수도 있겠다. “세상이 바뀌지 않고 있는데 나 혼자 무슨 재주로!”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당신이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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