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동아일보를 앞지른 조선일보의 ‘혁신’(2)- 조선일보 대해부 4장(2)
  • 관리자
  • 승인 2017.09.20 11:18
  • 댓글 0

‘동아’의 ‘자치론’ 공격한 ‘조선’의 논설

조선일보가 ‘혁신’을 외치면서 독립운동과 무장투쟁, 그리고 일제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던 시기에 〈동아일〉보는 ‘민족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조선 민족은 독립을 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제로부터 자치를 허용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1924년 1월 2일부터 5회에 걸쳐 실은 장문의 연속사설 「민족적 경륜」이 바로 그것이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춘원 이광수가 집필한 연속 사설의 핵심적 내용은 아래와 같다.

2천만에 달하는 민족으로 전혀 정치적 생활을 결한 자는 현재 세계의 어느 구석을 찾아도 없을 것이요, 또 유사 이래의 모든 사기(史記)에도 없을 것이다. 실로 기괴한 일이다. (…) 그러면 왜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정치적 생활이 없나. 그 대답은 가장 단순하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것이 그 제일인(第一因)이 요, 병합 이래로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 하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활권의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적수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의식이었던 것이 제2인이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지금까지 하여 온 정치적 운동은 전혀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정치운동은 해외에서나, 만일 국내에서 한다면 비밀결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무슨 방법으 로나 조선 내에서 전 민족적인 정치 활동을 하도록 신생국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 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연속 사설 「민족적 경륜」’은 “교육은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대문제”라고 전제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는 여타 문제…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문제 등 모든 문제는 영영 해결을 못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량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교육 제일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그 사설은 결론 부분에서 “특히 정치적 결사 이외에는 절대적 색채를 띠지 아니 할 필요가 있다. 대개 정치적 색채를 띠면 보복의 위험이 따르는 까닭”이라고 단언했다.

이 연속사설이 나가던 시기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었고, 만주 지역에서는 무장 항일투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진보적인 단체들이 그 신문을 강력히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경유학생학우회는 10여개 단체들과 함께 ‘동아일보 배척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는 한편 성토문을 국내 여러 곳으로 보냈다. 북경한인임시선전회도 격렬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자치론’을 반대하는 민족진영 인사들은 물론이고 조선노동총동맹, 잡지 〈개벽〉 등이 동아일보 비판에 앞장섰다.

그런 반응에 놀란 동아일보는 1월 29일자 사설(「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 책(責)이 수사(修辭)의 졸(拙)에 있다. (…) 이것은 결코 문구의 모호함이요, 결코 우리의 의사가 변함이 아니다. 언론이 극단으로 부자유한 이 세상에 있어서 우리의 의론이 투철하 게 해박하게 발표될 수 없음은 천하가 모두 인정한 바이요, 또한 우리의 석명(釋名)이라는 것도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가슴에 먹은 것을 그대로 표현치 못한 것도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 그 논법이 불철저함으로 일반 사상계의 오해를 야기한 점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이에 대한 진사(陳謝)를 주저치 아니하노라.

동아일보의 연속 사설 「민족적 경륜」이 큰 파문을 일으키기 전인 1923년 가을부터 이미 ‘자치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가 주동이 되고, 천도교 신파요, 33인의 한 사람 인 최린의 찬동을 얻어, 역시 동아일보의 이광수, 최원순과 평양의 조만식, 변호사 박승빈 등 15~16인이 모여 “지금 정세 하에서는 직접적인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 도의 국민회의 같은 합법적 정치단체 구성에 나서, 그 명칭을 연정회(硏政會)로 하였던 것 이다. 그러나 인도의 간디가 주도한 국민회의가 비타협, 불복종 운동이었던 데 반해, 연정회 는 타협적 민족운동 곧 자치운동을 지향했고, 그 선전지로서의 자세를 드러내 보인 것이 바 로 문제의 사설이었던 것이다(최민지, 「한말- 일제하 민족과 언론」, 〈한국언론 바로보기〉, 56쪽).

동아일보가 「‘민족적 경륜」’ 때문에 홍역을 치르던 시기인 1923년 초부터 나온 조선일보의 기사와 논설들을 보면, 세간의 평대로 ‘사회주의 신문’ 성향이 강했다. 「유물사관 요령기(要領記, 전 3회)」, 1924년 1월 9일~11일), 「유물사관의 해설과 계급투쟁 시론(전 10회, 1월 15일~24일)」, 「서양 사회주의 개관(전 3회, 1월 12일~1월 14일)」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민족적 경륜」이 일으킨 파문이 미처 가시기도 전인 1924년 6월 ‘자치운동’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직자대회’라는 모임이 열린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6월 18일자 사설(「능동과 타동[他動]-소위 공직자대회의 참정권설에 대하여」)을 통해 자치운동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명목 아래 생(生)을 계속하는 이상 개인에게는 각자의 자유의지가 있고 사회에는 일반의 군중적 의식이 있다. 칼날이 아무리 예리하다 할지라도 자유의사를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요 무력이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군중적 의식을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 일 그것을 빼앗을 수가 있고 정복할 수가 있다 하면 그것은 여하한 형식 여하한 수단을 밟 더라도 합리가 아니요 심복(心服)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명목과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오직 가면으로 보일 뿐만 아 니라 전혀 조금도 관지(關知)할 바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슨 심각한 느낌이 있으리요. (…)

우리는 적어도 반만년 간이나 장구한 시일 동안에 정치로나 제도로나 윤리나 도덕으로도 특수한 발전을 하여 왔다. 주위의 형세와 지리상 관계로 외구(外寇)의 침략이 전 역사를 통 하여 시대마다 그치지 아니하였지만 그 창피와 상해를 받은 중에서도 일종 고귀한 경험을 쌓은 민중이요 일종 특수한 문화를 개척한 민중이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가 있고 우리의 특 종적 역사가 있을진대 우리의 제반 제도와 시설이 우리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적합하지 않으 면 남이 말하는 황금백옥도 우리가 바라는 기와장이나 돌덩어리만도 못한 것이요 남이 주는 진수성찬이 우리의 청한(淸寒)한 가세(家勢)로 요리한 소박한 음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미련한 자는 그만한 이해를 우리처럼 가지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가소롭지 아니한가. (…)

여름이 오면 각종의 오예물(汚穢物)이 부패하여 그 속에 구더기가 생기는 것처럼 각 사회 에도 무엇인가 정변이 있든지 특별한 동란이 있을 때마다 각양각색의 도당이 내외에 활약하 기 마련이다. 이번의 공직자대회에서도 조선에 특별선거법을 시행시키고자 참정권을 달라, 의회를 두어라, 연장주의(延長主義)를 버려라, 대신(大臣)을 두어라는 항목을 내걸었다. 우리 는 그 소식을 듣고 하등 놀라지도 않고 또 호오(好惡)의 감상도 없이 일소에 붙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인 이상 우리의 자유의사가 있는 법이다. 우리 민중이 의식을 갖고 있는 이상 우리 일반의 요구가 있는 법이다. 제군은 우리의 의사와 일반의 요구가 어디에 있는가 를 아는가 모르는가. 알면서 그따위 짓을 한다면 그것은 도로(徒勞)가 될 것이요 모른다면 우둔하기 짝이 없는지라. 우리는 오늘에 이르러서 물질적 파산으로 경제적 노예가 되었음과 동시에 정신상으로는 도덕적 노예가 되어가는도다. 멸망을 앞에 두고 그까짓 위무책(慰撫策) 에 안심하는 정도의 어리석은 민중이 아님을 알지어다. 공평한 제3자적 세인이 한 일이라 해도 오늘날 무엇 무엇이라고 떠드는 자는 모두 어떤 자 등의 타동적 준동이다. 적어도 우 리의 의사와 일반의 공의(公議)로서 나타난 능동적 현상이 아닌 것만은 우리가 이를 인정하 는 바로다. 무어라 기다란 언사를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 손가.

독립운동가 신석우의 조선일보 인수

남궁훈이 사장으로 3년 남짓 일한 때인 1924년 9월 중순 조선일보 사주 송병준은 경영권을 신석우에게 넘겼다. 그 경위가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총독부의 암묵적 지원 하에 조선일보 경영권을 쥐고 있던 친일파 송병준은 3년 만에 두 손을 들었다. 회사의 채산은 채산대로 맞지 않고, 기자들은 논지를 지키려고 강력히 대응하 면서 이런 신문에 못마땅한 총독부는 총독부대로 송병준을 압박하자 시달림을 받던 송병준 은,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며 경영을 포기했다. 나라는 마음대로 팔아먹었을지언정 신문은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조선일보의 판권은 1924년 9월 13일 독립운동가 신석우(1894~1953)에게 넘어갔다. 신석우는 송병준에게 8만5천원의 거금을 주고 경영권 일체를 정식으로 인수하고 신문 제작 의 전면에 나섰다. 당시 80킬로그램 쌀 한 가마에 20원 안팎이었으니 조선일보를 인수할 때 내놓은 8만5천원은 쌀 4250가마 값이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과 재산을 모 두 쏟아부어 신문사 사주가 됐다.

친일파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내놓고 독립운동가가 새로운 사주가 된 것이니 역사의 추가 극에서 극으로 움직인 것이다(52~53쪽).

조선일보 판권을 인수한 신석우는 발행인 겸 부사장을 맡고 민족운동 지도자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이사진은 안재홍, 조설현, 백관수, 이상협, 최익선, 신구범, 김동성이었다.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 아래 보강한 편집진은 편집국장 민태원, 논설위원 안재홍, 김준연, 신일용, 편집부에 김송은, 이상철, 손영주, 사회부에 김형원, 김달진, 박헌영, 임원식, 김단야, 정인익, 지방부에 홍덕유, 홍남표 등이었다. 1918년 9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임명되었던 이상협을 뺀 다른 사람들은 친일 경력이 없는 이들이었다.

1924년은 조선일보의 ‘혁신’과 더불어 새로운 민간지 탄생으로 언론의 역사에 기록된 해였다. 최남선이 시대일보를 창간했기 때문이다.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 “조선민족아! 일치합시다. 민족적 자조(自助)의 일치합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주간지 〈동명(東明)〉을 경영하던 그는 3월 31일 〈동명〉을 일간지로 개편하면서 시대일보 창간호를 펴냈다. 이 신문은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달리 1면을 정치면 대신 사회면으로 편집했는데, 친일파로 전향하기 이전 최남선의 명성에 힘입어 창간 초기에 발행부수가 2만을 넘어섰다. 시대일보는 1926년 8월 경영난으로 문을 닫기까지 ‘3대 민간지’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조선인 28명 학살’을 대서특필

‘혁신 조선일보’의 가장 첫 번째 ‘반일 기사’는 1924년 9월에 지면에 등장했다. 그해 8월 11일 압록강 중류인 평북 위원군 화창면 신흥동에서 일어난 ‘주민 28명 몰살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조선일보사가 사회부 기자 이석을 현지에 파견(동아일보사와 공동으로 그를 풀기자로 보냄)해서 취재하도록 한 결과, 몰살 사건 전날 그곳 주민들이 독립단에게 저녁을 지어 먹였다는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고, 주민 몰살이 일본 경찰의 보복일 수도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9월 27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위원 학살사건 현장답사기」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지난 8월 11일 밤중에 평북 위원군 화창면 신흥동에서는 어떤 무장한 사람들에게 한 동네 여섯 호가 불에 태여 전멸을 당하고 가족 28명이 일시에 학살되었다 함은 이미 각 신문에 보도된 바이어니와 금번 내(특파원)가 실지에 출장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달 오전 6시 경에 그 동네에서 약 25리(조선 이수)쯤 되는 곳에 있는 화창면 주재소를 독립단원들이 습 격하려다가 중지하고 약 25명이 신흥동으로 올라와서 동네 송지항(피해자)의 집에서는 점심 을 하여 먹고 동네 최응규(피해자)의 집에서는 저녁밥을 지어 먹고 돌아간 일이 있는데 그 이튿날 죽내(竹內) 평북 경찰부장과 이달(伊達) 경부보가 인솔한 경관대 40여명이 돌연히 그 동네로 달려들어서 피해당한 여섯 집을 에워싸고 집안 식구를 모조리 잡아내어서 독립단이 밥을 해먹고 간 일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독립단이 갈 때에 밥을 해먹였다는 말을 경 관에게 하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을 한 일이 있으므로 경관대에게 사실을 말하기도 난처하 여 누구나 용이하게 자백하지 아니하매 필경은 고문을 하기 시작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악 형을 하다가 그 아랫말에 사는 전모(全某)의 집에서 점심을 시켜 먹고 신흥동에서 약 10리 가량 되는 ‘다락말’로 내려가서 박모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여섯 집의 호주 되는 김응 채, 전명길, 김창성, 최응규, 송지항, 리창섭 여섯 사람을 불러내리어 밤을 새워가면서 악형 고문을 한 결과 그들도 필경 매에 못 견디어 “독립단이 밥을 해먹고 간 일이 있다”고 자백 하였으므로 그 이튿날 즉 9일에는 일시 방송되어 각각 집에 돌아와 있던 중에 11일 밤에 귀신도 모르게 그와 같은 참화를 당하였다 한다.

조선일보는 1924년 11월 12일자 시평(「저주할 동척(東拓)」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앞장선 동양척식회사(약칭 동척)를 정면으로 공격했다가 압수를 당했다.

동척의 죄상을 금일에 운운하는 것부터 시대착오적 일이나 폐일언하고 동척의 존립과 조선 민족의 생존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려면 이 회사는 근본부터 구축 (驅逐)하여야 한다. 이 회사를 구축하려면 여간 순순한 방법으로는 아니 될 것이다. 물론 일 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비협동 비타협한 방법 아님이 아니다. 그러나 실력 있는 편과 실력 없는 편의 비협동 비타협은 아무리 하여도 실력 없는 편에 약점이 있고 만다. 그러므 로 이 방법도 철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느 사람의 말과 같이 ‘동척’이라는 두 글자를 어 디까지 나쁘고 더럽고 무섭고 미운 모든 저주의 대명사로 내돌려 영영세세토록 그 도천(滔 天)의 악을 박멸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는 1924년 11월 23일자부터 하루 조간 2면, 석간 4면으로 모두 6면을 발행하는 조·석간제를 시작했다. 그리고1925년 2월 21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특파원을 보냈다.

특파원 파견을 알리는 당시 「사고」에서 본사는 “이 의문의 나라를 하루 바삐 독자 여러분 앞에 소개하기 위하여 5년 동안 구라파에 유학하다가 돌아온 김준연 씨를 새로 귀국하야 행장도 끄르기 전에 다시 머나먼 길을 떠나도록 부탁했다”고 전했다. (…) 당시 해외 특파원 을 누가 먼저 파견하느냐를 놓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에 하루라도 빨리 소련에 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결국 조선일보가 김준연을 동아의 이관용보다 하루 먼 저 출발시켰다. 김준연은 공부는 많이 했으나 기자로서 기사 한 줄도 써본 적이 없는 신참 인 데다 서둘러 출국하느라고 기자 훈련을 시킬 겨를도 없이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래서 편 집국장 민태원이 중국 단동까지 가는 열차에 동승, 기사 작성법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이 해 6월 10일에 귀국한 김준연 특파원은 15일자부터 혁명 뒤 소련의 모습을 「노농(勞 農) 로시아의 관상(觀相)」이라는 제목으로 40회 연재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얻어온 부하린 의 기고 「도시와 농촌과의 관계」도 8회에 걸쳐 실었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69~70 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