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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깃발이며 등대인 동아투위[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25)] 이근행 MBC PDㆍ전 뉴스타파 PD
  • 관리자
  • 승인 2017.04.24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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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38년 앞에 나는 부끄럽다

나는 2010년 6월 7일 MBC 사장 김재철 씨에 의해 해고됐다. 그리고 19대 대선이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난 직후, 해고 939일 만에 나는 김재철 씨에 의해 특별채용이라는 형태로 MBC에 귀환했다. 어떤 명예도, 어떤 실익도 없는 방식이었다.

한때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우주에서 제일 좋은 회사’라고 농담 반 시샘 반으로 얘기하던 MBC였으나, 복귀를 두고 나는 고민해야 했다. 회사는 여전히 희대의 괴물이 되어 버린 김재철 씨의 1인 지배체제였다. 달라진 것도, 달라질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하간 나는 양자택일의 결정을 해야 했다. 비록 수모라 하더라도 지금 돌아가는 게 현실적으로 나은 선택인가, 아니면 평생을 두고서 후회하고야 말, 그래서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될, 안이한 굴복인가? 결국 나 스스로가 명쾌하게 입장을 정리하지 못해서,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나 자신과의 정면대결을 피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위했다. 굴욕도 때론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고. 그게 쉽게 끝날 리 없는 긴 싸움에서 오래 버티는 길이라고 합리화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1,000일이 안 되는 ‘해고자 이근행’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2013년 3월 18일 11시.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옛 사옥 앞. 38년 전의 해직언론인들이 쫓겨난 날을 기념해 자신들을 쫓아낸 회사 앞에 모였다. 백발의 노인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독립언론을 기치로 새로 출발한 뉴스타파의 취재자로서 현장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그렇다. 참 무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참으로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세상과, 변하지 않는 세상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인간들을 생각했다. ‘오 징그러운 시간이여, 무엇이 이들을 아직도 이렇게 모이고 이 자리에 서 있게 하는 것인가?’ 나는 속으로 물었다. 정오를 향해 가는 3월의 햇살이 잠시 어지러웠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해직 38주년 성명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1975년 3월 17일 새벽,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동원한 폭력배들에게 떠밀려 회사를 떠났다. 일제강점기 36년보다 더 긴 38년 동안 역대 정부와 동아일보사를 상대로 명예로운 복직과 배상을 요구하던 과정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구성원 113명 가운데 18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옥고, 고문, 생활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가족과 동지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통함을 안기고 눈을 감았다.

''일제 강점기 36년보다 더 긴‘이라는 말과 ’명예로운 복직‘이라는 말이 아프게 폐부를 찔러 왔다. 저 38년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시간에 견주어 나의 1,000일도 안 되는 시간은 얼마나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저 명예라는 말이 갖는 고귀함에 비추어 나의 복직은 얼마나 비루한 것이랴. 시간이 굴북시키지 못한 그들의 자존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얼굴을 한 사람씩 보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모진 시간과 견고한 불의(不義)와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자기 자신과의 힘든 싸움을 견뎌 낸 의지의 인간들이 백발이 성성한 채 내 앞에 서 있다. 이른바 ‘민주화’가 되고, 권력이 몇 범이나 바뀌었어도 결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던 그들 앞으로, 시간이 무심히 흐르고 세상은 더 무심했다. 어쩌면 50년이 지나야 이 긴 싸움의 끝을 보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며, 또 내년에 보자고, 아직도 날이 춥다고, 한 ‘38년 해직자’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38년을 같이 싸우고 견뎌 온 동지들이 하나 둘 삶을 마감하는 인생의 황혼에도 굽히지 않은, 어쩌면 절대 굽힐 수 없는 저 자세는 어디서 오는 것일가. 아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명예와 자존심,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나의 ‘짧은’ 해고는 끝났다. 그러나 나의 싸움마저 끝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MBC와 YTN 그리고 국민일보 등에서 해고된 언론인들이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 내고 있다. 그 상황을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해고자들은 절감한다. 자신 앞에 얼마의 해고 시간이 더 남아 있을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언론인이고자 하는 우리에게 깃발처럼, 그리고 등불처럼, 백발이 성성한 채 바람 부는 거리에서 나부끼며 서 있는 이들. 이 불의한 시대에 우리를 향한 인간 의지의 표상, 바로 동아투위다.

영혼을 팔지 않은 대가는 혹독하다

캠퍼스에 봄이 오면 삼삼오오 잔디밭에 앉아 놀았다. 그러면 꼭 우리 곁에 접근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성경책을 든 이들이었고, 한 부류는 클래식 음반이나 영어 회화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책을 파는 외판원들이었다. 둘 다 환영받지 못했으나 참 집요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생기지 않는 믿음을 강요해서 생길 리 없었고, 가난한 유학생들이 통상 전집(全集)으로 파는 음반이나 책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책을 파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40대쯤이었다. 《씨알의 소리》, 《창작과 비평》, 《사상계》 등을 내밀며 ‘이거 안 읽으면 대학생 자격이 없다’는 뉘앙스로 은근히 시골 유학생의 자존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결국 읽지 못할 전집을 할부로 사고서 생활에 쪼들려야 했던 기억이 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대학 신입생 시절의 기억이다.

책 외판원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게 해 준 이들. 그들이 동아투위 해직선배들이었다. 쫓아낸 것도 부족해서 어디 가서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를 구할 수도 없게 사람을 내몰았던 박정치 정권 치하, 그리고 반유신ㆍ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다시 반체제 불순세력으로 몰아 탄압했던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동아투위 해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책 외판원이었다는 회고담을 몇 차례 행사에서 들은 것이다. 하루 종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하면서, 종종 사기꾼 취급을 받기도 하면서, 팔면 얼마나 팔았을까마는 그것이 호구책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해직언론인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어디 가서 해직자 소리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되뇌곤 했다. 나는 어쩌면 대학시절 그들을 캠퍼스에서 만났을지 모른다. 설령 만나지 않았다 해도 결국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해고자가 된 이후 내가 주변 어른들로부터 받았던 가장 많은 질문은 “요새 어떻게 사느냐”였다. 어느 날 동아투위 선배님 한 분도 내게 물었다. 나의 일과를 물은 게 아니라, 밥은 굶지 않느냐, 처자식을 어떻게 부양하느냐는 얘기였다. 노동조합 동료들의 도움으로 생활난에 몰리지는 않는다고 설명하면 그제야 그개를 끄덕이며 근심을 조금 더는 표정을 지었다.

동아투위 사진들을 본다. 밤에 편집국에 모인 얼굴들. 농성을 하느라 편집국 바닥에 비스듬히 기댄 얼굴들. 쫓겨나 거리 시위를 하는 얼굴들. 아직 젊다. 준수하다. 누구보다 자존심 상하고 패기 넘치는 얼굴이다. 30대의 얼굴이다. 대부분 아침 출근길에 무릎에 매달리는 아이를 안아주고 집을 나섰을 젊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그러나 믿었던 회사에 의해 쫓겨난 채 출근 할 수 없는 그들은 거리로, 주택가로, 대학캠퍼스로 향했을 것이다.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다”는 고백 앞에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의지형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생활 앞에 굴복하는 순간은 온다. 책임져야 할 게 거창한 사회와 역사만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굶고 있는 처자식일 때 가장(家長)의 선택은 고독하고 처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 하소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투사와 생활인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종종 모르거나 망각한다.

처음 거리에서 동아투위 선배들을 보면 낯설었다. 나이로 치면 대략 숙질간 정도인 셈인데 왠지 어려웠다. 지금도 사실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가끔씩 던지시는 질문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삐질 흐리기도 한다. 그 삶이 주는 힘 때문이고, 그 삶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다. 위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한 인간, 그리고 영혼을 팔지 않고 한 생활인으로서 살아낸 사람에 대한 어려움이거나 존경 때문이다.

지난 3월 초, 언론인들의 시산제에 참석했다. 북한산을 내려오는 길에 팔순을 넘기신 선배 한 분과 잠시 동행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가끔씩 웃으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신다. 어떠한 심리적 거리도 없다. 그저 사는 얘기다. 아픈 무릎 얘기며 할머니, 손자 얘기다. 영락없는 숙부요 아버지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래도 참 잘 사셨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우리에게 그들 모두는 안종필이다

누구나 인정하듯, 이명박 정부 5년은 언론의 역사적인 암흑기였다. 박정희 유신정권, 전두환 신군부 정권, 그리고 민간정권인 이명박, 통산 세 번째다. 그러나 앞서의 두 시기와 한 세대를 뛰어넘어 일어난 세 번째 암흑기는 우리 모두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기도 했다. 인류의 문명사적 진화와 역사의 발전이라는 도식적 사고를 의심하게 할 만큼의 퇴행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우리 어놀계 종사자들의 투쟁은 2009년에 본격화되었고, 이명박 정권 내내 지속됐다. 그 과정에서 20명의 해고자가 나왔고 400명이 넘는 언로노동자들이 소속 조직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 단지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요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현장에 늘 함께해, 후배들에게 언론의 위기와 언론인의 자세를 카랑하게 말씀하시던 분들이 바로 동아투위 선배들이다. 존경할 만한 선배와 사회적 원로를 찾기 힘든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투쟁의 현장에 한결같이 모습을 드러내고 격려의 말을 해 주시는 존재는, 앞을 가늠하기 힘든 길고 큰 싸움을 하는 후배들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위로이자 힘이었다.

언론인들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상이 있다. 쉽게 받을 수 없는 상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상이 바로 안종필자유언론상이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서 주는 상으로, 비록 안종필이라는 이름으로 상은 주어지지만 사실 그 상은 113명 동아투위 선배들 모두가 주는 상이다. 언론인으로서의 굳센 의지와 투쟁의 역사가 담긴 이 상은, 앞서 싸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언론인 노릇 제대로 하라’고 주는 상이기도 하다.

작년에 ‘무너진 언론 환경에 고군분투했다’는 평가를 담아 뉴스타파의 제작진에게 안종필자유언론상이 수여됐다. 뉴스타파 제작에 거의 탈진한 우리 제작진에게 힘을 준, 연말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평생 간직해야 할 기억이자 영광이라며 열 명 남짓한 제작진은 상패를 복사해서 모두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상패 속에 새겨진 여리하고 가는 선의 인물을 보았다. 직접 대면해서 본 적이 없으니 가늠할 길이 없다. ‘안종필’이다.

하지만 안종필은 하나가 아니라 동아투위 113인 모두를 지칭하는 명사에 다름 아니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는 안종필들을 집회 현장이나 사석에서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그 안종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다. 113인 중에 18명이 우리 곁을 떠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백발이 되고 검버섯이 핀 얼굴로라도 청년인 채 영원히 우리 곁에 있으면 좋을 것이지만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지난 3월 18일. ‘일제강점기보다 더 긴’ 동아투위 38주년 기자회견 성명서의 말미다. 38년의 세월이 참으로 무색하다. 시간이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언론인의 정신이 오롯하게 공중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명예 회복과 배상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 이 순간에도 고통을 받고 있는 21세기의 해직 언론인들, 그리고 자유언론과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 언론일꾼들과 언제나 함께 가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의무라는 것을!

희생의 방치 속에서 문명은 불가하다

나는 본시 타고난 성정이 소심하고 예민한 탓에 대범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참 많다. 그 생각을 타인에게 다 털어 놓지도 못한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고, 그래도 해고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처지로 ‘강성’ ‘종북’ ‘좌빨’이라는 딱지가 제격인 마당이라 선뜻 동의하기 힘든 고백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았고, 애써 강한 체 했던 셈이다.

3년 전. 나는 해고자라는 걸 쉬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내가 ‘해고자’라는 사실은 복병처럼 뒤늦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갑자기 덮쳐왔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하고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불쑥 아침 9시30분에 침실에서 오기도 하고, 밤 10시 버스 안에서 오기도 한다. ‘이게 뭐지’ 하는 정체 불분명한 느낌의 덩어리이다. 한없이 적막해지고, 모든 게 정지되면서 멍하다. 위험신호다.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오고 있다는, 아니 왔다는 느낌은 분명하다. 머리를 흔들고 눈의 초점을 맞추고 ‘자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한다. 상처받지 말자. 그것이, 소심한 내가 살아내는 생존방식이었다.

하물려 동아투위 38년. 그들은 ‘일제강점기보다 더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나는 그들이 애써 고통을 전면에 내세우며 싸워 오지 않아지만, 그리고 결코 후회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지만, 들여보면 내면 깊순이 상처가 가득할 거라 믿는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시간 앞에서 장사일 수 없다. 주어진 고통과 상처 앞에서 무심할 사람도 없다. 하물며 하루 이틀의 시간이 아닌 바에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군은, 여진히 개인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기업이 성장하고 권력이 유지되는 본질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사실상 후진국이다. 또한 누구의 희생 위에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성찰이 없는 사회에서는 폭력이 일상화되기 마련이다. 아직도 투쟁과 고통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이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지만 참 불행한 일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아직 국가적으로 ‘미개국’이라고 생각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시시비비가 무의미하며, 심지어 국가폭력이 횡행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근래 몇 년간 사회적으로 ‘힐링’이라는 개념이 공감을 얻고 또 유행병처럼 번지는 게 다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 힐링은 절실하다. 치유의 차원에서도 그러하고 미래를 위해서도 그러하다. 나는 동아투위 선배들에게도 사회적 힐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파괴당했던 삶과 남몰래 견뎌 내야 했던 고통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하는 일은 비단 당사자들만을 위한 일일 수 없다. 그들을 환하게 웃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과거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일이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말해 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절망 속에서 조금씩이라도 희망을 세워야 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당사자들이 극단적으로 호소하지 않는다고 해서 속된 말로 ‘생까고’ 넘어가는 한 대한민국은 절대로 문명국가로 진입할 수 없다. 자유언론을 부르짖다 무고하게 쫓겨난 언론인을 38년이나 방치한 나라에서, 그리고 여전히 언론인들을 해고하는 일이 밥 먹듯 행해지는 이 나라에서 나는 지금 문명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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